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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의 딸
교코 모리 지음, 김이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미숙한 자아를 교양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키워 나간다. 그런데 그 시행착오 속에 운명의 장난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외부적 충격이나 상처를 받고 비틀거리게 되고 인생의 고통과 씁쓸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통과의례라고, 그 시절을 지나고 난 사람들은 가볍게 기억하겠지만, 지금 그 음울한 시간 속에서 누군가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그립고 누군가의 아늑한 품에 기대고 싶은 작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을까?

가스를 마시고 자살한 어머니. 열두 살에 그 충격과 슬픔을 겪은 유키는 독특한 아이였다. 집안일을 차근차근 일상적으로 가르치기보단 꽃이름을 가르치고 자연의 풍광과 멋을 즐길 줄 알았던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으로 공상을 잘 하고 자기 주장이 또렷하고 모험심이 있으면서도 사려깊은 아이였다. 그러나 새엄마의 눈에는 긴 머리카락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니고 고집이 세고 부엌일을 아무 것도 못하는 애물단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키의 새엄마는 동화책에 으레 나오는 전형적인 계모의 모습이라 더욱 안타까웠는데 잔인하고 표독한 새엄마와 냉정하고 무관심한 아버지 때문에 유키는 집에서 거의 말을 않고 지낼 정도록 외롭고 고통스런 사춘기를 보내게 된다.

인생과 사랑에 대해 비관적으로 인식하는 여자아이에게 무엇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유키는 당당한 모습의 사히코라는 여자아이를 동경하게 되고 친구가 되지만 사소한 말다툼 끝에 그녀를 잃게 되고 학교생활도 민감한 감수성 탓에 상처를 받게 된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 비틀거리며 혼자 슬픔을 감내하고, 그것도 모자라 가족들의 따스한 위안도 받지 못하고 되려 구박과 무관심 속에서 자란 유키는 냉소적이고 공격적으로 점점 변하면서 합법적인 탈출만 기도할 뿐이다.

독립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던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쓰러짐과 죽음 앞에서 정신적인 각성과 성숙을 겪는다. 완전히 자신을 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외가의 사랑을 인식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12년 동안 풍부한 감수성을 키워주고 사랑을 베풀어준 엄마의 영향 때문에 유키는 홀로 잘 커간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남자친구의 사랑을 수용하고 자신의 사랑도 인정하게 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코끝이 찡했다. 큰다는 것은 육체만 크는 게 아니라,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만 크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이 세계를 이해할 줄 알아야만 진짜로 크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깔들의 광휘로 비탄에 젖은 단조로운 애도소리를 막고 싶었다.'처럼 시적인 문장이 가끔 구사되고,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유키의 슬픔,고요하게 응어리진 슬픔이 읽는 독자에게까지 조금씩조금씩 스며들게 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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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사에 슈이치 지음, 김영순 외 옮김 / 프리미엄북스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오랫만에 소설을 완독했다. 기분이 상쾌하다.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보고 영화관을 나올 때처럼 차고 신선한 바람이 내 고여 있는 마음의 방에 불어오는 듯하다.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었는데도 자꾸 소설 속 세상을 떠올리게 되고 내게도 분명히 닥칠 노년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번잡하고 고단한 일상을 함께 하고 함께 치러내야 할 가족관계의 사슬. 이것들에 대해 사실적으로 솔직하게 담담하게 이야기한 소설이 '아내에게'이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무슨 고백을 한다는 걸까,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는데 몇 페이지 안 읽고 '아! 이 소설은 노년에 대한,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구나.'라고 느꼈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 도모아키가 아내에게 진정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그 고백을 조만간에 할 것 같은 징후를 남기고 소설은 막이 내렸다. 그리고 그 각성은 되려 예순살 된 주인공, 사는 게 짜증나고 화가 나고 무료한 주인공에게 분명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누구에게나 오래 살고픈 욕망은 본능으로 잠재해 있겠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게 되면 새로 꾸리게 된 보금자리를 지키고 픈 소망에 삶에 대한 욕망은 더 질기고 강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 욕망 뒤에는 또한 건강하게 노년을 지내다가 맑고 고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픈 욕망도 있다. 치매에 걸리지 말고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배우자에게도 짐이 되거나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심각한 병에 걸리더라도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말고 잠자듯이 편안히 생을 마감하고픈 게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인 것이다.

근데 이 소설의 여든여덟의 어머니 키누도 그렇게 살려고 애썼지만 모든 게 뜻대로 안되자 굶어서 서서히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깔끔하게 살고자 하나 대소변도 못 가리고 심지어는 아들 손으로 자신의 기저귀를 갈게 하는 처지에 이르자 비참한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 속의 '나'는 부모님 봉양 문제로 아내가 너무 힘들어 하고 심한 요통에 시달리고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지탱 못 할 만큼 정서적으로도 피폐해지자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제안한다. 아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내를 '며느리'의 자리에서 해방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 제안도 아내를 어느 정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지만 아내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지 않은 성급하고 단순한 결론이었다. 그것은 그가 어머니의 오줌기저귀를 난생 처음 갈아보는 데서 구역질과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정말 힘든 일을 아내는 하루에도 수십 번 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도 진정으로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에서 하고 있는 것을 남편은 모른 것이다. 그리고 그 아내는 남편이 그것에 대해 진정으로 고마워 하고 이해해 주기만 해도 얼려 있던 마음이 풀릴텐데 남편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삶과 죽음 노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어쩌면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들에 대해 지은이는 쉬운 문체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써 놓았기 때문에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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