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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렌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 정작 프레드는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고 그만큼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


"<로렌스 애니웨이>에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의 벅참을 찬미하는 낭만적 열기와 그 일이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냉철한 통찰이 다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로렌스 무엇이건(Laurence Anyway)'이다. 이 이름은,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길(any way)'을 택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다. 로렌스는 프레드를 잃은 뒤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더 분명히 말하자면, 로렌스 그녀는 행복해보인다." 



예전에 로렌스애니웨이를 볼때 나는 프레드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깊은 밤 거실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으면서는 스스로를 로렌스의 상황에 깊이 대입하고 있었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수록 나를 사랑하는/던 이에게 끊임없이 상처주고 있음을 느낀다. 
나의 변화는 곧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관계의 변화이자 필연적으로 그의 변화를 요구한다.
나의 변화를 감당하기 벅차하는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안쓰러움과 섭섭함. 
가끔은 분노. 때로는 무력감.


자기 자신을 살지 못하게 하는 관계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나의 변화를 수용하라는 것 또한 “사랑”다운 모양새는 아닐테다.


시간과 속도에 대한 존중, 만족할 만큼 충분히 많은 대화 정도로 노력해보자,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나도 그도 본인 스스로들을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한다면.. 
사랑해도 헤어지는 것이 맞다. (물론 자아 또한 관계안에서 만들어지는 운동태 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평생 나 하나 사랑하는 것도 빠듯하듯 
일생을 바쳐 한 사람을 온전하고 정확하게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한번 뿐인 삶인데,
기왕이면 가장 좋은 사랑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

서로로 인해 성장하고, 너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결국 우리의 변화를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는 너무 어렵다. 영화 속의 그들 처럼 매일매일 싸운다. 부디 서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나를 살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중이다. 
각자의 삶을 살며 연대하기. 
그렇게 사랑을 더 심화시켜 나가기.
어쨌든. 애니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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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그런말을 했었다. 사람이 겪어버린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란 이미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 같은 것이라서 한쪽에 치워둬야 한다고. 그걸 완전히 없던 일로 할수는 없고, 이미 일어나 버린 것이기에 상처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질하고 걸레질하여 한쪽에 모아두고, 무심코 밟지 않도록 넘어다니거나 비껴 다녀야 한다고.

심리치료는 그 유리 파편들을 잘 쓸어 담아 보이는 곳에 치워두는 작업이며, 이후에 우리는 그걸 인식하고 헤집어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어쨌든 적어도. 상처가 일상을 초과하지 않도록. 그 것이 나의 평범한 하루를 해치지 않도록. 삶은 날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펼쳐져 있는 그 일과 사건들을 분초 단위로 겪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라서.


2월 이후, 미투 이후.. 사실 어쩌면 페미니즘에 감응하기 시작한 이후 부터, 한쪽으로 치워둔 상처들을 자꾸 다시 헤집는 느낌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 할 수 없었던 사건들, 사건들 속의 그들,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 문제들 속의 각 개인들.

그 땐 그것이 상처인 줄 몰랐으나,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상처받아 왔으며, 언제부턴가 시작된 무기력과 우울감, 되풀이 되는 꿈들도 시작을 좇아가니, 그 날들 이후였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분노 했어야 하는 데,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분노할 대상과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내 잘못과 부족을 탓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알고 서야 조금은 정확하게 분노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극찬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이면. 사람이 가진 다양한 얼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사회에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혀가며 힘주어 말할 수 있었던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이 너무 따뜻해서 였을 것이다. 따뜻했다. 좋아하는 민중가요 가사처럼, 좋은 이들과 함께 한다는 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전부. 내 전부 같은 좋은 이들이 좋았다. 우리를 괴롭히는 적들만 없으면 우리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공통의 적을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낭만적인, 한껏 사랑할 수 있는, 그럴 수 있었던 날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지독한 패배주의.

*

가끔은 내 안에 이렇게까지 서늘한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괴적인 냉소로 내 사람들을 공격할 때가 있다. 
난 그런 내가 싫다.

그런가 하면 또 그는 나다.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인지, 
한 쪽으로 치워놓은 채로 조심조심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사실은 정신적으로 힘들다.

겨우 슬픔으로 바꿔 놓은 감정이 다시 날이 서게 끔 하는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누군가들은 계속 싸운다. 나는 포기하려던 것을 다시 움켜잡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사실은 분노할 마음의 에너지가 없을 뿐더러.. 방향도 방법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를 좀 해야겠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

그나마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것은 지금의 상황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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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빗소리가 톡톡톡 좋았는 데, 오랫만에 오빠랑 본 영화도 너무 좋았고, 3월의 첫 월요일인 내일이 개강이라도 하는 듯이 설렜는 데, 차분했는 데, 저녁무렵에 지인의 부음 소식을 두 차례나 들었다. 가깝지 않았으며 이미 많이 멀어진 사람들이라 슬프다기 보다는 믿기지 않아 얼떨떨 하다. 

사실은 너무 이상하다.
언제부터 타인의 죽음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20대 시절의 나에게 부음은 분명 생각이 많아지는 이슈였던 것 같은 데.

삶에 관한 소식들. 시작에 관련된 축하와 죽음·장례식에 가야하는 빈도수가 거의 비슷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당연해 하지 않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경건하게 하는 기도” 정도가 아닐까. 물론, 나에겐 종교가 없다. 그러나 삼가 기도 드리는 것 말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인용된 문장에서 처럼, 감사를 위한 기도는 아니다. 의례적이지 않은 애도를 위해 내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무언가로서의, 기도.

고인의 명복을.
마음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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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보면서 나를 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독히도 나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요즘 나에게는 무한대한 시간이 주어져 있다.
이 시간 동안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다.
소중한 시간들이다.

하지만 워낙 무관심했기에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또한 연습이 필요하다. 부단한 노력이다. 

실낱같은 가능성을 부여 잡아가며 가닥가닥 매듭짓는다. 자책으로 빠지지 않아야 하니까, 스스로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싶으니까.


*


그토록 ‘왜’ 스스로에게 무관심했는가를 따져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건 대답이 아니라 그냥 살면 되는 거니까.

서걱서걱. 적고, 쓴다. 그러다 배고프면 읽고.


*


친구들과 자기분석 모임을 하면서, 놀랄 때가 있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타인들이 바라보는 <나>사이에 
너무 많은 간극이 있는 것 같을 때, 그 때. 아득해진다.

내가 나를 몰랐다는 것.
내가 나에게 무관심 했다는 것. 
누구에게 미안해야 하는 걸까. 
나에게? 나와 관계했던 모든 이들에게?


*


“일이 되게 해야한다”는 미명하에 스스로를 설득시켰던 자신과 – 타인에 대한 폭력의 흔적들.
그 때는 몰랐다. 문제들에 대해. 허겁지겁 배고파 음식을 삼키듯 모든 문제들을 대했다. 
기다릴 수 없었다. 
인내하지 않았다. 
조심스럽지 않았다.


*


요가 시간에 배운 대로 숨을 들이킨다. 
조금씩 나눠서 내뱉는다.

눈앞에 닥치는 문제들을 묵혀두고- 익혀둘 수 있을까. 
아직은 읽지 못하는 외국어로 적힌 책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P. 40)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속에 풀리지 않은 채로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고 대하라는 것과 그 문제들 자체를 굳게 닫힌 방이나 지극히 낯선 말로 적힌 책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먼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해답 속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가슴속에 삶을 특별히 행복하고 순수하게 짓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쪽을 향해 매진하십시오. 그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커다란 신뢰로 맞아들이도록 하세요. 그것들이 당신의 의지에서 나올 때, 즉 당신의 내면의 어떤 욕구에서 나올 때에는 그것들을 미워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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