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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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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었습니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요즈음 해가 길어졌습니다. 퇴근 시간 지하철을 견디고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날이 밝습니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흔한 말이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별이 떠 있었습니다. 스케치북에 별을 그리면 왜 항상 노란색으로 칠했을까요? 별은 노랗다, 는 불변의 공식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본 별은 하얬습니다. 파르스름한 배경에 콕 박힌 흰 점, 수명이 다 한 형광등 불빛처럼 때로 흔들리는 불빛이, 별이었습니다. , 그런데…… 저건 별이 아닙니다. 초저녁 동쪽 하늘에, 이런 밝기를 유지할 수 있는 별은 없습니다. 맞아요. 금성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그것보다는 작고 희미하지만 역시 밝은 흰 점이 놓여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건 목성이었습니다. 지구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행성이 별자리처럼 나란히 빛났습니다. 신기하네. 신기한데 이상했습니다. 저토록 조그마한 흰 점이, 실은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물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반대로, 어마어마한 원주를 가진 두 행성이 한낱 먼지처럼, 스케치북에 그려진 노란색의 별보다 작은 크기로 보인다는 게, 그것을 한눈에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이쯤에서 리처드 파인만의, 그 유명한 문장을 빌리겠습니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입니다. 먼 우주에 나가 뒤돌아보자,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주광선 위에 놓여, 신호가 없었더라면 발견할 수도 없었을 만큼 작은 점이었습니다. 우주는 얼마나 광활한가요.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서 있는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요. 김수영의 시를 빌리겠습니다.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수차례의 전쟁과 막대한 부, 권력, 그리고 명예. 얼마나 부질없고 하찮은 것이었나요. 우리의 일생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징병되어 잃은 목숨, 권력에 휘둘리고 명예에 짓눌리는, 그 어떤 것도 이뤄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무가치한가요. 금성과 화성조차 한낱 먼지로 보이는 이 우주에서, 한 사람의 육체는 무엇으로 보일까요. 신은 우리를, 너무 작은 탓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은 성공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기술을 연마하고, 학문을 닦고, 이곳저곳 발품을 팔고, 여차하면 밤을 새기도 합니다. 지난한 노력을 겪은 끝에 그들은 무엇이 되나요. 인간은 특별해지길 소망합니다. 큰 부자가 되길,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길, 추종자를 거느리는 미남자가 되길, 새해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기도합니다. 굳이 긴 문장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우리의 삶이, 일생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가 우러르는 부와 명예와 권력의 소유자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황정은은 소라나나나기,의 세 표본을 통해 이를 증명합니다. 아니, 표본은 더 많습니다. 애자, 순자, , 소라와 나나의 할머니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는 아픔을 가졌습니다. 겉보기에 그들은 순탄하고, 어쩌면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행패를 부리고, 소위 막 나가는 삶을 저 또한 꿈꾼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대신 도시락을 싸주는 이웃이 있고, 일본 유학을 다녀와 본인만의 가게를 차려 소소하게 꾸려가는 삶, 따뜻하고 소박합니다. 한강의 소설을 빌리겠습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우린 절반의 진실밖에 보지 못하는 건가요? 아빠가 보는 건 내가 못 보고, 내가 보는 건 아빠가 못 보잖아요.


인간은 자신의 뒷모습은 보지 못합니다.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황정은은 이들의 뒷모습을 담담히 묘사합니다. 이를 보지 못하는 한, 피 흘리는 달의 뒷면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보잘것없고, 하찮지 않겠느냐고, 아프게 질문합니다.



인간은 외롭습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하나뿐인 부족으로 멸종해갈 뿐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혼자, 죽는 것도 혼자입니다. 죽으면 그뿐인 인생이므로 허망합니다. 죽음마저도 보잘것없고, 하찮은, 그것이 인간입니다. ,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요? 속절없이 무너지고, 가라앉고, 보잘것없고 하찮은 죽음을 맞이할 바에야,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요?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너에게 입을 맞춰 보지도 못했을 거니까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요. 매일 아침 조달한 고등어로 만든 초절임을 맛있게 먹고, 한자리에 모여 만두를 빚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종이로라도 꽃을 접어 벽을 꾸밀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가요.



황정은은 끝끝내 고백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것을 이뤄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혼자여도 괜찮습니다. 사랑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아파도 괜찮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사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제 옆에는, 그렇게 사는, 함께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피 흘리는 뒷면을 가진, 하나뿐인 부족으로 사라져가는, 누군가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럼에도,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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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7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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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알고 있다. 내가 죽음에 관하여 얼마나 약한지.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척 연기하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혼란과 공허감을 얼마나 견디지 힘들어하는지 너는 안다. 혹여 그 죽음에 좁쌀만큼의 희망이나 행복이 비칠 때 나는 미치기 직전에 이른다는 사실을 너는 안다.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부릅뜨며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너는 수없이 보아 왔다. 너는 내 등을 다독이거나 어깨를 붙잡거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거나 떨리는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너는 묵묵히 내 옆에 앉아 있다. 내가 손을 뻗어 너의 허리를 감싸 안고 엉엉 울 때까지 너는 망연히 앞만 바라보고 있다. 무심히 너는 내 팔을 잡아 네 몸쪽으로 밀착시킨다. 나는 너의 손길이 따뜻해서 너에게서 몸을 떨어뜨린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너의 행동을 따라 한다. 앞을 본다.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은 높은 건물을 응시한다.

너는 강하다. 세상의 질감을 만져가며 느리게 걸어가는 너는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의연하다고 한다. 나는 그들의 천진한 문장을 분쇄하여 흩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내가 틀렸다. 그들도 틀렸다. 너는 강하지도 의연하지도, 그렇다고 초연하지도 않다. 너는 나보다도 그들보다도 여리다. 너는 나보다도 그들보다도 약하다. 너를 강해 보이게 만드는 것은 난도질당하여 피가 철철 흐르는 네 작은 심장을 감싸고 내려앉은 수 겹의 딱지이다. 너의 눈물과 피가 더는 보기 싫었던 시간이 내린 단단한 더께이다. 너는 무수한 깊은 상처가 무디어진 결과이다. 너의 심장을 건드리는 고통은 더는 없다. 


네가 우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너는 불평하거나 투정부리지 않는다. 너는 내게(어쩌면 다른 이들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의지하려 하지 않고 네 감정을 철저히 숨긴다. 너는 늘 받아주는 쪽이었다. 반듯이 한자리에 서서 나의 고통을 너는 말끔히 흡수하여주곤 했다. 나는 네게 미안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면서도 고통을 덜어내고 싶었기에 나를 네 앞에 모조리 뱉어내 왔다. 너의 시선은 내 말을, 단어들을 지켜보듯 우리 사이의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는, 말이 없던 네가 입을 열었다. 공간이 젖어 있어. 나는 그 후로 네게서 떨어지는 눈물을 읽을 수 있었다. 네가 길을 걸어갈 때마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 입에 욱여넣을 때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때마다 운다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조용히 네 감정을 배출하고 있던 것이다. 무엇이 너를 이토록 은밀히 울게 하나. 어린 너를 장악하고 완전히 바꾸어버린 그 봄인가. 네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시리디시린 그 봄인가.


네게 너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이 무어냐고 물어보았을 때 너는 허기라고 답했다. 그 봄 이후로 너는 먹는다는 것에 치욕을 느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손을 바삐 움직여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의무가 역겨웠다. 너는 굶을 수 없었으므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밥을 먹었다. 그마저도 목을 넘기기 전에 뱉어내기 일쑤였다. 쌀알은 모래 같았고 김치는 최루탄 같았다. 너는 수척해졌고 깡말라갔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죽음에 결부된 슬픔을 끝까지 견뎌보자고 마음먹은 나를 번번이 굴복시킨 것이 허기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장례식장에서, 어린 나는 새빨간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육개장을 함부로 퍼먹으며 엉엉 울었다. 속에 생긴 빈자리에 토란 줄기와 퉁퉁 불은 쌀알이 박혀 영영 소화되지 않고 내 신체를 이룰 것 같아서 구역질이 났다. 나 자신에게서 욕지기가 났다. 먹는다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인 행위이기에,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그만둘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죽음이 일상이 되는 것 같아서 밥숟가락을 들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허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가 부쳐준 올배쌀을 공기에 담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네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끔 죽은 이들을 생각한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입에 무언가를 넣고 씹고 있다. 음식물의 즙이 입천장으로, 혀로 배어들 때 나는 죽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 쪽빛으로 푸르렀던 주검의 얼굴, 뇌가 멈추었지만 아직 심장만은 남아서 뛰고 있는 평온한 얼굴, 중력으로 늘어난 피부 위에 아로새겨진 주름이 가득한 얼굴. 얼굴에 놓인 표정은 모두가 어둡다. 찡그려져 있다. 마치 나는 힐책하듯. 나는 입에 든 것을 뱉고 싶어진다. 토하고 싶어진다. 죄의식을 내게서 떨쳐내고 싶어진다.

악취미…… 라고 너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나는 너를 언제나 아파한다. 나는 너를 염려한다. 네가 세상을 등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면 나는 가슴에 무언가 마치는 것이 느껴진다. 너를 어떻게든 돌려놓고 싶지만 그렇게 하는 게 너를 더욱 상처입히는 일 같아서, 사실 그것은 너를 위한 행동이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인 것 같아서 나는 매번 포기한다. 너는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서 한마디씩 너를 꺼낸다. 너의 봄을 내게 한 덩어리씩 꺼내 놓는다. 너의 목소리는 나직하다. 떨림이 없다. 시를 낭송하듯 무감각하게 너를 읊는 네 모습은 결기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그 순간이 아프다. 너를 알고 싶으면서도 너를 아는 것이 두렵다. 무섭다. 너의 목소리가, 너의 단어들이 활처럼 내 심장에 와서 박히므로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피를 흘리는 셈이 된다. 생각한다. 내가 흘리는 피의 양은 네게 비하면 얼마나 적은가.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끼는 고통은 네게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가.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 옳은 일인가 회의한다.

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범죄자를 구타하고 불태워 종내 죽이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끔찍한 영상이라며 무심코 네게 보여주었다. 영상이 중반쯤까지 재생되었을 때, 각목에 맞아 튀어나온 자신의 눈알을 보고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사내가 구타하는 자의 다리를 힘겹게 붙드는 장면이 눈에 비치었을 때에야 나는 깨달았다. 너에게 이걸 보여주다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너를 돌아다보았다. 너는 담담히 영상을 보고 있었다. 너의 시선은 맞는 자에게도 구타하는 자에게도 향해 있지 않았다. 너는 눈알을 보고 있었다. 사내 옆에 떨어져 흙이 잔뜩 묻은 눈알. 이제 제구실을 더는 하지 못하게 된 그것을 너는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영상을 종료하지 못했다. 사내는 그사이 자신의 마지막 힘을 다해 눈알을 쥐었다. 사내의 숨이 외마디 신음과 함께 끊어지고 나서야 너는 몸을 움직였다. 너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너의 눈은 공허했다. 너의 뇌가 들여다보이는 듯 텅 비어 있었다. 너의 눈은 빨갰다. 어찌나 힘을 주었으면 실핏줄이 터졌다.

그리고, 쏟아지는 말들.

나는 그것을 잊었다. 잊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너의 고통, 그네들의 고통, 나와 비견할 수 없는 그것을…….

 

나는 떠오르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작은 목소리로 나직이 그들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읊조린다.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는 건 일종의 초혼(招魂) 의식이기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혹여 그가 왔을까. 기척이 느껴질까. 너의 어머니가 네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네가 그곳을 떠난 뒤였을 것이다. 네 어머니는 구부러진 허리를 지팡이로 지탱한 채 대문을 나왔다. 그녀로선 최고 속력이었다. 느릿하게 대문을 나온 뒤 네가 걸어갔을 땅의 자취를 눈으로 훑었다. 네가 남기고 지나간 체취를 감지한다. 그녀는 쉰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녀는 외로우시다. 그녀는 매일 자기를 책망한다. 너는 네가 변한 것처럼 그녀 또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네가 잘못했단 말은 아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나는 위로하는 법을 모른다. 우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는 얼어붙는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포기한다. 어설픈 말을 건네기보다 너를 흉내 내 가만히 있기로 한다. 우는 네 곁에 함께 있어주기로 한다. 언젠가 네 상처가 모두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고 새 살이 돋는 그 날까지 동행하기로 한다. 네 이름을 자꾸 부르며 너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기로 한다. 네가 나를 돌아보면 봄의 시린 풀빛을 지울 수 있는 따듯한 미소를 너에게 건네주기로 한다. 내게 사원이 된 네 속에 나의 촛불이 아른거리면 나는 그제야 걷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다짐한다.

 

나는 강둑에 앉아 있다. 내 시야를 가로막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눈앞에 강이 흐른다. 촉촉한 소리를 내며 강이 흐른다. 자유롭다. 자유다. 자각하지 못했던 자유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는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운다. 슬픔이 아니다. 양심. 그렇다, 양심이다. 고개를 들고 입술을 깨물고 다시 운다. 네 손길이 내 어깨에 닿는다. 너 또한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있다. 너는 위대하다. 너는 숭고하다. 너는…… 너를 지킨 사람이다.

 

군인들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누구도 너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눈을 감고 묵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를 지킨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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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14-06-2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말고사 좀 있으면 시작이죠? 잘 보세요.화튕

루쉰P 2014-06-2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공부 잘하고 계시죠. ㅋ
저도 서재에 왔어요 침묵을 깨고 ㅋ
 
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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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세차다. 창문이 으스러질 듯 몸을 흔든다. 귓바퀴를 건드리는 파열음이 거세어지자 나는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다본다. 아스팔트 도로에 은행잎이 한가득 떨어져 있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차와 사람에 밟혀 뭉개어지며 쓸쓸히 버려져 있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겨우 숨을 이어가는 은행잎을 측은히 여기며 나는 팔짱을 낀다. 저항하듯 바람은 더욱 거칠어진다. 나는 괜히 소음을 뿜어내는 제습기를 발로 툭툭 건드린다.






  의자에 앉아 몸을 비튼다.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눈을 감는다. 말러의 2번 교향곡을 재생시킨다. 숨죽인 밤, 너울 치듯 몰아오는 어둠의 물결 틈을 '부활'로 파고드는 음악. 쏟아지는 음표의 무리에 나는 이미 무너진 몸을 가누지 못한다. 산산히 조각난 몸. 활이 현에 몸을 비빌 때마다 떨리는 음, 심장을 베는 듯한 소름 끼치는 비명에 나는 진저리친다. 나는 왜 매일 실패하는가. 나는 왜 패전한 군대처럼 무릎을 꿇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의 끝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회색 거인의 거대한 몸뚱어리는 과연 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걸어갈 수 있을까. 담장위를 걷는 소년같이 조심스레 무거운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창문 틈으로 바람이 소리를 지른다. 넌 안 돼. 나의 억센 팔로 너의 몸을 옭아매었어. 덩굴 줄기가 잘리지 않는 한 너는 내 족쇄를 벗어날 수 없어.


  장중한 음의 파도에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들기 시작하면 나는 끝내 몸을 쓰러뜨린다. 고통의 시작이자 절정, 그러나 부활의 징조인 그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떨림으로 울려온다.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그때의 감동-팀파니와 북을 마구 때리고 온갖 금관악기를 폐가 터지도록 불어댄다 해도 결국 표현하지 못할 어떠한 폭발을 나는 글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여리면서도 폭발적인 역설과 환희로 범벅된 말러의 음악은 한강의 손을 거쳐 한 편의 장편소설로 변화하였다. 말러의 교향곡이 악장별로 나뉘어 글에 녹아든, 음악 그 자체의 소설. 소설의 짜임과 철근 같은 이야기를 제쳐두고 작곡하듯 단어와 문장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 신체소설. 오로지 감각으로 작문에 임하여 감정을 제출한, 결기와 치기가 단단히 뭉쳐진 소설.









그 무렵, 때로 늦은 시간에 인주는 나에게 전화했다.

첫 마디는 언제나 정희야,였다.


(…)


정희야, 자니?

얘기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나쁜 일이라고도 좋은 일이라고도 할 수 없어.

민서가 왔어.

어제. 짐 다 싸서 데려왔어.



정희야.

…민서 못 만나고 지낸 몇 달 동안,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 남김없이 파괴됐다고, 완전하게 죽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어. 그때 내가 정말로 죽었던 거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아니, 죽기 전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되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서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서야 하는 거야. 누군가가 지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말해.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들… 살아내려고, 어떻게든 존재해내려고 필사적으로 그렸던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고. 


아니, 아무것도 안 무서워.

아무것도 후회 안 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P. 322-4









  교향곡이 절정에 다다르면 모두는 땀에 젖는다. 마침내 도래한 부활의 날. 구원과 축복의 오라가 사람들을 감싸고, 연하고 투명한 희망의 막이 생성되는 시간. 새 시간. 세계가 바뀌고 사물이 바뀌는 천지. 환상의 아우성 속에 번지는 인주의 얼굴을 생각한다. 밤늦게 미시령을 찾아가 마녀처럼 흩날리는 눈발을 보았던 인주. 그녀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고 종내 죽었다. 자살로 결론짓는 다수의 틈에서 홀로 반기를 드는 여인, 정희. 인주의 유일한 친구를 자처하며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인주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남자 강석원과 맞서게 된다. 강석원은 인주의 유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인주의 그림들을 실은 전기를 작성했다. 핵심 내용은 인주가 자살했다는 것. 그에 대항해 정희는 자신만의 인주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 자신의 인주에 관한 추억과 기억들을 상기한다. 성인이 된 인주가 즐겨찾았던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며 인주에 대해 새로운 것을 환기한다. 정희는 결국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335)"라는 고통스러운 고백을 내뱉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인주는 결코 자살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 






  말도 안 되지. 서(인주) 선생이 왜 자살을 해. 당연히 사고지. 서 선생을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애는 또 얼마나 어리고. 그 애한테 얼마나 끔찍했어? 그렇게 정 많은 사람은 자살 못 해. 여기 배우는 애들한테도 정성이었어요. 안 해도 될 일들을 다 껴안고 골병이 들었지. 다들 그렇게(인주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구? 데려와봐요. 평론가? 교수? 미술판 사람들? 웃기고들 있군. 미안해요, 내가 요즘 마음이 이래… 이 빌어먹을 눈물이. (208)






  인주에게는 혈우병을 앓는 외삼촌이 있었다.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때로는 자신이 여자인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은 그는 피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경외감은 그를 매사에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아닌 세상을 보호하려는듯 세심하게, 소심하게 움직이는 남자. 그를 인주와 정희는 사랑했다. 인주에게 그는 부모님 대신 자신을 키워준 보호자였고 정희에게 그는 사춘기의 두근거리는 감정을 해소할 이성이었다. 인주는 외삼촌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활기차고 쾌활하고 당당하게 살아갔고 운동신경이 좋은 강점을 살려 소질을 발하고 있었다. 정희는 심오한 철학을 지닌 미술가로서의 외삼촌에게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해 들으며 미술을 시작했다. 인주는 그림을 싫어했다. 정희와 외삼촌이 좁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면 홀로 마당에서 줄넘기를 넘거나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곤 했다. 그들은 늦은 저녁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했으며 감자를 삶아먹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죽었다. 뇌에 피가 고여 작업실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인주는 그날로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장대높이뛰기를 하다 절게 된 다리를 계속해서 썩혀두며 한 발짝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 년 동안이나.


  인주는 그 사이 변하였다. 조용해졌고 여려졌다. 살은 쪽 말라 가죽만 보일 지경이었고, 가장 큰 변화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주의 그림은 어두웠다. 인간의 심연의 고통만을 꺼내 연필로, 펜으로 옮겼다고 표현할 수 있을 그림이었다. 인주가 수 년 간 감내해오고 묵혀두고 곪도록 두었던 상처의 둑 터짐. 고뇌 고통 고독 쓸쓸함 외로움 비애 비통, 그러나 신성함조차 느껴지는 그림. 









<김명숙>










  부활의 기쁨은 오래간다. 환희의 송가, 감동에 도취한 음악은 쉼 없이 흐른다. 인주의 마지막. 구급차 안에서의 긴박한 시간.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인주는 갑자기 숨을 내쉰다. 들숨과 날숨이 충돌한다. Breath Fighting. 삶에 대한 열망. 살고 싶다는 의지. 삶을 향한 투쟁 정신으로 인주와 정희는 이어진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살아야만 해. 살아 내야만 해. 삶의 아픔과 인간의 죄악을 낱낱이 폭로한 전작들에 대한 답변-살아 내야 한다. 갈대처럼 충분히 흔들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두 팔로 받아내며, 넓은 벌판에 발을 뿌리박고 견뎌내야 한다. 이 삶을 사랑해야 한다.


  구원의 시간이 끝나고 눈앞에 닥친 세계. 적응해 나가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통증은 모든 곳에 있다. 격렬하다.' 처음의 빛은 광명으로 인주를 감싼다. 그러나 그녀에게 처음의 빛은 너무 밝아 고통스럽다. 인주는 자신의 삶이 조금은 어두워지기를 바랐다. 탁한 음영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길, 자기를 이해할 수 있길 소망했다. 인주는 거칠고 투박한 선의 그림을 버리고 외삼촌의 그림을 따라간다. 오로지 종이와 물, 먹으로만 이루어진 그림. 마치 우주의 탄생을 표현한 듯한 먹그림. 죽음와 삶의 경계를 종이 안에 담아내며 인주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느낀 것일까. 죽기 일 년 전부터 그녀는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다. 일 년 동안의 공백. 정희는 아득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무거운 두 발을 차례로 내딛는다. 회색 거인의 무거운 발. 거대한 두 다리. 걸어갈 수 있을까. 정희는 걸을 수 있었다.


  얇은 유리막 사이로 터져나오는 핏물. 닥쳐오는 죽음의 경계선. 격정의 폭풍이 몰아친다. 한 손엔 대항을, 한 손엔 저항을 들고 투쟁하는 인물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신성한 격렬함.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가는,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어본다. 터지기 직전까지.


  심장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듯 흐르는 감각. 각혈의 단어, 문장, 문단, 책.


  말러의 교향곡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진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두 번 부딪친다. 다시 앉는다. 정면을 응시한다. 두 팔을 한껏 옆으로 뻗어본다. 눈을 감고 느낀다. 어느새 근처에 펑퍼짐하게 팽배한 고통과 상처, 이 아픔들을. 달의 뒷면에 서려 있는 슬픔을.





  살아내야 한다.








  이 년 가까이 스테로이드 제제로 치료를 받았지. 부작용으로 온몸이 백 킬로그램 가까이 부풀어 올랐어. 견디기 어려웠어. 그렇게 육중한 몸으로, 조그만 상처도 내지 않으려고 절절매면서, 어린 누나가 안간힘을 다해 벌어오는 돈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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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11-25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강만 읽고 있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네요. 저번 글에 얼핏 그런 말을 본 것 같은데..ㅎㅎ

이진 2013-11-25 23:45   좋아요 0 | URL
이얍, 가연님 빠르네요. 한강의 장편소설을 모조리 접수해보려구요. 지금은 <희랍어 시간> 읽고 있어요. <검은 사슴>만 읽으면 장편은 완전 정복!

꼬마요정 2013-11-26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러 2번 부활 완전 좋아해요.. 그리고.. 소이진님 표현에 전율을 느낍니다. 심장을 베는듯한 소름 끼치는 비명.. 아.. 그런거였어요. 그리고 절정에서 쏟아져내리는 환희.. 다락방님에 이어 소이지님도 조만간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ㅎㅎ(저 없는 새 벌써 책 내신 건 아니죠?) 이 책 동생이 갖고 있던데 빌려봐야겠어요~~^^

이진 2013-11-26 22:12   좋아요 0 | URL
꼬요님(꼬요 좋은걸요...? ㅎㅎ)
말러 2번 1악장이 저는 정말 좋아요. 전율까지야... 에이
다락방님에 비하면 저는 아직 감성팔이죠. 아니다, 감성팔이 정도도 못 돼요.
고등학생이 무슨 책이에요. 하긴 제 아는 동학년 중에 책을 낸 친구가 있다네요. 부러워요.

이 책은 꼭 읽어보셔야 해요. 후유증은 책임 못 져요. 힘들거예요, 무척.

2013-11-26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6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3-11-2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잘 지내시죠 ㅎㅎㅎ
열정적으로 등장하셔서 제 서제에 방문 해 주셨던 걸 잊지 않고 있어요 ㅎ
요즘도 공부 잘하고 계시죠?
전 늦은 나이에 대학생들과 어울려 도서관에 있답니다 ㅋ
물론 복장도 캐쥬얼하게 입고 이 학생들을 속이고 있죠 ㅎ

이진 2013-11-26 22:10   좋아요 0 | URL
으왑으왑 루쉰님!!
저 루쉰님 정말 좋아해요. 알라딘에서 왠지 애착을 가진 사람이 몇 있는데, 루쉰님도 한 분.
요즘 공부 너무 열심히해서 탈이에요. 근데 성적은 그닥이에요. 저희 학교 문과애들이 다 나눠먹는 지경이라, 저도 일단 젓가락으로 반찬 몇 개 집어들고 있긴 한데... 히히
루쉰님 얼마나 동안이면 학생들을 다 속여요. ㅋ.ㅋ

Shining 2013-11-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가 처음으로 읽었던 한강 소설이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동네 마실 나가듯 주머니에 손 넣고 놀이터에 나갔는데 웬 단단한 주먹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고수에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하면 표현이 좀 저렴한가요;; 낯설기도 했고 충격이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던 기억이네요. 가끔, 그러면 안되지만 이 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해질때가 있어요. 절망의 단애를 훑는 그 손길이 참.. 이러한 글을 쓰는 사람의 과거와 현재는 어떨까 하는 천박한 호기심 같은거요. 겨울이네요, 한강을 읽기에도 말러를 듣기에도 좋은 계절, 같아요. 감기 조심해요 :)

2013-11-28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3-12-1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한강의 작품에 집중(?)하는 모습이 정진(精進)을 생각하게 합니다...

jo 2013-12-3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과정 속 어려움을 한번 뛰어 넘어야 하는데 6학년때 앵무새 죽이기를 읽던 실력이나 지금 책을 읽는 실력이나 똑같아요.
이해가 안되도 계속 읽으면 재미를 붙일 거라는데 아직 너무 힘들어서 책에 손을 못 대고 있어요.
하는 것도 없는데 시간없다고 책도 못읽는 저를 반성 합니다!!!!!!
근데 소이진 님은 고딩인데도 열독하시네여.

jo 2013-12-30 11:50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동영상 첨무는 어떻게 하나요? 동영상 링크를 입력해도 액박밖에 안 뜨네요.
 
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강이고, 아름답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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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 달콤한 맛을 빤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소리를 크게 하여 듣는다. 추파춥스와 베토벤 교향곡은 어떠한 면을 들먹여도 썩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리적이다. 추파춥스는 작고 달콤하며 부드럽다. 입에서 돌돌 구르며 치아를 두드리는 동그란 알은 딱딱하고 끈끈하다. 뜨거운 열과 침에 서서히 녹아가는 추파춥스는 입 속에 달큼한 당으로 남는다. 엄지손가락 첫마디만큼 커다란 동그란 알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줄어든다. 그 모양 그대로 줄어들 때도 있고 타원형으로, 납작하게 작아질 때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없어진다. 입 안에 여운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형태와 더 즐길 수 있는 사탕은 없어진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크고 감칠맛 나고 웅장하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 귓속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음파는 거대하고 장중하다. 환희의 열기와 生으로 치닫는 열정은 온 몸에 전율로 남는다. 무겁고 고통스럽게 시작한 곡은 서서히 장조로 변주된다. 모든 악기는 환희를 노래하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비치는 광명의 빛을 현을 떨며 반갑게 맞이한다. 악기의 연주는 끝나도 내비치는 빛과 은은하게 울리는 현의 떨림은 여전히 남는다. 사라지지 않고 귀에서 몸으로 혈관을 타고 퍼진다. 결국에는 내 몸이 베토벤 교향곡 안에 서 있다.











<Jacques Louis David   Marat assassiné (1748~1825)>






흰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앞발을 최대한 쳐올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히이잉 하고 울음소리가 들릴 듯 벌어진 입술과 눈은 광기 어린 모습을 취한다. 열정으로 가득한 광기다. 그 위에는 산맥 위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채 앞을 응시하는 나폴레옹이 있다. 깊게 파인 눈과 꽉 다문 입은 그의 장군으로서의 패기와 결단력을 대신한다. 화려한 붉은 망토가 휘날리는 이 그림을 모두가 안다. 나폴레옹 그림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는 살해당한 정치인을 그렸다. 바로 위의 [마라의 죽음]. 나폴레옹 그림이 반 타의적이며 인물을 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라 그림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다비드는 오로지 자의적으로 자신의 친구였던 마라의 죽음을 그려낸다.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마라는 다수의 지롱드당원을 단두대로 보냈는데 여기에 분노한 지롱드당원 샬롯 코데이는 마라를 살해한다. 칼은 정확히 그의 가슴에 찔렸고 마라는 즉사한다. 코데이는 그 자리에서 잡혀 나흘 뒤에 처형당한다. 다비드는 이 역사적 사실에 시선을 주기보다 마라를 돋보이게 하였다. 세로로 긴 구도에 절반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 적막이 짙은 공허 속에 마라는 욕조에 누워 죽어 있다. 가슴팍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욕조물은 빨갛게 물드는 동시에 상체와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한쪽 팔을 욕조 밖으로 빼낸 채. 연설문과 펜을 끝까지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나중에 보더라도 그의 몸에 은은히 비치는 어떠한 빛을 오래 응시해야 한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에서의 광명의 빛, 환희의 빛과 같은 밝음이 마라의 몸을 감싼다. 공허 속의 빛. 다비드는 마라를 순교자와 같이 그려냈고, 성공했다. 온화한 표정과 밝고 부드러운 빛은 가히 신성하기까지 하다.











<Edvard Munch   The Death of Marat 1863∼1944>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마라와 코데이를 그린 작품은 많다. 폴 자크나 장 자크 오에르의 그림말고도 더 있다. 다비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마라 살해 사건을 그린 작품은 사실적이며 묘사적이다. 역사를 그리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일 터. 하지만 뭉크는 다르다. 특별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다수가 그렇듯 그가 그린 마라의 죽음 또한 무섭다. 거칠 필선과 아무렇게나 보이는 선들은 매우 불안하게 느껴진다. 초록색은 안정감을 준다는 색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뭉크가 사용하니 불안감을 더해준다. 마라는 죽어가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앞에 샬롯 코데이가 서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얼굴은 유령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나신인 몸은 의아함을 불러낸다. 어라, 왜 나신인 걸까. 마라도 나신인 것으로 보아 두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중요한 의문점은 아니라 생각되니 이만하고. 다비드가 마라의 희생정신, 혁명정신에 초점을 두고 성스럽게 그려냈다면, 뭉크는 마라의 '죽음'과 코데이의 충동성과 불안 등을 한데 모아 거칠게 그려냈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하 파괴)>는 다비드의 그림을 차용했지만 사실 뭉크의 그림과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어딘가 검은색 물감으로 칠한 필선이 거칠에 드러나는 듯한. 분명 김영하의 글은 뭉크처럼 직설적이면서 추상적이고 불안하지 않지만 뭉크의 그림 같은 구석이 있다. 많다. 











<파괴>를 읽는 것은 그림을 왼쪽 위 모서리부터 오른쪽 아래 귀퉁이까지 훑어가는 것와 비슷하다. 느낌이 닮았다는 것. 마라의 죽음을 다룬 그림 두 편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언뜻 보아선 알 수 없는 세세한 면까지 찾아가는 희열이 그것이다. <파괴>를 읽을 때의 기분이 아직 생생한데 바로 그것이다. 한강의 단편소설 '몽고반점'을 읽을 때 그랬다. 거칠게 요약하면, 머리카락이 숭숭 빠진 중년의 남자가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비디오 아티스트&행위예술가라는 직업적 명목으로 여자를 범하는 내용이다. 작가 스스로 '파격적'이라는 평은 싫다고 말한 이 소설을 나는 학교에서 읽으며 방망이로 두들겨맞은 듯 멍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혜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 속 어딘가가 터져 피가 봇물 터지듯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느낌이 <파괴>와 닮았다. <파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파괴>는 정적이고 '몽고반점'은 동적이다. 말하자면 <파괴>는 그림 같고 '몽고반점'은 영화 같다. 느낌과 분위기 말고도 <파괴>와 '몽고반점'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비디오 아티스트와 행위예술가이다. 두 작품 모두 비디오 아트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파괴>는 예술욕, '몽고반점'은 성욕이다. (<파괴>에서는 아티스트가 품은 예술욕으로 인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깊게 건드릴 능력은 되지 않고 이 문단 바로 다음에 인용하겠다.) 행위예술 또한 두 작품에서 자그마한 차이가 있다. <파괴>의 행위예술가는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은 반면 '몽고반점'의 행위예술가는 곧 바스라질 듯한 고목 같이 힘 없고 순응적이다. 예전 어느 리뷰에선가 데려온 실레의 나무 그림과 그녀는 닮았다. 분위기를 좀 더 건드려보자면 두 작품은 환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고. 딱히 적확하다고 칭송할 만한 형용사가 없다는 점이 두 작품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당찬 한 마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김영하는 자살청부업자로 형상화한다. 살인청부업자도 아닌 자살청부업자. 작가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일본에 있는 직업이라고 하니 현실성이 조금은 부가된다. 어찌 되었든 김영하가 자살청부업자로 내세운 남자는 소설 전체의 화자이기도 하다. 남자는 매일을 자신의 손님을 찾는 데 쏟아붓는다. 신문에 조각기사를 내걸고 도서관 미술관 공원을 전전하며 재목을 탐색한다. 밤엔 동성애자부터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여학생까지 각종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전화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걸러내어 결국 재질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곧바로 낚아챈다. 즉시 남자의 손님이 된 사람은 남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남자는 손님에게 어떤 자살 방법이 있는지 어떤 자살 방법이 덜 고통스러운지를 안내해준다. 그렇게 손님을 보내고 남자는 머릿속에 저장된 것을 꺼내어 소설을 쓴다. 유디트와 유미미, C와 K의 이야기는 남자가 쓴 소설이다.





"왜 비디오를 두려워하죠?"

그의 질문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맞받았다.

"두려워하다니요? 전 단지 싫었을 따름이에요."

"두려움은 흔히 혐호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이 수긍의 표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절 두려워하잖아요. 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비디오를 들고 나온 거죠? 아닌가요? 정작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또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간 C는 거실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K와 유디트를 본다. 그리고 며칠 뒤에 C와 유디트가 거실 소파에서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다. 생일이라고 C를 불러낸 유디트와 멀리 떠나는 도중 내린 폭설로 둘은 구속된다. 거기서 한 번 더 섹스를 하고 C가 잠깐 잠든 사이 유디트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몽고반점'의 영혜가 그랬듯 유디트는 어딘가 이상하다. 섬뜩하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하다. 미친 여자 같다. 영혜는 진짜 미쳤고 유디트는 미친 척 하는 여자 같다. 그녀는 항상 공허하다. 그래서 자신의 구멍들을 채워야만 한다. 추파춥스를 달고 사는 것은 그 때문이고, 어떤 남자든 몸을 내어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C와 둘이 있는 차 안에서 자위를 하고 동그랗게 뭉친 눈을 아랫입 속으로 집어넣는 것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후에 C와 만나게 되는 유미미는 꽉 채워져 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사랑 등 모조리 자신에 대한 것으로 빈틈없다. 그것에서 오히려 공허가 생겨난다. 그래서 유디트와 유미미는 닮았다. 둘 다 공허한 여자이다. 





<파괴>에는 여자가 셋 나온다. 유디트, 유미미, 그리고 나머지는 자살청부업자인 남자가 외국을 여행하다 만난 동양의 여인이다. 동양인 여자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데 몸을 팔던 시절 정액을 페트병에 모아두고 여자에게 마시라고 강요했던 남자 때문이다. 유미미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과 몸을 섞었는데 학교에 찾아온 선생의 아내에게서 받은 눈빛이 그것이다. 남편과 유미미가 혼란에 빠져 소리를 내지르고 있을 때 그 아내는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고 했다. 유디트에게도 있다. <파괴>의 여자들은 전부 몸 전체를 뒤덮을 만큼 큰 상처를 갖고 있다. 이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불안의 한 요소일 터. C와 K를 포함, 작중 화자를 제외한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동일하다. <파괴>를 써내려가기 위한 최소조건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뭉크의 샬롯 코데이 같은 인물들.












<Mort de Sardanapale     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 (1798~1863)>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일단 밝과 화려한 색채감에 압도되고 다음으로 칼에 찔려 죽는 여인들이 보인다. 맨몸의 여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사들의 손에 잡혀 여린 살 칼에 찔린다. 흑인 병사는 보석 장식을 한 왕의 것처럼 보이는 말을 잡아 끌고 있고 그림 옆 편에서 사람들이 손을 뻗어 살인 행각을 추도한다. 그림의 저 위편 어두운 곳에서 사르다나팔 왕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머리에 팔을 괸 채로.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은데 그래서 더욱 처참하다. 자신의 수하물의 말살을 지켜보는 폭군의 최후. 그것을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표현했다. 감정의 절제. 절제로 인한 폭발의 미학. <파괴>가 그렇다. <파괴>는 결코 폭발하는 법이 없다. 터지기 직전 압축시킨다. 절제하고 덮어버린다. 그것으로 인해 작품의 美는 살아난다. 삼류작가라면 그것을 폭발시켰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두 작가의 수작.





자살청부업자인 남자는 사르다나팔의 표정을 끝까지 취한다. 유디트와 유미미를 추억하며 남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유디트와 유미미가 비단 남의 일만 같으십니까? 아닙니다. 당신도 저 칼에 찔려 죽는 하녀의 처지가 될 수, 마라를 찔러 죽인 샬롯 코데이의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순간 절실하게 그녀들이 그립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도 완성되었고 이제 이 글을 그들의 무덤 위에 놓일 아름다운 조화가 될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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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3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31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4-0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오랫만이에요. 요새 난독증인가봐요. 장문의 글은 안 읽히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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