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파이란>이 최민식과 장백지가 어찌어찌 만나서 짧은 사랑을 하고 장백지가 죽고나서 최민식이 개과천선을 하는, 그런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다. 내 상상력이야, 그 정도지 뭘.
주인공 남녀가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영화라니(아니, 여자가 죽고 한번은 만나는군), 그리고 그걸로 얘기가 되다니...참, 인생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전개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을 하든 독한 맘을 먹어야 성공하는 법인데 주인공 강재(최민식)는 뭘 해도 지지부진한 그야말로 삼류양아치다. 자기 입으로 스스로 이렇게 칭한다. '대한민국 대표 호구'
독한 맘을 먹고 삥을 뜯자니 마냥 정에 약해 수퍼집 할머니한테도 머리칼을 쥐어뜯기고, 감옥에 간 것도 겨우 포르노 비디오 팔다가 걸려서, 배한척 살 돈 들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으나 매일 하는 일이라곤 귀신 나올 것 같이 어질러진 방구석에서 비슷한 후배녀석과 빠떼루 놀이나 하고 있는 이 한심한 인생을 최민식은 너무도 리얼하게 연기했다. (아, 난 아무래도 그의 빠순이가 될 것 같아...)

<오락실에서 만만한 중학생이나 갈구고 있는 강재>
역시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인생을 알 수 있는 것이, 최민식이 그럴듯한 꽃미남 배우여서 아주 젊은 시절부터 매스컴의 주목을 받은 스타였다면 이런 연기는 죽인대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회한과 비참하고 비굴한 지경에 빠져 본 사람의 굴욕감, 그러나 어떤 전기를 맞아 자존을 찾으려는 사람의 심경변화를 최민식은 너무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아마 그도 젊은날,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강재는 죽은 파이란의 편지를 받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서류상의 아내를 조금씩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에는 두번째 편지를 읽으며 펑펑 울고, 유골함을 소중하게 들고 오는 것은 파이란을 사랑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냥 될대로 되라, 인생 뭐 있나 그냥 흐르는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온 강재 자신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죽은 파이란이 떠올려 준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강재는 죽는다. 하류인생에게 세상은 마음먹은대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감독이 강재를 살려서 고향에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 실제 이런 일이 있다면 그 사람도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감독은 섣불리 우리에게 그런 희망을 주지 않았고,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