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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로알드 달을 처음 만난 건 <마틸다>에서였다. 읽고 난 후의 느낌 :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구나. 재밌구나. 통쾌하구나. 그래, 어린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웬지 좀 무섭다. 이윤 잘 모르겠지만.
두번째 만남, <마녀를 잡아라> 느낌 : 재밌고 신나긴 한데, 이 사람 동화는 웬지 좀 무서워.
그런데 내가 이렇게 미심쩍어하는 로알드 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아서 나는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너무 고지식한 어른이어서 이 사람의 유머가 어색한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아는 누구나 좋다고 하는 이 책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오늘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왜 이 사람의 글을 좋아할 수 없는지. 아, 내 타입은 아닌 것이야. 나는 이 사람과 친하긴 힘들겠어.
우선 주인공. 이 책의 주인공은 찰리인가? 누가 물어보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이 책에서 찰리는 뭘하지? 못먹어서 비쩍 마른 착한 소년이 경품에 당첨되어서 초콜릿 공장을 견학한다. 찰리와 함께 경품에 당첨된 다른 네 소년소녀가 뭔가 열심히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동안 찰리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덕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공장을 물려받는 행운의 주인공이 된다. 난 이런 건 싫다. 아무것도 안하는 주인공이라니. 단지 착하기만 하면(뭔가를 해서 착한게 아니라 말썽을 안피워서 착한것, 단지 그것?) 되는 주인공은 너무 쉽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이 책의 주인공은 웡카씨가 아닐까 하는데, 그가 의도하는 바대로 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결말이 나기 때문이다. 그는 착한 어린이에게 자기의 판타스틱한 초콜릿 공장을 물려주기 위해 5명의 소년소녀를 뽑아 일련의 시험에 들게 하는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저씨 또한 바람직한 어른은 아니다. 찰리를 제외한 4명의 싸가지 없는 어린이들이 겪는 수모는 그들이 한짓에 비해 너무 가혹하다. 그들이 매일 껌을 씹는다는 이유로, 혹은 어른들에게 버르장머리 없다는 이유로, 매일 TV앞에서 산다는 이유로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어지다니 알고 보면 걔네들도 불쌍한 애들이 아닌가? 그 아이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그 아이들의 나름대로 이유있는 질문도 가차없이 묵살해 버리는 야멸찬 웡카씨가 과연 그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을까?
확실히 나는 선악 이분법적 구도를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나보다. 해리포터에서도 해리를 돋보이게 하고 읽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은 두들리가 나는 영 불쌍하다. 좋은 소설(혹은 동화)이란 착한 사람에게도, 악역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매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한 사람에게도 고뇌는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오, 나의 미오>에 나오는 악역(뭐라 부르는지는 벌써 잊었다)은 무시무시하나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매우 불행해 하며 그 사슬이 끊어지기를 자신도 바라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린드그렌의 <카알손> 시리즈에 나오는 가정부 아줌마는 정말 무뚝뚝하고 아이들이 싫어할만한 사람이나 묘하게 귀여운 매력이 있다. 작가가 디테일을 부여하여 캐릭터를 살아있게 만든 탓이다. 착한 놈은 원래부터 착한 놈, 나쁜 놈은 원래 나쁜 놈, 그래서 권선징악. 상을 받고 응징을 당하고 끝. 이러지 말자구. 인간이란 변하는 거고 난 그 변화를 보고 싶다니까. 주인공이 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나쁜 놈은 왜 나쁜 놈이었는데 무엇을 계기로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가, 혹은 그의 고뇌는 무엇인가.
내가 동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가? 하지만 내가 읽은 동화 중 내가 맘에 들어서 찍어놓은 것들은 저런 요소들을 만족시켜 주는걸?
이 책의 매력을 그런데서 찾지 말고 작가의 재기발랄함, 거침없는 말투, 냉소적인 유머, 뭐 이런 것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그런 면으로 확실히 뛰어나다. 그런데.........(계속 흠을 잡게 되네. 그렇게 안 좋은 것만은 아닌데) .......그 신랄한 블랙유머의 칼을 휘둘러 우리에게 내민 것이 고작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지 말고, 껌 씹지 말고, TV 많이 보지 말라는 교훈인가? 뭔가 좀 심심한데? 그렇게 발칙한 문체로 우리에게 잔뜩 기대감을 불어넣었다면 창의적이고 기발한 결론으로 우릴 놀라게 해 줬어야지, 이건 마치 너무나 예쁘고 화려하게 포장된 사탕껍질을 벗겼더니 그저 평범한 알사탕 하나가 나왔을 때처럼 내용부족의 느낌이 든다. 그래서 실망.
그렇다면 작가의 상상력에 점수를 줄까? 화려한 공장의 내부, 갖가지 유혹적인 달콤한 먹을 것, 움파룸파 사람들.....화려하긴 해. 그러나 미안하지만 이런 비슷한 상상은 우리 다 어렸을 적에 해보지 않았나? 난 내 동생들과 <내가 요술쟁이라면> 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온갖 화려한 것이 주어지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상상은 하다보면 공허해져서 중간에 더 할말이 없었다. 그래 그렇게 나에게 멋진 것이 원하는 만큼 생기면, 그러면 그다음은 뭐? 더 이상 이어나갈 얘기가 없잖아. 이 이야기도 그랬다. 초콜릿 공장과 거기서 만들어지는 기기묘묘한 과자들에 대한 묘사에 비해 결론은 너무 썰렁하고 뻔하다.
내 느낌을 짧게 요약하자면 <너무나 맛없는 덩어리(뻔한 교훈과 스토리)에 달디단 초콜릿을 씌운 과자를(그것도 그냥 씌운 게 아니라 아주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기기묘묘한 무늬를 넣어서) 먹은 기분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별로 맛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