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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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2004-05-1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소나기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 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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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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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도종환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 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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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打電할지 모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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