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나에게 매번 왤케 착하냐고 하지만 나는 착하지 않다. 착한 척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내 안의 신랄한 공격성을 나는 알고, 어쩌면 나만 알지. 집-일-도서관(혹은 카페)이 일상이고 전부인 내가, 유일한 낙이었던 습관성 알콜마저 책 읽으려고 줄여버린 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주의자(?)처럼 느껴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난 딱히 바른 생활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규율이나 규칙을 지키고 예의를 차리는 쪽에 가깝다. 음. 🤔 확실히 자신과의 약속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체면 차리는 사람이다, 난. 그러기 싫은 데도 이미 내면화 되어있음. 덧붙여 나를 주장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소심함도 있다. (소심하지만 발작 버튼 눌리면 어려웠던 것까지 포함해서 더 심각하게 쏟아냄 -> 그런 모습의 내가 싫어서 점점 더 주장이 어려워짐 -> 차라리 글을 씀) 


이런 내가 사회의 정상성/규범을 문제시하며 한계경험(동성애, 마약, bdsm…?)이라는 것을 좇는 푸코를 좋아하는 까닭은 뭘까 나 자신도 궁금했다. 특별히 어떤 금지의 위반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조금 고상하게 말하면 지적 모험에서 용감해지고자 하는 것이 내(완고한 불복종의?) 성향이라면 성향일 텐데… 


나의 그런 부분(착하지 않아서 공부하는)을 알려준 문장들을 읽었기에, 잊지 않으려고 끄적끄적 해본다. 



<푸꼬의 수난 2>를 읽다가 이런 단어를 발견했다. 푸코 아니고 푸코가 사랑한 니체에 대한 설명들인데.


“(23) 철학자만이 갖는 고유한 잔인성” 

“(24) 니체의 앎의 의지에는 ‘살인과 같은 것, 인간의 행복과 모순되는 무언가’가 있다.”

(내게 있는 잔인함은 내가 공부하게 하는 동력이다.)


니체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동물성(잔인함, 잔학함, 포악함)이 탄핵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표출되지 못한 동물성(충동/권력—니체曰: 잔인함을 실행하는 것은 최고의 권력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무런 금지 없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잔인해지는 것이 된다—)을 자신 내부에서 전개시키게 되었으며, 그걸 ‘영혼’을 개발했다!라고 설명하는 데. (이것은 내가 이해한 바에 대한 거친 정리이며, 인간의 영혼이 곧 인간의 동물성은 아니다. 니체 잘 알 님 덜, 만약 심각한 오독이라면 지적 바랍니다~ 아니면 냅둬주시구랴 클클)


여기서 영혼 어쩌고 할 것은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나는 인간이 유기체이기에 갖는 어떤 동물성, 포악함, 잔인함을 긍정/부정도 하지 않고 그것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니체에 동의한다. 그것을 잘 처리해야~한다~라는 당위로 설명할 생각이 거의 없다.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음.) 잔인함. 폭력성. 혹은 권력 의지. 그건 나에게도 있다. 나는 내가 죽이고 싶은 인간을 죽이고 싶지도 않다. 죽는 건 편한 일이니까. 그가 처절하게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괴로움에 몸부림쳤으면 좋겠다. 온 땀구멍에서 수치감을 흘렸으면 좋겠고,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랜덤으로 노출시키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고 싶다. 사회 속에서 사회적으로 고통받으라! 나는 착하지 않다. 나에게도 나 스스로가 제어하기 힘든 어떤 충동들이 있다. 악랄한 저주, 깊숙한 우울, 무엇보다 분노. 가끔 방향을 못 찾아 나를 공격하기도 하는 분노가 있다.


자, 그렇다면. 예술이나 범죄, 악플 달기나 몰래 하는 일탈이 아니라 어떻게 철학함(혹은 공부함/사회가 인정해 주는 일반적인 공부는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하고 있는 내 수준에서 해내는 이런저런 읽고 쓰기들…)이 잔인함(혹은 내 경우 어떤 동물성의 표출) 일 수 있단 말이지?


난 여기서 니체의 천재성에 탄복하고 마는데. 


철학자가 앎의 의지를 추구해 가면서 그것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직면해 나가다 보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23) 진리라는 관념이 그 자체 허구의 일종”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정직성은 허무주의로 끝날 위험이 있다”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내에서 가정에서와 같은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규칙들, 전제들, 확신들을 파괴시키는 철학자들의 앎의 의지는 ‘일종의 숭고한 사악함’이다”



네, 저는 앎의 의지 주체 못하고 페미니즘 읽다가 심연을 봐버렸습니다. 결혼제도 및 가족제도와 재생산과 관습적 이성애와… 뭐 여타의 모든 것을 포기. 꼭 그렇게 살아야 해?라고 물으신다면. 이제 포기가 되었기에 원하지 않게 되었을 뿐입니다. 꼭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은 아님. 제도로서의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인데. 또 심오해지는데요, 나의 권력 의지를 포함한 감정과 실존을 제도가 주는 편안함에 의탁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나를 살겠다. 나에게 끝까지 물어보겠다는 결단에 가깝죠. 제도를 거스르겠다 거부한다는 아님. 나, 히피 아님.  


사실 포기하기 싫기도 했고, 적막한 혼자가 될까봐 두렵고, 괴로웠는 데. 쭉— 나의 의존성을 직면하고 헤아리면서 포기시키고 나니 다른 의미로 홀가분해지고 원하는 만큼까지 명랑해졌다. 


하. 참으로 괴로운 시간들이었구려. 마침내, 붕괴, 되었던. 내가 믿어온 모든 것들을 다 허물어야 하는. 앞으로도 기약은 없지만 이제 정말 상관없다. 


비비언 고닉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58) 예지력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200년 동안 갖고 있던 통찰이 내게 찾아왔다. 내 삶을 지배하는 힘은 오직 나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해내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이었다. 나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생각을 통제하고, 확장하고, 내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법을. 그러나 실패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또 실패했다. 

(60) 내게 있어 페미니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로맨스가 아니라 힘겨운 진실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힘겨운 진실을 추구한다. 

(61)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끊임없는 투쟁 속에 있다.

나는 세 차례나 구원 같았던 로맨스의 상실을 견뎌냈다. 사랑이라는 환상, 공동체라는 환상, 일이라는 환상의 상실이 그것이었다.  …

(62) 나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심한다. 내 단단한 마음을, 그리고 또 다른 인간 존재를 동시에 사랑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나는 일을 한다. 매일의 노력은 여전히 몹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노력하는 한, 나는 로맨스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로맨스에 저항할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페미니즘은 내 안에 살아있다”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가부장제라는 진실을 정말로 알고자 하면서 인류가 만들어온 모든 제도와 규칙들에 환멸을 느끼는 나를, 그걸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로맨스라는 환상을 부여잡고 내 실존을 타인에게 의탁하고 싶어라 하는 나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의 폭력적인 신랄함, 예사롭지 않은 가학성(m이 분명해ㅋㅋ) 니체 말대로 일종의 동물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내가 싫어하는 그들이 아닌 바로 내 안에. 그렇게까지 강렬한 분노와 포장된 자기애, 폐허 같은 허무주의, 타자혐오 약자혐오, 한남못지 않은 열패감이 있을 거라고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규율 권력을 내면화한 정도가 강해서 (성실하고 열심이었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으며.


어쨌든 어떤 독서란 확실히 “인간의 행복과는 모순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재밌기만 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다. (그런 쾌락은 넷플릭스가 훨씬 유효하다.) 이러한 모순의 읽고 쓰기에서 어떤 압력—을 견디고 나니, 또 이상하리만치 나 자신이 견딜만한 존재로 변했음을 느낀다. 물론 그건 한 번 딱하고 끝나는 종류의 것은 아니지만. 난 이젠 정말로 내가 좋다. 


내 안의 동물성을 동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충분히 보존하면서 적당량 꺼내서 쓸 수 있어질 때까지. 그것에 익숙해질 때 까지. 내가 해야 하는 것. 매일의 책상 앞에서 생각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할 때까지 패배하기. 나는 나의 사악함을 숭고하게 써보고자 합니다. 하하. 


음. 또 쓰다 보니 길어졌네. 두 줄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자니 난~ 여자라~~~ 나를 요카 쥐는 마~~~😫

내 안의 니체적 잔인함 = 내 공부(읽고 쓰기)의 동력


“(24) 잔인성으로 특징짓는 동물적 본성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이들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을 부여하는 데서 원초적 즐거움을 발견한다”  - 미셸 푸꼬의 수난2

2023-08-22 

잔인성으로 특징짓는 동물적 본성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이들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을 부여하는 데서 원초적 즐거움을 발견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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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14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동물성애자를 좋아하더라니.

공쟝쟝 2023-10-14 14:15   좋아요 0 | URL
동물성애를 하는 것이랑 동물성애자를 읽는 것은 다르다 말입니다. 잠자냥은 버섯 구하기 중단하시고요 ㅋㅋ -니체녀-

은오 2023-10-1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하지 않다고 하신다면....
일단 쟝님은 귀여운건 확실 ㅋㅋㅋㅋ
 
[SIWFF] 잉게보르크 바흐만 : 사막으로의 여행/ 질투는 나의 힘/ 슈퍼 에이트 시절

왜 때문에 오늘이 연휴의 마지막 날인 것인가. 보다 놀라운 것은 뭐 했다고 벌써 시월인가. 징글징글한 가족들과 딱 붙어 지내다가 (중간에 두 번 다퉜음) 서울에 올라오니 아, 이제 진짜 가을인가. 안되겠다. 뭐라도 써야겠다. 뭐라도 쓰자.

“(40) 삼십 대 후반, 굉장히 가슴 아프고 특별하게 쓸쓸한 사연을 겪은 이후 나는 자웅동체 아메바처럼 혼자 씩씩하게 살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 <잘 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새벽 기차를 함께 타야 했기에 추석 연휴 시작에는 동생네 집 책장에 꽂힌 이경미의 에세이 <잘 돼가, 무엇이든?>을 꺼내 다시 읽었다. 삼십 대 초반, 나도 자웅동체 아메바가 되었다. 내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셀프로 통합하기까지 (융이냐ㅋㅋ) “근거 없는 피해의식”“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41) 엄마한텐 아빠가 있고, 동생(들)한텐 제부(남친)가 있고… 그래, 나한텐 영화(책)가 있어. 근데 걔는 내 손도 못 잡아주고 백허그도 한번 해주지 못하는 주제에 심지어 나를 딱 반만 죽여놔서 내가 지금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지냈다. 


감독님은 맘이 힘들 때마다 영화 <파고>의 마지를 떠올렸다는 데, 나는 그의 영화 <비밀은 없다>의 ‘연홍’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손예진(죄송합니다)에 빙의시키며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내 몫의 인생조차 감당이 안 돼서 정신줄을 놓고 싶어질 때마다 눈에 핏발 세워가며. 

“(22) 사랑을 잃었다고 무너지면, 나는 끝난다. 나한테는 나밖에 없다. 매일 매시간 매초, 나를 때리며 악으로 버텨왔는데, 창피한 줄 모르고 아무 때나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렇게 매번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은 편해졌다. 숨 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냥 내가 마흔을 목전에 둔 서른아홉 가을에 그랬었다는 이야기.”

(아직 마흔은 좀 멀었지만.... 윤석열 나이 땡큐!)


  

감독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읽으면서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계속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캐릭터들도 그래…😭 (영화 속 인물 비호감 상위권에 여전히 랭크되는 미숙이 연홍이…) 후… 스스로를 죽을 때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나에게는 고달파도, 한 발 떨어져 감상하기에는 좀 많이 웃기고 뭔가 귀여운 매력도 있다고… (가까스로 가여워에서 귀여워로 무의식의 오타를 수정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이경미와 그녀의 인물들처럼 비호감인데 귀엽다!!!!!!



 19년에도 23년에도 동생 집에서 읽으면서 위로받는 부분은. 이경미의 사주팔자다. 

“(100) ‘갈대밭을 베며 걸어가는 팔자’라고 아저씨가 그랬다. …미래는 계속 안 보였다…

 ‘잘돼가? 무엇이든?’하고 누가 질문한다면 나는 갈대 무성한 망망 무제한 벌판에서 낫을 들고 서서 외치겠다.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아요, 아저씨이???!!!’”


막막해서 5년 전에 본 내 사주도 비슷했다. 1인자 (1인자가 되는게 아니라 그냥 혼자 다 알아서 해야 되는 사주라고) 사주니까 혼자 일하고, 결혼도 지금이야 고민하지만 결국 안 하는 게 편하단 걸 곧 깨닫게 될 거라며… 마치 사주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네. 나는. 웅웅. 준비는 진작에 끝났고 이대로 쭉 완벽한 아메바 자웅동체 굳히기에 들어간다 🦹🏻‍♀️ 크하하


성인이 된 이후부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황(갈대 밭)에 마주할 때면 마음이 황망하고 많이 억울했다. 의지하고 의존하고 싶어도 잘 안되더라. 그래서 더 억울했다. 낫으로 아무리 베도 길은 나오지 않아 쉬발 엿 같다고 생각하면서 술 퍼마시고 엉엉 자주 울었다. 맨날 술만 퍼마실 수는 없어서 도피처럼 읽기 시작한 책들이 집을 어지럽히기 시작하고 내 인생은 갈대밭이 아니라 책 지뢰밭이 되었다. 



<사진은 반항에 대한 욕망이 너무 기고 만장해서 9월에한 뒤메질… 꽂을 데도 없다>


“(15) 우리를 주체로 형성하는 미시적 권력, 즉 규율 권력의 메커니즘이 사회의 도처에서 그물망처럼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주체로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권력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권력이 주체를 생산한다는 이 테제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에*, 예를 들어 위르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뤽 페리와 알랭 르노의 <68사상>(1985)처럼 의사소통적 주체나 근대적 주체로의 회귀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나는 권력에 의해 생산된 주체가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전략이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에 내재적인 방법으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하버마스나 페리·르노처럼 ‘주체로의 회귀’가 향후에도 반복될 것이며, 또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혁명적인 성과 자체가 억압되고 은폐되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 책의 직접적인 집필 동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내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저항’의 이론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근대적 주체로의 회귀’에 의한 저항이라는 손쉬운 방향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미리 이런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근대적인 능산적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정신분석이 찾아낸 ‘무의식의 주체’를 참조*하게 된다. 이 책이 철학과 정신분석의 대화, 나아가 철학에 의한 정신분석의 극복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 <권력과 저항> 사토 요시유키


놀라지 마시라. 나의 독서는 아마도 제대로 가고 있다. 하버마스 등이 퇴행으로 읽히는 지점이 흥미롭다. (잘 모르지만 동의가 된다. 나를 포함, 인간은 고상해 보이고 싶어하지 고상하지 않다.) 

포스트 구조주의의 미시적(규율) 권력이 저항의 가능성마저도 포박해버리는 것 같다는 느낌에 대해 (알겠는 데 그래서 어쩌라고? 하게 되어버리는 딱 거기에서) ‘무의식의 주체(라캉)’에서 답을 찾아보마 하는 일본 지성계의 맥을 좀 짚어낸 것 같다. 낫 들고 갈대 패듯 혼자 씩씩대며 읽어오던 나로서는 책이 책을 일러주는 가이드가 신선하고 고맙다. 


이 책은 “(14)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라는 네 사람을 관통하는 권력 이론에 대해 고찰” 하고, “내재적인 방법으로 권력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전개한다. 


그래 저항이다. 그러니까 저항. 내 안의 반골 기질이 웃고 있다. 즉슨, 내가 대타자에 반항하는 방식은 이런 읽기라고 할 수 있지😏 어렵긴 드럽게 어렵다. 그런데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졌다. 저항의 방식을 (그저 읽어서 알 수 있는 거라면) 알고 싶다. 간절히. 



서론까지 정독한 결과 <권력과 저항>은 그래도 (포스트) 구조주의와 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도전할 수 있을 법하고, 최신간인 <라캉과 철학자>들의 난이도는 그보다는 조금 아래 그리고 입문서들보다는 조금 위에 위치한 것 같다. (우치다 타츠루 ➡️  지바 마사야 정도 읽고 넘어오면 딱 좋을 듯)


“(10) 라캉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 즉 개인이 가진 욕망의 방향을 잡고 결정하면서도 본인조차 알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을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앎’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완전히 알 수 없다기보다는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앎’, 그럼에도 항상 활동하고 있는 ‘앎’이다. 무의식이란 어떠한 지배자라도 통제할 수 없는 ‘앎’,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배자 없는 ‘앎’이다. 라캉이 생각하기에 철학은 이러한 종류의 삶에 대해 충분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철학의 언어에는 앎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지배자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은, 예를 들면 그것이 ‘절대자’는 ‘자아’든 간에 모든 앎을 축적해서 이윽고 보편적인 앎을 손에 넣는 자를 집요하게 탐구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탐구의 이면에는 오히려 *지배자에 대한 사랑*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철학적 사변 속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추상적 개념들이 우상숭배 혹은 페티시즘적 대상과 같은 대용품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아닐까.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개념을 정점으로 한 앎의 제국이야말로 철학의 “영원한 꿈”이다. ‘반철학’이란 곧 정신분석과 철학에서 *앎이 존재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라캉 학파는 물론이고 뱅센느에 모인 반체제적 지식인, 예를 들어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에 눈을 돌려 보면 그들이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철학의 “영원한 꿈”을 해체하기 위한 투쟁에 몸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동업자를 거리낌 없이 신랄하게 비꼬던 라캉도 그들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애초에 푸코든 들뢰즈든 이 시대에 창조적인 작업을 했던 철학자들은 예외 없이 프로이트의 우수한 독자였으며, 그러한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라캉과 공유하는 것이 있었다. 즉, 1960년대 이후의 프랑스 철학이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 이후의 철학, 혹은 정신분석과 함께하는 철학이었다.” - <라캉과 철학자들> 구도 겐타


일본 인문학자들은 1960년대 파리를 중심으로 생겨났으며 2000년이 오기 전에 정리(?) 된 일련의 지성의 흐름들을 *현대사상*이라고 명명하기로 정한 듯하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된 이 프랑스인들의 지적 논쟁 대상은 그 자신들이었으므로 (갑자기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겁나 착하게 느껴진다) 내가 읽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며ㅋㅋㅋ 푸코의 경우 대놓고 <말과 사물>의 독자가 2000명 안팎일 거라 상정하고 썼다고 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걔만큼은 안 읽으려고 했는데, 호승심 돋구로.)


앎에 대한 사랑(philosophy)으로서의 철학은 곧 ‘지배에 대한 사랑’이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전통적인 지식 생산을 서양-백인-브루주아-남성-지식인 계급이라는 위치성으로만 이해했는 데, *현대사상*에 속하는 이들이 그러한 철학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신분석가였던 라캉은 ‘앎’이 닿을 수 없는(기실 그건 앎의 모양일텐데) 영역에 ‘무의식’(아마도 니체는 광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걔를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천착한 듯하다. 


인식할 수 없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것. 스스로 알기 싫어 억압한 것. 

사실은 99.99999999999999999999999999%


아무리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남으며, 알게 된 것들이 그 자신을 억압한다는 앎의 역설. 그 태도의 체화. 나는 여기서 다시 철학(혹은 인문학)을 시작해야 하는 거구나 하게 된다. 


*현대사상* 혹은 라캉의 ‘[무의식적인] 주체’는 아마도 철학이 ‘타자화’한 대상일 테다. 하여 인문학의 남은 몫은 타자들의 철학이며, <제2의 성> 타자로서의 여성(페미니즘, 물론 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와도 만난다. 그런데 포스트 구조주의도 읽기에 따라서는 신자유주의랑 친하다), 그리고 포스트 콜로니얼리즘(탈식민주의)은 조우한다.



탈식민주의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는 아시스 난디(혹은 프란츠 파농) 역시 심리학(정신분석)자다. 식민주의의 심리적 유인들을 추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이 파고드는 피식민자의 무의식도 매섭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피식민자(타자, 여성, 장애, 퀴어, 자연…)의 위치에서 다시 사유를 전개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27) 식민주의자의 이런 전락을 이해하지 못할 때 세속적이거나 비세속적인 종류를 망라한 모든 해방 이론은 *간접적으로 억압자들의 우월성을 인정함*으로써 그들과 협력하게 될 뿐이다. 

이런 나의 입장에 대한 핵심적인 논증은 간단하다. 근대적인 노예주와 비근대적인 노예 중에서 후자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고통받는 쪽의 우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에만 있지는 않다. 또한 노예가 억압받고 있어서도, 심지어 그가 노동을 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맑스는 노예가 노동으로 말미암아 노예주보다 덜 소외된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노예를 선택해야 하는 당위는 *노예는 아마도 한 인간으로서의 노예주를 배제하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을 대변*하는 반면, 노예주의 인식은 하나의 ‘사물’로서가 아닐 때 노예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궁극에 있어 근대적인 억압은 전통적인 억압과는 달리 그저 자아와 적, 지배자와 피지배자, 혹은 신과 악마 간의 만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탈인간화된 자아와 대상화된 적, 기술혁신을 따르는 관료와 그의 물화된 희생자, 그리고 *유사 통치자와 그의 ‘신민’에게 투사된 그 자신의 공포스러운 다른 자아들 간의 투쟁*이었다. …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오로지 희생자에 대해서만 말한다. 간혹 승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 승자는 궁극적으로는 승자로 위장한 희생자, 그것도 심리적 부패가 더 진전된 단계의 희생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 <친밀한 적> 아시스 난디


근대 이후의 식민자-피식민자/정상인-환자/피해자-가해자/남자-여자는 그 정도의 차이 혹은 순서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이는 삶의 조건이다. 피식민자의 위치에서 사유를 한다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것(무의식)을 보는 것이다.  그 긴장을 유지하기 싫으면 공부를 안 하면 된다. 공부 안 하고 사는 사람 널렸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식민화된 개념이 공부일진대. 시켜서 할 공부는 안 하는 것도 저항이라고 난 생각함. 


어려운 책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제 쉬운 책 이야기를 해볼까 했는데 벌써 5천 자를 다 썼네. 그래도 쓰자.



맨 아래 두꺼운 책 <존재론적, 우편적>은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의 데리다 논문이라고 한다.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일본의 현실에서 ‘현대사상’을 조명한 거의 최초의 책이기에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나 보다. 지바 마사야도 사토 요시유키도 이 책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하니 어떤 건가 하고 사봤다. 읽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느낌. 


인도에서 수입(?)된 탈식민주의 책과 1세계를 풍부히 소화하는 일본 책 사이에서 한국말(전라도까지 2개국어 가능) 밖에 할 줄 모르는 나는 좀 어리둥절하다. 일단은 번역이 더더더 많이 되고 책을 많은 사람들이 더더더더 많이......사..... 기 위해 역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타인을 안다는 착각>은 “나, 사람,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불안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바로 나 아닌가? 하면서 사서 읽었다.

라캉의 말대로 알고자 한다는 것은 지배하기 위함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정희진을 통해 ‘앎비앎’도 배웠다. 페미니즘 이후로 뚫려(?) 버린 지식에 대한 폭식은 나 자신의 ‘(이토록) 희미한 자아감’이라는 캐릭터에서 촉발된 질문 묶음들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얽히고 엉켜서 살아온 전근대형 봉건녀(?)에게 안정적이고 선명한 근대적 자아 정체성이란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리학 책 한참 많이 볼 때는 스스로 ‘경계선 성격장애’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요즘엔 HSP로 정착. 여하튼 나는 타인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고, 그런 내가 싫어서 책을 왕창 많이 읽어도 여전히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근대는 나를 근대화에 실패했음.😪


“(101) 불교에서는 ‘마음이란 순간마다 변화하는 운동이다’라고 가르칩니다. 즉 ‘마음’은 고정적인 실체가 없고 따라서 매 순간마다 변화한다고 말하지요. 이는 단순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상담을 하면서 접하는 환자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설득력 있는 말임을 실감합니다. 행복해하던 사람이 갑자기 침울해지거나 하거든요. 그래서 불교는 서양 심리학과 비교할 만한 ‘동양 심리학’의 내용을 갖추고 있고 역시 전위적이고 놀라운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타인을 안다는 착각> 요로 다케시


책은 불교적인 통찰을 제안하는 데, 그래도 일본은 동양이라서 느끼기에 역함(서백남이 생산성 어쩌고 하면서 불교·명상 떠는 거 싫어함)이 좀 낫다 싶더라.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으나 우리는 빈 곳을 채우고저 할 때에만 동력(에너지)이 생기므로 그걸 인식한 상태에서 기왕이면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걸 일상의 동력삼아 적당히 추구하면서 살라”는 것이 거칠게 정리한 라캉의 가르침이라면 불교는 “헛되도다 인간의 욕망이여. 욕망은 번뇌의 시작이라. 자아란 공空! 자아가 없으면 욕망도 없는 것이여”라고 말(아, 넘나 심오하고 급진적임🤔)하는 듯. 


내가 이놈의 자아를 추구하기 위해서 쓴 돈(?)과 기력과 시력이 얼마인데. 앞으로 궁극의 가르침 끝에는 불교가 있다고 생각하겠다만 당분간은 라캉적으로 살란다. 기질에 따른 욕망을 억압하지 않겠숴여. 나의 욕망은 어려운 철학 책 한국어로 번역된 것 만 읽기! 현시점의 나에게 붓다보다 더한 가르침을 주신 성인 ‘마리 루티’님께 조신히 감사를 표하며. 



“(9)이 책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에 깊이 의존한 주인 서사(master narrative)를 지탱하는 지극히 파괴적인 가정들이 함축된 *유럽계 미국인 페미니스트 인본주의가 와해되는 과정*을 검토한다. 그다음에는 섬뜩하고 위반적인 기호를 채택하여, ‘사이보그’페미니즘의 가능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 페미니즘은 강력한 연결을 계속 추구하면서도 특수한 역사적·정치적 입장과 *영원한 부분성*에 보다 열려 있을 것이다.”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도나 해러웨이


결국 *현대사상*을 부수고 내가 가야 할 (머나먼) 길…은 포스트 휴머니스트 사이보그 페미니스트 문이과 통합체 다학제적 연구자 도나 해러웨이의 길… 펀딩 해서 받았습니다. 책 정말 예쁨. 


그런데 아 희진 샘 증말 너무하네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상가가 왜 하필. 해러웨이입니까!!!!!!!!!!!!!!!!!!!!!

이제는 구구단도 헷갈리는 본 투 비 수포자가 팔자에도 없는 이과남들이 쓴 책을 사게 된단 말입니다. 내 안에 돋아나는 양자역학에 대한 지적 욕망 해결하라!!! (웅성웅성🗣️👥👤🗣️👥)



 이 책 <세계 그 자체>는 <하나의 유령이 온 과학을 떠돌고 있다 플라톤주의라는 유령이>라는 자극적인 책 소개 때문에 일단 덮어놓고 샀다. 아무튼 살 때의 마음은 “철학(인문학) 없는 과학은 없다!!!!”는 문과적 호승심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는데,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 이 책을 샀다는 것조차 까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호기가 아니라 객기였던 것으로. 


 














장강명 신간 에세이 읽고 그의 지독한 한국 문학 사랑에 영업당해 <재수사>와 요즘 눈여겨보는 젊은 소설가 단요의 신간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도 기꺼이 사들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안산 걸 사게 하는 힘, 이란 사랑의 힘!! 


이번에 잠자냥의 퀴즈를 풀(지 못하)면서 느낀 점은 나는 역시 문학(특히 고전이나 문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난쏘공><무진기행><새의 선물><모순>안 읽었고요. <가시고기>는 읽었다ㅋㅋㅋㅋ 인생 최애 소설은 <드래곤 라자>랑 <해리포터>에서 아직도 업데이트 안 되었고. 소년 성장소설(;;) 취향 못 버려서  아직도 소설 읽을 바엔 넷플릭스 보는 게 더 재밌고요. 이런 나의 한국 문학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이 제도권의 문학 교육 때문은 아닐까 하여 근 20년 전 언어영역 지문 읽다가 유일하게 맘에 들었던 소설 오상원의 <유예>가 눈에 보이길래 중고 서점에서 겟. (나… 문학…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외 니체, 마르크스, 젠더, 나를 잃어버린,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은 중고 구매!



삼십세는 커녕 사십 대로 달려가는 이 시점에서 <잉게보르크 바흐만> 전기 영화를 보고 난 뒤, 작가의 글이 궁금해서 샀다.  영화 속에서 지독한 사랑을 겪고 난 후 만신창이가 된 여성 시인의 독백을 듣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또 잘못 생각했네.


헤어지는 것이 어려워서, 사랑이 변하는 것이 싫어서, 내 인생에서 사랑은 없어도 돼!라고 마음먹었다. 이경미 감독 말마따나 사랑이 끝났다고 무너지면 나는 끝난다.며. 


영화를 보고 나니 바흐만이 가닿게 된 진실이 궁금해졌다. 사랑이 아니라 이별이 진짜 앎이라는 걸 느꼈다. 사랑이 아니라 잘 배운 이별이 필요해졌다. 우리는 만나고 변하고 헤어지는 데, *변한 나*는 헤어져야만 인식할 수 있다. 변화의 농도와 질량이 사랑이 일으킨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내게 남아 있으므로 완전한 이별은 없는 거네. 내 안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는 내가 선택한다. 


관계의 단절과 상실이 주는 분리의 고통이 아니라 이별에 딸려오는 반추, 그러니까 내 인식과 해석이 지나치게 아플 때도 있었다. 그건 독후감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매번의 독서로 연습했던 거 아닐까. 이별. 그러고 보면 쓰지 않았을 때는 몰랐던 것도 같다. 


어떤 관계는 무 자르듯 싹둑 잘라낼 수가 없어. 그래서 아주아주 느리게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듯 유지하지만. 그것 역시 길게 보면 헤어지는 과정이라서. 환멸과 슬픔과 미움과 불행.


20대의 나와 30대의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쓴다’는 것이다.


9월. 지난한 기록들을 정리하다가 알게 되었다. 어떤 이별이 들이닥친대도, 나는 결국엔 나를 돌보게 될 거란 걸. 현명한 이웃님의 말대로 궁극의 사랑은 자기애다. 나는 그걸 몰라서 이별이 무서웠다. 책을 읽고 글을 쓴 후부터는 매번의 헤어짐 이후에 엄청나게 똑똑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상실의 두려움을 제거하니 사랑할 일이 남았다. 


그렇다면 더 알고 싶다. 더 사랑하고 싶다. 더 잘 헤어지고 싶다.  


나는 자웅동체 아메바이고, 갈대 밭을 혼자 낫 들고 베어 가는 막막한 운명이 택한 인간이지만. 이런 나의 운명을 사랑하며 덕분에 쿨한 이별, 애닳는 이별, 지겨운 이별, 인정할 수 없는 이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서 일기를 쓰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건 꽤 비용도 안 들고 재밌어서. 사는 동안 계속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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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03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 저 홍당무 쟤 좋아하는데…? ㅋㅋㅋㅋ
오상원의 <유예> ㅋㅋㅋㅋ 딱 쟝다운 선택이군요. 그새 책장이 더 뒤메질이 되었군?!

그러나저러나 나에겐 아직 6일의 연휴가 남았다!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0-03 19:16   좋아요 1 | URL
잠즈ㅏ냥!! 정말요? 미숙이 좀 나같은데… 그의 창조자 이경미에세이는 공감성 수치감이 너무 올라와서 읽으면서 현타와요ㅋㅋㅋㅋㅋ
유예… 의식의 흐름..ㅋㅋㅋ 책장.. 저 이사 어떡하죠? 망해따 ㅠㅠ
우와와~ 6일의 연휴????? 진짜 끝내준다!!!!! 잼난거 또 올려주세요!!!😎

잠자냥 2023-10-03 19:25   좋아요 2 | URL
홍당무는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암튼 난 볼빨간 그 애가 좋아요. ㅋㅋㅋ

공쟝쟝 2023-10-03 22:52   좋아요 1 | URL
잠쟈냥은 쟝쟝이를 조아한다 (오독)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님 부럽지 메롱😝

독서괭 2023-10-04 08:25   좋아요 1 | URL
뭣?? 아직 6일이라고요? 우왕.. 혹시 부산영화제 가시나요? 목요일에 노벨문학상 발표던데.. 역시 문학분야 아닌거 맞쥬??

잠자냥 2023-10-04 09:02   좋아요 1 | URL
부산영화제처럼 사람 몰리는 데 제가 갈 거 같습니까?
문학 많이 나온다니까 ㅋㅋㅋㅋ 그리고 제가 1인출판사입니까 ㅋㅋㅋㅋ

독서괭 2023-10-04 09:09   좋아요 1 | URL
아니 담당분야…. 없어유?

독서괭 2023-10-04 09:11   좋아요 1 | URL
(잠사모로서 공부가 많이 부족하군)
쟝쟝님 글에다 딴소리 해서 미안합니당 ㅎㅎ 대충 읽을 내용도 길이도 아니어서 이따 피씨로 정독 예정.

잠자냥 2023-10-04 11:22   좋아요 1 | URL
제 담당분야는…….


수학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0-04 17:50   좋아요 1 | URL
뻥!!!!

미미 2023-10-03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창시절에 <유예>읽다가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고 했었어요! ㅋㅋㅋㅋ 그래서 저 책도 사둠ㅋㅋㅋ

공쟝쟝 2023-10-03 22:42   좋아요 1 | URL
역시 의식의 흐름에는 무언가 거뷰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이 있다!!! 제 문학교과서에는 최초 한국 판타지의 장르를 개척한 <드래곤 라자>가 실렸다는 것을 밝힙니다! ㅋㅋㅋㅋㅋ!!! 판타지를 교과서로 배웠어요~

단발머리 2023-10-04 0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8월, 9월이 쟝님에게는 넉 달이었나. (9월에 이걸 다 읽은 건 아니겠죠?) 왜케 많이 읽었어요, 좋겠다ㅋㅋㅋㅋㅋ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 담아갑니다. 읽겠다는 건 아니고, 일단 담아둡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그러니까 왜 산 거에요? 나는 선물 받았단 말이죠, 20년 전에.... 왜 산 거에요, 쟝님은?

공쟝쟝 2023-10-03 22:53   좋아요 2 | URL
요양을 좀 했습니다ㅋㅋㅋㅋ 많이 읽었는데 정리를 하나도 못했어요 (시무룩) 써야지 공부되던 데ㅋㅋㅋ 쓰면 요샌 기력이 사라져서… (작년에 제가 미쳤던 걸까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전이라고 하더군요… ㅋㅋㅋㅋ 아마도 벨 훅스 선생님이 일러주신… 아직은 가야할 길로만 남겨두는 것으로…(자웅동체는 지금도 충분합니다)
 

에세이를 좋아한다. 내 독서 주 종목은 에세이다. 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과 맺는 관계를 주로 본다. 그런 시선을 배우기 위해 읽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건 태도이고 관계다. 에세이(라고 쓰지만 나는 일기를 쓰고 일기가 주는 장점을 스스로 안다)를 쓰는 나는 나를 대상화한다. 글씨(언어)가 된 것 끄집어 내진 것은 내 무엇(그 나 역시 관계의 구성물)이지만 이제 내가 아니게 된다. 쓴 나와 쓴 것을 읽는 나 사이에서 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글은 기도와 닮았다. 믿음을 잃어버린 채로, 기도마저 없는 사람에게는 내밀한 일기가 필요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무의식적 믿음이 강했던 나는 일기를 쓰며 나와 대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것들이 퇴적되어 실체처럼 느껴지는 내면을 알아차린 후, 역할이 아닌 삶을 고안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1세계의 여성들이 쓴 에세이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냅, 솔닛, 게이, 랭… 그러다 비비언 고닉을 만났을 때…는 아마도 겪어야 했을 또 다시 무너지는 시기였다.

불안, 고독과 우울의 한 가운데를 허우적거릴 때, 어떤 부표처럼 고닉의 문장들이 떠 있었다. 붙잡았다. 바다 위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문장들과 같이 흔들렸다. 어느 덧 폭풍이 멈추었고, 물결은 찬찬히 일렁였으며, 내가 짊어지고 가는 나.의 무게와 위기 앞에 부족한 근력.을 낱낱이 마주보게 되었다.

자기 직면, 매일의 반복, 환상을 포기해! 스스로에게 집중해, 권위에 기대지마, 그리고 흔들릴 것. 끝까지 의심할 것. 더 흔들릴 것. 몰아세울 것. 포기하기 힘든 나의 나르시시즘. 그것이 보인다면. 포기하지 않더라도. 포기하게 되더라도. 같이 흔들어 볼 것.

“말하고(쓰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지 않으려는” 비비언 고닉의 글쓰기 작법서가 출간되었고, 일기를 멈추지 않기 바라는 아름다운 이가 선물을 보내주셨다. 함께 온 커피를 내리고 18페이지까지 읽다 말고, 고닉에 대한 나의 붙잡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13) 익숙한 것을 꿰뚫고 들어가기란 당연한 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고 또 힘든 일이다.”

어떤 글이 더 의미가 있는지
어떤 삶이 더 가치가 있는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하며,
내 삶을 누구에게도 추천하지 않지만,

자기 자신을 쓰며 결국 자기 자신이 되는 사람들에게 깊고 단단한 존경심을 느낀다.
나는 해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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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15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는 해내고 있는 중이다!˝
한동안 모닝루틴으로 일기 열심히 쓰다가 운동을 1번으로 놓으면서 일기타임이 사라져 버렸네요;; 다시 써야지 싶으면서도 귀찮기도 하고.. 쩝.. 쟝쟝님의 일기 쓰기는 오래오래 지속되길요^^

공쟝쟝 2023-09-15 13:31   좋아요 2 | URL
운동….. 독보적…. 독보적…..(후 오늘의 걸음..103) 집에서 밥먹고 집에서 일하는 자…에게 운동과 독보적 알림이란… 생..명…

책먹는고란 2023-09-15 2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이 맺는 관계를 주로 본다. 그런 시선을 배우기 위해 읽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건 태도이고 관계다.˝ 이 말이 와닿네여... 에세이를 읽을 때 이 말을 떠올리겠습니다!!

공쟝쟝 2023-09-15 21:13   좋아요 3 | URL
저는 크게 보면 픽션도, 사회학 책도 (연구주제의 설정과 무의식적 누락이라는 점에서) 자기계발서(성공은 거저 오는 것은 아닌듯 합니다. 과정에서 분명 자기를 해방시키는 경험이 있는 듯?)까지도 에세이라고 생각해요. 모두는 사실 자신을 씁니다. 말하고, 쓴다는 행위는. 더더욱 그렇고. 그것들 모두 관계이고 태도를 전제합니다.
읽고 듣는 것 역시 선택이죠. 특히 정보과잉의 사회에서는 말입니다 ㅋㅋㅋ 그래서 자신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현대의 비극~!
진지하게 읽는 고라니님의 노트가 제겐 자극됩니다!

책먹는고란 2023-09-17 16:44   좋아요 1 | URL
고라니 감동 심하다...... 쟝쟝님께 ㅇㅈ받은 거 진짜 내 독서인생에 중요한 일 10개 뽑으면 꼭 들어갈듯...

좋아하는 분야인 픽션과 사회학 책,
안 좋아하는 분야인 에세이,
싫어하는 분야인 자기계발서까지
좋아하면 더 좋아하게 되고
싫어하더라도 장점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공쟝쟝님의 아름다운 말...
가슴에 새기고 독서생활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저를 돌아볼 수 있도록ㅠㅠㅠ
tmi지만 새끼고라니 시절의 저는 약간우울충이었는데(지금생각해보면 걍 사춘기빨이었던듯...)
그때 그렇게 슨스에 우울글 쓰면 딴사람이 불편함. 중2병같음.
이런 피드백을 받고(이게피드백이냐???ㅠㅠ)
아!!! 하고 저의 슬픔... 정확히는 우울함을 많이 도려낸 느낌이랄까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내면이나 나 자체에 관심이 덜해졌던 것 같음...
사회적 이슈나 책 내용을 받아들이면 그게 나와 연관되지 않고
계속 다른 사람이나 사회하고만 연관지어서 화를 내는 거예요ㅋㅋ(우울을 도려낸 대신 화를 얻다)
그래서 제가 비록 댓글은 개허접하게 남겼지만...
공쟝쟝님의 글과 댓글을 며칠간 곱씹으면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공쟝쟝 2023-09-17 23:50   좋아요 1 | URL
고라니님, 제가 힘들다는 글을 썼을 때 저를 살린 말이 있어요. 중2병이냐, 우울충이냐, 아픈 사람 글 기빨린다!! 가 아니라

작가들 다 글써서 살았어. 살려고 쓴 거야.

살려고 견디려고 읽고 쓰는 사람이 세상에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버지니아 울프도, 조지 오웰도… 우울증이었대고(제가 울프나 오웰은 아니고요 ㅋㅋ 작가의 덕목이 우울이라는 것도 아닙니다만) 요컨대 세상을 아프게 감각하지 않는 사람이 책을 읽겠으며, 어떤 고전도 희노애락. 중에서 우울과 슬픔을 도려내라고 하지 않아요.

저는 계속 밝음을 유지해야 (소비가 유지되는)하는 조증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 때로는 님 말 대로 분노하며 읽기도 해요. 버뜨, 가장 좋아하는 글은 유머가 있는 글이죠. 풍자와 해학 ㅋㅋㅋ

가끔 진지한 독자를 만날 때 동족이다!!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가 진지하게 듣고 읽는 이유는 저자에게서 배우고 싶은 무엇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고라니님은 진지한 독자!!

감정은 몸에 체현된 사상이래요. 언어의 그물은 매우 성기지만 질겨서. 나의 고유한 감정에 좋지 않은 말을 (우울충이라뇨 ㅠㅠ) 붙이는 건 두고두고 나 스스로에게 좋지않게 작용해요. 타인이 하는 말이 그럴진대 스스로 하는 말이 그러면 더 안타깝죠. 나의 우울에 얘쁜 말을 붙여쥽시다. 난 역시 예술가군!!!

분노하고 아파하고 우울하고 또 명랑하고 즐거우며 지적인 쾌락을 느끼는 고라니님의 다채로운 독서 생활을 종종 보러 오갰삽니다 😝

유부만두 2023-09-16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간 <통증과 뇌과학>이 보여서 링크 공유합니다.

http://aladin.kr/p/e4tUv

공쟝쟝 2023-09-16 11:16   좋아요 1 | URL
유부만두님의 뇌과학 마니아 당첨을 축하하며!! 💖💖💖

얄라알라 2023-09-16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냅, 솔닛, 게이....푹빠져 읽었고, 그 중에는 비행기 타고 가서 만나고 싶기도 한 작가가 있지만 같은 책을 읽었어도 공쟝쟝님처럼
자신과 대화하며 자기화하는 시간을 못가졌나봐요. 쟝님께서 평소 유머강도를 1/10로 낮추시고 쓰신 이 일기형의 글이 왜 이리 와닿는지요....

아직 고닉은 읽지 않았고, 플친님들 칭찬으로만 대신 접했는데 쟝님 글 보니, 결코 놓치면 안되겠네요

공쟝쟝 2023-09-17 23:48   좋아요 1 | URL
나만 알고 싶은데~ 나만 잘 쓰고 싶은데~ ㅋㅋㅋ 비비언 고닉의 이 책은 정말 교재로도 너무 좋네요. 매료되었습니다.

단발머리 2023-12-14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쪽 읽었는데 너무 좋네요, 이 책...
영어로 살까? 라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 굿모닝! 늦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2-14 15:17   좋아요 1 | URL
굿앱터눈! 비비언 고닉의 관점을 모조리 훔치고 싶었더랬쥬!!! 고닉조아여! 영문을 어케썼을진 나는 모름!😂🤣
 

비와서 오늘은 달리기 못함!
커피 시켰는 데 (책나무님 땡튜❤️) 책이 딸려옴!!! 읽고 싶게 생긴 책 ㅋㅋㅋ

나는 푸코는 어려워 죽겠는 데 라캉은 너무 쉽다 ㅋㅋㅋ (응?) 무슨 말인지 다 알겠음 ㅋㅋㅋ!! 내가 바로 인간 라캉임 ㅋㅋㅋ (망언)

이거 적으며 생각해보니 라캉은 라캉이랑 나만 생각하면 되는 데 푸코 읽을 때는 사회랑 관계까지 다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이 문득!!

이 책도 쉬울까봐 걱정…. (하지만… 라캉말고 나머지 인간들이… 과연?) ㅋㅋㅋㅋㅋ 언제 읽을지는 미지수. 따뜻한~ 커피 냄새 굿!

(아무래도 북플의 독보적과 뒤메질 땡투는 포기할 수 없군요!!)

#라캉과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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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13 2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이제 댓글창 열었어요 쟝쟝??

공쟝쟝 2023-09-13 20:57   좋아요 3 | URL
북플 중독이 대충 치료된 것 같아서~ ㅋㅋㅋ뒤메질(책 산거) 폴더를 열었사옵니다!!!
알라딘 떠나면 책 많이 안 살 줄 알았거든요? (구매액수는 변함없다...)

독서괭 2023-09-13 21:0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반가워요~~ 웰컴백!!(와락)

공쟝쟝 2023-09-13 21:18   좋아요 2 | URL
부비적....! 뒤메질 책탑에 땡스투 부탁합니다. (하지만 요즘 사는 책 목록들이 엉망이네요. 추천불가능..)

건수하 2023-09-13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웰컴이에요! ☺️

공쟝쟝 2023-09-13 21:17   좋아요 2 | URL
수하님 성이 생겼네요? 건?

건수하 2023-09-13 21:29   좋아요 2 | URL
쟝님은 성이 공이었어요? ㅋㅋㅋ
그런 사연이 좀 있어요

공쟝쟝 2023-09-13 21:30   좋아요 3 | URL
네. 공부하는 쟝쟝이 공쟝쟝입니다.
수하님은 건강한 수하님 건수하!?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9-13 21:35   좋아요 3 | URL
건강한 수하님 ㅋㅋㅋㅋ
건조수하입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3-09-13 21:38   좋아요 1 | URL
하............... 이거 19금????????

건수하 2023-09-13 22:47   좋아요 1 | URL
네??????????? 크하하 쟝님 오자마자 한 건 크게 했네요 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9-13 22:48   좋아요 1 | URL
그런 거였군요… 전 factory 의 장인 줄…..

건수하 2023-09-14 09:30   좋아요 1 | URL
아니 공쟝쟝님 이런 명언을 남기고 그 다음 댓글이 없다니 ㅋㅋㅋㅋ

건강한 수하도 좋네요. 건치 건수하 이런 느낌? :)

공쟝쟝 2023-09-14 09:33   좋아요 1 | URL
아.. 수하님... 죄송해요. 워낙에... 무성애자 이미지가 강하시다보니......(;;;;;).... 그런데 또 이게 에이섹슈얼에게는 기분 나쁜 농담인가(에이스를 읽어보아야 하겠다...)? 긁적긁적ㅋㅋㅋㅋ 아 어쩌지? 아 어쩌나. 오자마자 edps........ 엉망이다 나는.

건수하 2023-09-14 09:52   좋아요 1 | URL
아 기분나쁜 건 아니구요 ㅋㅋㅋㅋ 그냥 생각도 못한 ㅎㅎㅎㅎ

제가 그 농담을 제대로 이해한 건가 잘 모르겠지만 꼭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저야말로 에이스 얼른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공쟝쟝 2023-09-14 09:56   좋아요 1 | URL
예!!!!!! !!!! 명심!! 그런 의미에서 건조한 것은 아니라는 것!!!! ㅋㅋㅋㅋㅋㅋ (아......)
더위가 좀 더 지나면 건조한 수하님께 가습기를 한대 놓아드려야겠어요. 저는 악성건성피부입니다.

잠자냥 2023-09-14 12:16   좋아요 3 | URL
사실 내가 그 별명을 지어주면서 (애초에 ‘건조수하‘였음) 하도 내가 변태자냥이라, 혹시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시는 거 아닌가 염려했으나 아무도 그런 것 같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달 만에 돌아온 쟝이 바로 그렇게 해석했다는........ 너는 역시 인티제로구나.

건수하 2023-09-14 13:19   좋아요 2 | URL
심지어 쟝님은 이 별명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처음엔 건강한 이냐고 물어봤다는!

그런데 저 서재 방문자수 왜 97인거죠...?

공쟝쟝 2023-09-15 09:07   좋아요 1 | URL
변쟈냥… ㅠㅠ mbti .. edps.. 동물성애자…
건수하… 그건 수하님의 건조함이 필요한 습한 날들이라 그러합니다

바람돌이 2023-09-13 2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어쨌든 쟝쟝님 오니 좋아요. 부비부비 ^^ 지금 저 막 깨춤추고 있어요. ㅎㅎ
저 아주 오래전에 푸코랑 라캉 읽었는데 저는 라캉이 훨씬 어려웠어요. 푸코는 그래도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라캉은 말이야 빵구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어쨌든 저는 라캉에 상처가 많습니다. 라캉에서 철학공부를 접었으니 말이니다. ㅠ.ㅠ

공쟝쟝 2023-09-13 21:45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의 페이퍼는 책 사러와서 항상 챙겨 읽었어요. 요즘 이슈도 그렇고! 복직하시고 맘 복잡하실까봐 안부 여쭙고 싶고 그랬네요~!
저는 푸코의 문체가 어려웠지만 끌렸어요. 권력개념을 일상에 적용하는 순간 역했고..
라캉은 역하지 않았고 쉬웠어요! 제가 인간의 무의식에 무지 관심이 많은데다 (신비주의적으로는 아닙니다 ㅋㅋㅋ 과학적 임상적으로), 제가 좋아한 페미니즘 3대장 언니들이 다 라캉의 착한 딸, 나쁜 딸, (그리고 데리다의 여친.. 딸딸 거리는 건 맘에 안듬.. 내가 니 에미닼ㅋㅋ)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ㅋㅋㅋ 그녀들 입문용 책 읽으면서 엉거주춤 어절씨구 대충 읽고 나니.. 라캉 입문서는 우왕~ㅋ 이렇게 되버렸지만. 또 모르겠네요. 푸코처럼 진짜 강의나 저작을 읽으면 멘탈이 찢어질지...... ㅋㅋ 하지만 굳이 그럴 욕심은 안생기고요. 라깡을 전유한 페미니스트 철학자들 책을 더 읽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9-13 2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쟝님 댓글창 열린 걸 이제야 알다니! 블로그에 놀러가기는 했지만 역시 서재에서 보니 훨씬 더 좋네요^^ 웰컴!

공쟝쟝 2023-09-13 21:37   좋아요 3 | URL
네. 제가 멀티를 잘 못합니다! 여기는 책산거 + 100자평으로 남겨두고 글은 블로그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거리의 화가님의 넓고 우아한 세계사 책탑.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에.. 영어.....?) ㅋㅋ 화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3-09-13 21: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중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여기 댓글창 열린 거에요? ㅋㅋㅋㅋㅋㅋ웰컴백!!!

한 번 오면 두 번 오고
두 번 오면 세 번 오고 싶은
알라딘 개미 지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보라!!

공쟝쟝 2023-09-13 22:16   좋아요 3 | URL
오늘까지 읽은 책 662권. 백자평을 쓰지 않으니 다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합니다. 다. 읽었다.는 느낌은 알라딘 백자평만이 주는 느낌…이었던 것 입니다!!ㅋㅋㅋㅋ

건수하 2023-09-14 09:30   좋아요 2 | URL
662권이 올 한 해만요...? 으앜

공쟝쟝 2023-09-14 09:34   좋아요 2 | URL
일리가요 2017~입니다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9-14 10:21   좋아요 3 | URL
자매품 : 이리가레

책읽는나무 2023-09-14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댓글창 오픈!!!!
결국 돌아왔네~ 돌아왔어요.
가을이 되니까...전어도 굽기 전에..ㅋㅋ
요즘은 해산물 겁나서 먹지도 못하겠던데 알아서 돌아와 댓글창 열어주셨군요.ㅋㅋ
아침에 보고 이제 댓글 답니다.^^
커피 땡투 감사합니다.
커피 사진 저렇게 이쁘게 찍을 줄이야!!
6년동안 662권이면 진짜 많이 읽었군요.
곧 천 권 채우러 갑시다.ㅋㅋㅋ

공쟝쟝 2023-09-15 09:08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천권 채우기와 서양철학 마니아를 위하여!!!

바람돌이 2023-10-05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책 지뢰밭에 한번 푹 빠져보고싶은 사람 여기!! ^^
나무님 말씀대로 역시 가을엔 전어가 있어 집나간 공쟝쟝님이 돌아오는거 맞죠? 전어회 먹고싶다요. 전어회 먹고 남은 뼈다귀는 잠자냥님네로 택배 보낼까? 저 긴 철학얘기를 읽고 저는 왜 전어회얘기밖에 못하는 것일까요? 그래도 전어회는 사랑인데 어쩜 올해 먹는 전어회가 내 생애 마지막 전어회가 될지도 모르니까 먹으러 가야지요. ㅠ.ㅠ

공쟝쟝 2023-10-06 10:08   좋아요 1 | URL
하 오염수 생각하면 열불 터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능 데 가을전어… 가을도 짧아져서… 잊지 않고 꼭 먹도록 하겠습니다…!!
철학ㅋㅋ 아직까진 꿀잼인데 좀 지칠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포스트 구조주의 좋아요 ㅠㅠㅠㅠ 왜일까요!!
저의 책 지뢰밭의 지뢰 해체작업은 계속될 예정입니다 🤩
 

1.


사람들은 남의 행운이 거저 오는 것처럼 여기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남의 불운은 자초한 것 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 행운이야 말로 끌어당기는 쪽으로 끌려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인력이 더 강한 쪽으로. 당신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생겼다면, 그건 당신이 그것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도 행운 같은 사건들은 몇 번 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도 분명 처음엔 행운이었다. 행운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우연의 연쇄 작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촉발한 계기는 내가 만들었더라. 이를테면 생각지 못한 비싼 계약 건이 들어왔을 때, 그건 돈과 상관없이 일단은 성실히 일했던 과거의 내가 불러온 복. (하지만 비싸다고 더 열심히 할 생각도 없는 게 나는 좀 문제 😩 이렇게 평등한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고 불운은 랜덤이다. 무조건.* 


그런데 불운은 내게 뭘 가져다 주냐면… 배움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불운이 닥쳤을 때는 과도하게 서사를 부여해 억울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불운을 자초한 것 처럼 여기게 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내가 너무 주인공이라서.  


“오! 신이시여! 어쩌다 내게 이딴 개 같은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신의 영역이므로 내가 알 수가 없다. 순간닥친 똥 같은 기분을 강렬하게 느껴내고, 이 불운이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인생의 코어와 관련된 반복 강박의 경우 무의식까지 파고 내려가야 하는 난이도 최상의 숙제지만 간단한 불운의 경우는 잠깐 머물러 통찰하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준다. 어쩌면 이건 사업가의 마인드 일지도.)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였지? 

이 상황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이번 겨울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아르바이트생의 실수로 나에게 끼얹어졌을 때.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커피 프랜차이즈에 매뉴얼이 없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뭐 여차저차 쏼라쏼라 친구에게 물어보고 하는 과정에서… 세탁비와 병원비도 받고, 약간의 화상에 대한 실비 보험을 탈수 있다는 걸 배웠다!!! 수년 동안 돈을 내고도 좀 처럼 탈 생각을 (귀찮아서) 한 적이 없던 내 실비… (응?) 친구가 당장 신청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 운 똥망~ 운명을 탓했겠지. 


또 있다. A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 알지 못했던 A의 새로운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며, 코로나 후유증 관리를 잘못해서(자초한 불운) 허리가 작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걷기가 내 몸에 얼마나 도움 되는 지를 10년 후 쯤에야 알았겠으며, 에… 또…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았을 그 …



2.


를 쓰는 이유는 바로 ‘억울함’ 때문이다.


뭐지? 나 왜 하나도 안 억울하지? 

나는 억울하지 않다. 내면에 억울함이 없다.


응? 왜죠? 😀



한때 나를 휘감고 있던 그 감정이 일상에서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낯설었다.

아. 편하다. 내가 편한 것은. 억울함이 사라졌기 때문이구나. 


오늘 오전엔 이걸 써봐야지.



3.


아침엔 낯설고도 익숙한 손길을 받으면서 일어났다.


- 이렇게 이쁜데 ...


.

.


라며 엄. 마. 가. 내 이마를 쓸어서 깨웠다. 


… 뒤에 생략했으면 좋았을 말. 이렇게 예쁘게 낳아놨는 데 왜 아무 놈도 안 데려가냐고 궁시렁. 까지 다 들어버렸네. 들으라고 한 소리겠지만. 음음.


오전에 병원 가려고 어제 늦은 저녁에 비행기 타고 오신 울 엄마. 


분명 어젯 밤엔 딸들이 면세점에서 사다 준 가방을 받고 즐거워 보였는 데. 

오늘 아침에는 본인 입으로 “이렇게 예쁜 딸 얼굴”을 보니 우울증이 난다고 하신다. (이유: 시집을 안 가서) 아빠가 은퇴하고 요즘 계속 골골대는 이유도.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지겨운 레파토리이지만 나는 하나도 억울하거나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우하하하!!! 내가 계속 히죽거리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고 (조금만 더 참고 가만히 들으면 윤석열이 나온다. 대통령 때문에 자식들이 시집을 못감) 이 바닷 마을의 부부는 자식들이 자식을 낳지 않아 생긴 우울증으로 불운한 삶을 마칠 예정이라는 훈훈한 경고를 들으며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예쁜 것과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과 엄마의 급격한 우울감(증이라곤 절대 생각 안 함. 엄마가 리모델링한 시골 집에서 얼마나 신나고 즐겁게 사는 지는 내가 봐.서. 알고 있다!!!).


오늘의 나는 엄마의 거대한 논리적 공백을 채우지 않기로 해. 


대신 수치에 의거한 팩폭을 날려주지. 


-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는 나이가 평균 84세래. 가사 노동 해방 만세! 


이럼시롱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는 데.


- 그건 죽을 때 까지 해야지! 


하신다. 


- 엄만, 안 억울해?


- 네 아빠가 더 억울하지. 평생을 일했는 데. 아빠가 없으면 엄마는 밥 먹기도 싫을 거 같아. 아빠가 있으니까 뭐 맛있는 거 해먹을까? 이러면서 맛있는 거 하지. 


- 우와, 신혼이네 신혼. 즐겨. 


<딸들은 밤 11시에 모여 엄마가 가져온  고구마대 김치랑 생 배추 김치 먹음> 



4.


엄마 나도 그랬어. 내가 혼자가 돼보니까 가장 어려운 일이 매번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밥 챙겨 먹는 거더라고. 그제서야 알았지. 나는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구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하는 구나. 맛이 없더라고. 혼자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맛 없어. 


하지만 곁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오로지 나의 생존 만을 위해서 제 때 먹어야 내 삶이 유지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나. 


지금은?


여전히 오늘은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찮지만, 이제 나는 나만을 위해서 먹어. 내가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매번 대충 맛없게 먹어. 


하지만 나는 동네 카페에서 까다로운 책을 읽으며 골똘할 때 행복해. 엄마가 가사 노동 다 끝내놓고 컴퓨터로 고스톱 30분 치면서 행복해 하는 것 처럼. 세상에는 곁에 구체적인 사람이 꼭 없어도 되는 종류의 행복도 있다고. 


<이를 테면 *감시와 처벌* 이라던가 7월까지 절반 읽었습니다, 좀처럼 다시 펴지 못하는 중 ㅠ,,ㅠ..>


내가 억울하지 않은 것에는. 밥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끈덕지게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다. 

예전의 엄마는 아빠 밥을 하는 건 억울하지 않지만, 시부모님의 밥을 하는 건 때때로 억울하다고 했었다. 오늘의 엄마는 아빠 밥을 생각 하는 것이 엄마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게 되는 이유라고 했다. 


엄마와 나 사이의 공백.


억울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라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자초한 깊은 불운에서 배우게 된 것일 거다. 나에겐 이상한 억울함이 있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억울하지 않다. 나의 억울함을 해체하기 위해 내 불운에서 배우기 위해서 그토록 읽고 썼던 걸까 싶을 정도. 


내가 여자라서 밥을 해야 하는 거라면 분명 억울했을 것이다. 엄마 몫까지 껴안은 채로 이상한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의 경우 아빠는 무조건, 그리고 시부모님들은 불평없이 맛있게 잡수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는 지를 잘 모르겠더라고. 누구까지는 되고 누구까지는 안되는 지도. 동생들한테 맛있는 걸 해줄 때는 좋은 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분이 팍 나빠질 때. 안하는 게 좋지. 안하는 게 좋아. 이제는 하지 않지만. 어떤 기대와 근거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했어야 했어. 


어디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파고들기 위해서는 통증과 내 상태에 무감각하지 않은 몸을 가져야 했고 느낌과 느낌 사이의 공백 안을 채워 넣을 엄밀한 논리가 있어야 했다. 나에겐.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 역할 고정관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돌봄 혹은 재생산 노동, 신자유주의, 관습적 이성애, 권력의 미시 물리학, 감정과 무의식, 정체성의 정치, 개념의 탈구축, 담론이라는 통치성, 타자와 악의 평범성, 기억의 우울증의 괴롭힘의 뇌과학 …









5.


새 학기에도 연장된 아르바이트에 대해 엄마가 자기는 운이 좋은 것 같다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에서 시집 안 가고 있는) 


- 너희들만 생각하면 우울하다!!


나는 엄마의 우울. 나는 엄마의 우울. 


예전이라면 그 말을 들으면서 어딘가 미안했을 텐데, 오늘은 계속 웃겼다. 


자식들만 ‘없으면’ 바로 행복해지는 엄마를 나는 사랑한다. 

내 사랑의 최고 실천은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것. 


엄마 눈에 내가 보이면 우울해 지실 테니까. 



푸하하하. 

엄마의 뇌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행기로 1시간 정도의 물리적 거리. 


엄마의 시냅스에는 나라는 존재가 자신과 분리되지 않을만큼 무척 가까이 있고, 엄마의 안녕과 행복은 아빠라는 존재인데 그것이 없는 나는 불행해 보일 테고, 엄마는 내가 불행하(할거라고 여기)니까 우울하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우울하게 하는 내가 우울하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면서 유지해야 하는 제도. 

가족 제도. 

혹은 제도로서의 가족.




6.


모든 지식은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모든 제도 역시 필요와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필요 없던 지식과 거추장스럽기만 한 제도와 규범은 없다.

낡아가는 것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거기엔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가족이야 말로. 우리의 분리되기 어려운 연약한 시냅스야 말로. 

인간의 친밀함이야 말로. 돌봄이라는 사랑의 노동이야 말로. 


엊그제는 유기체적 인간의 동물성에 대해서 적어 놓고,

오늘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사회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이 원하는 친밀함의 농도, 생존 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와 언어. 

사랑의 필요, 필요로서의 사랑. 

인간이기에 느끼는 행복감. 고독감. 안전함.


그리고 

가족들과 밥을 먹어야*만*,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나를 생각하면서. 


또 내가 기억하기에 단 한번도 엄마의 밥은 맛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울 엄마는 진짜 진짜 훌륭한 요리사. (그의 피를 이어 받은 나도… 응?)



새 가방을 메고서 엄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껴안으면서 구호를 한번 더 복창했다. 


- 84세 가사노동 해방! 울 엄마는 120살에 해방! 사랑해요!


당신과 나 사이의 어떤 공백을 기백권의 책을 읽어  논리로 채우고 나니, 나는 이상할 정도로 억울하지 않고, 공백을 포함한 채로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엄마는 알까.

아마도 엄마는 모를 거야. 


하지만 나는 안다.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아마 나는 재생산을 포기했으므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하는, 할 사람은 엄마 뿐이라는 걸. 엄마.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책을 읽었어요.



7.


(72)

경상도 농가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 될 만큼 부드러웠고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심할 만큼 이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스무 해 이상의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수공예품처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공예품이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통은 허위와 폭력의 게임이어야만 했다. 진의를 다정함으로 감싸고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 가는 것이, 그러다가도 격렬한 거부 반응 앞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를 드러내 기세를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이었다. *진정성과 정직의 힘을 동경하는 이들*은 그 역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질 적이었다. 


(159)

돈을 벌어야 해. 텅 빈 배속에 주문처럼 메아리치는 한 문장. 돈을 벌어야 해.

“나쁜 일이라도 있어?”

엄마의 목소리가 오후 나절의 햇살처럼 내 위에 내려와 얹혔다. 나는 뻐근하고 불편한 낮잠으로부터 깨어나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니, 왜?"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무드 등의 주홍색 불빛이 마른 어깨를 덮고 있어서, 엄마의 머리도 무드 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꽃받침처럼 보였다. 나는 갑자기 트램펄린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물었다. 

“엄마.”

“응.”

“내가 만약 잘 안되면 어쩔 거야?” 


(234)

나는 선물이 아니라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각각은 선물과 다른 시장인 만큼 다른 나쁨이 있었다.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노동자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주가를 먼저 살피는 나쁨. 사람의 총체적인 가치가 소유한 아파트의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는 나쁨. 모든 시장은 어떤 이유로든 다르게 나빴고 어떤 이유로든 똑같이 나빴다.

그리고 나는 아주 뒤늦게 시장의 참여자들이 심판을 기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잘못 처신한 사람은 계좌에 손해를 입었으며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기에서는 방역당국의 노고를 들먹이며 확진자들을 꾸짖을 필요도, 메뚜기 떼가 하나님의 진노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인간의 도리를 따질 것도 없다. 현학이나 영성을 명분 삼아 남 위에 올라서려는 이가 없다. 오직 수익률과 잔고뿐이다.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이고 시장이란 어떤 공간인가. 세속적인 원칙도 하늘의 공의도 그 어떤 인과도 빌리지 않고 욕망을 욕망으로서 돕는 것은. 그래서 몹시도 사나워지고 잔인해지고 무규칙해지는 것은. 그럼에도 이 견고한 세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그 사이의 접점과 간극은...

한 달간 삭였던 기억이, 그동안 시장을 바라보며 느꼈던 껄끄러움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따끔거리는 심장이 서로 맞물리며 실패한 인의와 욕망의 총체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똑바로 바라보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소설 <인버스> 23살 여주인공은 엄마와 함께 살 아파트를 위해 선물거래에 뛰어든다.

부모 세대와 나의 세대의 공백과 단절에 대해 생각했다. 손에 땀을 쥐고 아주 재밌게 읽었다.  



덧. 제 독서의 원흉(?)이었던 엄마와의 화해도 결론처럼 알려드릴겸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어 생존 신고를 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책을 예전 처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일기는 더 자주 쓰고 있습니다. 새로 둥지 튼 블로그 주소 걸어놓고 갈게요~ https://blog.naver.com/jyanggrim 슬슬 독서의 계절 가을도 다가오는 데 ~ 서재 식구들~ 평안한 독서를 이어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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