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다녀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벨훅스의 사랑은사치일까를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다. 

내 분열의 어딘가를 매만지는 글씨들 속에서 위로받고 있는 데, 옆자리의 시선이 느껴진다. 티비를 보다가, 창밖을 보다가, 가방을 뒤적이다가, 사실은 읽는 나에게 무언가 말걸고 싶어하는 눈치의 스마트 폰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 

나는 엄마가 생각나서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페미니즘을 읽는 것의 다른 말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주 눈물이 난다. 다섯시간의 버스. 다섯시간의 고독. 종종 서울을 올라오던 우리 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_

평범한 노동계급이었던 벨훅스의 엄마는 독서를 장려하다가도 책에서 그녀를 떼어놓고 싶어했다. “책들이 그녀를 망치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하며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한 여성적 덕목을 파괴”할 수도 있다며.

사실 맞는 말 이다. 
언제부턴가 나와 우리 자매들은 처지에 비해 ‘너무 과계몽 된거 같아 힘들다’며 스스로의 앎을 비아냥 거리곤 하니까. 슬프게도.
_

똑똑한 여자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걸까. 확실히 독서는 나를 “인간”이게 하고 동시에 주변의 인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유롭게 하고 그래서 불안하게 한다. 숨쉬게 하고 아프게 한다.

곁의 속도가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을 때, 괴로웠지만 분리와 고독을 자처해서라도 스스로의 속도를 선택했었다. 
관계를 조율할 수 없을 때, 어쩌면 그 관계를 (떠나 보낼 수 없이) 너무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일종의 자아분열을 겪으며 너무 진지하게 너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사실 요즘이 그러하다.

“반항할 힘은 있었으나 자유로울 힘은 없었던” 젊은 날의 벨훅스. 이 불안을 이기고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선 더 힘이 커져야 하는 것이겠지. 
_

여자는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똑똑하면 미친다는 

저주는 오래부터 있었다. 여전히 그 저주는 힘이 세다.
무시하기 어렵다.

나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똑똑해지고 싶다.
다행이 아직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더 똑똑/사랑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4-15 1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똑똑한 여자는 생각이 많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생각들이 부딪히게 되면 내적 갈등에 겪게 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내적 상황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똑똑한 여자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공쟝쟝 2018-04-16 08:41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읽을 수록 남친이랑 멀어지고 있어요 힘드네요 ㅠㅠ
 
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 산처럼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7년에 만난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사람. 가네코후미코. 그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박열>. 영화를 본 후 박열보다 후미코가 더 짙게 마음에 남았었다. 깊이 매료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인물이 가진 매력과 함께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차였다. 내 안에 무엇이 그렇게 그녀에게 공명했는지 알고 싶었고, 평전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인 식민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던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후미코에게는 ‘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자신과 같지는 않았지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할머니 보다는 친근한 존재로서 곁에 있었다.(p.74)”

그녀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았다. 무적자, 일본인, 여성, 그리고 부모에게 마저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 어쩌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깊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후미코는 다른 이의 고난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에만 몰입되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울음을 울면서 타인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 사상이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통해 형성된 나의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인해주었을 따름이다. 나는 가난했다.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혹사당하면서, 가혹한 대우를 받으면서, 괴롭힘에 짓눌린 채 살아왔다. (p.114)”

나는 가난했다. 지금도 가난하다. 한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다. 꾸준히 이어지는 물질적 결핍. 나는 그녀가 가난해서 좋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후미코가 놓쳐버린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박열과 한참 사상운동을 하고 있을 때, 활동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그들의 경제생활을 고려하여 간이식당을 낼 것을 제안했다. 후미코는 자신들에게 처음 찾아온 행운을 즐겁게 승낙했다. “정말이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운명입니다. 나는 나물 무치는 법까지 연구했는데..(p.426)” 물론 식당을 낼 겨를도 없이 그녀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식당주인이 된다해도 그들이 부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가난과 싸우고, 생계와 싸우면서도 세계의 생겨먹음을 걱정하고 천황제와도 싸웠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싸웠다.

“이런 세상에서는 고학 따위를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소위 훌륭하다는 인간들만큼 하찮은 자는 없다는 것을 나는 명확히 알았다! 사람들에게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참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바로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지금껏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성들의 장난감이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p.115)”

기성의 가치관에 편입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살 수 없다면 훌륭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 거듭 마음 먹는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세상과의 투쟁.

나 또한 끊임없이 궁구하고 있다. 나 자신을 살면서 누군가와 연대하는 방법. 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헌신하는 방법. 세상과 싸우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방법..

“‘당신은 민족운동가이십니까... 나는 사실 조선에서 오랫동안 산 적이 있기 때문에 민족운동에 몸담고 이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조선인이 아니어서 조선인처럼 압박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3.1운동에 깊은 공감을 보였던 후미코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그것은 후미코가 자신이 밑바닥 체험과 피차별의 경험을 거울삼아 조선인의 해방운동에 지속적으로 깊은 공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기가 억압민족에 속해있는 까닭에 피억압 민족인 조선민족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124)”


내가 그녀에게 푹 빠진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솔직한 단호함이다.
당신과 함께 싸울수 있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다.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고 하여 섣부르게 그를 다 이해했다고 단정 짓지 않는 모습.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연민과 동정 또한 평등일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했던 박열은 빈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민족적 체험에 입각점을 두고서 열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 박열의 이렇듯 철저한 투쟁자세는, 지금까지 만났던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기성가치관에 대한 타협적 태도와 달리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자서전에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고서 “저다지도 그를 힘차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후미코는 박열이 “직접적인 민족운동가는 아니지만 언제나 자아에서 출발하여 그 운동을 위해 생명을 걸 수 있는 힘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후미코가 박열을 자신에게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후미코가 자기를 철저하게 투시함으로써 비전향 즉 반천황제를 꿰뚫고자 했던 데 비해, 자기 사상의 기저에 민족을 두고 있었던 박열은 그녀만큼 자아를 깊이 있게 탐색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은 내셔널리즘으로부터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억압받은 식민지 민족의 구성원에게는 개인의 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하는 과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민족과 개채로서의 자아의 관계를 심도 있게 묻지 않은 것이 박열이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 조선민족으로부터 이반하여 천황제에 굴복하고 전향한 내적원인이 아니었을까. (p.142)“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살기 위해 분투했던 후미코와 투쟁에 헌신적이었으나 자아를 탐색하는 데는 서툴렀던, 그러나 분명 탁월한 조직가이자 혁명가였을 박열. 그 둘의 마지막 모습이 같지 않았던 이유는 두 사람이 처한 민족적 입장이 다르기도 했겠지만, 남녀 성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끊임없이 침해당하는 것이 기본값이었던 “여성” 후미코에게는 스스로의 안을 깊이 더듬어서 그것을 지켜내고 빛내며 살아가는 것-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박열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겪은 남성 동지들 중에는 ‘지키는 운동’을 하더라도 ‘확장’이 기본값인 경우가 많았다. 즉, 현상을 해결하고 일이 잘되게 되는 데-타인을 설득하는 것-중심을 둔다.

“....동시에 여자로서도 박열에게 만족하고 있었기에 몇 가지 문제를 뛰어 넘어 박열과 함께하는 죽음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미코는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서도, 한 달에 60전 이상 차입해줄 여유가 있다면 박열에게 주고 싶다. 뭔가를 먹게 하고 싶다. 자신을 포함에서 동료들의 박열에 대한 몰이해가 실패의 희생물로 그의 쇠약한 신체를 옥사에 갇히게 하고 말았다고 말한 뒤 ‘그가 뭔가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랍니다. 그의 부탁은 가능하다면 뭐든 들어주세요’라면서 박열에 대한 아내로서의 생각을 적고 있다. (p.312)

사랑꾼 후미코. 부러워서 열심히 연표를 뒤적인 결과, 스물 세 살의 짧은 생애 동안 박열과 함께 살았던 시기는 대략 1년 6개월 정도.. 한참 뜨거울(?) 때 형무소가 갈라놨으니 이 절절한 편지가 더욱더 이해되는 바,
그렇다 하더라도 재판장에서 마저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 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박열 후미코 재판기록 748족)” 

이런 뜨거운 고백을 할 정도인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흐흐.

영화 속 대사와 책속의 이 구절은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여전히 내 마음을 떨리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에게서 머무르지 않는다. 투쟁하게 한다. 연대하게 한다. 각자의 이상을 실현시키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녀의 사랑은 박열 개인에 대한 사랑임과 동시에 일본 천황제(일제는 천황제를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곧바로 제국주의로 나아갔다)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이자,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연대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실행해 보’는 것 이에는 그것을 시험할 만한 적당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리얼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실천가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생각, 자신이 말한 것만은 모조리 실행합니다. 적어도 실행해보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말이나 훌륭한 논리가 내 앞에 널려있습니다. 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말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실행의 시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확실한 것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실행해 봅니다. 한 곳에 고착되지 않고 흐르면서 자신의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는 나는 내일 일을 걱정하여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영악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어제 말한 것에 얽매어 오늘을 말하고 싶은 것을 거둬들일 정도로 갇혀있지도 않습니다. (p.308)”

그녀는 실행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고, 또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녀의 삶과 그녀의 사상은 일치했다. 그녀의 일관됨이 좋았다.

“불령사 동인의 회합 장소였던 박열의 집에는 ‘불령사’라는 표찰이 당당하게 걸려있었다. 이층벽에는 붉은 잉크로 커다란 하트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안 에는 검은색으로 ‘반역’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씌어있었다.(p.168)”

시대가 그들을 반역자로 몰지 않았다면, 다소 급진적인 자신들의 생각을 이처럼 개구지게 표현하면서 앳된 스물세 살의 얼굴을 하고 살아갔겠지.

슬픔과 고난으로 엉겨붙어있는 그녀의 짧은 생을 사랑한다.
평등과 존엄을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서 살아보고자 했던 그녀와 같은 사람 덕분에, 나는 감히 아직까지는 ‘모든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선언이나, 제도가 아니라 - 자신이 선언하고, 평생 지켜가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를 닮아가고 싶다. 정말로. 


p.5-6
자신의 삶을 초점으로 하여 사회적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실천적 삶을 통해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개인의 삶은 ‘역사적 삶‘으로 비약한다. 그리고 역사적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쉼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당신들은 당신의 생명과 정신의 진정한 주인인가? 주어진 삶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노예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나 체게바라 그리고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 등은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이 부여한 삶이 ‘노예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기꺼이 탈주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정신의 파르티잔이다. 새로운 삶과 사유를 꿈꾸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정신의 파르티잔! 그들은 필연적으로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인 삶에 안주하는 범인들의 눈에 그렇게 비칠 따름이다.
그들에게 이상은 현실처럼 구체적인 모습이었을 터.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과 <미성년>에서 낙원에 대한 그리움 없이는 인간으로서 살 자격은 물론이고 죽을 자격도 없노라고 예언한바 있지 않은가.

(p.7)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이유에 기초하여 ‘연약한 성을 지닌’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런 전제 위에서 내게 제공되는 모든 은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상대를 주인으로 간주하여 시중드는 노예, 상대를 노예로 간주하여 딱하게 여기는 주인, 이 둘 모두를 나는 배척합니다. 개인의 가치와 평등한 권리 위에 선 결속 그것만을, 오로지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상호간의 정당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타인의 모든 교섭을 그 기초 위에서 구할 것임을 나는 다시금 소리 높여 선언합니다.

p.126
근대 일본인은 서구의 근대에서만 인간해방의 이념을 구했다. 근대일본은 일본문명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조선인을 멸시하거나 아니면 무관심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렸다. 그것은 서구의 문명대국을 정점으로한 세계지배와 차별구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구조속에서 자신만이 ‘선진국민‘으로 올라서기만 하면 그 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환상 속의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미코는 역으로 일본문명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일원인 박열의 모습에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세계의 지배질서 맨 밑바닥에 놓여있던 인간의 해방을 향한 길에서 자기 해방을 서로 포개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길이었다.

p. 310-11
˝그러나 나에게는 백 명의 동지보다 나 한사람의 자아가 훨씬 소중했으며, 설령 적과 우군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아 감옥문을 넘는 순간 자살을 한다 해도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라고 그당시 후미코는 생각했던 것이다.
박열과 그녀의 사상에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박열의 행위가 실패함으로써 자신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미코가 그와 함게 죽겠노라고 각오한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대역사상을 갖고 있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사상적 차이를 뛰어넘어 박열과 함게 투쟁해야할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앍ㅋㅋ당했다.. ㅋㅋ

근래에 가진 문제의식과 비슷하다 생각해서 역시 갓희진 정희진 만세 하며.. 
허겁지겁 읽었는 데.. 결론: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답 같은 건 없대..

단호하게 책 마저 다 끝나버림ㅋㅋㅋㅋㅋㅋ

하긴 신자유주의가 답이 어딨겠니..
다만 엊그제 읽은 띵문이 생각난다. 

“젠더에 대한 문제의식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나 계급에 대한 문제 없는 페미니스트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내 삶이야 말로 
“젠더 감수성없는 페미니스트에 계급의식없는 마르크스주의자”아닌가 싶어졌다..
오늘 저녁은 희진언니가 알려준 대로 절망이나 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택하지 않을 자유 - 결혼과 비혼에 관한 새로운 태도
이선배 지음 / 허밍버드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월에 오빠와 토론을 위해 함께 읽은 책. 비혼주의에 대한 주장이나 비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많이 나올 줄 알고 골랐는데, 제목이 ‘선택하지 않을 자유!’ 임에도... 의외로 ‘결혼하는 것도 추천’하는 (게다가 저자는 결혼했다. 반전) 내용도 담고 있다.

확실히 세상이 변했다. “결혼 언제하냐?”는 질문 보다 “결혼 그걸 대체 왜하려고 하니?”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듣고 있으니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가지고 있던 질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얄팍한 수준이나마 함께 ‘고민하고 읽고 나누려 한다’는 사실에 안심했을 뿐이지.

읽고 나서 둘이 하나는 확실하게 합의했다. 결혼과 출산은 별개의 사건! 이라는 것. 확실히 취직-결혼-출산-육아 등등 결이 다른 많은 것을 하나로 도식화 시켜 그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수행하며 살아가기엔 사회가 너무 살기 어려워진 것 같다. 일단 취직부터 걸리는 걸 뭐.

결혼제도 또한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 시류에 휩쓸리듯 비혼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는 것, 저자가 개인들에게 그것이 결혼이든 비혼이든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하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해 더욱더 진지한 고민을 하길 제안하는 동시에 “(결혼/출산)선택할 수 있는 자유” 또한 보장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대책을 촉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읽고난 뒤 나의 고민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되었다. 소위 “며느리, 엄마, 아내”로 이름 붙여진 당위적 역할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크다는 것과, 그것을 제외 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살아가는 것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두가지가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결혼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결론. 오빠는 책을 읽다가 불편했다고 했다. 결혼하자는 입장이 큰 만큼 기본적으로 ‘비혼주의’에 대해서 곱게 보고 있지는 못하는 듯.


p.136
안 낳을 선택권과 마찬가지로 원한다면 낳을 수 있는 선택권도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p.133
결혼과 출산은 별개의 사건이다.

p.180 결혼과 가족은 다시 정의된다.
결혼은 영속적 개념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그 시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확대-축소되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혼을 ‘여성들의 교환을 통한 남성집단의 통합‘으로 본 레비 스트로스의 고전적 정의가 과연 현대 사회에서 통할 지 의문이다.

p.231
“전 그냥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요. 결혼이란 형식을 빌리든 아니든 상관은 없어요. 그런데 전형적인 한국식 며느리, 아내, 엄마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그 사람과 날 닮은 아이가 낳고 싶어지면 낳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설령 우리 중 하나가 돈을 벌지 못하거나 뜻이 맞지 않아 헤어진다 해도 큰 걱정 없이 키울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 어째서 그를 견뎠을까 [현남오빠에게]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무타 카즈에 지음, 박선영 외 옮김 / 나름북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알못의페미니즘책추천 

3번째 책은 역대급으로 쉬운책이다
.......... 음..... 난이도 별반개(☆). 

요즈음의 미투에서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실수하지 말아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은 남자들(부장급의 중년 뿐만 아니라도 남자라면 누구라도)이 읽고 공부하기 좋다.

'여자들은 도대체 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지 않는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부터, '이런것도 성희롱이라고??' 풍부한 예시(남자 입장-여자입장 비교), 심지어 성희롱 가해자로 연루되었을 때 대처법과 (소송까지 안당하려면 이렇게 해라) 좋은 변호사를 고르는 법까지.. 이쯤되면 거의 가해자 입장(!)에서 썼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친절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떠먹여줘야 하나 싶을 정도지만, 그래 모른다는 데(!) 정말로 잘 모른다는 데.. 알려줘야지. (한숨) 가해자가 끝까지 몰라서 제2,3의 피해자가 생기면 안되니까. 지인 중에 미투지목 당하면 어쩌나 걱정되는 사람이 있다면, 사서 손에 쥐어주면 좋겠다. (난 남친에게 주기 위해 읽었다. 응???..)

"(p. 58) 관리자나 교사는 직장 환경, 학습환경을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감정을 ‘이상하다’,‘지나친 생각’이라며 전적으로 부정해버리면 그야말로 성희롱이 되고 맙니다."
"(p. 270)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당사자도 관계자도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겐 어떤 문제도 없었다, 나는 ‘누명‘을 쓴 피해자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은 당사자. 당사자 이상으로 사태를 낙관하는 관계자, 멀직이 떨어져 제삼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립‘이고 바른태도라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 실제로 그들은 악의나 이해심과 상관없이 성희롱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자는 후기에 본인이 성희롱 2차 피해자 였던 체험을 적고 있다.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으로 일을 중도 하차하게 되면서 본인이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역시 피해 당사자가 아닌 상황을 수습해야하는 중간자의 입장에서 속시원하지 못하게 대처했던 경험이 있다. 무지해서 부족했고, 부족해서 무지했었다. 당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몇년이 흐른 후, 페미니즘에 자꾸 눈이 갔던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그리고 미투를 통해 알게되었다.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p. 73-75) 둘만 있을 때는 “좋아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뒤에서 껴안는 상사. 그런데 이 여성은 애처가인데다 아이들도 잘 돌보고 일도 자라는 그 상사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의 고민이란 “그가 고백을 하거나 몸을 만져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고, 마치 남의 일처럼 사태를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 성희롱이라고 느껴 혐오감이 일었다면, 이를 거절할 강하나 의지가 생겼을 텐데…. 자신의 ‘경박함’이 이 여성의 고민입니다.
이 상담에서 우에노씨는 “그것은 성희롱”이라고 딱 잘라 답변했습니다. “이 여성은 의지할 상사를 잃을까 두려워 싫은 일을 싫다고 느끼지 않도록 감각을 차단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뿌리깊은 문제”라고.
(...) 이렇게 “나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여성이 특별히 자존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흔한 일입니다. 여성은 정말 ‘성희롱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겁니다. (...) 아마도 이 사례엔 복잡 미묘한 심리가 작동할 겁니다. 이 여성은 스스로 걱정하고 있듯 “무의식중에 상사에게 존경 이상의 마음을 가져 자신의 매력을 알아줬다는 사실에 기쁜”마음이 있는 겁니다. (...) 따라서 이 경우는 객관적으로 보면 성희롱, 하지만 당사자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는 회색지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달라질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상사의 행동이 점점 강도가 세져서 “모르겠다”로 그치지 않게 될지도 모르고, 상사에게 환멸을 느낄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성에게도 똑같이 행동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흔한 계기입니다). 그 때 여성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내게 해온 것은 성희롱이었다”고 느끼게 되겠죠."

"(p. 147) 존경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힘은 대놓고 보수와 징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말을 듣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를 만드니까요.
남성 쪽은 자신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성 신입사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는 여학생 입장에서는 그 남성이 뛰어난 수완가나 우수한 학자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 남성은 촌스러운 아저씨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샐러리맨 혹은 교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사장님이나 거래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가정에서는 그다지 존재감도 없습니다. 그런 자신이 상대방이 싫은 일이라도 무조건 따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에겐 그런 힘이 있다’고 평소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인의 자격이 없는 자아도취형 인간입니다). 더군다나 젊고 예쁜 여성이 자신에게 그렇게 생각해준다고는 미처 상상도 못합니다. 여기에서 합의를 둘러싼 착오가 생깁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존경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 존경의 시선을 ‘자신의 매력‘으로 셀프 착각해, 그 여성을 성적으로 취할 허락을 얻은 듯이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힘이란, 가지고 있는 쪽에서는 그것을 잘 모른다. 또한 상대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종종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선배고, 상사며, 금전을 더 가진 권력자다. 지위나 나이차를 이용한 은근한 내리누름. 혹은 그것에 따라 오는 선망의 시선. 공기처럼 포진 되어있는 위계에 ‘성‘이 개입되면 언제고, 문제는 생길 수 있다. 위계에 따른 갑질문화, 만인이 만인을 서열로 나누는 문화가 팽배해져버린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당신은 언제고 생각해야한다. 당신이 공기같이 누리고 있는 ‘힘‘을 어떤 존재를 침해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는 지.

물론, “전혀 객관성도 없이 단지 상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해서 성희롱이 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p.58)”다. 그러나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 해도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의 당연한 매너(p.58)”다.

이제 껏 눈치는 약자가 강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눈치는 강자가 약자에게 피치못하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먼저 조심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눈치 좀. 제발 눈치 좀.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진지하단' 소리좀 그만했으면...
너의 진지함이 여성이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자. 전국의 모든 부장들이여 적읍시다. 여성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p. 105)
이렇게 착각에서 연애 모드로 폭주하는 남성들이 하나 같이 하는 소리란 “나는 진지하다”입니다. .... 여성들을 침대에 밀쳐 넘어뜨릴 대도 “나는 진심이다”, “장난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 진심이든 아니든 여성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 그런 쉬운 것을 왜 모르는지 여성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그러니 남성은 “나는 진심이다”라며 섹스만이 목적이 아니다, 너를 가볍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자신의 성실함을 어필합니다. 남성은 그걸로 상대 여성이 안심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성의 ‘진지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실제로는 속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 남성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 여성은 전혀 기쁠 리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 말할 것도 없이 남성이 진지하다고 그것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진심이다”라는 대사가 성희롱의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