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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 하 ㅣ 밀리언셀러 클럽 27
세르게이 루키야넨코 지음, 이수연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재미있고, 유머가 있으며, 스타일이 살아있고(그 스타일이 어떤 스타일이냐고 물으면....뭐라 꼬집어 말은 못한다. 나는 어쨌든 약간 폼생폼사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이야기.
일단 재미있다. 판타지의 가장 큰 매력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새로운 세상이 수미일관되고 그럴듯하면 일단 이야기에 빠져들 조건은 갖춰진 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그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라면 그때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 나이트 워치. 이런 조건을 만족시켜 주신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자신의 의지로 역사를 창조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평화를 지키는 줄 알았겠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실제로 역사를 창조한 것은 '다른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다른 존재'란 그동안 우리 인간들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며 설왕설래했던 마법사, 마녀, 변신자, 흡혈귀 등등의 초능력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 옆집, 앞집, 윗집 등에서 살고 있으며 길거리를 스치고 우리와 어깨를 부딪치기도 한다.
현실계에서 보면 무척이나 평범한 듯 보이는 그들은 '어스름의 세계'라는 곳을 드나들며 인간세계에 개입한다. 2차대전, 히틀러의 등장, 사회주의 건설 등 인간세계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다 그들의 개입이 있었다. 오홋, 그랬단 말이지. 그래, 그럴듯해, 말이 되는 얘기야......
이렇듯 이 소설에는 실제 역사적 사건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우리에게 다른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데 그건 역사적 사건만 그런게 아니라 실존인물 또한 마찬가지다. 알고보니 에드가 알란 포도 '다른 존재'가 될 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형상화되지 않는 존재의 특성이 있으니/ 이중의 삶으로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니/ 이중의 본질 속, 이 본질의 원천은/ 물질 속의 빛과 사물과 반영이다/ - 이렇게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실제 문학작품이나 노래가사 등이 이야기 중간중간에 절묘하게 들어앉았다. 기가 막히군 그래.
다른 존재, 그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빛의 편과 어둠의 편이다. 음, 이분법적 시각이군, 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만은 없는 것이 빛의 편이라 해서 딱히 선은 아니며 어둠의 편도 마찬가지로 악은 아니다. 아니, 이 말은 정확치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말해 볼까. 빛의 편이 선을 이룩하기 위해 쓰는 수단은 선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악이 오히려 진실을 말해 줄 수도 있다고.
그러다 보니 빛의 편에서 어둠의 편을 감시하는 야간경비대원 안톤은 마냥 확신에 차 있는 흔들림 없는 존재일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한다.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상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의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그에 따른 약간은 냉소적 태도와 시니컬한 유머가 내가 좋아하는 이 소설의 스타일을 형성한다. 나라는 사람이 원래 흔들림없는 신념에 차있는 존재를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부시 같은 존재 말이다. 부시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신병자의 동화같은 단순한 세계(나는 선이고, 너는 악의 축이다. 나는 너를 제거하겠다. 빠방!)에서 한발 나아간 이 이야기는 절대선이나 절대악 같은 것은 없으니 그딴 것 믿지 말고, 너 자신도 믿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시한번 생각해 보라는 얘기로 들린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믿음이 간다.
그래서(또 그래서다) 내가 좋아하는 안톤, 그는 초능력자이지만 매우 불쌍하다. 끊임없이 고민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괴로워하고, 자신의 행동이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상부의 누군가에 의해 계획 예정된 것이 아닌가(반항조차도)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가 괴로워할수록 이야기는 설득력을 얻고 재미있어지지만 이제는 좀 그만 괴롭혀 주면 안될까? 나는 이미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거든.(다음편은 그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그렇다면 뭐)
수록된 세편의 이야기 중 두편이, 어떻게 보면 멜로드라마 쪽으로 흐른 것이 나에게는 조금 유감이지만(나는 로맨스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거야 내 취향이고, 이 이야기에 별을 몇개나 줄 것인가는 후속편으로 나오는 데이워치와 더스트워치가 어떤 식으로 본편과 얽힐 것인지에 달려 있다. 일단은 별 네개를 주었지만, 후속편은 꼭 읽어볼 것이며 다 읽고나면 아무래도 지금보다 훨씬 더 이 이야기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고전적인 데라고는 없으며 지하철과 휴대폰과 씨디플레이어와 컴퓨터와 함께 허둥거리며 이 세계를 지키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