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나는 애도가 언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애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이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꿨다. 그는 성공적 애도가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는 의미라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원래 우울증과 관련되어 있는 incorporation이 애도 과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나는 대상의 완전한 대체 가능성을 우리가 지향하기라도 하듯이 다른 사람을 잊는다거나 다른 무엇이 대상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아마도 애도는 미리 그 변화의 본격적인 결과를 알 길이 없는데도 그런 변화를 겪겠다고 (어쩌면 변화를 감수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동의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뭔가를 잃는다는 경험이 있는가 하면 또 상실이 초래하는 변화라는 결과가 있다. 후자는 그려질 수도 계획될 수도 없다.”

“(85) 내가 ‘너’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너를 알려면 나의 언어가 부서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내가 ‘우리’를 소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너는 이 방향감각의 혼란과 상실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다. 다시 또다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서.”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폭력, 애도, 정치>


사랑해서 아픈 거였더라고. 아픈 거 보기 싫다 치우라는 마음이 사랑을 없던거라 밀어내버리는 미운 마음이라 어찌나 분노했던지. 애도할 겨를도 없었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더 미안했어. 10년 전 그때는.

삶이 사랑과 이별과 애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슬픔과 고통을 쉽게 몰아내는 게 아니라 느끼고 인정하고 내 안에서 숨쉬게 살려둘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많이 변했어. 내 세계는 변했고… 그래도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면서 그렇게 기억하는 중이야. 어쩌면 온전히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고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은 순간에서 또 나는 변하겠지만.

작년에는 <너와 나>를 봤어. 영화 보고 나서 그냥 그 말 해주고 싶더라고. 나도. 나도 사랑해🎗️


마지막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이 되게 해주는가? 우리의 위치와 역사가 다르다 해도, 내 생각에는 "우리"라는 말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어설프게나마 "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상실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뭔가 소유했다는 것,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욕망을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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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4-16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틀러 책, 참 좋네요. 저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러고 다시 봤더니 맨 마지막 페이지는 마리 루티 문장인가보다 ㅋㅋㅋㅋㅋㅋ맞나요? 고통에의 직면, 정면승부는 어려운 일이죠. 제대로 해내는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난, 생각합니다.
단지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의 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겠죠. 다시 쓰지만....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쉽게 만나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쟝쟝 2024-04-16 22:49   좋아요 1 | URL
고릿적 ‘우울증적 이성애‘ 때 부터 버틀러의 애도와 기입(incorporation, 합체라는 번역을 참을 수 없다)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 데... 그걸 이렇게 정치철학적 비평으로 풀어내니... 버틀러... 넘...🥹🥹😩😩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의 재난이란 911이란 말이죠. 911이후의 미국의 왜곡된 애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엇나갔는 지 어렴풋한 기억이 있고... 당시 ‘느닷없이 공격 받았다는‘ 미국 내의 정서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직면하기 힘든 미국의 어떤 징후(피해자의 오만..이라고 정희진의 워딩가져와봅니다)를 드러내는 버틀러의 정치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온전해지자.‘ 가 아니라. ‘우리 모두 상처 입었으므로 취약함을 살피자‘고 하는. 것은. 사실 고차원 적이죠. 아름답다와 별개로.

맞습니다. 마지막 검은 캡처는 루티(ㅜㅜ 그를 애도중인 나)입니다. 마리 루티나 제가 고통에 정면 승부 하자는 아니고요. 저는 10년 전의 ‘세월호‘를 떠올리면 일베와 장례 자체를 유난 떤다고 하던 어떤 사람들의 신경질적임이 생각 나거든요. 애도할 겨를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 조차 참을 수 없어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문장이라 가져왔어요.

고통 혹은 고통의 곁의 곁까지는 사실. 엄두 안나고. 다만 저는 애도요.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과 충분히 헤어지면서 혹은 간직하면서 다른 내가 되는 것요.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애도하는 일에 가혹해지지 않고 싶습니다. 음. 헤어짐의 고통은 소중합니다. 몸에 기입된 사랑의 흔적이니까요. 그건 재난이나 참사가 아니라도 언제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이기에. 거기서 ‘어설픈 우리‘를 도모해보자고 하는 버틀러의 제안을 찬찬히 따라 읽어가도록 해보겠스읍니다.
 
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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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써둔 문장을 읽었다. 

생존과 실존. 두 가지 장르에서라고 적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둘 모두의 적정한 익숙함이라고. 그게 목표라고.

두 가지를 다 갖겠다는 건가. 그때는 좀 간절했는데, 지금 보니 꽤 오만하다. 둘 중 하나를 택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적정함의 기준이 애매했거나 높았던 건 아닐까.  


나는 삶을 관계를 통해 적절히 외주화하는 것에 능하지 못하고. 그래서 꾸역꾸역. 그러다 오바하고. 어쩌면 거기에 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사실은 고작 1인분의 일상이지만 종종 너무 버겁고. 내 간신함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희로애락이 더 무섭고 무겁고. 그렇다 하더라도 혼자 살아갈 수는 없으니, 적절한 온기들을 나누어준다면 정성들여 취하며 지적 호기심은 억압하지는 않는 채로. 


넘어졌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기다시피 해서 집에 왔고, 다음 날 인대 파열 및 약간의 골절까지 진단받아… 목발을 짚고 네 다리가 되어서 집에 겨우 돌아왔으니. 꽤 아픈 것이 맞고 막 땅바닥과 인사했을 때는 번쩍할 만큼였는데. 나는 다친 직후부터 뭔가 웃겨서 계속 웃었다. 왜 아픈데 웃어요, 왜 힘든데 웃어요, 괴로운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네요, 그런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음. 어쩔 수 없다. 나는 좀 웃기다. 당황했을 때도 웃었고, 너무 싫었을 때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웃기게 만들지 않으면 웃어버리지 않으면 로코나 시트콤이 신파되는 상황. 심각하거나 비참하거나 철학하는 건 예술 영화에서나. 그런가 하면 언제부턴가 나는 너무도 자주 우는데. 말도 안 되는 부분에서 시도 때도 없이 펑펑 아주 눈물의 여왕이다. 상황에 맞는 감정 표현. 상황에 맞는 감정 반응. 아니, 나를 느끼는 것. 그냥 내가 느껴야 할 것을 느끼는 것. 나에게 주입하는데… 이젠 반쯤 포기다. 무얼 느낄지를 누가 정해? 내가. 이젠 내가. 그래서 사실 이건 부조리극이다.


병원에서도 로보캅처럼 움직이면서 샐샐 웃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 사람들 모두가 표정이 굳어있었는데 하지만 정말로 별로 짜증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웃겼으니까. 이참에 누워서 책 읽어야지. 중증이다 중증 이러면서. 그리고 오래전의 이제는 많이 잊은 듯도 한 비참한 상황들 속웃음들에 비하면 좀 건강한 웃음,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누굴 탓할 것도 없이 오늘의 부상은 스스로 자초한 것. (음치 박치 몸치 런치… 달리기하면서 정형외과만 몇 번째냐. 난 또 나를 몰랐니.) 


사소한 불운에 친구들이 음식을 동생은 책을 보내주었고… 맘 편하게 누워서 한가로이 책이나 읽었다. 읽다 목이 아프면 도파민 걱정 안 하고 모로 누워 그동안 참아왔던 인스타 중독자가 되어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책 사진 잘 찍는 사람들도 실컷 팔로잉 하면서 밤이 늦도록 훔쳐보았다. 이제 나도 사진 대충대충 안 찍고 잘…찍으려고 하면 결국 안 찍을 테니 대충 예쁘게 찍어야지. 앱도 받았다. 


그러다 내가 작년에 적어둔 문장에 닿았다. 생존과 실존이라. 일 년 전의 나는. 지금 보다 훨씬 더 암담했고. 그때 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성공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이모냥이니까. 뭔가 조금만 방심하면 넘어져서 어딘가가 깨져버리니까. 익숙함. 적정한 익숙함. 적정함.을 나는 잘 모르지. 그렇다. 암담을 잘 지나왔는데도 나는 잘 모른다. 계속… 계속해서 나를 잘 몰라서, 나를 잘 알아주려고 하지를 않아서. 나를 나 스스로 별로 그다지 많이 엄청 충분하게 좋아하지는 못해서… 울어야 할 때는 웃고 웃어야 할 때는 우는 이상한 발연기를 혼자 하고 있어서. 내가 죽어야 끝나는 이 드라마의 대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지만 내가. 어쩌겠어. 이게 난데. 미련하고 미련 많고 그런 주제에 이상한 자존감. 굽히기는 싫은데 소화는 안되고 착한 척을 하는 건지 모아뒀다 푸는 건지.



아구아 비바를 누워서 여러 번 읽었다. 좋다. 그냥 좋다. 사실 ‘이게 뭐얔ㅋㅋㅋㅋ’ 싶은 데 너무 좋다🤪🤪🤪 승모근 뭉쳐서 침 맞으러 다니는 나 같은 사람은 흉내도 못내는 그런 아주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말초 신경 하나하나 살아있는 춤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근데 그걸 ‘글로’ 쓴다… 🫶🏻🫶🏻🫶🏻🫶🏻 (확실히 나의 욕망은 여기에 있나 보다. 글에. 이런 걸 어떻게 쓰지? 이런 걸? 처음에는 감동받고 다시 읽을 때는 ‘어떻게’ 생각을 계속하면서 읽는다.) 추측건대 이건… 몸이 살아있는 사람이 쓰는 글이다!!! 싶은… 그러니까. 


나 같은. 몸이 통제가 잘 안되는. 잠깐 정신을 못 차리면 관념의 성에서 허우적대는. 실은 몸이 너무도 무겁고 귀찮은. 내가 싫어하는 몸을 멸시하는 구 서양 남자 철학자들처럼(언제나 싫어하는 건 나의 일부라는 알기 싫은 진실). 그러고 있는 내게.는 그녀의 문장들이 이계의 문장처럼 느껴져 해방적이다. (아… 남성들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나는 전혀 공감이 안되는 그런 해방감을 느꼈다는 평이 비슷한 맥락일까나…) 


그래서 나와 달라서 좋은 거구나 하게 된다. 나도 닿고 싶다. 생생한 삶에 불가능에 용감하고 싶고 열려있고 싶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삶의 어느 순간에 절묘하게 나를 중단시켜 버리는 주눅이 가시처럼 담석처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약간 어딘가에. 왜일까. 어쩌면 그건 내가 버리고 싶다고 느끼면서도 실은 포기하지 못하는 너무 소중한 무엇인 것일지도 모른다. 두 가지 다에 배팅할 수 있을까. 자유와 부자유. 일상과 초월에. 생존과 실존에. 소중하니까. 둘 다.



매혹되어 읽게 된다. 나도 클라리시 선생님을 따라 감각을 내장까지 열기 위해 당장 지금부터 몸을 단련하고 싶지만… 현실은 극단의 부자유… ㅋㅋㅋㅋㅋㅋㅋ 😮‍💨 (이쯤 되면 달리기하기 싫어서 일부러 다친거냐?ㅋㅋㅋㅋ 하는 합리적 의심ㅋㅋㅋㅋ) 어쨌든 걷지 못하는 몸 상태로 읽기에는 고난도의 작품이었다. 백자평을 어디 끄적여놨는 데. 나중에 한꺼번에.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것과 쓰고 있는 걸 이해하려 노력해 보라. 내가 설명하겠다: 나는 글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릴 때도 내가 보는 순간을 정확히 보려 한다—과거의 순간에 보았던 기억을 통해 보지 않는다. 그 순간은 여기 이것이다. 숨 막히는 절박함을 지닌 순간. 그 자체로 절박한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살고, 나는 그 순간이 다른 순간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으로 뛰어든다. 이 둘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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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4-14 1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의 몸을 좌지우지 하지요. 일단 말실수를 들 수 있겠구요. 또 넘어지기.............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 와중에 실컷 웃으셨다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빠른 쾌유를 빕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자리 편 김에 독서 많이 하시고요, 최근에 헤겔 레스토랑 읽은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닌 거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4-14 23:16   좋아요 0 | URL
아… 그 독서 땜에 하늘 위로 둥둥 떠 다녀서 이제 땅으로 내려오라 땅과의 진한 키쑤를…🤣🤣🤣 (탈레스냐며)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4-14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작년 이무렵에 발목인대파열에서 혈전까지 골로 갈 뻔했잖아요… 골절이랑 파열이랑 최소 고정기간 끝나면 불편하더라도 많이 움직이시고 (실금 골절 정도면 뼈 앵간히 붙으면 체중 일부 부하해서 걸어도 되…는데 의사한테 잘 물어보구) 이참에 누워서 책이나 보자, 이러고 너무 오래 안 움직이면 혈전 생길 수도 있습니다(그럼 폐색전증으로 죽어…) 나보다 조금 젊은이니까 건강하겠지만… 귀찮아도 자주 다리랑 몸 움직여주시고…얼른 나으시길…

공쟝쟝 2024-04-14 23:19   좋아요 0 | URL
반님!!! 넘나 경험이 묻어나는 진지하고도 뼈아프고 혈전 온 조언 감사드려요…. 이 참에 누워있….으려던 마음이 호다닥 달아나서 안보인다 쓰윽 미뤄둔 설거지를 호다닥 해치우고 온 참입니다!!! 잘 움직일게요! 고마와요😉

잠자냥 2024-04-14 1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와중에 고양이 똥 치우기 어렵겠는데…. 싶어지는;;;
얼른 나아~!! (낳아 아님 ㅋㅋㅋㅋ)

공쟝쟝 2024-04-14 23:22   좋아요 2 | URL
흐아앙 잠자먕밈~! 다행스럽게도 아이들 사료를 한놈이 독식하는 사건이 펼쳐진 덕에 얼마전 자동급식기를 들였고!! 아가들 감자는 바로바로 캐고 있습니다!! ㅋㅋㅋ 그 정도는 움직일 수 있다!!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4-04-14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에 매년 한분씩 부상자가 나오는군요 ㅜㅜ 다치신게 안타깝긴 하지만 또 책도 편히 읽으시고 맛있는것도 드시니 그렇게 나쁜건 아닌거 같습니다 ~!!

그래도 빨리 나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공쟝쟝 2024-04-14 23:2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내년엔 새파랑님 예약입니다! 맛난 것도 드시고 책도 편히….. 넝담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쾌유될게요! 이참에 하루키인가? 하루키를 빌려오긴 했는데 아직 잡진 않았습니다 …ㅋㅋㅋ!!

2024-04-14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14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ersona 2024-04-15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다리 어서 나으시길…

공쟝쟝 2024-04-16 07:14   좋아요 1 | URL
펄도사님 🥲 고마워요😆

2024-04-15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16 0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은 왜 책 탑 사태가 이토록 웅장한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합리화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책탑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33)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효용성이나 상품의 사용가치를 따지면서 합리적으로 소비를 하는 게 아니다. 특정 상품이 남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사회가 그 대상에 어떤 기호를 부여하였는가를 의식하면서 *현대인은 자발적으로 강요된 소비를 한다.* 상품은 이제 사용가치를 넘어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는 기호로 소비되고 있으며, 인간은 기호를 통해 욕망을 실현한다. — 김석 <자아>”


제가 소비에 능한 현대인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군군자자부부신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유교사상(이번 생은 수신에만 머물러있기로 결단함)에 쩌들어있긴 하지만 책 많이 읽어서 제법 현대인이 된 고로. 이젠 “(33)타자의 욕망을 구조적으로 욕망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무한정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만족이 아니라 결핍감만 더 커”진 좀비 상태 되겠습니다🧟‍♀️. 어쩌란 말인가. 나의 지적 초조함과 독서에 대한 허기는 무한정 욕망을 추구할 수록 더 갈급해지나니. 이 결핍-욕망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마음을 꾹 다잡고 손가락을 (쓱싹쓱싹) 아니, 왜 손이 이렇게 거친가? 핸드크림을 (처발처발) 향이 좋구나. (손가락을 자를 집중력도 없음...ㅋㅋㅋ) 



정신건강의학은 물론 뇌/신경과학까지 자기계발시장에서 활약하는 가운데 (정작 중요한 그 이면: 나를 내가 어찌할 수 없음으로서의 자아) 실현의 대상이나 뒤늦은 적성검사가 아닌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각종 심리학/사회학 이론 + 라캉과 함께 콤팩트하게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읽는 중 입니다만 ‘자기 기만’에 포인트를 두셨지 싶은데요, 기만하는 나 자신을 훑어내는 일은 꽤나 시금 털털하지만 한 번에 크게 많이 아픈것 보다는 조금씩 자주 아파 버릇해 두는 게 낫지 싶습니다. 그래도 전 아픈 게 싫어요. 좋은 책이라서 다 읽고 독후감 쓰고 싶은데. 결국 안 쓸 자아를 알아서 여튼 요 <배반 인문학 시리즈> 눈 여겨 두도록 합니다. 



타발적 고립 속에서 명란한(앗 오타인데 어쩐지 그대로 두고 싶다) 은둔자…모드로 살아가고 있지만,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떠드는 것이야 말로 자기기만이기 때문에 (아, 나는 어쩜 왜 이렇게 솔직한지) <어떤 고독은 외롭지 않다>를 구매하였습니다. 필사적으로 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롭지 않고도 고독해지는 방법을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부터 제가 터득한 방법이 있는 데.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적 최면으로 “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천재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저런, 겉으로 해버렸네) 뇌가 지치도록 어려운 책이나 읽는 것입니다. 뻘짓거리를 덜하게 됩니다. (책 쇼핑은 부작용) 아. 잡소리 그만. 그러니까 이 책은 고독한 천재 작가들의 유명한 글들을 모은… 앤솔로지입니다. <월든>도 <자기만의 방>도 <뉴잉글랜드 수녀>도 이미 다 책 있는데 (게다가 읽었는 데)🥲  그래서 책 받아보고 실망했지만. 


제가 읽고 싶었던 건 #엘리자베스케이디스탠턴 이었고(대단한 연설은 아니었으나 그 의의에 만족하는 걸로) 구매를 못 참은 건 바로 나의 사랑 #비비언고닉 슨상님의 아래 문장 때문입니다. 


“(148) 그러나 이 유럽인들과 지적 위상을 나란히 한 유일한 미국의 선구적 사상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이 펜을 든 첫 순간부터 ‘그들’이 아닌 ‘우리’라고 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우리’가 되고서야 우리는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게 바로 페미니즘이 미국의 것이 된 이유다*. 울스턴 크래프트에서 보부아르에 이르기까지 유럽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등 시민 지위에 분노했지만 남성 세계에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압도적인 갈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유럽 문화가 내면화한 힘은 엄청났다.) 이 갈망은 —강제하는 힘이 에로틱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분열로 무력해진 의지와 하나로 묶어버렸다. 한편 미국의 선구자들은 낭만적으로 끌어당기는 세속성의 힘을 향해 마음의 등을 돌리고 페미니즘을 에로틱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권리는 일편단심 열정이 되었다. 그들은 비할 데가 없을 정도로 단결해 평등을 추구했고, 비할 데가 없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지적인 뿌리를 유럽에 두고 있지만, 오직 이곳 미국에서만 자리를 잡고 운동이 되었다.”


- 비비언 고닉 <멀리 오래 보기>


역시 지적 오르가슴은 유럽 페미. 전투력은 미국 페미. 나는 누구? 한국의 점진적 소멸을 담당하는 중인 K-페미 되시겠습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4B는 타발적입니다. 연애는 비싸고 감정 노동이며 나는 기력이 없다.) 오늘도 엄마는 카톡으로 꽃을 찍어 보내시며 피었을 때나 이쁘지 꽃이 다 지기 전에 시집을 가라하네. 그러든가 말든가 심드렁한 나는 시집이나 읽고 싶네.


여기까지 쓰니까 또 3,000자이기 때문에 주요 부분 위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페이퍼에서 아구아 비바를 읽으며 돼지 국밥을 말아먹음을 시인한 바 있는 저는… 사실 순대 국밥을 먹고 싶었는데… 집 앞 순댓국이 드릅게 맛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좀 더 걸어서 돼지 국밥을… 왜 그러니까 왜… 하필 우리의 이름부터 고상하기 이를 데 없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언니의 문장을 읽으면서 내장순대돼지국밥이 그렇게 땡겼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구입한 언니의 두꺼운 일기장 (ㅋㅋㅋㅋ) <세상의발견> 추천사에 이런 문장이 떡하니 있는 겁니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뜨거운 내장을 내 손으로 쥐는 일 같았다”




아… 이거였네. 나는 그걸 문장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돼지국밥(우적우적)을 먹으러 간 것. 쳇. 필력 부럽네.

제가 느낀 것도 비슷했다구요. 그저. 쓰지 못하고 먹으러 갔을 뿐… ㅋㅋㅋㅋㅋㅋ


저의 점심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오전 내내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해버려서 특별히 더 허기가 집니다. 오뎅탕을 데펴서 밥 말아으려고 준비해뒀는데, 지금 돼지국밥 각입니다. (응?)


컴북스 이론 총서 여성 지식인들을 쪼매씩 모으고 있습니다.  친구한테 선물 받았지요. #세일라벤하비브 #앨리러셀혹실드 


그러고 보면 책갈피에 남자 지식인들만 나오는 거 섭섭하다고 말하기 무섭게... 계속 발간되는 책들이 여성인거 보면...  세계 지성의 성비는 어느 정도 얼추 들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 지적인 여성들이 활약했기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문득 이번 총선 정치인의 성비는? 


물론 갈 길은 멀지만 책의 세계를 바라보며 낙관을 해 봅니다. (근데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이제 책 아예 안 읽기로 결단 한 걸까요? 자기계발서 말고는? 어쩐담.) 집 거실에 서양 철학사 연표가 붙어있는데요(앗 이것도 알라딘에서 판매중입니다 위에 링크 ㅋㅋ) 거기에 벤하비브, 이리가레, 아렌트, 보부아르 여성은 일케 딱 네 명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컴북스에서 나오는 책들이란... 재밌어요. 재밌는 일이 세계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정도 모이고 읽은 량도 늘어나면 컴북스이론 총서 여성들의 지성미 돋는 책장 사진 찍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푸코 읽다 철학에 진심된 여성의 거실 벽면...  미감 적으로는 썩 좋지 않다....>


음. (급 배고파져서) 이런 저런 재미없어 보이는 두꺼운 책들은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재밌게 설명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닌데다 ㅋㅋㅋㅋ 너는 왜 이런 책을 읽는가?라고 묻는다면. 똑똑한 척 하려고가 1번이긴 한데… 사실 내가 너무도 평범한 지능의 인간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서… 아마도 그럴 듯한 이유 중 하나를 더 대자면 중고 구매한 이 책 <트라우마>엔 다음과 같은 소개 글이 붙어있습니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신학자, 철학자, 법학자가 된다. 그들은 묻는다. ‘왜?’ 정답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다”


어차피 인간의 이해의 너머에 있다는 것 나도 압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게 트라우마 적인 상황이 되곤 하는 것은 마치 평생 건강할 것 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 삶에는 외상 따윈 없다는 듯 완고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자기기만 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 까지 깨닫지 못하고 죽어버리기도 합니다. 화를 내고 싶어도 대상은 이제 없습니다. 왜? 글쎄요. 이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질문은 남겨둡니다. 그건 나의 조건이며 덕분이고 재능이니까. 살아 남았으니 필요한 것은 내게 남은 것들을 잘 보다듬으면서 사라지는 것들과 충분히 이별하는 것 일 테죠… 헤어진 것들과 또 헤어지는 일이며. 헤어지기 싫어서 그걸 다 끌어안고 살겠다 우겨대느라 우울증자로 버티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며. 정답도 옳고 그름도 없는 듯 합니다. 사는 건 말이죠. 하물며 책 사는 것은 더 그러합니다.



마지막 충동 구매 한 책은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어슬렁거리다. 띠지에 붙어있는 이 문장을 보고 홀린 듯 결제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 행복해하면서 쓴 글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냥. 그랬어요.


요즘. 나는. 다행스럽게도 행복이 궁금한가 봅니다! 




덧붙임. 서재에 관심 없어서 트랙백 서비스도 스팸을 이유로 들어 중단한 (문의했으나 기약 없다고 함) 알라딘이여. 이미지 파일 사이즈 마저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잘라 붙여야 하면 내 페이퍼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어떡하라고. 여기 사람 있어요. 책 읽는 사람 있다고요. 관심 좀. 제발 관심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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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4-12 1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탑이 어마무시하네요. 근데 너무 두꺼운 책 많아서 어쩌지 못하겠는 분위기 알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의 발견>이 이럴 줄이야. 두꺼운 줄 알았지만, 헤겔 레스토랑이랑 막 겨루는데요.

저는 <자아>가 좀 궁금하네요. 한 문장평,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각종 심리학/사회학 이론 + 라캉과 함께 콤팩트하게 다루고 있는˝이 마음에 들어요. 고닉 책은 저도 읽는 중이고, 아렌트 책은, 나는 아렌트 표지로 있지롱!!!
<한눈에 보는 서양철학사> 저 연표, 어디 가면 살 수 있어요? 혹 헤겔레스토랑 사야 주는건 아니겠죠? @@

공쟝쟝 2024-04-12 16:14   좋아요 2 | URL
그 아렌트 책들 정말 부럽습니다 ㅠㅠㅠ 에이 또 나오겠지 나오겠지… 기다리다가 ㅋㅋㅋ 그냥 샀습니다! 아렌트 좋대놓고 저작 하나도 안 읽은 거 찔려서요!!!!
자, 북플에 직접 링크된 저 연표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약 2500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히히😎

단발머리 2024-04-12 16:27   좋아요 2 | URL
나는 아렌트 표지 아렌트 책은 있고, 저 연표는 없는 사람이었죠.
이제, 아렌트 표지 아렌트 책 있고, 저 연표도 있는 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롱! 🤪

잠자냥 2024-04-12 16: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탑이 명란하다...
냥이들은 잘 있나요?
냥이들아 니네 집사가 밥 안 사주고 책만 사는 거 아니니?!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4-12 20:00   좋아요 1 | URL
명란책탑📚냥이들 근황도 전하겠습미다 ㅋㅋ!! 고층 캣타워를 설치하였거든요!! 넘나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는 뻥!) 의사 표시를 뭘 밀어서 떨치는 걸로 배운 새냥이 땜에 😢😢 집 살림이 남아나는 게 없습니다… 잠자냥 추천표 스크래처도 너덜너덜 해졋어요!!

2024-04-13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13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indy 2024-04-15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고 갑니다. 멀리오래보기란 책을 제 장바구니에도 담았어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4-04-16 2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신디님. 댓글 감사합니다!
자기서사 혹은 에세이의 장인이라고 많이 알려진 비비언 고닉이 아주아주 진지한 독자이자 훌륭한 서평가 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확 드러나는 책 입니다. 물론 등장하는 미국 책들을 잘 몰라서 난해할 때도 있지만.... 자신만의 관점을 발견하기 위한 고닉의 지난한 과정이 느껴지기도 해서요, 독후감 잘쓰고 싶어라하는 저는 곁에두고 틈틈 꺼내 읽기로 했답니다.^^
 
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댓글을 주고받다 일 년 사이에 쓴 글 목록들을 훑어보았다. 머나먼 양자역학부터 푸코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까지. 어, 내 독서 목록 왜 이래? 몰랐어? 내가 그랬네. 내가 이랬어. 어쩐지 친구들이 이제 그만 지상에 발 딛으라는 잔소리를… 대화할 때 나도 모르게 버벅대고 사과하고….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계속 어려운 책만 읽었구나. 나. 왜 그랬지?

1. 앎의 쾌락 

2. 열등감 (조급증)

3. 허세

(4. 기타 : 딱히 밖에 나갈 일이 없었음)

셋 다 조금씩 있긴 한데…  근래엔 2번보다는 1번이 더 컸다. 3번 허세는… 독서에는 원래 허세가 필요하다 하하하하하핫! 난 명품으로 있어 보이고 싶지만… 돈이 없으니까!!! 책은 비싸봤자!!!가 아니라. 제 허세에 귀여움을 살짝 타서 흐린 눈을 하면 좀 호기 있어 보이지 않나요? 😜 (애써 귀여운 척) 허세호기호기허세호기. 


그 허기로. 가끔 읽다 보면 읽어지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맹탕 모를 때는 아예 허리가 휘었고. 알듯 말 듯 모를 때 알 것 같은데… 😖 아악, 여기서 더 가? 말아? 하는 생각과 *너 내가 읽어 버린다* 약간의 호승심과 *이 부분은 그래도 좀 이해가 가는 구나* 하는 나 스스로가 느끼는 성장, 그런 걸 느끼는 그 재미를 알아버렸달까. 2024년 봄, 보름 정도 그 재미를 준 사람은 (돼지감자) 지젝이었다. 땡큐!   


지젝이라고 방심했다가 한방 맞았다. 철학의 경우 입문서와 원전의 갭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아는데… <how to read 라캉>이 넘 재미났기 때문에. 지젝과 함께라면 즐겁지 않을까? 🙅🏻‍♀️아니오.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는 영화나 시사로 지적인 수다를 떠는 책이 아니라. 본격. 철학 책었지 말임돠. 어쩌면 지젝 특유의 그 잡스러움이 내 이해를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도합 세 번의 고비가 오는데… den, 피히테, 칸트 공격… “야. 그만해. 알았어. 그만 하라고 이 돼지감자야!!😱” 라고 외치면서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긴 했는데, 사실은 몇 줄로 간단히 쉽게 정리된 것을 보고 그걸로 덮어버리고 싶은 욕망은 아직도 내게 있다. 

페미니즘 책은 터져 오르는 폭풍 눈물 땜에 고생하게 된다면(정말로 몸으로 읽는 다구욧!!) 철학 책 읽는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지치는 일인 것 같다. 이걸 왜 읽지라는 충동적 질문을 꾸욱 눌러 참으며 (인내) 국경까지 초월해서 모르는 개념들을 거칠게라도 이해해야 하며(횡단). 이게 중요한데 (얼마없는) ‘알던 것들’도 다시 다 분해해서 복잡한 현실에 맞게 재조립하는 게. 그렇게 해보자고 하는 게. 21세기 이후의 철학(혹은 정치철학)인 듯. 그래서 그런 이런 책들을 읽을 때 나의 팁은. 


잔다. 많이.

 

졸리면 바로 자고 눈 뜨면 깨자마자 바로 읽음. 이번에 <헤겔 레스토랑>의 경우 특별히  100번 정도 잠들었고… 영원히 잠들지 않고 100번을 다시 깨어난 것을 보면 나에게 쳐주자. 박수 짝짝. 짹짹. 지젝. 지젝. 자, 이런 나의 독서가 얼마나 헤겔적 이었던지에 대한 엿보기 만 해도 지치는 문장을 가져오도록 하겠다.  

“(368) 철학적 용어로 바꾸자면, 여기서 헤겔의 요지는 외적 장애물(또는 적)에 대한 ‘자기모순’의 우위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유한하거나 자기 정합적이지 않은 것은 우리의 행동이 항상 외적 장애물에 의해 좌절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외적 장애물에 의해 좌절되는 것은 우리가 유한하고 비정합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주체가 적으로, 극복해야 할 외적 장애물로 지각하는 것은 주체의 내재적 비정합성이 물질화된 것이다. *투쟁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은 정합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형상을 필요로 하며, 그의 정체성 자체가 적에 맞서 있는 것에 달려 있다.* 그의 (궁극적) 승리가 결국 자신의 패배나 해체에 이를 정도로 말이다. 헤겔이 좋아하는 대로 표현하자면,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부지불식중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과 싸우게 된다.* 따라서 격렬한 투쟁을 찬양하기는커녕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오히려 교전 중인 모든 입장, 모든 편들기는 필연적 환상(일단 적이 제거되면 나의 존재의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고유한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네 입장의 내속적인 구성요소인 것의) 가능성의 조건을 불가능성(너의 완전한 실현을 막는 장애물)의 조건으로 오인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 전체가 본인이 자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지각하고 있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 (중략)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형상, 즉 사회질서의 조화를 교란하고 타락시키는 낯선 침입자라는 형상은 궁극적으로 사회 질서 자체의 ‘비정합성’을 가리기 위한, 사회의 불안정성의 동역학을 낳는 내재적 적대성(‘계급투쟁’)을 가리기 위한 물신적 대상화, 대리물이다. (중략) 주체는 투쟁에 뛰어들며, (일반적으로 승리 자체 속에서) 패배하며, 그리고 이 패배가 그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나: 아. 데모크리토스 den 이걸 왜 알아야 하나. 이해가 전혀 안된다. 정말 화 난다. 서양철학 그것은 태생 자체가 유산계급의 것. 야, 이놈들아 그딴 걸로 고민하지 마. 기운이 남으면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 다 찢어, 불태워!! 저것들 배불러서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으니 좀 굶겨랏!! 굶겨서 노동교화형에 처해야 이딴 책을 안 쓰지!! 스탈린에 빙의했다가ㅋㅋㅋ 지젝의 혹독한 스탈린 비판에 한번 혼꾸녕 나고 (참고 링크) 그 다음… 독일관념론 공격에서ㅋㅋㅋ 지젝 님하… 이 레스토랑 그만 먹을래요 흑흑 ㅠㅠㅠ 이토록 맛 더럽게 없는 인생에서 불필요한 지식을 내가 왜 돈 내고 시간 내고 알아야 하는가(😡) 다 현대에서는 써먹지도 못할 쓸... 모.. 없는 관..념들 일 뿐…응? 하다가 여기서 설득됐다. 


“(457) 따라서 (자본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라는) 주관적 경험과 (착취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필연적인 세 번째 수준이 추가되어야 한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 생성적 순환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458) 빌 게이츠와 함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졌는데, 적어도 표준적인 의미에서는 그렇다. 여기서는 아이러니를 놓치기가 쉽다. 즉 자본의 논리를 정식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헤겔이 필요했던 사실(마르크스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돌파는 1848년 혁명의 실패 후 다시 헤겔의 <논리 과학>을 읽기 시작한 185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헤겔 이후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헤겔적 측면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헤겔은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았는데,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투기적인 내용, 금융 자본이 ‘현실의 사람들’을 가공하는 순전히 가상적인 개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왜 설득됐냐면…에… 아무도 안 궁금해할 테니까. 암튼 나는 설득됐다. 위에 저 문장이 라캉 처돌이 지젝이 굳이 멀리 헤겔씨의 궁극의 관념론 다시 데려와서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걸 내가 눈치채 버림. 아님말고. 여하튼 900페이지 다 읽고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저깁니다. 이거 읽는 여러분(있을까?) 믿어주십셔… 이렇게 구구절절 썼지만 이번 독서의 헤겔적 (패배의 진리) 교훈은 ‘이해 못 해도 읽어두길 나쁠 건 없다’이다. 

그리고. 읽어두고 사유해온 고로. 나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뭔지 안다. 개념과 직관이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규범. 규범을 보는 눈.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를 감각하는 몸. 너무 당연해서 공기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보이는 것. 그걸 보려고 한 독서. 그래서 내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하게 되는 부분. 나의 환상은 찢어지고 나는 패배했지만. 또 다시 패배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모두가 믿고 있다. 언어 속에 사는 모두는. 믿지 않을 수 없으니까.    


"(228) 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것 말이지요.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장치의 작동의 흔적을 지우고, 이타성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에게 강제된 동일성을 기원으로 투사함으로써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야기한 자유로운 원인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비슷한 맥락일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이 읽어내는 헤겔 중에 내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요 부분. 


(373) 이처럼 아직 아닌 것으로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의 갑작스러운 소급적 전도(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목표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에서 갑자기 그것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간다.)가 바로 헤겔의 관념적 화해는 현실(실제의 아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남겨두기 때문에 충분치 않으며, 철저한 사회 변혁을 통한 현실적 화해가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통상적인 비판적 힐난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역사주의적 수사 어구들로부터 헤겔을 구분시켜주고 있다. 헤겔에게서 기만적인 것은 끈질기게 지속되는 분열들을 무시하는 강요된 ‘거짓 화해’의 기만이 아니다. 진짜 기만은 우리에게는 생성의 카오스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무한한 목표가 이미 실현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유한한 질서 내에서 우리는 목표가 진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한다. 무한한 목표의 달성은 오직 이 목표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기만을 극복하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궁극적 기만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중략) 최종적 화해에서 변하는 것이라고는 주체의 관점뿐이다. —주체는 패배를 인정하며, 그것을 승리로 재기입한다. 따라서 화해는 적대성의 극복이라는 통상적인 이념 이상인 동시에 이하이다. 이하인 것은 아무것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상인 것은 이 과정의 주체가 (특수한) 실체 자체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니까.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나도 모르게 되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원래는 힘들어서 어떤 답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답은 점점 더 모르겠고. 계속해서 모르겠는 책들을 읽는 사람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나를 괴롭힌 어디를 가라고 뭐가 되라고 무엇을 하라고. 많은 말들. 그걸 사야 한다고 살아야 한다고 하는 많은 말들. 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은 덤. 어디로 갈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자주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며 오늘 가야 할 곳은 안다.

책에 붙은 말미잘 플래그 다 뜯어내고 책 반납하러 가야겠다. ㅋㅋㅋㅋ

으쌰. 

먹을 수 있는 재료를 깔짝 대다 안 먹어본 것까지 먹느라 배 너무 불렀던 레스토랑. 

좀 지쳤으니까. (라캉) 카페는. 다음에. 


bgm은 god의 길로 해 보자.


덧, 덧붙이는 아래의 문장들은 주로 지젝의 성격을 추측해 보게 되는 문장들. 이 사람 사람 참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는구나. 하게 되는 지점 + 현시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심지어 나의 일부 친구와 동료들조차 요점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중략) 심지어는 어떤 주체가 특정한 믿음(신앙)을 조롱할 때조차도 그것은 결코 그러한 믿음의 상징적 효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믿음은 종종 계속해서 주체의 행동을 규정한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비웃을 때 진리는 종종 그러한 태도에 있지 그것에 대해 취하는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나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으로부터 감추기 위해 그것을 비웃는 것이다*. 어떤 여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조롱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종종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그토록 심하게 매달리는 자신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P173

본래적인 믿음은 믿는다고 가정된 또 다른 주체에의 의존(또는 참조)과는 정반대된다. 본래적인 믿음의 행위에서는 나 자신이 나의 신앙을 온전히 떠맡으며, 따라서 그러한 믿음을 보장해 줄 어떤 타자의 형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본래적인 신앙은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 밖에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본래적인 믿음은 어떠한 큰 타자도 전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큰 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큰 타자의 결여, 큰 타자의 비존재의 완전한 수용을 전제한다. 참된 무신론자가 종교의 정신적 진리를 ‘외적인’ 교리적·제도적 맥락에서 구하려는 사람들과 정반대 쪽 끝에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신앙심이 돈독한 한 친구가 언젠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는 내 책의 부제에 대해 한마디 한 적이 있다. - P228

"나도 완전동의! 나도 신을 믿지만 희생과 굴욕을 주는 것, 고통을 통한 구원, 인간들이 자기 아들을 죽이도록 일을 꾸미는 신을 찬양하는 등 온갖 곡해된 행위들은 얼마나 역겹고 충격적인가 말일세. 이러한 도착적 핵심 없는 기독교는 어디 없을까?" *하지만 차마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 책의 요지일세. 즉 고통을 통한 구원, 신의 죽음 등 저 모든 도착적인 곡해들이 바로 내가 원하는 거지. 단, 신 없이 말이지."
따라서 앞서 말한 대로 신은 두 번, 즉 한번은 실재적인 것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상징적인 것으로, 두 번 죽어야 한다. - P228

당연히 모든 욕망의 대상은 환상적 미끼이다. 물론 근친상간의 완전한 주이상스는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라캉의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는 여전히 옹호되어야 한다. 비록 욕망의 대상은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이 환상 속에는 실재적인 것이 있다. 욕망의 대상은 긍정적 내용에서는 헛되지만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 실재의 자리는 그렇지 않다. 이것저것 애써보았자 모두 헛되다는 체념적 통찰보다는 욕망에 무조건 충실한 것 속에 더 많은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254

변증법적 접근법은 통상 분석되어야 할 현상—이것은 풍부한 역사적 맥락 속에 끼워 넣어져 있다—을 그것이 속한 총체성 속에 위치시키려는 것으로, 그리하여 물신화시키는 추상화의 주문을 깨뜨리려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가장 위험한 덫이다.
헤겔에게서 진짜 문제는 그와 정반대 것이다. 즉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우리가 거기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며, 사물의 핵심을 형성하는 개념적 규정을 명확하게 지각하지 못하게 하는 풍부한 경험적 세부사항의 주문에 걸리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풍부한 규정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아니라 정확히 그것을 어떻게 추상할 것인가,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 그리고 오직 개념적 규정만 파악하는 것을 배울까 하는 것이다. - P712

하지만 20세기의 역사적 경험 또한 마르크스의 혁명관을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후쿠야마 이후의 세계에 사는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후기 헤겔의 상황 속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1990년대의 후쿠아먀식의 유토피아적 순간에는 ‘역사의 종언’으로, 마침내 발견된 가능한 최고의 정치 경제 형태로 보일 수도 있었을 자유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의 ‘미완의 어떤 것, 건축물 내부에서 이미 부서지고 있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 따라서 아마 우리는 여기서 비동시대성의 또 다른 경우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어떤 의미에서 헤겔이 마르크스보다 표적에 더 가까웠으며, 공민권을 박탈당한 대중의 분노를 사회적 적대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로 지양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한 20세기의 시도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했으며, *‘시대가 완전히 다른’ 헤겔이 마르크스보다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 P782

라캉적 용어로 이를 표현해 보자면 결혼은 대상(배우자)으로부터 "그/그녀 안에 있는 그/그녀 이상의 것"을 소문자 대상 a, 욕망의 대상을 공제한다. 대상을 일상적 대상으로 축소시킨다. 낭만적 결혼을 따르는 결혼의 교훈은 이렇다. 즉 그 사람과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그렇다면 결혼하라. 그러면 천박한 경련, 옹졸한 쩨쩨한 짓, 더러운 속옷, 코 고는 소리 등 일상생활 속에서의 그/그녀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아래와 같은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결혼은 성을 통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성으로부터 모든 진정한 열정을 제거하고, 그것을 지루한 의무로 바꾸는 것을 기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는 이 점에 관해 헤겔을 정정해야 한다 - P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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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4-12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건 모르겠고, 여기 인용된 문장, 내가 다 읽었음이요.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나는 읽었습니다.
번역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챕터 읽은 사람) 이 책의 번역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구요. 설마요, 저는 그걸 알아챌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언어의 한계요. 철학은 언어로 하는 거니깐요. 잘 아는 사람의 번역이라도, 언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걸, 쟝님은 알고 있겠죠. 그래서, 나는 많이 실망하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차피 모르겠는걸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이 노래 좋아합니다. 비긴 어게인에서 가수들이 같이 이 노래 부르는 동영상을 좋아하죠.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인가....

공쟝쟝 2024-04-12 20:19   좋아요 1 | URL
그치만… 저는 느낀다고 생각해요. 번역을 포함한 개념의 도저함을 넘어서는 언어의 한계를 가로지르는 부르는 사람의 간절함(?)을요. 그게 많은 사람의 몸과 머리를 잡아채는 까닭은.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종교적 경전은 사람들을 죽이고 살렸고. 무산 계급은 공산당 선언에 몸을 떨고 확신을 갖고 삶을 바치기도 했고… 성의 변증법이 지금도 우리 여성들을 덜컥 잡아채는 것 처럼. 어쩌면 나는 들은 것 같거든요.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다. 어떤 문장들은 나를 분명 불렀고…. 거기에 감히 답할 의무를 느낍니다! 그래서… 으음….(긁적)
그런데 또 착각… 같고 ㅋㅋㅋㅋㅋ 착각은 자유니깐요 ㅋㅋㅋ 나를 불렀다 ㅋㅋ 생각하고 읽기…😂
 
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난폭하다고 밖에 표현 못 하겠는 지젝 식의 헤겔 독해와 그 의미심장한 내기에 경의를 표한다. 나에겐 책을 깊게(강조) 오독할 자유가 있다는 계시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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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4-0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646)모든 해석은 부분적[당파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우연적인 해석자의 주관적 입장에 ‘끼워 넣어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우연성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철저하게 돌파해야 할 필요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해석된 텍스트의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는커녕 해석자가 텍스트의 내용의 보편성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해석자의 우연적인 주관적 입장은 추동력, 충동 또는 절박함을 제공해 주며, 그것이 본래의 해석을 지탱한다. 만약 해석자의 관여적인 입장을 우회하고, 지우고, 무시함으로써 해석된 텍스트의 보편성 — 이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을 직접적으로 얻기를 바란다면 패배를 인정하고 역사주의적 상대주의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텍스트에 대한 특수하고 자의적인 독해인 것을 고정된 보편적 즉자 존재로 격상시켜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식으로 도달하는 보편성은 추상적 보편성, 특수성의 우연성을 포괄하기보다는 배제하는 보편성이다. 『안티고네』(또는 성경이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같은 위대한 역사적 텍스트의 진정한 ‘구체적 보편성’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독법들의 총체성 자체에 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핵심적 특징은 구체적 보편성은 자체 내에 보편성이 지각되는 특수하고 우연적인 점으로서의 독자-해석자의 주관적 입장[위치]을 포함하지 않고는 진정한 구체적 보편성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