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라캉 읽는 중이다. 아주 초짜 입문서는 아니고, 라캉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딱히 알려주지 않지만ㅋㅋㅋ(맨 막판에 출판사에서 넣은 듯한 <함께보면 좋을 자료>가 이 부분에서는 가장 유용) 개인적 취향으로다가 매우 재밌다.

책은 아마도 슬라보예 지젝이 읽어낸 라캉 쪽에 더 가깝지 않나. 그리하여 읽으면서는 라캉보단 지젝의 필력에 놀라고 있다. 이래서 지젝지젝지지제젝하는 구나. 와… 잘 쓴다… 😲 진짜 잘 쓰네… 이걸 이렇게? …갖다 붙인다구여?? 이럼시롱 신나고 있음.

근데 스아실…중요한 건, 라캉이나 지젝이 아니고요?


바로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바디우의 사랑에는 수학이 필요하고…
수학은 무엇이길래… 전쟁 도중에 비트겐슈타인을…… 흡족하게 만드는 것인가.
넘나 고상한 그들을 본받고 싶었지만 (수학 문제 푸는 로맨스 드라마 <멜랑꼴리아> 결국 중도 하차한) 나는 문과입니다. 흑 😭

오늘의 교훈 : 비밀일기는… 소각해야 한다…..
(내친김에 유언 한마디: 제 집 안방 책상 맨 위 칸에 있는 그 노트들을 부디 소각해 주십시오)

#비트겐슈타인 #괜찮아 내페이퍼잘뒤져보면 #몽정자 #하이젠베르크 도 나오니까..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박제한건 아님. 메롱



이런 이유로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사건이다. 사랑받는 것은 한정된 존재로서의 나와 내 속에서 사랑을 촉발한 어떤 불가해한 X 사이의 간극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라캉의 정의("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기치도 않게 열정적 사랑을 고백하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가능한 긍정적인 응답보다 앞서 일어나는 것은 외설적이고 난폭한 어떤 것이 침입했다는 느낌이다.
😂 페이퍼 지젝이랑 내가 변태인거 티나므로 문장이라도 그럴듯한 거 하나 첨부 ㅋㅋㅋ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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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젝에서 느낀 호감의 정체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4-01-14 11:03 
    간이형 라캉(ㅋ) 지젝에서 느낀 급격한 호감이 푸코 냄시(ㅋㅋ)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읽기… (이쯤 되면 나는 푸코 성애자…라고 하기에는 제가 비트겐슈타인은 아니라서요. 성애아닙니다. 그냥 푸코 좋아요. 우정입니다. 우정!)2024년이 밝았고, 1월의 나는 친구와 함께 읽기로 한 #라캉사랑바디우 (가 수학 공격을 가해서)를 읽지 못해 다른 책을 두리번 거리며 지젝(의 #howtoread라캉)을 읽다가 급기야는 #어려운책을읽는기술 을 너무 쉬.워.
 
 
건수하 2024-01-12 2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

공쟝쟝 2024-01-12 23:15   좋아요 2 | URL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독서괭 2024-01-13 0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재는 이상한 데서도 천재적이군요 ㅋㅋㅋㅋ 왜 수학 생각하며 그걸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1-13 08:51   좋아요 2 | URL
자웅동체 아메바를 꿈꾸고 있는 저에게는 매우 훌륭한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 뭐랄까.. 조금 더 발달된 인류가 아닌가 싶으며…(농담 아님. 진지함). 하이젠베르크는 자위를 참으며(아님, 벵하민 라바투트 발 가짜뉴스.) 불확정성원리를 발견하는 데. 만약 비와 같은 과였다면… 하이젠베르크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사람(스님급의 고행 아닌가…)인 것입니다. … 그 역시 미개한 인류에게 양자역학의 철학적 임무를 띄고 이계에서 온 선지자인 것이 아닐까…. (극N쟝쟝의 뇌피셜에 S독서괭님의 고개 젓는 소리 들린다 ㅋㅋㅋ)

독서괭 2024-01-13 09:48   좋아요 2 | URL
절레절레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1-13 10: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수이 2024-01-13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멜랑꼴리아 증ㅡ중도 하차 하셨다니 저는 차마 시작을 못하겠나이다-.-

공쟝쟝 2024-01-13 10:19   좋아요 1 | URL
한 4화 정도까지가 증말 재밋고.. 그 후로는 좀.. 쩜쩜.... 아무리 이도현과 임수정이라도... 너무 늘어져..

단발머리 2024-01-13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집 안방 책상 맨 위 칸에 있는 그 노트들을 부디 소각해 주십시오........ 기억해 둘 만한 고급정보이지만 아무래도 쟝님 나보다 오래 살 듯....
그리하여 다이어리, 특히 스벅이랑 알라딘 다이어리 다 소각해 주!!

지젝을 읽어야 한단 말이죠? 흠.......🤔

공쟝쟝 2024-01-13 17:1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우리 서로 품앗이 소각... 근데 저 실눈 뜨고 좀만 보면 안될까요? 안되겠죠...? ㅋㅋㅋ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소각하기로해요.....!! 약속!!
 

다시 말해 처벌하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반이 필요해진다. 위반을 통해 자신의 죄를 확인하고 그것을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확립하는 개인을 우리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또 순수한 처벌의 목적으로 타인의 위반을 치밀하게 감시하고 단죄하는 개인을 역시 상상할 수 있다. 다양한 변이가 가능하겠지만 모두 같은 심리구조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쾌락은 위반의 쾌락이 아니라 위반 뒤의 처벌의 쾌락이다. 위반은 처벌을 위해 봉사하는 법의 노예로 전락한다.

초자아는 위반을 먹고 자라는 괴물처럼 그 잔인성을 점점 강화한다.

금지와 위반은 서로 기묘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위반이 초자아의 망에 잡혀있는 한 위반은 결코 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위반과 처벌의 악순환은 지속되는 것이다. 위반은 더 이상 반역의 실천이 아니라 죄의식에 이르는 통로이다. 이런 식의 위반은 결국 법의 현상유지나 강화에 기여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위반의 욕망에 바탕을 둔 정신분석의 윤리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좇음으로써 초자아의 가학적인 요구를 무력화하고 욕망의 만족을 성취하고자 한다. 성욕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질서는 따라서 근원적으로 부정되고, 만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가 지속적으로 추구된다. 위반은 결국 아버지의 도덕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같은 쾌락에서 출발하지만 법의 금지를 만나면서 쾌락은 문화의 테두리 내에서 용인되는 쾌락과 문화가 금지하기에 고통을 수반하는 희열로 나누어진다. ‘희열은 금지를 넘어섬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쾌락‘이다. 반면 쾌락원칙은 희열을 포기하고 쾌락에 안주한다.

쾌락원칙은 사회가 정해 놓은 법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를 금지된 대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체가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쾌락은 따라서 도덕적 선(善)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라캉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선을 영어 ‘the good‘으로 제시한다. 영어에서 ‘굿‘은 도덕적인 ‘착함‘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맥락에서의 ‘상품‘을 의미한다. 쾌락은 도덕적인 선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으로 그 뜻이 확장된다. (중략) 쾌락원칙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지배질서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보수적인 원칙이다.

간단히 말하면 욕망은 욕망과 충동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다. 상위개념으로서의 욕망이 다시 그 하위개념으로 자기 자신과 충동을 거느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쾌락이 다시 쾌락과 희열로 나누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식의 개념 구성은 정신분석 이론에서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재해석에서 특히 놀라운 것은 라캉이 칸트를 사드와 연결한다는 점이다. ‘불온하고 사악한‘ 난봉꾼 사드를 ‘순수하고 선한‘ 철학자 칸트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는 칸트 윤리학의 그늘을 드러내고자 한다.
🙄 사드 또 나오는 데 ㅋㅋㅋ 칸트랑 나와버림ㅋㅋ

프로이트를 인용하며 라캉은 ‘이상화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시(identification)와 관련되는 반면 승화는 (이와)매우 다른 어떤 것‘이라고 단언한다.(111)대상에게 완전한 속성을 부여하는 이상화의 과정은 그 바탕에 대상과의 동일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대상을 향한 이상화는 주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동일시를 통해 대상에 투사하는 심리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아도취적이다. 이에 반해 승화는 이상화와 ‘매우 다른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승화는 동일시나 자아도취(narcissism)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유되어야 함을 라캉은 암시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안티고네의 오빠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279)

이러한 ‘대체될 수 없는 특이성‘은 영웅이나 배신자와 같은 구체적인 특성보다는 폴리네이케스의 존재 그 자체를 지목한다. 어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거나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남다른 용맹함을 지녔다거나 하는 이유로 안티고네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공동체를 배반한 배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폴리네이케스의 ‘독특성(singularity)‘은 그가 구체적으로 지닌 어떤 특징의 차원을 넘어선 그의 존재 자체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특징도 지니고 있지 않음에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실재를 가리킨다. *안티고네는 구체적인 ‘무엇‘이 아니라 존재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는 ‘공백‘을 사랑한다.*
🫣공백

사드가 희생자의 깊은 곳에서 ‘파괴될 수 없는‘ 본질로 발견하는 것은 타자의 결여의 자리를 채운 자신의 환상이지만, 안티고네가 발견하는 타자의 ‘지울 수 없는 성질‘은 환상으로 채울 수 없는 실재의 공백 그 자체이다. 사드는 타자의 결여를 부인하지만 안티고네는 결여를 긍정하고 사랑한다. 사드는 결여를 환상으로 채우지만 안티고네는 실재를 결여로 비워둔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윤리는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정언명령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때 주체가 충실히 실천해야 할 ‘욕망‘은 생물학적인 본능이나 자본주의적인 물신숭배, 나아가서 체제 순응적인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불순한‘ 욕망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것은 ‘순수욕망‘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이 문명 이전 자연 그대로의 ‘본능‘을 회복하려는 낭만적인 기획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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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1-05 0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지 웃음이 멈추지 않음, 아침부터 라캉 읽는 내 친구 멋짐 뿜뿜_

공쟝쟝 2024-01-06 00:22   좋아요 0 | URL
끗!
 

자… <고려거란전쟁>을 완벽하게 정주행(아놔 최수종강감찬 장군 정말 어쩌려고 승리에 미치셔가지고 제가 매회 진지하게 골똘하게 된단 말입니다. 동생이랑ㅋㅋㅋㅋ 내년에 관악에서 열리는 강감찬 축제라도 가야 할 것 같다며ㅋㅋㅋㅋㅋ 빨리 귀주대첩 승리로 이끌어주세요!!!! 🤣 나 탈식민 어쩌고 읽겠다는 사람인데 ㅋㅋㅋㅋ 지금 고려 백성 다 됐고요. 심지어 <애국의 계보학> 읽으면서 진짜 얼굴 후끈대던 사람인데요?ㅋㅋㅋㅋㅋ 그렇다 하더라도 양규 장군 만세입… ㅠㅠㅠㅠㅠㅠ 거란 놈들 단 한 놈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 털썩..🧎🏻‍♀️)해 버린 사람 바로 나는

*인간 그것은 단절된 충동들의 묶음일 뿐*이라는 K-뒤라스 언니의ㅋㅋㅋㅋ 욕망을 잘 알아야 한다는 요청에 끄덕이며 <라캉 사랑 바디우>를 꺼냈다.

“머리말_ 1장은 수학을 통해 사랑을 다룬다. 라캉과 바디우의 사랑에 대한 접근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에 주목 하면서, 성별화 공식, 수적 성질, 양상 논리, 위상학, 매듭 이론을 통해 사랑에 대해 논의하고, 사랑의 공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낸다. 2장은 정치를 통해 사랑을 다룬다.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이 정치에서 정점에 도달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동시대 사랑의 위기, 우애의 재발명, 사랑의 공동체, 인류와 사랑의 연관성을 통해 사랑과 정치 간의 수수께끼 같은 매듭을 검토하고, 사랑의 탈권력이라는 개념을 도출한다. 3장은 반철학과 철학을 통해….“

첫 장: 네? 수학이요? ㅋㅋㅋㅋㅋ 왜 수학을 통해 사랑을 다뤄야 하는 거죠? ㅋㅋㅋㅋ 저 구구단 7단이랑 8단 외울 때 버그 오는 중년인뎁쇼…🤣😗😔

책 잘 읽으려고… 하루키, 앙드레 고르, 읽다만 입문서 다시 빌려왔다. 수학….. 사랑…… 사랑….수학…. 그래 가보자 사랑…!! 연말에는 바캉사랑… 러부!!

그러나 사랑을 사유한다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어쨌든 고려의 백성은… 넷플릭스를 닫으려다 <멜랑꼴리아>(수학천재 주인공 : 임수정, 이도현)를 발견하고 그들의 사랑을 정주행해야 함을 예감하고 말았는데. 바캉의 사랑 읽으면서 수학 천재들의 사랑….. 감상은….?

투 비 컨티뉴…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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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29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저 주황색 이쁜 책은 왜 페이퍼에 안 담았죠? 😳

공쟝쟝 2023-12-29 12:29   좋아요 0 | URL
저 주황색 책… (서문 읽고) 좋아요… 너무 이쁘고 좋은 책인데 ㅋㅋㅋㅋㅋ 라캉과 사랑이 주제이지 라캉과 철학은 주제가 아니랍디여 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9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 아… 밖이라 이게 얼른 안 쳐져서요. 왼손에 세탁물, 왼손에 장바구니(빠새), 왼손에 바닐라라떼… 오른손아 넌 뭐하니?

3. <라캉 사랑 바디우> 후르륵 살폈고 구매 결정. 난 실물 보기 전에는 책 구입 안 하는 깐깐한 독자! 줄을 치며 읽을 책이라서 구입하기로 ㅋㅋㅋ

4. 최수종 하면 왕건이죠. 나한테는 ㅋㅋㅋㅋ 그 때 그대는 몇 살? ㅋㅋㅋㅋ

공쟝쟝 2023-12-29 12:41   좋아요 2 | URL
2.3. 괜찮아요. 위상학. 초끈이론 이런거 나와도 난 괜찮아요. 어차피 사랑에 대해 말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필요하지만 불가능… 라캉이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이말 아닐까😭😭

4. 태조대왕께서 나주의 백성들(ㅋㅋㅋㅋ 나 전라디언이여 ㅋㅋ)과 호족들과 힘모아 궁예를 무찌르며 고려를 건국하신지 어언 20년… 강감찬으로 되살아나시어 위기에 빠진 고려백성을 노구의 몸을 이끌고 구해내고 계시온데…. 진짜 눈물없인 볼 수 없다. 왜 정통 대하 사극에 대한 향수 몽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극하냔 말이다… 공영방송 오랜만에 일좀하네 ㅋㅋㅋ
(2000년의 저는 중딩 🥹, 왕건은 우글우글 흥부처럼 우리여섯식구 모두 한 방에서 함께 이불 속에서 고구마 먹으며 보던 드라마인데 ㅋㅋㅋ 이젠 엄마아빠랑 동생들이랑 넷플릭스로 따로 또 같이 함께 봤어요 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2-29 1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려거란전쟁 정주행하셨군요^^ 요즘 저도 푹 빠져보고있습니다! 양규 장군의 그 대사에 저도 쓰러졌네요ㅎㅎㅎ

공쟝쟝 2023-12-29 12:40   좋아요 2 | URL
저 지금 피폐합니다… 흥화진전투 못잃어…. 양규 장군…. 아 화가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눈 정말로 한놈도 살려보내지 않을 테야요 ㅋㅋㅋ 이 끌어오르는 르쌍티망이여 ㅋㅋㅋㅋㅋ 거란은 너무 멀고 사과해라 일본아!!! (여러분은 탈식민주의 공부하겠다는 사람의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를 보고 계십니다 ㅋㅋ ㅋㅋㅋㅋ)

수이 2023-12-29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멜랑꼴리아 잼나면 알려주세요 쟝님! 저도 볼래요! 고려....는 길.......다

공쟝쟝 2023-12-29 15:19   좋아요 0 | URL
언니 아…. 너므 좋아요 ㅠㅠㅠ 너무…. ㅠㅠㅜ 2화까지 봣거등요? 사랑임… 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진짜!!! 너무 좋다…
딱 그거다.. 내게만 보이는 세상이 네게도 보이니? … 🥲🥹

Sol 2023-12-30 0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유툽 존버탑니다

공쟝쟝 2023-12-30 15:36   좋아요 1 | URL
잊지 말아주세요! 다시 돌아옵니다 🤣

공쟝쟝 2024-02-06 15:31   좋아요 1 | URL
sol님!!! 저 다시 돌아왔어요!!! 이 댓글이 제게 돌아와야한다는 어떤 의미로 작용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나 스스로가 잠시 잊었던 북튜버의 꿈을 되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youtu.be/-wOjdnO4PoE?si=7RF8jmh3r3TobUmO

2024-01-01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3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4-01-06 0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늦은 새해인사 하러 왔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근데 수학으로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와우.. ㅋㅋㅋㅋ

공쟝쟝 2024-01-12 23:02   좋아요 2 | URL
괭님 늦은 인사 더 늦게 받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____^*
수학으로 사랑을……. -_-;;;; 말한다고 한들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무녜…. 그래도 노력은…

단발머리 2024-01-13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님! 저거 how to read 라깡, 저 책 쟝님 꺼에요? 품절이던데… 언제 사 두었대요?
부럽다 😳😳😳😳😳

공쟝쟝 2024-01-13 17:18   좋아요 1 | URL
작년에 라캉 입문서 재밌다고 뒤적일 때, 잠깐 오프라인 중고매장 들렀는데 눈에 번쩍번쩍 하길래 겟해두었습니다!!! 아... 이놈의 책욕심이란 ㅜㅜ

Sol 2024-02-06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님, 제가 마이어스리 입니다. ㅎㅎㅎㅎ돌아와 주셔서 행복해요. 고마워요.

공쟝쟝 2024-02-06 15:36   좋아요 1 | URL
세에에에에사아아아앙에....🥹🥹🥹🥹🥹 아.... 귀인..이세요..... 저도요.... ㅠ..ㅠ 저도 고맙습니다... 진짜류...
 
어떤 자살은 질병사다

얼마 전까지 서경식의 <책임에 대하여>를 읽다가 (어려워서) 놓고 있던 중이었다.



“(148)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요? 자국, 자민족이 자행한 식민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채로 포스트 콜로니얼 연구가 성립될까요? 식민주의 비판이라는 의식이 박약하고, 결핍된 포스트 콜로니얼 연구는 단지 ‘지적 유행’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고, 나쁜 경우에는 의도하지 않게 국가와의 공범 관계를 형성할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통일 운동과 오키나와 반기지 투쟁 등 전체적으로 제3세계의 민족 해방운동을 ‘내셔널리즘’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만 자족하면서,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려는 데 대한 관심은 희박한 듯 보입니다. 내가 박유하 씨를 예찬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언설에서 느끼는 위화감은 그런 것입니다. (중략) 1990년대 이후에 냉전이 무너지고 포스트모던의 사상 조류가 일본에 들어왔을 때에 그것을 섭취하여 흡수하지 못한 채, *결국 타자비판 도구로 삼았지만 자기비판 도구가 되지는 못해서* 일본 사회의 반동화, 리버럴파의 퇴락, 아카데미즘의 형해화……로, 전부가 발을 맞추어서 진행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요. 예컨대 리버럴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우치다 다쓰루 씨가 있지요.” - <책임에 대하여>, 서경식


일본의 지성계의 상황이 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내 프랑스 현대 철학 독서의 한줄기 빛이었던 일본의 미소지니 꼰대 할배 우치다 센세🤪를 꼬집어 조근조근 씹어 주시는 서경식 선생님의 혜안에 피식피식 웃긴했다.)


음.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호기심이 생겼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더 정확하게 적자면 일본의 지식인이 고안하고 황국신민이 동조한 서구를 선망했던 제국주의와 한국에서 나고 자란 국민(K-장녀...)으로서 내게도 뿌리박혀 있는 선진국을 따라잡고자 하는 심성(?)에는 어떤 간극과 어떤 다름이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사실은 궁금하지 않다. 거칠게. 혹은 잔인하게. 나는 이미 “거기엔 다름이 없다”는 결론 내린 채. 이런저런 책들을 뒤진다... (일단은 내려놓는 가장 가혹한 전제. 이건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터득한 어떤 방어기제일지도.)



“(23) 일본의 제국주의 실행은 좀 복잡하다. 일본은 유럽식(영국과 프랑스)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방식대로 변용을 했다. *일본은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영국’으로 상정*하고 영국식을 모방했다.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 (중략) 일본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일본이 직면한 고민이 있었다. 자신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 피부색과 문명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중략) 일본인은 자신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차이가 없고, 분리 또한 쉽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여 자신의 우월성과 제국 건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고심했다. 한 가지 방법은 조선의 후진성을 부각시키고, 문명화의 필요성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박종성 -


“(29) 슈미드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식민주의가 정치적 의제의 차원에서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모두 문명개화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비슷한 목표에 매진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일본 당국은 한국의 민족주의적 자기비판 양식을 손쉽게 채택해서, 문명개화라는 동일한 원칙하에 식민 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애국의 계보학>, 실라 미요시 야거


“일본이 대일본 제국이라는 다민족 제국이던 시대에는 지배층이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대만인 등 식민지 신민臣民들에게 야마토 민족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식민지 신민을 ‘이등 국민’으로 취급하고 심하게 차별하면서 그 차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패전을 전후해서 일본 지배층은 ‘국체’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옛 식민지 출신자들을 내버리고 야마토 민족에 의한 단일민족 국가로서 전후 일본을 재출발시켰습니다. 여기에 전후 일본 ‘국민주의’의 기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중략).”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




올해 1월, 케이트 만의 <남성 특권>을 읽고 인셀의 심리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다가 그건 나에게도 있다는 결론에 가닿고 소스라친 나머지 (나의 인셀스러움ㅋㅋㅋ) 차마 글로 정리하지 않은 것.


인셀의 심리(라고 쓰고 내게도 있는 심리라고 읽는다. 나는 야, 여자 인셀). 자신의 내면 안에 사회(다수)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위계를 짓고. 그 위계에 따라서 인간(이 자리에는 숱한 정상성 혹은 규범이 들어간다. 남성, 백인, 황국신민, 국민, 정규직, 중산층, 스카이, 정상인... )/비인간을 분류하고. 라벨링, 규정하고. 혐오하거나 배제하거나 지배할 명분을 스스로가 멋대로 ‘정당화’한 채. “다들 그렇지(나 같지) 않나?”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 버리는” 인간이 인간이기에 지니는 어떤 속성에 대해. (이게 N번방이 가능했던 까닭 아닐까?) 


동시에 비인간들(특히 여성)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옆에 있는 데. 연결되어 있는 데. 자신이 비인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멍청함. 어쩌면 스스로를 보지 않으려는 거대한 억압에 대해. 그러니 혹은 그러나. 운이 나빠. 아마도 삶이 짓궂어 어쩔 수 없이 우연하게 다른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던 심연. 두려움. 도망치고 싶음. 자기기만.


에 대한 이야기로.


나는 그런 방식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읽었다.

“(193) 하지만 내 아내에게서 비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난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그리고 내가 아기를 그 자리에서 눌러 죽여 버릴 만큼 터프한 악한도 아니지만, 아무리 치명적인 증상을 가진 아기라도 의사들을 총동원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어떻게든 살려내 보려고 할 정도로 터프한 선인도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아기를 대학 병원에 맡겨두고 자연스런 쇠약사를 선택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지. 그러던 끝에 *자기기만이라는 질병*에 걸려 쥐약을 먹고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든 시궁쥐처럼 되어버린다 한들, 그것도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개인적인 체험>,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내부자가 아닌 외부인. 아니, 외부인도 아닌 코리안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그의 책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에서 작가 오에를 ‘애매한 일본인’에 저항한 지식인(일본에 몇 없는) 계보에 두고 검토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반동기’는 보수파와 우파들만의 작품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 국민 다수의 ‘국민주의’적 심성이 이들을 크게 이용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전쟁 책임·식민지배 책임을 철저히 파고드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민주주의자’로서 도덕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싶은, 동요하는 머조리티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된 소망*이 이 ‘국민주의’입니다.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해낸 ‘아시아여성기금’이나 그것을 이어받은 2015년 말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바로 그러한 모순(‘애매함’)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겠지요.

미국의 ‘핵우산’에 스스로를 의탁하면서 자신들이 ‘유일한 피폭국’이며 ‘평화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애매함’의 또 다른 사례일 겁니다. 일본 국민 다수는 이 ‘애매함’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평화 애호가이며, 자국은 평화 국가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지지난 달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독서 앱에 남겨놓았던 단상은 아래와 같다.


“일본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70대 한국인 택시 기사의 내면화된 애향심과 분열된 애국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애국주의-> 가족주의까지 연결되는 내면화의 흐름 잡아채서 쓴 부분은 보통 훌륭하지가 않음. 


서경식의 위치는 사유를 치열하게 해야 하는 위치였을 거다. 멈추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사유하는 사람이라 느낌. 무튼. 깊었다. 때때로 서슬퍼렇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가 일본의 지배 계층, 국민주의적 심성에 물든 국민, 혹은 이 책에서 계속 때리는 ‘진보적 리버럴’이었다면 그의 입을 막고 싶었을 듯. 그런데 서경식은 일본에서 대학교수다. 한국에는 이렇게까지 불편한 지식인이 있나? 그게 일본 사회의 어떤 면모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혜택(?)을 입은 그가 피해자로서 가해자 집단에게 가해 의식을 가지라! 지적하는 것은 대단한 결기와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해 집단이 셀프로 “우리 모두가 애매한 죄인입니다”라는 종류의 말은 아무 말도 아닌 게 맞다. 그것은 피곤한 갈등을 평안하게 봉합시키는 비열하기까지 한 장치로도 보인다. 실은 거기까지 염두할 필요가 없는 위치성에서 어쩔 수 없이 게으른 사유가 나온 것일 테지. 일본의 메조리티들이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은근 징그러운 품위 유지의 일면도 알게 되었음.


어떤 부분은 한국인으로서는 듣기 좋았는데, 서경식이 말하는 반일과 한국인의 정서에 있는 반일주의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른 듯. 일본 내부의 상황은 전혀 몰랐는데, 한국과 어딘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차라리 들었다. 서경식 더 읽어보겠으.”


더 읽어보겠다고 하고, 또 밀어두고 다른 책 읽느라 바빴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선생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이상하고 착잡한 마음이 든다. 생각 자체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어떤 ‘지성’이라 이름 붙인 것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존재 자체가 다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사유가 이토록 뜨거우면서 서늘해지기까지 그 지성을 가다듬는게 얼마나 어려웠을까하고 생각했다. 불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제거해버리고 싶어 하는 눈초리만 그득해져가는 한국과 일본의 현실에서. 선생의 몸이 강건하게 버티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 자체가 염치없었구나. 하게 되는.


언젠가 코리안 디아스포라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 <파친코>라는 소설을 읽고 친구와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트랙백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81035 참고) 그때 나는 노아의 자살을 질병사(우울증)라고 썼다.


글을 끝내는 시점에서 왜 서경식 선생님과 노아가 겹쳐지는지 모르겠다. 더 써볼까.


내 위치에서 나를 보는 훈련. 페미니즘을 읽는 것은 지금까지 익히고 배워왔던 (남성) 언어와 내 존재가 얼마나 불화하는지를 굳이굳이 선사시대까지 꺼내와서 재독해 하는 일이었다. 어떤 남자 철학자(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까지 했는데.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어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 은유마저 penis인 pen으로 자신을 규정해왔던 여성주의 언어의 역사를. 그들을 읽던 나는 나의 언어를 내가 만들어야 하는 까닭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힘들지만 보람있는 과정이었다.)


재일 조선인 노아는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세계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아마 문학에서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한 언어(권력, 조직, 집단, 가족, 사람...)가 나를 살해해온 바로 그것일 때.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을 때. 아니. 도망쳤는데 결국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휘몰아치는 낙담.을 어떤 경험에 기대어. 노아를 내 맘대로 해석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때 그렇게 적었다. 노아가 썼다면 어땠을까? 일본어로 썼다면?


나는 서경식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으며, 이제서야 막 그의 저서를 읽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 선생이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일본어로 사유했다는 이웃들의 댓글을 보면서 당연하다 느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번역된 책에서 느낀 그의 사유가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었을까.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삶.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이니치.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마이너리티 지성.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 그 복잡함에 대해. 그 치열함에 대해.


이제서야 책을 읽는 재미를 알게된 나는 책에서 좋은 사람을 만날 때 정말 기쁜데.

아주아주 좋은 사람을 채 알기도 전에 떠나보낸 것만 같다.

몰랐던 것이 부끄럽다.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바쁘다고만 생각했다.


그의 사유가 담긴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경식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는 사유들이 페이지 마다 빼곡했다.  


읽는 것으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젠 안다. 그래서 부단히 읽기 다짐해본다.

서경식 선생님.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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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21 0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단발머리 2024-01-13 13: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이래서 공쟝쟝님 팬입니다. 알아본 나의 안목을, 내가 칭찬합니다.

탈식민주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그러니까 식민지였던 나라의 인간도 아닌 여성인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 많네요. 쟝님이 링크해준 책을 좀 읽어보고 오겠습니다.
반성하는 지식인의 마지막 계보라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분이 일본 대학의 교수인건 맞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절대 일본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엔... 그는 영원히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어에 서툰 한국인이요. 그가 가진 위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리가 그를 그렇게 이끌었다고 전 생각해요. 우리 인생에는 겪을 수 밖에 없는 난관이 있고 이런 사유는 그래서 가능할 수도 있었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쟝님이 추천할 때 얼른 읽을것을.... 소식을 듣고 나니 많이 후회가 되네요.....

공쟝쟝 2023-12-21 09:57   좋아요 2 | URL
저는 잘은 모르지만 자이니치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때 가네시로 가즈키 많이 읽음 ㅋㅋㅋ)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영화 박열을 보고 후미코에게 잠깐 눈길이 간 적이 있고요. (일본 천황제에 반대한 일본안의 무국적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충격)

책을 읽을 수록 점점 소속(?)이나 이념이 아니라 한 사람을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경식의 책에서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끝까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는 그런 맘을 느꼈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그리고 누가 뭐래든 저는 제가 한국사람인게 좋습니다. ㅋㅋㅋ 포스트 콜로니얼 어쩌고해도. 나는 고려거란전쟁 10분에 몰아보기 하는 여자ㅋㅋㅋㅋ

2023-12-21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2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수 2023-12-21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3-12-22 10:56   좋아요 2 | URL
유수님! (댓글 기쁨)

서곡 2024-01-03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새해 복많이 많이 받으세요!!

공쟝쟝 2024-01-03 17:12   좋아요 1 | URL
든든한 레퍼런스 서곡님 2024년에도 폭풍 자료 업데이트 잘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곡 2024-01-03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민망합니다 ㅋㅋㅋ 조은 저녁 되세요 감사합니다 ~~
 

올해의 책을 <감정의 문화정치>로 할지 <가치 있는 삶>으로 할지 고민 중이다. 아마 다 읽게 된다면 감정이 되겠지만. 가치를 올해의 책으로 남기고 싶어서 홀딩한 상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6장. 책임의 윤리학


그런 책들이 있다. 제대로 읽기 위해서 내 삶을 바꿔야 하는 책들이. 그리고 그런 책이 있다. 나를 바꿔 온 까닭이 이 책을 읽어낼 수 있기 위함이었다는 알게 하는 책들이. 그러니까 읽다 보면 그런 저자들을 만난다. 내게 전자는 정희진. 후자는 미셸 푸코.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전자일지 후자일지 물음표인) 사라 아메드. 살아남기 위해 굳혀버렸던 나의 감정을 풀어헤쳐 이해하고 내게 가능한 수준의 언어의 형태로 바꿀 수 있을 때까지. 이제 나는 (정희진의) 몸으로 읽는다는 말을 안다. 감정은 (이성의 반대가 아닌) 체현된 사상이라는 문장을 몸으로 산다. 


그러니까 애석하게도 나라는 인간에게 기억이 윤리적 장치였던 것이다.


삶에서 (때로는 역사에서) 어떤 단절과 비약을 염두에 두지만, 단절은 망각이 아닌 기억을 전제한 것이어야 한다. 잊지 않는 까닭이 있다. 반복 강박은 삶이 보내는 신호다. 내겐 다르게 살기 위한 숙제 같은 거였다. 물론 망각은 중요하다. 그것은 새롭게 살 수 있는 여분의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기억도 중요하다. 기억은 윤리적 장치다. 스스로가 해로운 인간으로 기능하지 않기 위해.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잊어버렸을 것이며, 몸을 다 지워버렸을 거다. 


“(189) 기억한다는 행위는 충실함을 의미한다. 기억은 어떤 사건을 우리의 의식에서 지워 내고 싶은 유혹에도 우리가 그 사건이 남긴 흔적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윤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190) 사실 내가 현재에 충실한 삶이라는 이상을 보편적인 삶의 철학으로 대중화하려는 시도가 너무나 근시안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과거의 지혜를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에게는 현재 가지고 있는 욕구의 관점에서 과거를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가 욕구를 더욱 잘 충족시키기 위해 과거를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이 희미해져 가는 과거를 영감이 가득 깃든 삶의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때때로 가능한 이유다.


(191) 현재를 충실하게 산다는 이상은 (중략) 우리가 현재에서 과거의 흔적을 더욱 몰아낼수록 과거를 능가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정반대다. 과거가 현재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재에 당면한 문제와 과거의 관련성을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과거가 지닌 무게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며, 특히 대인 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오직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아를 갖는다는 사실, 기질의 발달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존이 타인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며, 이 책임은 도덕적인 사고 과정을 처리하는 의식적 세계 너머의 무의식적 열정이 머무는 뒤죽박죽 지하 세계까지도 닿는다.


(193) 우리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타인들도 똑같이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



무의식적 열정과 뒤죽박죽 지하 세계. 마리 루티 답다. 무의식이 강요한 일에 대한 책임까지도. 


잊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맞춤하게 찾아와 나 자신을 해석하게 하는 독서라는 노동은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다. (모두가 나처럼 읽지는 않는다는 건 내게 자존감이 되었다.) 


나는 내 삶을 잘 책임지고자 한다. 그건 오직 나 하나일 테지만 나와 관계 맺은 모든 것과 때때로 내가 잊어버린 그러나 잊지 않으려 하는 기억들과 관계된 일이라 가끔은 벅차고 난망하게 느껴진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서는 쿨내 진동하며 아예 다 잊고 살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게 사는 일은 충분히 넉넉히 부끄러워하는 일이겠지. 우리는 부끄럽기 싫어서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더 무자비하게 망가져가는 게 아닐까. 가끔은 정성들인 것들을 대범하게 망칠 필요도 있지만. 어쨌든.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떤 전제를 흔들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될 때까지 멀어져야 하는 것이며. 멀어지는 것은 달아나기 위함이 아니라 마주보기 위함이라고. 


상처를 기억하는 것. 지금의 삶이 요구하는 것에 맞추어 다르게 읽어내며 기억하는 것이. 내게는 #가치있는삶 처럼 느껴진다. 나는 과거와 다르게 읽을 수 있는 몸으로 나를 만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읽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다르게.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계속 이렇게 살면 되는 걸까. 더 웅크려있기를 처방했던 23년도 딱 16일이 남았다.

기억한다는 행위는 충실함을 의미한다. 기억은 어떤 사건을 우리의 의식에서 지워 내고 싶은 유혹에도 우리가 그 사건이 남긴 흔적과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윤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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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12-15 14: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멀어집시다. 마주봐야 하니까. 후후후. 올해는 제 인생에 두고두고 기억에 깊이 남을 한 해인데_ 내 생에 중요하고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났기에. 그 중에 한 명은 쟝님입니다. 쟝님과 만나 읽기와 쓰기에 대해서 가벼이 여기던 마음을 좀 접을 수 있었습니다. 내내 읽고 사유하시어 이 게으르고 게으른 중년의 손을 놓지 말아주소서.

공쟝쟝 2023-12-15 14:14   좋아요 2 | URL
아 나란 얼마나 진지한 독자인가.
저는 *과정을 쓰는 것*에 대해 배웠고. 읽고 쓰지 않고 느끼는 법도 배웠고. 무엇보다 수이님 아니었으면 *사랑*이라는 탐구주제는 10년 뒤로 미뤘을 듯. 저 정희진의 공부가 꼽은 올해의 인물 ‘구독자’인데요. 이 훌륭한 제가 꼽는 올해의 인물도 ‘수이’언니 할게요! 서로 나눠주는 거 아니고. 정말로 많이 배웠어요. 제가 워낙 잘 배우는 사람이긴 한데 쑥쑥 크는 건 역시 알라디너 언니들 때문이다!!! 내년에도 잘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