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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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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긴 호흡의 글을 단숨에 내뱉을 수 있도록 하고, 부제목은 한 번에 뱉은 호흡을 가다듬는데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제목은 책의 전부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새로운 책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그런 면에서 책의 본문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제목을 갖고 있다. 책 제목처럼 「명작순례」는 과거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마흔 아홉 가지의 서화에 대해서 저자만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다른 수식이 필요치 않을 것 같아 서평의 제목 역시도 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술세계에서 독창성과 유일함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숱한 표절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래서 매번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는 예술가들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서 새롭지 못하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그만한 명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앤디 워홀은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쳐줄 것이다(Be famous, and they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even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라고 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것들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 정도가 되겠다. 하나로는, 대중들은 독창성의 가치를 높게 산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중들은 다른 이의 시선, 즉 사회에서 내리는 일반적인 평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예술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안목이 그 만큼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독창성이라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모자람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안목을 기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자신만의 안목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결국 다른 사람의 안목에서 차근차근 모방해나가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접한 기존의 안목이 당신에게 그 해석만을 요구하고 강요한다면 이는 접하지 않는 것 보다 못하다. 따라서 객관적인 시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안목을 처음에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작품 속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보는 것이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몇 해 전 KBS는 “사극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은 공영방송으로써의 책무”라고 밝히며 비용문제를 떠나서 매 해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송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한 공언 뒤에 처음으로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은 정통 사극의 부활이라는 평가와는 반대로, 기존의 사극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매 주 일요일 방송분의 마지막에서 5분 내외의 미니 다큐멘터리를 편성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이 때 다큐멘터리는 해당 주에 방영된 드라마의 내용과 관련된 실제 장소, 또는 유물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정도전의 유배 생활을 다룬 6화 끝에서는 정도전의 실제 유배지를 보여줬고, 공민왕의 죽음을 다룬 2화 끝에서는 공민왕의 무덤과, 마포구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을 보여줬다.

 

 

이와 같은 시도는 영화 「관상」을 실제 한국사 강사에게 의뢰해 영화의 역사적 내용을 다루는 등 이전에도 있었던 시도였기 때문에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국사의 의미가 날로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공영방송이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점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미니 다큐멘터리의 몰입도를 높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곳, 또는 그 유물을 보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것에 얽힌 이야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책으로는 「명작순례」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책은 저자인 유홍준 나름의 해석과 함께 그 서화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해석이 특별한 방향으로 치우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서화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 최소한의 안목을 갖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어떤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그 시대적 맥락을 바탕으로 해석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표현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듯이 시대적, 역사적 맥락 없이 온전히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면, 책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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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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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 빈부 격차와 소득, 계급 고착화에 대해서 논쟁이 오갔던 적이 있다. 많은 학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바 사실 논쟁의 주제도 되지 못하는데, 때문에 당시 논쟁은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토의가 주를 이뤘다. 다수 계층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마당에 빈익빈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는 한 편의 주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적인 부의 박탈감이 이전에 비해 커졌기 때문에 빈익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 오갔는데, 서로 이해가 다른데서 출발한 논쟁의 끝이 개싸움과 진흙탕으로 귀결됨은 이미 예정된 결과이다 보니 그 논쟁이 어떻게 끝맺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당시 논쟁에서 오가던 두 가지의 주요한 내용, 1. 과거에 비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2.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간의 소득차가 과거에 비해 매우 커졌다는 것은 모두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던 매체들은 더 이상 상위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또한 1대 99로 불리는 월가 점령시위가 보여주듯이, 상위 계층이 한 사회의 부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미국 하위 1억 2천만 명의 소득 총 합이 낮다는 통계 결과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은 과연 오늘날에도 유효한 용어인가? 설령 빈익빈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익부'라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테다.


3분의 2에서 파레토로, 그리고 1대 99 사회로


가진 자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부익부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최근에는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80%를 가져간다는 파레토의 법칙부터 이보다 더 나아간 1%의 소수 계층이 다수의 부를 차지한다는 1대 99사회까지로 그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좌파의 시선에서 바라본 결과이겠지만, 최근의 미국 통계에 따르면 상위 1%의 계층이 사회 전체 소득 가운데 20% 가까이를 가져간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 만큼 전 세계적으로 소득의 계층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에 따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점차 감소하는데 반해 인류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 속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자신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도 '기술의 진보가 실업자를 양산할 것이다'라고 예측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늘날의 소득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 노동 현장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한 채 현재 근로중인 노동자의 평균 연봉과, CEO의 그것과 살펴보았을 때 과거의 수십 배에서 오늘날의 수백 배의 차이는 단순한 산업, 정보 혁명에 따른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 플루토크리트는 이에 대하여 베네치아의 사례를 제시한다.


유동성은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진 못한다


베네치아는 삶의 안정성을 담보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불모지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선택한 불모지를 당대 최고의 무역 국가로써 발돋움 시키게 된다. 그런 그들의 사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무역을 시작할 수 있는 제도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의 자본은 높은 유동성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반대로 특정 계층의 계급 고착화를 막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아무리 부를 쌓아 올렸다고 하여도 지속적인 개혁과 도전이 없다면 언제라도 그들의 부는 새롭게 시장에 뛰어든 이들로부터 뺏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동성은 그래서, 사회의 발전은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런 높은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승승장구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그들이 세력화되어, 어느 정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수준의 단체로 성장하게 되면, 그들은 이전처럼 계속적인 경쟁을 거부한다. 그리고서는 그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해자'를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해당 분야로 들어오는 데에 일정 수준의 방어벽을 형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전문직을 갖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격시험의 합격 인원 감축을 요구하는 것 역시도 해자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당대 베네치아의 그들이 요구하던 해자는 그보다 더욱 적극적 이여서, 그들은 이미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의외에 다른 사람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그들 사회의 발전을 보장했던 그 제도 역시도, 더 이상은 시행하지 않기에 이른다.


독점적인 권한을 누릴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그들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기 시작했고, 한 때 유럽 전체의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무역의 최고 국가에서 그들은 이제,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 이들이 모여 만든 박물관, 그 이하의 것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찬란했던 과거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마련한 유동성의 제한이 결국은 그들 사회의 발전을 억압하고 나아가 그들이 누리던 부 마저 뺏어가기게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독점적인 권한을 누리기 시작한 이후 잠시 동안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그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 역시 커져나가는 방향으로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증가되는 빈부의 원인 역시도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해자는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걸림돌이라고 보면 되는데, 경제적 해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펫 도시의 '경제적 해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다. 그런 내용은 차치하고, 책 플루토크라트에서도 해자라는 용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 때 사용되는 해자는 상위계층이 자신들의 바운더리를 사수하기 위해 그들만의 세계를 사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방법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되겠다. 앞서 언급한 자격시험이 바로 이러한 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해자를 그런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책에서 언급되는 해자는 이러한 물리적인 방어벽뿐만 아니라 상위계층이 기존의 지역이나 직장에 따른 공동체를 구성했던 데에 반해 오늘날은 상위계층끼리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서 오는 벽 역시도 해자의 일종으로 그려내고 있다. 즉 물질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박탈 역시도 해자의 일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해자가 가져오는 사회 통합의 저해는 실로 상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자는 앞서 언급한 베네치아와 같은 모습을 보여 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이너 서클을 지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계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상위계층들의 이러한 이너 서클을 통해 은연중에 계급의 전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시도 다분히 좌파의 시각에서 바라본 평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보다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해답은 없어 보인다. 또한 가끔씩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기업 임원들의 만행들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것도 없을 것이다. 책 플루토크라트를 읽어본다면 이 주장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루토크라트 : 보호를 위한 해자, 고립시키는 해자


예전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의 이념 전쟁이 자본주의의 이러한 문제점을 보다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플루토크라트가 다수의 노동자 계층과 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나, 레이건과 대처 이후 불어온 신자유주의 열풍이 이러한 현실을 오늘날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왔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 오늘날 1대 99로 불리는 현상 역시도 태동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자가 결국 그들을 몰락시키는 전형이 될 것임은 베네치아의 사례에서 충분히 보이고 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유동성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유동성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지위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분명 몰락하게 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도 쇠퇴 일로에 서있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100가구가 사는 한 마을에, 99가구가 평범하거나 또는 그 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매우 잘 사는 한 가구가 그 마을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책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이나 해답을 제안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이러한 현상들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해서 현실을 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중요 할 테고, 따라서 책 플루토크라트는 그런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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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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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중들에게 일베의 이미지가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일베 자체만 놓고 보면 그 역사는 무척 깊다. 초기 디씨인사이드의 코미디 프로그램 갤러리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갤러리, 또는 스타크래프트 갤러리 등 소위 잘나간다고 불리는 갤러리에서 당일의 베스트 글로 뽑히는 글을 모아놓은데서 출발하는 일베는, 본격적인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10년도 중반이며, 출발선을 놓고 보자면 그 보다 훨씬 이전이다. 다만 그 특성상 당시에도 주로 좌파 정치인을 희화하는 글이나 이미지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련한 것들이 주를 이뤘으며, 그와 비견할 수준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도 희화화의 주요 소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웹상에서 이러한 문화를 조금이나마 접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근에 논란이 되는 일베의 모습들은 왜 논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음표를 띄우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지천 드링크를 합성한 영상이라던가, 내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당시 했던 말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를 이용한 영상은 지금도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당시에는 전라도를 향한 지역감정의 발화나, 내지는 518을 비하하는 등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어려웠다. 때문에 혹자들은 좌파 정치에 대한, 또한 특정 지역에 대한 무분별한 반발감과 위화감 조장이 오늘날 일베가 힐난 받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문화는 정치-사회 갤러리 속에서 여전히 있어왔던 것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정사갤이 오늘날 일베만큼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켜본다면, 단순히 그러한 이유만으로 오늘날의 일베를 진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 내려진다. 그렇다면 정말 현재의 일베가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지역감정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를 부정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일베가 무시할 만큼의 커뮤니티가 아니다'라거나 또는, 외부에서 적을 찾지 못한 기정 좌파 정치인들이 일베를, 그들의 새로운 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더 이상 진보만의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베가 그렇게 커졌다고 하여도, 여전히 인터넷은 감성의 공간이고, 때문에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우파가 아니라 마음과 인간성, 이상향에 호소하는 좌파와 진보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터넷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것은 2003년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자,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위일 것이다. 전자나 후자 모두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 오늘날의 그것에 비춰 바라보았을 때 다분히 과장되었고, 또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상황이 조장되었다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분위기속에서 우파는, 마치 영화 '디 워'가 나왔을 때, 그 누구도 함부로 영화를 비판하지 못 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 모두 죽어버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함께, 예전에 그들에게 속았던 것에 대한 반발심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인터넷상에서 우파는 점점 수면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두 번 연속 이은 우파정권의 집권 역시도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촛불시위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선동당한 좀비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아무런 자의식도 없이 그저 남들의 모습만을 따라가면서 생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한 지역의 특정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역시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그래서 비난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만 비춰졌을 뿐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전형적으로 보수 스탠스를 지향하는 디씨인사이드의 글을 모으는데서 출발한 일베가 보수 성향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은 달리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인터넷은 진보들만의 유일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베로'와 '민주화'


그런 일베의 탄생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베에서 채용하고 있는 추천 시스템 용어이다. 바로 '일베로'와 '민주화'이다. 일베로의 경우 평범한 추천버튼과 같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추천 받은 글들은 짤방 게시판에서 일베 게시판으로 이동하게 되며, 다수의 방문객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와 반대인 민주화 버튼은 반대 버튼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때 왜 하필 반대 버튼의 이름을 민주화로 했는지, 이것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시에 대한 모욕이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실, 이 '민주화'버튼의 역사는 일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 역시도 다시 2008년의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언급했지만 2008년 당시만 해도 광우병에 대한 반박 논리를 인터넷 상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름의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유일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이글루스다. 티스토리 블로거들의 상당수가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로 이글루스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2008년 당시에 '아고라'로 대변되는 진보 진영 웹사이트에서 이글루스 블로그 글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는 분들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기에 충분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처음으로, 본질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지만, 겉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그들의 태도를 비꼬며 이글루스에서 '민주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일베만의 용어로 치부되는 경향이 많지만 말이다.


따라서 현재의 일베 역사가 우리나라 인터넷의 우파 역사, 또는 젊은 우파들의 탄생을 대변하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까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것들에만 그 시각을 국한해서는 일베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일베로와 민주화 버튼으로 구성되어 있는 추천 시스템일 것이다.


저열한 기성 좌파 커뮤니티의 모습과 일베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일베가 2010년, 11년 까지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치권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논란이 되던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때 논란이 되던 것이나 지금 논란이 되는 것이나 별 차이는 없다. 어쨌거나 그렇게 은근슬쩍, 웹상에서 스스로를 병신들이라고 칭하는 일베는 이제 더 이상 삼류문화의 집합이 아니라 어느덧 주류문화로 그 수준이 승격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일베가 이렇게 까지 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기존 보수 정치인이 아니라 좌파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면 그저 가만히 있었을 일베임에도, 굳이 없는 관심을 주기 시작하면서 일베가 커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웹상에서 '병먹금'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좌파 정치인의 힘을 얻어 큰 일베라서 그런지, 일베에 올라오는 글의 수준이나 기성 좌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 수준이나 사실 별 차이는 없다. 다만 이는 정치 게시판에만 국한되어서 봤을 때 이야기이고, 일베 게시판까지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 둘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저열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베 게시판까지 본다면야, 저열함의 수준은 일베가 훨씬 높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열함이 젊은 세대에게는 훨씬 잘 작용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쥐박이나 2MB로 표현한 저열함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오래 각인되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운지라 표현하거나,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쩔뚝이로 표현한 그러한 저열함이 머릿속에는 훨씬 오래 남는다.


그러한 저열함을 지향하는 일베가 때문에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에게 큰 파급력을 가지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희화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이 기존에는 좌파만의 소유물 이였다면, 이제는 우파 역시도 이러한 희화화를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좌파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면야 발끈하겠지만, 큰 맥락에서 그 둘을 놓고 본다면 결국 그 둘은 일맥상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란이 오갈 때 좌파 커뮤니티에서는 항상 일베의 대부분이기도 한 사자(死者)에게 향하는 비난이 과연 용인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자에게 향하는 맹목적인 비난은 과연 무조건적으로 용인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한 연예인의 현직 대통령을 향한 '몸이나 팔아라!'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베의 사상 : 일베는 기성 좌파정치에 대한 반동에 불과하다


책은 일베가 향유하는 사상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는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일베의 사상은 과거의 인터넷 저급 문화와 함께 촛불시위에서 보인 것들을 함께 계승하고 있다' 정도가 될 것 같다. 다만 그 방향이 과거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이었다면, 지금은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는 차이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베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 과거 2008년 아고라에서 보이던 비이성적인 모습과 닮아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후로는 그곳을 찾아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담겨 있는 모습은 그렇다.


결국, 일베는 기성 좌파정치에 대한 반동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일베는 좌파의 비이성적인 모습들이 만들어 낸 병적인 공간에 불과하며, 따라서 좌파 커뮤니티에서 일베의 모습을 바탕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들은 일베를 무작정 비판하기에 앞서, 일베란 무엇인가, 그리고 일베가 향유하는 사상과 행동 기저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 스스로가 자정 작용을 통해 순화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좌파 커뮤니티가 하나둘씩 변화해 나간다면, 일베는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일베를 정말 없애고 싶다면, 일베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그리고 그 작업을 위해 이 책은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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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어떤 논의를 전개해 나갈 때, 그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장하는 바의 근거로 삼고는 한다. 마찬가지로, 학자가 자신만의 이론을 학계에 발표하고자 할 때에는 발표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전부터 학계에서 인정받아 온 사람이면 그 이론의 논리적인 완결성은 차치하고서 일단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인정받기 마련이다. 반대로, 학계에서 존재감이 미약했거나 또는 이제 처음으로 이론을 발표한다면, 게다가 기존의 학설과 정 반대되는 내용이라면, 이론이 주장하는 바와 그에 따른 논리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고 하여도 일단은 외면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정받는 학자라고 하여도, 당대의 지성이라거나 또는 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하여도 학문적인 업적을 떠나서 그의 일면들을 세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포장됐거나 또는 조작된 것들이 많다. 사회주의의 창시자격인 마르크스도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문란하고, 정작 자신의 주변에 있는 노동자는 챙기지 않는 등 모순적인 행동을 많이 보여 왔는데, 책 ‘우상의 추락’을 읽어보면 그러한 사례는 비단 마르크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정신분석학이라는 심리학을 정립한 프로이트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그의 도덕성과 인간성으로 미뤄볼 때 신뢰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다른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나의 이야기이다. 정신분석학이 다른 학계로부터 의사 과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책 ‘우상의 추락’은 프로이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너무나도 한 쪽으로만 편향된 정보를 접하기에 딱 좋은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우상은 추락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 우상이 추락하는 것을 즐기면서 ‘저 사람도 나와 별 다를 게 없었네’라는 자기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사회는 항상 우상을 만들고, 또 그 우상을 무너뜨린다. 굳이 어떤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무너지기 마련이고, 또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것을 바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책 ‘우상의 추락’은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치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고, 또한 관심도 없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이나마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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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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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파 범죄학과 좌파 범죄학

 

영화 일급살인은 알카트라즈 감옥을 없애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한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니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다른 영화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일수도 있고,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기법적인 요소가 아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면, 그리고 그 내용이 모두 사실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다. 이는 책 '공범들이 도시'에서도 잘 언급되고 있다. 책의 표현을 인용하여 이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좌파 범죄학과 우파 범죄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 범죄학의 경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좌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범죄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앞서 언급한 영화 일급살인의 내용을 가져와보면, 주인공인 헨리 영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를 알카트라즈라는 감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영화 속 변호사인 스탬필이 법정에서 주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실제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가장 주요한 내용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는 헨리 영과 스탬필이 비슷한 유년 시절에 적은 돈을 똑같이 훔쳤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같은 죄를 지었지만 누구는 살인자가, 그리고 누구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파 범죄학의 경우, 어떠한 범죄가 사회 시스템적인 결함으로 발생한다고 보지 않고 개인의 정서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도벽이 있는 사람이 물건을 훔친다거나,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싸이코패스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좌파 범죄학은 이런 범죄자들의 범죄 원인이 된 정서적 문제가 결국은 사회적 결함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하지만, 우파 범죄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를 우생학적인 내용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단지 우파 범죄학은 범죄에서 '사회에는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좌파 범죄학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하다. 같은 사회 제도 속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경우에도 누구는 범죄자가, 또 다른 사람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책 속에서 표창원 전 교수도 마찬가지로 '외적 요소들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시스템적인 외적 요소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알카트라즈가 없어진 옛날의 사례를 통해, 이미 외적인 요소로 인해 범죄자가 양산될 수도 있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알카트라즈는 형벌의 과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일 뿐, 우리 사회에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표창원 전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는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의 결함과 문제가 또 다른 공범과 또 다른 범죄자를 양산한다고 보고 있다.

 

-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

 

이미 일어난 범죄를 완벽하게 수사해낼 수 있는 경찰이 완벽한 경찰일 것인가. 아니면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경찰이 더 완벽한 경찰일 것인가. 사실 그 둘 모두를 할 수 있는 것이 완벽한 경찰이겠지만,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경찰은 후자 보다는 전자의 것에 보다 중심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창원 전 교수는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경찰이 무능력하다, 사법 시스템이 부실하다가 아닌, '경찰과 사법 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반례로써 많은 사람들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언급된다. 그러나 어쨌거나 결국은 이 한 문장이다. 돈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 사람의 범죄를 결정한다.

 

물론 그가 언급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재벌 총수나, 정치계의 유력자, 또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친일 행동으로 금권을 만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빈부격차, 또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보다 이러한 갈등이 더욱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로는 아마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또 집단과 동화되려는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독특한 성향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인지 정상적으로 부를 축척한 사람들에게도 화살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일전의 지존파 사건만 보더라도 가진 자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이 어떤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하게 가진 자의 대결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가진 자를 그렇지 못한 자보다 분명하게 대우해주는 사회적인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상적으로 부를 축척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전향하는 사고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어떤 방법으로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일단 갖는 게 중요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는 얼마 전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설문조사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을 1년 정도 살 수 있다'라고 답했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이러하니, 청장년층은 어떨 것인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 책임감은 n분의 1이 되기 마련

 

“1964년 3월, 뉴욕 주 퀸스 지역 도로에서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0대 여성이 정신이상자에게 35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노비스가 살해되는 35분 동안 뉴욕 도로 인근 집에는 38명이나 되는 목격자가 있었다. 제노비스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제노비스를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많은 심리학책이나 프로파일 관련 서적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노비스 사건이 있다. 3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인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단 한명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책임감은 본래 사람의 숫자에 반비례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군 복무 시절이나 사회에서 응급처치법을 배워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환자를 발견한 후 119에 신고를 부탁할 때, '꼭'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하여 부탁하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 역시도 제노비스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이야기다. 불특정 다수에서 신고를 부탁하면, 그 누구도 신고해주지 않는다.

 

다시 제노비스 사건으로 돌아와보자. 만약 당신이 그 때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고,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자. 결국 당신은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럼 당신에게도 죄가 있을까? 형법상으로는 죄가 없다. 설령 그런 죄목이 있다고 해도 너무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워 신고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 우리 모두가 공범인, '공범들의 도시'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분명 어딘가는 상해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들어내져야 함은 분명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과 전공노의 대선 개입, 여야를 막론한 전대의 친일 행적 등 과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작금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관심 없이 흘려보낸다. 어차피 바뀔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을 것임을 지난 시간들을 통해 꾸준히, 그리고 쭉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던 국민의 정부나 참여 정부 역시도 정권 말부터 불법 대북 송금이나 비자금 논란에 꾸준히 시달려왔고, 사대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부했던 전 정권 역시도 까보니 문제들이 상당했다. 한번 찍었던 사람이 문제되어 다른 사람을 찍어도 봤는데, 별로 변화가 없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이 새삼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치관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사회적 평가의 기준이 정당한가 그렇지 못한가와 같은 방법론적인 태도는 온전히 배제한 채 단순히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와 같은 정량적인 평가로만 그친다면 그 누가 정당하게 살아가려 하겠는가? 그리고 비단 고위층에서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덧 우리 삶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는 실종된 채 반칙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회사 입사 지원서의 자기소개를 대필하거나 베껴 쓰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대학 입시나 특목고 진학 시에 작성하게 되는 자기소개서를 부정한 방법으로 작성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단순히 목도하고 없는 일이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사회 전체에 퍼질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제노비스 사건에서 신고하지 않은 이들은 형법상으로는 죄가 없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가 공범이다. 오늘날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을 공범이라고 부르기 전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한번 바라보자. 우리는 공범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가 공범인 '공범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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