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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비디오를 거의 보지 않다가 방학이 되면 몰아서 본다. 낼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된다는 부담없음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다고 별나게 늦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면서....
어제 새벽 두시반까지(그러니까 오늘인가?)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다. <서울의 달>을 보면서 그 존재를 알았고, <쉬리>를 보면서 저 사람 인물이다 라고 느꼈으며(우리나라 첩보원인 한석규보다 간첩인 최민식이 훨 멋있으니 이 영화는 용공영화라는 농담도 했다) <올드보이>를 보며 존경의 념을 느꼈던 배우 최민식. 아, 해피엔드도 있었지. 나는 최민식을 보기 위해 해피엔드를 봤다. 그리고 <꽃피는 봄이 오면>도 최민식 주연이라 하여 영화관에서 보려 했으나 어찌어찌 하다가 놓친 영화이다.
<꽃피는.....>의 현우는 어찌보면 지금까지 최민식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평범한 배역이다. 두눈을 부릅뜨고 카리스마를 활활 불태우며 나온 <쉬리>나 <올드보이>에 비해 현우는 우리가 길거리를 지나다가 혹은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는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 주지도 않는다. 현우가 도계중 관악부를 맡았다고 해서 갑자기 정열에 불타올라 얘네들이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하지도 않는다. 예정된 대로 관악부는 없어지고 현우는 보따리를 싼다. 그러나 미묘하게 변한 무언가가 있다. 극의 처음에서 힘이 빡 들어가 있던(그래서 좀 신경질적으로 보였던) 현우는 극이 끝날 때 쯤 되면 하나의 화두를 스리슬쩍 해결한 듯이 보인다. 현실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현우는 이제 좀 다르게 살 것이며 현우의 주변 사람들은 현우를 좀 더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영화의 너무도 평범한 주인공이 만약에 최민식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만약 주인공의 연기가 어설펐다면 이 영화는 절대 볼 수 없는 영화이다. 최민식은 절대로 대사를 그대로 내뱉지 않는다. 그는 어디서 뜸을 들여다 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얄미울 정도로...거기다 그 표정이라니...누가 최민식더러 자기 얼굴의 주름까지도 연기로 만들어버리는 배우라고 했다던데, 실제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몰라도 그 말은 그에게 정말 어울린다.
어제 본 영화의 감흥이 남아서 인터넷에서 그의 인터뷰을 찾아 보았다. 그의 말하는 스타일도 참 맘에 든다. 비맞은 중이 웅얼웅얼 대는 영화라고.....^^
nkino | <꽃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는 최근 출연작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평범한 캐릭터이다. 최민식 | 그래서 더 좋다. 사실 <꽃피는 봄이 오면>에 출연하게 된 것도 좀 쉬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올드보이> 하면서 너무 날카로워지고 거칠어진 감성들을 다듬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꽃피는 봄이 오면> 시나리오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의아하더라. 왜 욘사마도 있고, 박해일도 있고, 유지태도 있고. 부드러움의 대명사로 통하는 배우들이 많지 않나? 도대체 왜 이런 시나리오를 내게 보냈나 싶었다. 류장하 감독이 그러더라. "형은 세고 터프해 보이지만, 사실은 바보 같은 면이 많다. 형 생각하면서 시나리오 작업했다". 그래서 두 말 않고 고맙다고 그랬다.(웃음)
류장하 감독은 전적으로 최민식을 주연으로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라. 근데 이 말이 배우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말이다. 그렇게까지 부담은 없었다. 근데 류 감독이 나 생각하고 시나리오 썼다고 했지만, 자기 이야기 한 거다. 다른 보조 작가들이나 연출부들이 관여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영화의 느낌은 감독의 감성이 많이 녹아있다. 여리고 순수하고 그런 느낌이 딱 감독 자신이다.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자극적이지도 않고 원색적이지도 않은 그런 점이 좋았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정통 드라마투르기에 근거한, 기승전결이 분명한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늦가을부터 그 다음 해 봄까지 현우라는 한 남자의 시간적인 상황을 그린 이야기인데, 보통 우리가 그렇지 않나? 하루하루를 보내기는 하지만, 정작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잘 모른다. 특별히 한 일도 없고 뒤집어 질만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그런 느낌을 주는 영화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등장하는 인물도 전혀 특별하지 않는데, 그런데 뭔가 있다. 그 평범하고 나른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싹이 하나 돋는다. 엄동설한을 보내고 봄이 오면 이끼 속에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새로운 싹 말이다. 그게 <꽃피는 봄이 오면>의 참 매력이다. 요즘에는 거창한 이야기를 가지고 거창한 비주얼과 자극적인 스타일을 무기로 관객들과 소통하려고 하는 영화가 많다. 그에 비하면 <꽃피는 봄이 오면>은 마치 비 맞은 중이 '웅얼웅얼' 대는 그런 영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편안함이 제대로 묻어나는 것은 맞다. 솔직히 <꽃피는 봄이 오면> 포스터는 소주 광고 처럼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맞다. 아, 그런데 나한테는 왜 소주 광고가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어. 사실 소주 광고는 이효리나 이영애같은 예쁜 여자들이 하면 안 된다. 나같이 술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지.(웃음). 광고 콘티까지 다 짜놓았다. 술 광고는 사람들의 소음과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삼겹살의 '지글지글' 소리가 생명이다. 한 남자가 술이 취해서 테이블에 엎어져 있으면, 내가 딱 등장해서 그런다. "괜찮아?'. 거기서 "** 소주"라는 비주얼이 뜨는 거다. 이번 영화 끝나고 혹시 소주 광고 들어오면 한 잔 사겠다.(웃음)
현우라는 캐릭터를 설정하는데 있어,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은 내게는 휴식 같은 영화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보여줘야지, 일을 저질러 봐야지" 하는 그런 부담감이 강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는 그런 부담이 들어가면 망한다.(웃음) 처음 캐릭터 설정할 때 모든 각과 에너지를 다 빼려고 했다. 그렇다고 에너지를 다 빼면 또 안 되는 거고, 에너지의 수위 조절 문제에 집중했다. 그런데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만약 내가 욘사마 흉내낸다고 생각해봐라.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그래서 그냥 내 식으로 표현하기로 마음 먹었다. 최민식 스러운 연민, 열정, 연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얼마 전 제작발표회에서 '현우는 참 짜증나는 인간'이라고 말했었다. 정말 개인적으로 이런 놈 안 좋아한다. 아, 짜증나.(웃음) 그런데 또 연민은 간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밥벌이를 못하는 놈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나 결혼해"라고 말하는데 "잘 되었네, 축하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속으로는 정말 사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봐라. 그날 저녁에 분명히 이 놈은 친한 친구 불러놓고 술 먹으면서 엉엉 울 거다. 이런 사람을 누가 미워할 수가 있겠냐고.
현우가 강원도 도계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달라진 것이 뭐가 있을까? 크게 달라진 것 없지. 그래서 우리 영화가 더 좋은 거다. 예들 들어 현우가 도계에서 천사 같은 아이들과 살았다고 해서, 머리에 무슨 빛을 '뜅' 두르고 날개가 달려서 하산하는 게 아니다. 무슨 해탈도 아니고.(웃음) 현우는 여전히 현우다. 답답한 현실도 여전히 진행 중인 거고. 이렇게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현우에게 생긴 거다. 예전에는 짜증으로 다가왔던 것들에 대해 이제는 그것들을 음미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여유 말이다. 현우 스스로도 대단히 큰 정서적인 변화를 겪어서 마음에 큰 평온을 안은 것은 아니다. 그저 어머니나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했던 연인, 사이 나빴던 친구 등 주변 사람들과 벚꽃, 봄내음 같은 그런 것들. 평소에는 삶에 허덕이느라 스쳐보냈던 그런 현상들을 다시 한번 느끼고 보게 되는 것 뿐이다. 아주 현실적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 하면서 바람은 거창한 것은 없다. 해외 영화제 가서 상 타야겠다 그런 생각도 전혀 없고. 관객들이 이 영화 보고 나서 어머니나 관계가 소원했던 친구들에게 안부 전화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면 오케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꽃피는 봄이 오면>에 돈을 댄 투자가들이 떼돈은 못 벌더라도, 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소원은 그렇게 딱 두 가지다.

트럼펫 배우느라 아주 힘들었다고 들었다. 정말 성질 다 버리게 하는 악기다. 석 달 동안 입에 달고 살았는데 소리가 안나. 진짜 환장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선가 소리가 탁 터진다. 그때 느낀 쾌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트럼펫이랑 참 친해졌다. 그때는 '내가 죽네, 네가 죽네' 하는 심정이었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친구가 된 것 같다. 간단한 영화 음악이나 솔로 곡은 연주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올드랭사인'은 원래 트럼펫 곡은 아니지만, 송년회 같은 자리에서 모인 사람들 술 맛을 돋궈 줄 정도까지는 연주할 수 있다.
류장하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이 양반이 사람하고 쉽게 친해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더라. 아주 내성적이고 답답하지만 안으로 생각 많이 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처음에 친해지려고 내 쪽에서 많이 접어주고 들어갔다. 근데 발이 넓고 친하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한 명을 사귀더라도 진정하게 사귀는 게 더 중요한 것이다. 류장하 감독은 후자 쪽이다. 지금은 좋은 형 동생 사이다. 현장에서는 너무 '꼼꼼'하다. 물론 지휘 통솔자로서 현장에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거나 풀기 어려운 애로점이 발생하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고.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하면 될 것 같다. 각 파트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식과 테크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준다. 조율을 잘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떨 때 보면 "도대체 저 인간은 뭘 주장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더라. 민주적인 만만디 감독이다.(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