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며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섭냐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린 것은 모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코끼리를 소화시키는 보아뱀 그림이었습니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 왕자]에서 '나'는 보아 뱀이 동물 하나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꽤 만족하여 주변 어른들에게 내보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한 답변-모 자가 뭐가 무섭냐뿐. 그는 낙담하여 한동안 펜을 놓고 그림을 숨겨두었다가 불시착한 사막에서 만난 '어린 왕자'에게 다시 꺼내 보인다. 양을 그려달라고 오복조림하던 어린 왕자는 그림을 보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한다. "아냐, 아냐! 뱀은 싫어. 내가 언제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그려 달랬어? 보아 뱀은 아주 위험해. 그리고 큰 코끼리는 너무 거추장스러워. 자리를 많이 차지 하기 때문에 함께 지낼 수 없단 말이야.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아. 그러니까 조그맣고 귀여운 양을 그려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러니까 '나'와 어린 왕자의 순수한 시각이나 어른들의 잃어버린 동심 따위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근원적인,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에 대한 것이다. 뱀은 무엇이든 씹지 않고 삼켜 소화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한다. 외국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거대한 뱀-비단뱀 등이 수풀을 미끄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길고 큰 몸뚱어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팔뚝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뱀이 사람을 삼킨다는 입소문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데, 실제로 한 탐험가는 자신 동료의 머리가 뱀의 입에 들어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고 많은 학자은 뱀이 사람을 끝까지 삼키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유는 많다. 뱀의 입이 아무리 크게 찢어진다 하더라도 성인 남성의 어깨가 들어갈 만큼 넓게 벌어지지 못하고,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자칫하면 뱀이 터지기 때문이다. 악어를 삼켰다가 옆구리가 터진 뱀의 사진은 유명하다. 그렇다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의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생텍쥐페리는 그림을 그린 '나'의 손을 빌려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한 것일까.


미치오 슈스케는 [구체의 뱀]을 통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은 거짓을 품은 사람이라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은 사실 죄악과 거짓을 품은 사람이라고, 원죄로부터 시작해 자죄까지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죄악과 거짓을 삼킨 사람이라고, 미치오 슈스케는 첫 문장부터 차근차근 자의를 구축하고 있다. 장편소설이긴 하나 부담 없는 양에, 등장하는 소수 인물은 모두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현실 그 자체다. 토모히코와 그의 이혼한 부모, 토모를 거둬 함께 사는 오츠타로네-오츠타로, 나오, 죽은 아내 이츠코와 사요, 토모코, 타사이…. 꿋꿋하게 사회를 견디어 가는 평범한 사람들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미치오 슈스케의 손길을 거친 사람들로서 그렇지 않다. 


나열한 인물들은 모두 작거나 큰 거짓을 몸에 품고 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애써 현실을 피하고 죽는다. 그러한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에 갇혀 있다. '구체'이다. 미치오 슈스케의 인물들이 그토록 많이 가진 '스노우 돔'이다. 미치오의 말을 빌리자면, 구체에 갇힌, 저마다 거짓말을 품은 사람들이, 언젠가 구체에 비칠 저녁 해가 유리 속의 차가운 눈을 녹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즉 구체-스노우돔은 배가 빵빵하도록 거짓을 지닌 사람들이 터질 듯 쌓인 어두운 공간인 동시에 그들이 속죄를 기다리는 밝은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스노우돔 안의 물을 유영하는 하얀 눈은 예수의 십자가 흘린 피와 비슷한 의미로 해석된다. 미치오의 인물들이 스노우돔을 저마다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짊어짐과 비슷한 의미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도 그러한 구절이 있다. 


"여기에 들어갈 수 있으면 행복할지도 몰라"

맑은 음색이 점차 늘어지더니 결국 곡이 연주되는 도중에 멈춰 버렸을 때, 토모코가 불쑥 말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스노돔의 유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째서?"

"그러면 언제나 아름다운 경치만 볼 수 있잖아."

생각해보니 스노돔에 대해 사요와 토모코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요에게 스노돔은 자신을 가두는 보이지 않는 유리를 연상시키는 물건이었다. 토모코에게는 아름다운 경치를 언제까지나 보존해 주는 물건이었다.


위의 이치를 따르자면 깨어진 사요의 스노돔은 구원의 길이 사라진 걸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토모히코의 거짓된 긍휼, 거짓된 동정에 상처 입은 사요가 자살을 선택한 그 순간, 구체의 사람들이 소망하는 '광명의 저녁 해'가 그녀에게 비칠 일은 없어진 것이다. 또 그러한 이치에서 토모히코가 토모코의 스노우돔을 깬 것은 또한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토모히코는 그녀의 죽음을 후일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가 미치오의 이러한 의도를 깨달았다면 슬퍼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스노우돔만 깨지 않았으면 되었기에.


이야기를 조금 틀어,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범인이야 뻔하디뻔하다손 치더라도 마지막 반전은 소설에서 내내 견인해오던 싱크홀 같은 부자연스러운 부분들을 모조리 메꾸어 주는 것이어서 꽉 찬 폭발이 속에서 터지는 듯했다. 전형적인 신인작가의 면모. 미숙한 전개의 확실한 폭발. 그에 반해 [구체의 뱀]은 이제 그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작품이다. 생텍쥐페리의 보아뱀을 끌어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축하고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 글솜씨는 그의 성장을 방증한다. 인물들이 살아 있는데다 하나하나 매력적이어서 지루하지도 않았다. 


다만, '개발새발'이라는 번역에서 눈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어야 했는데, 아무리 맞춤법으로 인정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공식적인 글에서 보기에 껄끄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 '괴발개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개발새발'로 표현하는 건 소설의 흐름을 깨는 것 같기도 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외에는 딱히.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2-12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2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2-13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흥미로운 리뷰이군요.. 다만ㅠ 책을 아예 읽지 않은 저로서는 죄송스럽게도 몇 몇 부분이 잘 와닿지 않네요. 책을 한 번 읽고 또 읽어보아야겠네요. 많이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ㅎㅎㅎ

이진 2013-02-16 23:13   좋아요 0 | URL
그런 걸 감안하지 못한 제 탓인 걸요. 제가 죄송합니다아 ㅠㅠ
한 숨 늦게, 가연님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는, 많이 늦었군요.
그렇지만 저도 역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 보낼게요.
굳밤 :D

jo 2013-02-1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린왕자다!!!개발새발에까지 민감하진 말아요!!! ㅎㅎ 괴발개발보다 난 개발새발이 더 눈에 편한건... ㅎㅎ
한국어 능력 시험을 준비하면서 제 국어 실력을 한탄 또 한탄합니다. 어렵다 마음먹지만 능력시험 모의고사 풀고서 난생처음 그렇게 비 많이 내린 시험지 처음봤습니다. ㅎㅎ 언제나 홧팅! 공부해야하는데.. 하면서 이리기웃 저리기웃.

이진 2013-02-17 21:24   좋아요 0 | URL
개발새발에 어쩔 수 없이 눈이 멈추더라구요. 안 그래도 몇군데 맞춤법상 맞지 않거나 어색한 부분이 많아 고개를 갸웃하던 때여서 더욱 그랬어요. 한국어 능력 시험이라니! 저도 한번 공부해보고 싶네요. 어디, 모의고사 시험지좀 주실래요? ㅎㅎ
 
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들 1917>



열일곱 살이 되는 겨울, 내가 처음 먹으로 그려보았던 나무 기억하나요.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 라고 당신이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하고 당신은 덧붙여 말했지요. 그날 오후 내내 당신의 서가를 뒤져 나무 그림들을 봤습니다. 실레가 그린 어리고 섬약한 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 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 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192-3









 

한강의 소설은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으로 설명 가능하다. 아니,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이 오롯이 한강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레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암울하다, 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이울고 있는 붉은 태양과 제자리를 잡고 서 있는 나무들, 그 중에 헐벗은 나무 하나, 생기 없는 땅과 하늘, 핏빛 같은 붉은 계열의 색이 한데 모여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의 폐허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부정적인 시각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부정적인 고요와 부정적인 격렬함이다.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은 두 가지 모두로 볼 수 있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함 기운이 그림 안에서 맴도는 것이 느껴진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옆에, 곧 옷이 없는 몸을 함께 할 것만 같은 나무 세 개가 힙겹게 서 있다. 초롯빛 풀 한 포기 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에서 오로지 해만 붉은 빛을 내뿜는다. 그러나 그 빛조차 쓸쓸하고 고요해서 전체적으로 그림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한동안 쓸쓸함을 맞이하고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어보자. 쓸쓸함 이면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것이 보이는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던 붉은 태양이 투쟁을 위한 기(旗)의 형상을 취하고, 공연히 눈물만 흘리고 벌벌 떨고 있을 나무들이 투쟁을 위해 꼿꼿히 제 몸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허무하고 허탈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암울하고 쓸쓸하고 음산하였던 그림이 서서히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소설은 여리고 섬약한 인물 그림이다. 실레의 하늘과 들처럼이나 생기 없고 쓸쓸한 배경을 살아간다. 그들에겐 실레의 나무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病이다. 한강의 사람들은 모두 병들었다. 그것이 육체적인 病이든 정신적인 病이든 病은 한강의 사람들을 힘겹게 만든다. 지친 사람들은 조용해진다. 빠르고 격정적으로 파도치는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듯 느려진다. 그들은, 한 인터뷰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데나 나서지 않으며 나부대지도 않는다. 오지랖이 넓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무관심하지도 않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고 이겨내려는 사람들이다. 착하기보다 그들은 힘든 사람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들 같은 사람들이다. 한강은 이런 사람들만을 채용한다. 그래서 한강의 소설은 우울하고 축 처져 있다. 커다란 바위가 소설이라는 자그마한 포대기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또 그렇다고 그 돌이 집채만하지는 않다. 적당히 무거우며 적당히 가볍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처럼 인간의 가장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황정은처럼 통통 튀지도 않다.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싸여 있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이제 실레의 그림을 구도적으로 보자면, 수평과 수직이 바둑판처럼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들은 수평으로 나무들은 수직으로 뻗어 둘이 교차된다. 수평적 구도는 안정감과 평화로움, 그리고 넓이감을 주며 수직적 구도는 엄숙함과 성스러움, 상승감을 준다. 실레의 나무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이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통해 나무가 곧 실레라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는 어떤 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다. 이육사의 [교목]에 드러나는 의지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喬木), 이육사





우리의 저항시인 이육사는 자신의 투쟁 의지를 교목-줄기가 곧고 굵고 긴 나무로 표현했다. 말아라, 아니라, 못해라 하는 부정 어미들이 나타내는 부정적 의지는 결국 '교목'이라는 것에 흡수된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나무는 투쟁이자 살아감인 것이다. 실레의 나무들도 그렇다. 이육사의 투쟁 의지가 실레의 나무에게서도 보인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선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가 어떤 것에 저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어떤 것에 투쟁한다. 그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생의 벽이고, 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목소리를 나누는 가족이고, 시나브로 흘러 바야흐로 다가오는 시간이고, 그것들이 뭉쳐 만드는 세상이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살아내야지...' 중얼거린다. 그들에겐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시련이 닥친다. 아까도 말했던 病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아이를 갖기 못한 스트레스로 인한 거식증, 트라우마와 아프고 암울했던 기억들, 성정체성의 혼란, 한강의 病 중 가장 생소하고 흥미로운 외계인손 증후군, 혈우병, 그리고 자동차 사고. 모든 인물들이 아프고 조용하다보니 그녀의 소설은 모두가 비슷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소복히 쌓인 재 같은 글도 비슷하고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이나 가치관도 비슷하고 결말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미묘하게 다르다. 한강의 글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한강의 소설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것 같다. 한강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이나 감각에는 변화가 없지만 때론 [채식주의자] 같은 파격적(한강은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싫다고 하였지만)이고 진지한 소설을 쓰는 한편, [희랍어 시간] 같은 아주 얇은 유리잔 같은 소설을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을 독촉한다면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아." 그 말고도, "한강의 소설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글로 옮긴 것 같아." 나는 전자가 마음에 든다. 어린 새의 뛰는 심장은 여리게 느껴진다. 조금만 건드려도 봉숭아 꽃 터지는 톡 터질 것 같다. 그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는 모습은 전혀 여리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심장이 뛰는 횟수만큼이나 가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다. 즉 이중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처럼 이원적인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중적이다. 실레의 그림처럼 여리고 섬약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면에는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열심히 뛰는 심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지치고 힘든 한강의 인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리막, 이라는 표현은 사실 한강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인간이 가진 아주 연하고 투명한 부분을 생각하며 썼다고 밝혔다. 나는 [희랍어 시간]을 읽었으나 글이 계속 겉돌아 깊은 것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소설의 분위기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조용했으며 고요했다. 소설이 이렇게나 고요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깊은 고요였다. 


적요


, 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 고요와 적요 속에 한 여자와 남자가 격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괴리적이고 부조리적이어서 놀랐었다. 그것은 [노랑무늬영원] 전체를 휘감고 있다. [노랑무늬영원]은 괴리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나 현실적인 것을 감싼 기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중략)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다. 저녁에 붙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 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한강, 밝아지기 전에 '노랑무늬영원' 109-110





[노랑무늬영원]은 한강다운 글이다. 7개의 옹기종기 모인 소설이 어쩜 그렇게도 한강 같은지 보면서도 신기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긴 텀이 있는 소설들. 그중에는 내가 처음 한강을 만났던 '왼손'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노랑무늬영원]에서 가장 한강답지 않은 소설인데, 책장을 덮은, 지금보다 한 살 어린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다. 문장과 구성의 탄탄함과 어떠한 경지는 둘째 치고라도 놀라울 것이 많았다. 알라딘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대체 왼손이 움직이는 것을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한강은 무얼 말하려고 왼손을 통제불능으로 만든 것일까? 그 해답을 나는 후일에야 알게 되었는데,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도 셋째 치고나서 나는 '왼손'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한다. 일 년 전의 나는 돈이든 이성이든 권력이든 욕정이든 자신에 의해서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라고 읽었다. 불현듯 제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 왼손과 그로 인해 수 년 만에 만나게 된 하나의 인연이 평범하고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마침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서사적이고 기이하고 비실존적인 흐름... 어쩌면 현실적이기도 하나 비현실적으로 읽히는 이야기... 바로 그것이다. 여운조차 찝찝하다.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끈적하고 꾸덕한 여운이 남는다. [노랑무늬영원]에 자리 잡은 7권 중에서는 가장 동떨어져 있지만 이 소설이 가장 한강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한강답지 않지만 가장 한강다운 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훈자'와 '밝아지기 전에'와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구조가 비슷하다.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교차편집의 개념이 여기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처럼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고 그로서 시의 모습과 영상의 형상도 공존하는 듯 보인다. 한 단락, 한 문장, 한 단어 모두가 한강이 창조한 하나의 상징체이다. 한강은 말을 적당히 아끼는 법을 안다. 특히 '훈자'에서 한강은 한강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잔잔한, 그러면서도 충분히 짧은 단락들이, 역시 뒤죽박죽 이어지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여러개의 시각이 스치듯  빠르게 지나가며 각자의 말을 내뱉는다. 그 수많은 발화와 언어의 가닥이  꼬이고 꼬여 만들어 낸 질문. 곰비임비 흐르는 사건이 쌓이고 쌓여 건축된 탑. 그것이 '훈자'이며 나머지 한강의 소설이다. 한강은 평범하게 순행적으로 흐르는 구성보다는 역순행적인 구성을 좋아한다. 그것이 한강을 잘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구성이기도 할테고.



앞의 소설들은 '인간'을 그린 것이라면 뒤의 소설 두 개,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여성을 그린 소설 같다. 여성이라기보다 연인, 사랑을 그렸달까. 나는 이 소설 두 개를 근 한 달 동안 읽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읽고 난 지금 왜 그랬을까 의문스럽다. 이 소설 두 개는 [노랑무늬영원]의 소설들 중 어떤 것보다도 재밌다. 재밌으면서도 잔잔하고, 잔잔하면서도 애달프다. 그래서 재밌다. '파란 돌'은 읽으면 설레게 되는 소설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게 되는 소설이다. '파란 돌'은 막 피어나는, 조심스럽고 애틋한 사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지칠대로 지치고 힘들대로 힘들어 서로가 지겨워진 막바지의 사랑이다. '파란 돌'은 시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끝이다. 그러나 정작 죽음은 '파란 돌'에 있다. '파란 돌'에서 파란 돌은 곧 생명이지만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혈우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혈관이 터지는 통에 조심히 살아가야했다. 그래서 남자는 인생 자체가 조심스러운 남자였다. 여자를 만나고, 좋아하게 된 후로도 조심스러웠다. 여자도 남자를 조심스레 대했다. '파란 돌'은 조심스러운 사랑의 일련의 기록이다. 남자는 뇌에 피가 고여 죽은 채로 발견된다.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한강이 야속했다. 그를 왜 죽였나요. 살려서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주시지. '노랑무늬영원'의 여인은 검정 개를 피하려다 차가 전복했다. 그림을 그렸던 여인은 왼손을 못 쓰게 되었고 덩달아 오른손마저 고장났다. 여인은 몸을 회복하는 이 년 동안 마음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情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다. 남편은 여인이 지겨워졌고, 그만큼 여인도 남편이 지겨워졌다. '노랑무늬영원'도 조심스러운 사랑이다. 다만 언제 깨질지 알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조심스러움이다. 그런까 사랑이 없는 조심스러움이다. 사랑 없는 사랑을 지속해나가려니 여인과 남편은 서로를 경멸하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아니 그것이 미움의 감정일까? 아니지. 미움이 아니지. 



[노랑무늬영원]은 한강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과 같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살아가야하는 소설이다.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막상 당신에게 가지 않자, 깊기만 하던 가슴의 통증이 마치 넓게 도려내어진 듯 슴벅거려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얼마간 체념한 채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습니다. 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 사람인지, 할 수 있다면 나를 단번에 실망시킬 구석을 찾아내 그 이상한 고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팠니?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격렬한 비참함과 환희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 혼란한 순간 내가 희미하게 깨달은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아마도 당신을 통해서만 달래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6-7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1-0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1-0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은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진님 때문에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근데 왜 우리동네 도서관에 한강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없는 걸까요...............?

이진 2013-01-04 00:14   좋아요 0 | URL
한강은 동네 도서관에서 취급할 정도의 인지도는 없다고 봅니다.
이쪽에서야 대단한 문인이지만 아직 세상에 나가면...
친구들에게 한강 아냐고 물어보아 소설가 한강? 알지알지, 하는 답변 들을 수 있을까요...

댈러웨이 2013-01-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고로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이네요. <희랍어시간>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한강 작가 엄두가 안 났었는데 이 단편집은 추천이 많아 기대 만빵. 처음엔 반응이 좀 엇갈리는가 싶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봐요.

소이진님, 멋지게 새해를 시작했네요! 올해 말에는 소이진님이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생각하니 긴장도 되고 그래요. 그리고 숙제. 시제는 '인어'. 안녕 소이진님. (쑝~) 아, 실레의 그림에서 태양은 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

이진 2013-01-04 00:17   좋아요 0 | URL
<노랑무늬영원>의 시즌이죠? 저는 아마 댈러웨이님과는 다른 의미로 <희랍어시간>에서 고생을 했을 겁니다. 글이 겉돌아서 혼났어요. 실망을 좀 했는데 그건 아마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한 번 더 읽으려구요. 어쨌든 아무리 실망을 했어도 좋은 작가는 좋은 작가입니다. 한강 좋죠... 히히 서울예대 희망하는 것도 순전히 한강한테 배우려고... 근데 막상 가면 윤성희 작가님께 이년 내내 배울 것 같습니다. 아... 고민이군요.(순 김칫국.... ㅠㅠㅠㅠㅠㅠ)

꺄, 숙제! '인어'! 토요일까지 합평 소설을 써야하는데, 그걸 완료해내고, 아차 오늘 하나를 쓸 예정이니, 그 두개를 완료해내고 써낼게요. 다음주엔 서울에 가는데 서울가서 써야겠네요. 후후... '인어'라... 아! 제 프로필 보시고 낸 것인가요!!! ㅋㅋㅋ 인어는 왜 다 여자인가. 이거 김혜순 시인 시 제목인데, 이걸로 소설을 써봐도 괜찮을 것 같네요. 굳굳.

사실... 저도 그림 해설 보고 태양이 있구나... 아... 있구나... 태양이 있었구나... 헤헤...

마녀고양이 2013-01-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은 한 살 나이 먹었을 뿐인데,
글은 열 살 정도 나이 먹은 듯이, 어쩜 이리 멋진지요..... 와, 물 흐르듯이 정신없이 페이퍼를 읽었답니다.

푸른 돌은 설레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군요.
짧은 이 한 줄로 저는 충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한강이라는 작가, 섬님의 페이퍼에 이어 계속 유혹하네요.
인용해주신 문구들도 너무 맘에 드네요.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다.........

소이진님, 우리 그렇게 살아요. 힘들어도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도록.... 그렇게요.
즐겁고 평안하고 건강한 새해 되시구요.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많이 부족한 리뷰입니다. ㅎㅎ
달여우님의 탄탄한 글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읽어보신다면 정말 그런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저는 평론가들처럼 치장하지 않고 그대로 단어로 옮겼어요. (이 문장은... 그러니까 평론가들보다 뛰어나다, 하는 식으로 읽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파란돌'은 정말 설레요. 연애소설은 아닌데, 연애소설보다 더 설렌다니까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지만, 여기도 사실 분홍빛이 있어요. 이 소설도 설레는 면이 있다니까요.
한강은... 참 매력적인 작갑니다.

우리 몸은 다 타도... 심장은 꼭 남아서 끓는 한해! 그런 힘찬 새해 보내요.
달여우님 파이팅! 나도 파이팅 ㅎㅎ 새해엔 건강하세요~

비로그인 2013-01-0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모바일로 로그인이 되네요
이런 글을 새벽으로 쓰시다니요
겸손이 끝을 달리십니다아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유다다님 어서 글을 쓰시지요...
소설을 쓰시란 말입니다.
소설 아주 잘 쓰시더니 ㅠㅠㅠㅠㅠ

프레이야 2013-01-0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소이진님의 노랑무늬영원!
실레의 그림 중 왼쪽에서 두번째 나무, 그게 한강 같아요.
채식주의자, 중 거꾸로 박혀있던 불꽃나무의 이미지 같기도 하고. 여린 듯 강한.
아무래도 이 책을 봐야겠다는 강렬한 유혹이 활활~~~

이진 2013-01-04 00:22   좋아요 0 | URL
드디어! 드디어 올렸습니다 ㅎㅎ
젠장, 제가 그걸 생각 못했군요.
프레이야님 말이 맞아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바로 두번째 나무...그러니까 한강이죠.
어서 읽으십시오... 댈러웨님 말처럼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아니겠습니까. ㅎㅎ
 
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주 전에는 수제비 반죽 같은 눈이 육수에 풍덩풍덩 빠지듯 내렸고, 그제에는 단체로 실연을 맞은 구름떼가 하루종일 슬피 눈물을 흘렸고, 어제는 지상으로 마실 나온 안개들이 모든 것을 희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눈이 내리든 비가 내리든 안개가 덮이든 사건사고는 연일 끊이지 않았지만 내(內)에서 은은히 감돌던 서정성은 조용하게 극치를 향해 달려갔다. 한강으로부터 시작하여 신경숙, 윤성희, 김미월, 이혜경에 이르기까지 나는 몇 주 동안을 여성 작가와 함께 지냈다. 그 중 대부분은 한강과 오순도순 시간을 보냈고, 그 다음으로 이혜경에게 관심과 열성을 쏟았다. 세심하고 부드럽고 유연하게, 그러나 날카로우며 남성을 능가하는 힘과 격정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러한 글들. 게다가 매력적이며 탄탄하고 잘 쓰기까지한 소설들에 담뿍 빠져 며칠 밤을 샜다. 샤프 펜슬과 형광펜을 손에 쥐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행복하고 즐겁게 읽어나갔으나 힘든 점도 있었다. 단편 소설의 특장이기도 하나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짧다는 것이다. 몰입이 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작품을 읽고, 또 다른 작품을 연달아 읽을 때 속에서 솓구치는, 그리고 뒤섞이는 감정들이 문제다. 물론 두 작품 간에 시간을 두고 곱씹으면서 찬찬히 기다리면 되긴 되나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집이라 칭해지는 책은 이 짧은 소설이 대부분 예닐곱개 씩은 들어가 있기에 한 권을 하루에 다 떼기 위해선 미분함수니 지수함수니 삼각함수니 하는 수학적 혼란이 아닌 문학적 혼란을 견뎌내야 한다. 나는 이혜경의 신간 소설집을 이틀에 걸쳐 완독하며 몇번이고 한숨과 탄식으로 속에서 응어리진 어떠한 감정을 뱉어내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면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문장들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머리속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그래야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혜경은 농익은 소설을 쓴다. 그렇다고 야릇하고 요염하다는 소리는 아니고 분위기나 글이 다른 작가들보다 성숙한 느낌이 빼짓이 배어난다. 나중에 한강에 대한 글을 쓸 때 자세히 말하겠지만 잠깐 언급하자면, 한강은 어린 새의 심장 같은 소설을 쓴다. 여리고 연약하고 투명하고 부드럽고 뜨겁게 뛰는 소설들을 쓴다. 그 때문에 나는 한강을 20대 젊은 작가로 여겨왔고. 한강의 글은 투박하지도 촌스럽지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도시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중립적이면서 충분히 감정적이고 서정적이다. 이혜경의 글은 결혼 10년차 넘는 주부가 사골을 한 양동이 끓여놓고 불현듯 외국 여행을 떠나 양주를 홀짝이며 남기는 일기 같다. 원숙미가 글 전체에, 비록 서술자가 한창 나이의 여성남성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스며있고 삶과 인생에 대한 깊은 고찰과 고심이 발자국처럼 곳곳에 남아 있다. 때로 그녀의 글은 달리도 읽혀지는데, 오래 사랑한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찢어지는 가슴의 여자가 기록하는 일지 같은 느낌도 은근히 드러난다. 그것은 이혜경만의 사랑을 그릴 때의 문체일 것이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방에 들어와 물기를 닦다, 그만 당신 이름을 입밖에 내는 순간, 무릎이 꺾이며 주저앉았어요. 타일 바닥이 서늘했어요. 채 물기를 닦지 못한 머리에서 타일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내 뜨거운 눈물을 버무리면서 오래 울었어요. 평온한 비췻빛이었다가 한순간에 음험하게 짙어진 물, 유유히 헤엄치던 작고 예쁜 열대어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빨려들 것 같은 어둠만 펼쳐질 때의 당황과 공포, 내겐 익숙한 거였어요. 그게 뭐였는지는…… 나중에 기회 되면 말해줄게요. 18p



<너 없는 그 자리>는 초반과 후반의 글 양상이 달라지는데, 갈수록 내 집중도가 떨어진 까닭은 아니고, 분명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난 것이다. 앞의 소설들은 무언가 감추는 게 있다. 작가는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거나 서술자가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린다. 독자들은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겨야 한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진 진실을 알기 위하여 더욱 꼼꼼히 글을 훑어간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체가 드러나고, 해설을 빌리자면 그것이 '앎' 이다. 이혜경의 소설에서 '앎' 이란 고통을 대변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아니, 고통의 시작. 주인공들은 '앎' 을 통해 둑 터지듯 피가 쏟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슬픔과 고통의 좁은 길에 들어서게 된다. '앎' 이후로 그들은 서늘해지고 처참하게 슬퍼진다.



' 너 없는 그 자리' 에서 경원은 케냐에 출장을 갔다고 굳게 믿은 남자를 서울 한복판에서 운전 중에 발견한다. 발견, 즉 '앎' 이다. 경어로 쓰이던 서간문이 어느 순간 낮춤말로 진행되고, 남자를 발견한 경원은 이렇게 쓴다. "오늘 오후 네시 십오분, 뱅뱅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재색 비바리, 당신 맞지?" 곁에 없는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의 심정으로 읽히기 시작하다 읽어갈수록 공허하고 텅빈 듯 이상한 구멍들이 이 문장에서 맞부딪히며 절정을 맞는다. 추궁하고 심문하는 듯 날카롭게 날아오는 질문들은 어쩐지 두렵기까지 하다.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원은 남자를 운명의 상대로 받아들였으나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되레 경원에게 "경원씨가 내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우린 그저 한때 같은 직장 동료였을 뿐이에요." 하며 거부한다. 경원이 수도없이 거는 전화를 받지 않고 천장 위를 기어가는 바퀴벌레 보듯 그녀를 째려보고. 이렇게 본다면 남자를 그리워하며 회상했던 경원과 남자의 아름답던 추억은 여자의 착각이 아닌 회피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진실에서 회피하여 거기에서라도 사랑하고픈 심정. 어쩌면 위의 인용문에서 여자가 무릎을 꿇어가며 눈물을 뚝뚝 흘렸던 까닭은 자신의 애처롭고 비참한 모습을 동정한 것이 아닐까. 혹은 남자를 가지지 못한 슬픔과 분노에 울었던 것일까.



<너 없는 그 자리>는 사랑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초반 몇 개 소설은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이 아니었으나 결국은 일방적으로 판명난 사랑, 상호적인 사랑에서 마지막에는 비참하게 혼자가 되는 사랑, 아픔을 잊기 위해 선택한 사랑…. 이혜경은 '한갓되이 풀잎만'에서 이렇게 말은 해두고 있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그러나 이혜경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하는 것을 택한다. '감히 핀 꽃'의 시아버지는 평생을 집 떠나 살다가 죽기 다 되어 본가로 들어오는데 간병인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알고보니 사랑을 나누던 사람이었다. 이렇듯 주인공들은 계약보다 사랑을 중시한다. 특히 사랑은 맹목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덮어놓고 사랑한다. 그저 사랑한다. 그러다 당한다. 이혜경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당한다. 맹목적으로 사랑하다 당한다. 덮어놓고 사랑하다 당한다.



죽음은 후반에 이르러 얼굴을 빼꼼 내밀기 시작한다. 5번째로 실린 소설 '감히 핀 꽃'에서 시작되어 7번째 '꿈길밖에 길이 없어'까지, 총 3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감히 핀 꽃'은 늘그막에 죽는 거니 넘어간다치고 '금빛 날개'와 '꿈길밖에 길이 없어'의 죽음은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금빛 날개'는 한 중년의 남성의 글이다. 그는 가족들에게까지 천대받던 무지하고 무식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일하게 명문 대학을 나와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그야말로 돼지 같이 꿀꿀대기만 하는 가족들과 연을 끊고 지낸다. 그러면서 어릴 적 친척들에게 들은 비난과 동정, 거짓 긍휼의 발화들로 인해 매사에 부정적이고 무심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것은 결국 애지중지 키우던, 어떻게든 잘 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한, 그에게 전율을 불러 일으키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 큰 아들을 죽게 만든다. 불량배에게 칼을 맞고 아버지의 병원 문을 두드린 아들을 아버지는 외면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외면했고, 궁극적으로 자신을 외면한 것이다. 사랑과 무심의 괴리는 이토록이나 처참한 비극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는 가장 짧다. 그러면서도 울컥한다. 갑선은 축 처진 사람이다. 우울하고 순박하고 숫하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돌아다니는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힘들다. 아껴쓰기는 자린고비 저리가라인데다 어깨에는 보통 사람의 수십 배 부담과 피로가 얹혀 있다. 그런 갑선이 어느날 불쑥 알로하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무슨 일인지 돈을 펑펑 쓴다. 갑선의 이발소 단골 손님이었던 김씨는 이상하게 여기고 이곳저곳 알아보고 다닌다. 깨달았다. 갑선은 미쳤다. 김씨는 건강검진의 핑계를 대며 정신병원에 갑선을 밀어넣는다. 사람 잘 믿는 갑선은 어수룩한 거짓말에도 감쪽같이 속아 정신병원에 머무른다. 시간이 흐르고 통장 잔고가 바닥나기 시작하며 갑선은 예전과 같이 돌아온다. 그렇게 퇴원하고, "선생님, 저는 왜 미쳐지지도 않는 걸까요?" 하는 말과 함께 목을 맨다. 이 죽음은 매우 갑작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갑선의 한탄은 그동안의 고통을 극한으로 함축해 놓은 듯하다. 얼마나 심하고 처절한 고통이든 부담이든 피로이든 참고 인내해오던 남자의 끊어져버린 정신줄. 얼마나 닳았으면 끊어지기까지 했을까. 어느 정도로 힘들었을까….



이혜경의 소설은 힘들다. 해풍처럼 강하게 밀려오는 바람을 견디기 힘들 듯 읽기 힘들다. '앎' 은 이혜경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고 사랑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이혜경의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의 단편을 읽는 것이다. 과거와 과거, 과거와 현재가 버무러져 뿜어내는 고통의 아우라를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크아이즈 2012-12-1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대단해요.
머잖아 이혜경, 한강을 넘는 젊은 작가 한 명을 우리는 만나게 되겠지요. ^^*
글에 대한 그 열정, 그 탄력 분양받아 갑니다.

이진 2012-12-17 22:28   좋아요 0 | URL
와, 팜므느와르님! 제 서재엔 처음이신 듯해요~ 아닌가요?
한강을 넘기는 지금의 제 능력으론 무린 거 같고, 이혜경이라면 비등비등할 것 같아요. 물론 감정선 같은 것들이요! 감사합니다. 또 좋은 글 올릴테니 들러주셔요~

2012-12-17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2-17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추천 열개 드리고 싶은 리뷰에요.
이렇게 읽어냈군요.
전 오늘 가서 마자 낭독하고 끝내고 올거에요. 너무 읽고 싶어서요.
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 때, 요거 하다가 멈춘 상태라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앎, 우린 때로 모르면 더 나았을 것들을 알려고 들고 알게 되고 알아버리지요.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앎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래야하구요. 불끈!
조금은 흐린 아침, 12월의 중반 한 주를 시작하는 오늘,
단단하고도 무름한 마음으로 시작해볼까요. 응원합니다^^

이진 2012-12-17 22:3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읽으면서 계속 감사하고 감사했어요. 되게 좋은 글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사실 저도 후반부에 가서는 꾸역꾸역 읽어냈어요.
후반으로 갈수록 단편들의 힘이 달리는 건 사실이잖아요?
신경숙의 소설집도 그렇고, 이혜경의 이번 소설집도 그래요.
언제나 저도 응원할게요~ 파이팅!

ICE-9 2012-12-1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레이야님에게 동감이에요.
처음 문장을 읽는데 '와! 이건 리뷰가 아니야. 하나의 작품인 걸'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소이진님처럼 쓰고 싶어요 ㅠ ㅠ (갑자기 제가 쓴 리뷰를 싸그리 다 지우고 싶은 충동이...) 아무튼 정말 잘 읽었어요. 이혜경 '너없는 그 자리' 꼭 읽어볼게요. 그리고 소이진님 문학하길 정말 잘 한 것 같아요.(더하여 평론쪽도 노려봐요^ ^)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

이진 2012-12-17 23:43   좋아요 0 | URL
아이구, 헤르메스님 제가 할 말을 하시면 어뜩합니까... ㅠㅠ
사실 첫 문단은 작품 이야기는 없고 주저리주저리 식이나 마찬가지죠! ㅎㅎ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들러주시는 군요! 어때요, 실시간 댓글이죠? ㅎㅎ

착한시경 2013-01-2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앞 부분 읽고...헉~너무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 쓰실 글들도 기대가 됩니다^^

이진 2013-01-23 21:22   좋아요 0 | URL
와, 착한시경님 정말 감사합니다. 첫부분은 교회 갔다가 오늘 길에 가로등에 뿌옇게 낀 안개를 보고 생각났답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밤 되시길 :D
 
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세자의 연정과 사랑

 

 

 

 

  얼마 전까지 정은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를 품는 달>이 크게 화제를 이끌어내며 방영되었다. 가상 조선시대에 살았던 세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 책이자, 드라마다. 드라마에는 김수현이 그 역할을 맡았는데 역할에 몰입을 잘하여 드라마 자체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있는 연기와 구성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한 눈에 반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도, 원인모를 병에 들어 폐빈 되었을 때도, 그녀가 병으로 죽고 난 후에도, 그가 임금이 되어 중전을 거느리게 된 후에도 연심을 그만두지 않았다. 어찌나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지 그만두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잊지 않으며 살았다. 끝내는 죽었던 세자빈이 살아 돌아와 그의 사랑은 이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조선의 로맨틱한 세자의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이다. 나도 <채홍>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 관심은 오롯이 어서 세자와 세자빈이 재회하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TV를 두들기곤 했다.

 

  그러다 <채홍>을 읽게 되었다.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을 선물까지 받은 터라 들뜬 마음으로 펼쳐보았다가 덮을 때는 비탄하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그 여파는 한창 즐겨보고 있던 <해품달>에서 관심을 두는 인물을 바꾸게 했다. 바로 어린 시절에 세자빈과 함께 예동을 지냈던 중전이다. 그녀는 공주의 예동을 지낼 때부터 관심 밖이었다. 세자빈의 오빠를 마음에 품었던 공주는 세자빈 쪽으로 마음이 가기 마련이었고, 왕마저도 지식이 뛰어난 세자빈을 마음에 두었다. 중전은 늘 세자빈과 비교되는 수치를 당해야했고, 주저앉아야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아비는 더욱 독하게 마음을 먹으라며 다그치기만 했다. 성장한 후에도, 죽은 세자빈 대신 들어오게 되었다는 간접적인 이유로 세자에게 미움 받았고, 자신의 아비가 세자빈을 살해하는 것을 주도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일 밤 떨었다. 세자빈이 살아 돌아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정신적 이상까지 생겨버렸다. 심지어 합방일이 되면 세자는 언제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교태전에 걸음하는 것을 피했다. 그녀는 이러한 무관심과 자신을 향한 질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자처해왔다. 하지만 늘 그녀는 외로운 존재였다. 남편에게, 아비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많은 여인이었다.

 

  왜 내가 중전에게 눈길이 가게 되었는가? 바로 <채홍>에도 이와 같은 여인이 다뤄지기 때문이다. 순빈 봉씨. 역사서에 쓰여진대로만 보면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후궁의 회임 소식을 들고 투기를 부리고, 거짓 임신을 고하고, 심지어는 궁녀와 동성애까지 저지른 나쁜 여자다. 김별아는 이런 순빈 봉씨를 어떠한 여자로 다루고 있을까. 또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순빈 봉씨, 사랑할 수 있는...

 

 

 

 

  순빈 봉씨는 알려진 것이 없는 여자다. 그 칭호 넉자 말고는 이름도 모르고 단지 동성애를 저지르고 폐출 당했다는 기록만이 보인다. 이런 그녀에게 김별아는 난(暖)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고, 친근하게 봉빈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난으로, 봉빈으로 그녀를 표현해야 했을 이유가 무엇일까.

 

  봉빈은 일찍이 어미를 잃고 유모를 한 가족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듬직하게 자란 오라비들 밑에서 담뿍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컸다. 그녀는 비록 아비뿐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덕이 높았고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수려한 미모는 감히 중국의 천하일색들에 견줄만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오만했다. 간택절차로 궁에 들어 선을 보일 때도 그녀는 고개를 처박고 있는 다른 후보자와 달리 궁안을 둘러보며 느긋이 서있었다. 자기는 타 후보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술법들을 행했던 앞선 세자빈 휘빈 김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비웃음을 치기도 했다.(휘빈은 엄청난 박색이었다! 땅딸만한 키에 답답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자는 더욱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불안해진 휘빈은 민간의 술법을 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부덕한 죄로 쫓겨났고 재간택에 봉빈이 뽑히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난의 오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외모로 뭇 남성들까지도 홀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봉빈은 그 외모로 세자의 마음까지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휘빈과는 전혀 다르기에, 아니 수십배는 더욱 아름답기에 잡지 못하면 이상하리라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세자는 봉빈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되려 미모의 얼굴을 보고는 마음과 눈을 질끈 닫았다. 세자는 여자에게 무심했다.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치 못했다. 특히 세자에게는 오래전부터  미(美)에는 반드시 악이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봉빈의 미는 세자의 마음을 얻는 데 독이 되었을 뿐이었다.

 

  난의 사랑받고픈 마음과 세자의 선입견은 첫날밤부터 격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연(宴)에서 마신 몇 잔의 술을 핑계로 세자가 등을 돌리고 드러 누워버린 것이다. 어느새 그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버렸다. 콧소리가 쌕쌕거리며 고르게 퍼질수록 오라비의 신혼 생활을 엿들어오며, 남과의 접촉을 은밀히 상상하며, 첫날밤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품어오던 난의 억장을 처참히 무너져갔다. 누가 알았을까. 난이 시집간 첫날 밤, 등을 돌린 남편의 뒤에서 스스로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을 줄을. 난은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수치심과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는 겨우 세자빈 따위의 신분으로 장차 성군이 될 인물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아름답게 태어난 걸, 문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된 죄, 즉 자신을 탓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순빈 봉씨, 사랑받고픈...

 

 

 

 

  세자는 봉빈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극과 극으로 치달아버렸다. 세자에게 또 다른 후궁이 들어서면서 부터 더 심해졌다. 몇 년동안 갖지 못한 아이를 후궁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잉태해버렸다. 봉빈은 엄청난 질투심과 분노로 후궁을 괴롭히는 등의 파행을 저질렀다. 태어날 아이와 어미를 저주하며 하루하루 술잔을 비워갔다. 상상임신까지 했다. 하지만 상상임신으로, 그녀는 위로받지 못하고 더욱 악처로 치닫게 되었다.

 

  봉빈은 어느새 술고래가 되어있었다. 자신에 대한 한탄을 담아 한 잔, 세자에 대한 분노를, 사랑을, 그리움을, 외로움을, 질투를, 체념을 담아 열잔, 또 한 잔 마시다 보니 그녀의 옆에는 빈 술병이 산더미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상태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왕 내외는 세자와 세자빈을 단 둘이서만 나가 살도록 명하였다. 너무나도 멀어진 그들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 상상임신 아니 거짓임신으로 궁내를 휘휘스럽게 했던 세자빈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깨끗이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으로 더욱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대체 봉빈은 전생이 어떤 죄를 살았길래 이토록이나 처절하게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을까. 은희경의 <빈처>라는 작품이 있다. 현진건의 <빈처>가 돈의 결핍을 나타낸 것이라면 은희경의 것은 사랑, 즉 애정의 결핍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내의 일기장을 읽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남편이 등장한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남편이 아닌 아내다. 남편은 아름다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끝내는 얻어냈다. 하지만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이라고 그랬다. 그는 사랑을 얻었다는 허무감 때문인지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무시했다. 아내를 위할줄 몰랐고 따스한 한 마디 해줄 줄을 몰랐다. 일찍 들어온다고 말해 몸도 좋지 않은 아내를 저녁 차린다고 고생하게 만들어 놓고는 달랑 전화 한통으로 늦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해주려고 하지만 쓰러질 듯한, 아려오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생... 이루어진 사랑의 쓴 인생... 사랑의 외로움. 봉빈은 <빈처>의 아내보다도 더한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빈처>의 아내는 자신이 원한 결혼을 하기라도 했다. 결혼 전 연애 시절에는 무한 사랑을 받아보기라도 했다. 그런데 봉빈은 뭔가. 원하는 결혼도 아니었고, 세자가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혼 첫날밤부터 폐빈되기까지 7년 동안을 외톨이로 지냈던 것이다. 술을 벗삼아, 바느질을 남편삼아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가 택한 마지막 탈출구는 궁녀와의 사랑이었다. 동성애, 오직 그 하나만이 봉빈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봉빈을 음녀로, 악녀로 치부하기에 바빴고 결국엔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렀다. 어째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들어 놓고는, 그렇게 해 놓고서는 그 고통을 벗어내고자 하면 더욱 더 옥죄이고 결박하는 것일까. 왜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껏 무시해도 되고, 마음껏 쫓아버려도 되고, 마음껏 짓밟아도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여기서 내가 던진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김별아 작가는 이런 순빈 봉씨를 위로하기 위해 난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것일까? 여성으로 태어나 망가지고 짓밟힌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순빈 봉씨, 여자로서 패배자...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늘 패배자로 살아야 했다. 늘 남자의 밑에 서있어야 했고,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에서도 패배자였다. 봉빈은 오로지 악녀로만 그려져 있다. 도저히 따뜻한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탕한 여인. 하지만 어쩌면 김별아 작가가 그려낸 봉빈의 모습보다 훨씬 처참하고 힘든 삶을 살다간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농후하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에게 정절과 여성으로서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했다. 봉빈은 정절을 어긴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악하게 그려질 수 밖에.

 

  말했다시피 조선시대는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요하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동성애로 퇴출된 여인을 김별아는 왜 끌어온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 애처로운 그들의 삶'을 그려냈다고 생각해본다. 봉빈은 세자빈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다. 세자빈이라는 지위로서 박생들에게 덕을 보여야 하는 자리였고, 그녀에게는 수많은 격식과 의례와 절차를 지켜야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봉빈은 좋게 받아드리고자 했다. 하지만 격식과 의례와 절차는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닌 구속과 결박의 의미로 봉빈을 옭아맸다.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밤일, 친정과의 교류를 금지하며 세자는 봉빈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잠기도록 했다. 그런데 비단 봉빈만이 이러한 제약과 규율 내에서 악압받으며 살았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이번 생애 그곳까지 닿을 방도가 없기에 김태감은 무력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무력했기에,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헛힘을 쓰기 시작했다. 입번하러 나서는 길에 트집을 잡아 아내의 귀뺨을 올려붙었다. 쓰러져 울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나갔다가 출번하면 또 다른 가탈을 부려 아내를 쳤다. 고생중에 마음고생만큼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없으니 금세 아내의 눈빛은 흐려지고 피부는 윤기를 잃었으며 변함없는 산해진미에도 살이 내렷다. 수척해진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으나 김태감은 매타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44p

 

  지인의 친구 분은 배를 타시는데 어렵사리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아내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즌슥 아내가 그 분과 밥을 먹다가 생선을 뒤집었는데, 생선을 뒤집는 행동은 배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금기시 되어있던 일이라고 한다.(배가 뒤집힌다나...) 화가 난 남자는 쌍욕을 하며 아내의 귀뺨을 때려버렸다고 한다. 그저, 잘 몰랐을 뿐인데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될 것을 썅년, 이라고 욕까지 하며 때렸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행동으로 아내는 당장 짐을 싸서 나와버렸다고 한다.

 

  김태감의 아내도 실수를 저질렀다. 내시의 부인으로서 '자른다'는 말을 입에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여자들은 화를 때며 욕을 하고 때리는 남자를 두고 위의 아내 분처럼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구속된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저 맞고, 맞으며 참아냈으리라.

 

  봉빈에게는 신체적 구속은 없었다. 폭행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아파해야 했다. 그녀 자신으로서 조선 시대에 태어난 것을 아파하고, 역사로서도 아파야했다. 봉빈은 삶의, 속세의 패배자였으며 다시 일어날 수 없게 쓰러져버렸다.

 

 

 

 

     차라리 벚꽃같은 삶이었으면...

 

 

 

 

  엊그제 핀 듯한 벚꽃이 벌써 다 졌다. 날리는 벚잎을 보며 문득 봉빈을 생각했다. 그녀의 삶이 벚꽃같았다면 어땠을까. 벚꽃같이 짧지만 화려한 인생을,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한 번이라도 겪어봤더라면 그녀는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텐데.

 

  봉빈을 역사 속으로, 아니 내 마음속으로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사랑을 구속당했던, 인권을 억압받았던 조선시대의 여성들. 사슬로 감긴 사랑이라는 감정에 목숨을, 인생을 걸고 덤벼들었던 당돌한 여인. 그만큼 아파야했고, 외로워야했고, 슬퍼야했고, 고통받아야했고, 탄식해야했고, 눈물흘려야했고, 피흘려야했던 여인.

 

  가끔씩 <채홍>을 읽지도 않고 저질스러운 작품으로 치부해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나는 이제 무조건 책을 내밀며 한 번 읽어보라 권할 것이다. 김별아가 그려낸 하나의 작품안에서 김별아 자신의 호소와, 여성들의 호소와, 그리고 나의 호소를 느껴보라 말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2-04-1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한테도 얼른 읽어보라고 권해요!! 근데 나는 저질스러운 작품이라 안했음. 누가 저런 말을 해요, 대체!! 전에 그 친구들?

이게 <해품달> 보다 재밌어 보여요. 가만보면 남자들도 안됐지만 역사 속에서 여자들은 정말 많이 희생하잖아요. 다시 태어나서 여자 한 번 돼볼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뷰 좋아요^^

이진 2012-04-15 21:00   좋아요 0 | URL
누나, 얼른 읽어보아요! 전에 그친구들... ㅎㅎㅎ 아마 제 친구들 말고도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많을거에요.
<해품달>보다 더 재밌을거에요. 해품달은 로맨스 소설이잖아요. <채홍>은 많은 걸 담고 있단 말이에요. 음... 예전이라면 싫은데 지금이라면 대환영이죠! 안그래도 수다를 무척, 무척, 무척, 무척 좋아하는데 여자로 태어난다면 거리낌 없이 수다에 낄수있잖아요ㅎㅎㅎㅎㅎㅎ

ICE-9 2012-04-1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질이라 칭하는 이들과 달리 채홍의 매력에 빠져버린 동지로서 저는 이 리뷰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부부관계란 참으로 연약하군요. 생선을 뒤집었다고 헤어지다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남자들의 옹졸함이 일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이진 2012-04-16 23: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우리는 그렇게 옹졸한 인생을 살지 말아요. 여자를 때리며, 욕하며 살지도 말구요. 이 리뷰 저는 아무리 봐도 너무 막쓴거 같아요. 요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차근차근 정리해서 쓰신 헤르메스님의 리뷰에 비하면 뭐랄까... 아스팔트의 껌이랄까 ㅎㅎㅎㅎ

저는 이 리뷰랑, 히가시노 게이고의 리뷰로 일단 신청은 했어요. 그런데 10기 활동을 너무 안해서 뽑아줄지 안뽑아줄지는 모르겠어요 ㅠㅠ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가 늘 이런 식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었지?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그의 생각을 침범할 만한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어. 한 번 그에게 머릿속까지 농락당한 후로 그를 읽으며 철저한 그물망을 조금이라도 벌리고자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다 소용없는 짓이었어. 그의 트릭을 알아챘다고 좋아하는 순간부터가 내가 그의 늪에 빠지는 순간이었지.

 

 

 

 

               그의 작품인 [밀실살인게임]을 읽으며 감탄했었어. 미나토 가나에의 처녀작을 읽었을 때도 느끼지 못한 스릴감을,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읽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가슴을 치고가는 엄청난 반전을 그로 인하여 느낄 수 있었지. 그가 사용하는 트릭은 서술트릭이라고 해. 말 그대로 작가가 서술방식으로 독자들을 속이는 트릭인데 이 방식이 어찌나 독특하고 간사한지 나같은 추리 초보라면 생각한번 못해보고 마지막장을 덮어야할테야.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지. 전부터 누누히 말했지만 [밀실살인게임]을 읽다가 책위에 엎드려 울었어. 예전에 도서관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읽다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서 당황했던 적이있었는데 이때와는 다른 눈물이었어. 나는 그로 인해서 추리소설의 참맛을 알게되었고 또 머릿속에 강풍이 휘몰아친 것 같은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지. 아마 그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을거야. 하지만 그 후로 한 가지 후유증이 생겼어. 어떠한 추리소설을 읽어도 반전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지. 아무리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 긴박감이 흘러넘치게 진행된다고 해도 끝에 이르러서는 항상 내게 안타까움의 탄식을 흘리게 만들었지. 그래서 한 동안 책에 대한 관심도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책 수집도 접었었지. 곧 오노 후유미라는 작가로 인해 돌아오긴 했지만 이것이 내가 우타노 쇼고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생긴 행복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게나 애정하고 아끼던 작가였기에 우타노 쇼고의 것들 중 가장 사람들 입에서 오르락거리는 바로 이 책은 아껴두었어. 첫 장을 펼치면 어떤 매혹적인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을까? 그리고 나는 사로잡힐까? 얼마나 매력적인 주인공이 어떤 반전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책장에 고이 모셔진 책등을 볼 때마다 들었지.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이 즐거움과 설렘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책등만 한참을 바라볼때도 있었어. 그러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 하고서는 꺼내서 침대위로 던져두었어. [밀실살인게임]에서의 반전을 기대하고 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밀실살인게임]에서 느꼈던 임팩트가 너무도 컸기에 이 작품에도 기대를 많이 했어.

 

 

 

 

               내가 생각하는 우타노 쇼고는 완벽한 추리소설작가야. 또 내가 유일하게 읽어본 신본격추리소설의 작가이기도 하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문장력이나(문장력은 번역가의 기량이겠지만) 스토리따위의 추리소설에서 불필요한 요소는 바라지 않아. 그저 그가 스토리 흐름을 잘 살리는가, 어떠한 복선을 숨겨놓았는가에 집중에서 읽지. 그래서 이 책도 마음을 푹 내려놓고 읽었는데 왠일로 스토리가 탄탄하면서도 재미있는거야. 조폭이야기에다가 사람들을 속여 먹는 사기조직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의 연애사가 적절하게 섞이면서 책 한권을 만들어내. 사실 전혀 이어짐없는 이야기들이 각 챕터별로 연결되어있어. 1챕터에는 주인공이 사건의뢰를 받는 이야기, 2챕터에는 조폭이야기, 이런 식으로 극이 전개되지. 그런데 전혀 위화감이 없어. 다 한 이야기 같아. 이것이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의 능력일까?

 

 

 

 

               하지만 이번 작품은 너무 산만하다. 그리고 너무 혼란스러워. [밀실살인게임]에서 단 한 문장으로 독자의 마음을 콕하고 찌르는 반전을 보인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아. 이 작품에서도 단 한문장으로 극 전체를 바꾸어버려. 그런데 너무도 터무니 없어. [밀실살인게임]을 읽어본 자라면 서술트릭의 참맛을 알터인데 나는 이 책을 읽고서도 머릿속의 혼돈을 정리하지 못하였지.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는 다시 앞으로 책장을 넘겨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의심이 가는 문장이나 대사들을 꼼꼼히 훑었어. 그렇게 오랫동안 고심했음에도 반전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 마지막의 작가으 친절한 해설부분을 읽고서는 무릎이 아스라질 정도로 치며 '아!!'하고 감탄어를 내뱉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충격의 한 문장을 읽고서는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어. 농락당하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농락당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지. 기분이 묘했어. 즐겁기도, 기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지. 책 한 권 읽는 것에 이렇게 머리를 쓰게 만들고 체력을 닳도록 만드는 것도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의 능력일까?

 

 

 

 

               나는 이제 그의 다른 작품을 읽는 것이 두려워.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을까? 또 어떤 반전으로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릴까? 하지만 그런 기대감이 이제는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 같아. 내가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정도의 힘이 나에게는 없는 걸. 하면서 위축된다. 그래도 우타노 쇼고니까, 하면서 읽을 수 있게 만나는 것도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의 능력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