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 악(evil)이란 말은 산다(live)라는 말의 철자를 거꾸로 늘어놓은 거예요."
그렇다. 악은 삶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력을 역류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살인과 관련이 있다. 불필요한 살상, 즉 생물학적 생존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그러한 죽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악이 살인과 관련 있다고 할 때 그것이 꼭 육체의 살인에만 국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악은 또한 영혼을 죽이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 특히 인간의 생명에는 여러 가지 필수적인 속성들이 있다. 지각, 운동, 인식, 성장, 자율, 의지 따위가 그런 것이다. 실제 몸은 죽이지 않더라도 이런 속성들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죽이거나 죽이고자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 한 마리나 어린아이 한 명을 털끝 하나 만지지 않고도 '파괴시킬' 수 있다.
......이로써 악이란 인간의 안 또는 밖에 존재하는 생명이나 생명성을 죽이고자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악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죄의 난해성, 완고성, 경직성에 있다. 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결함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에 있다.
우리는 이미 악의 정의를 가장 간단하게 내렸었다. 악이란 자신의 병든 자아를 방어하고 보전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데 정치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읽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부분과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과학과 종교를 섞어놓는 것, '악'을 실체로 인정하는 것 등)이 혼재되어 있어 읽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