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48) 나는 애도가 언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애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이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꿨다. 그는 성공적 애도가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는 의미라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원래 우울증과 관련되어 있는 incorporation이 애도 과제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나는 대상의 완전한 대체 가능성을 우리가 지향하기라도 하듯이 다른 사람을 잊는다거나 다른 무엇이 대상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아마도 애도는 미리 그 변화의 본격적인 결과를 알 길이 없는데도 그런 변화를 겪겠다고 (어쩌면 변화를 감수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동의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뭔가를 잃는다는 경험이 있는가 하면 또 상실이 초래하는 변화라는 결과가 있다. 후자는 그려질 수도 계획될 수도 없다.”

“(85) 내가 ‘너’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 너를 알려면 나의 언어가 부서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내가 ‘우리’를 소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너는 이 방향감각의 혼란과 상실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다. 다시 또다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서.”

-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폭력, 애도, 정치>


사랑해서 아픈 거였더라고. 아픈 거 보기 싫다 치우라는 마음이 사랑을 없던거라 밀어내버리는 미운 마음이라 어찌나 분노했던지. 애도할 겨를도 없었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더 미안했어. 10년 전 그때는.

삶이 사랑과 이별과 애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슬픔과 고통을 쉽게 몰아내는 게 아니라 느끼고 인정하고 내 안에서 숨쉬게 살려둘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많이 변했어. 내 세계는 변했고… 그래도 잃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면서 그렇게 기억하는 중이야. 어쩌면 온전히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고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은 순간에서 또 나는 변하겠지만.

작년에는 <너와 나>를 봤어. 영화 보고 나서 그냥 그 말 해주고 싶더라고. 나도. 나도 사랑해🎗️


마지막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이 되게 해주는가? 우리의 위치와 역사가 다르다 해도, 내 생각에는 "우리"라는 말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어설프게나마 "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상실을 경험했다면 그것은 뭔가 소유했다는 것,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욕망을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4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4-04-16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틀러 책, 참 좋네요. 저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러고 다시 봤더니 맨 마지막 페이지는 마리 루티 문장인가보다 ㅋㅋㅋㅋㅋㅋ맞나요? 고통에의 직면, 정면승부는 어려운 일이죠. 제대로 해내는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난, 생각합니다.
단지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의 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겠죠. 다시 쓰지만....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쉽게 만나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쟝쟝 2024-04-16 22:49   좋아요 2 | URL
고릿적 ‘우울증적 이성애‘ 때 부터 버틀러의 애도와 기입(incorporation, 합체라는 번역을 참을 수 없다)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 데... 그걸 이렇게 정치철학적 비평으로 풀어내니... 버틀러... 넘...🥹🥹😩😩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의 재난이란 911이란 말이죠. 911이후의 미국의 왜곡된 애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엇나갔는 지 어렴풋한 기억이 있고... 당시 ‘느닷없이 공격 받았다는‘ 미국 내의 정서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직면하기 힘든 미국의 어떤 징후(피해자의 오만..이라고 정희진의 워딩가져와봅니다)를 드러내는 버틀러의 정치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온전해지자.‘ 가 아니라. ‘우리 모두 상처 입었으므로 취약함을 살피자‘고 하는. 것은. 사실 고차원 적이죠. 아름답다와 별개로.

맞습니다. 마지막 검은 캡처는 루티(ㅜㅜ 그를 애도중인 나)입니다. 마리 루티나 제가 고통에 정면 승부 하자는 아니고요. 저는 10년 전의 ‘세월호‘를 떠올리면 일베와 장례 자체를 유난 떤다고 하던 어떤 사람들의 신경질적임이 생각 나거든요. 애도할 겨를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 조차 참을 수 없어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문장이라 가져왔어요.

고통 혹은 고통의 곁의 곁까지는 사실. 엄두 안나고. 다만 저는 애도요.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과 충분히 헤어지면서 혹은 간직하면서 다른 내가 되는 것요.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애도하는 일에 가혹해지지 않고 싶습니다. 음. 헤어짐의 고통은 소중합니다. 몸에 기입된 사랑의 흔적이니까요. 그건 재난이나 참사가 아니라도 언제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이기에. 거기서 ‘어설픈 우리‘를 도모해보자고 하는 버틀러의 제안을 찬찬히 따라 읽어가도록 해보겠스읍니다.
 


그 문장이 왜 나를 불러 세우느냐면.
그 목소리가 왜 들리느냐면.

불렀으니까. 나를. 쓰는 그 사람이.
들렸으니까. 나는. 쓰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어떤 마음으로 누구를 부르는지.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더 잘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당치 않게도 내가 불렸다고 느끼는 사람은.

글씨의 사실은
비어있음을. 행간을. 백지를. 그 공백을 읽어보려 애를 쓰지.

그러므로 베유의 이 문장은 정말로 베유가 부르는 까닭에 가깝다.
비어있다면.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 달라는 말. 그가 간절하게 부르는 사람.
실은 그것이 읽는 이의 엉큼한 쾌락이라는걸.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적어 보낸 편지들을 모조리 도둑질해서 쪽쪽 빨아먹는 기분. 아니, 그가 부르는 것이 나라고 착각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면서.


#그렇게읽어도되냐고물으시면
#그렇게읽을때잘읽힌다
#도둑맞은편지가아니라도둑질한편지ㅋ


라캉이 기독교는 ‘진정한’종교라고 설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모든 것과 관련해 탈-존 한다. "그는 탁월한 탈-존입니다. 즉 간단히 말해 사람으로 나타난 억압이며, 심지어 억압 속에서 전제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진리인 것은 이와 관련해서 입니다." - P203

라캉은 여기서 "나는 ‘스스로 있는’ 나", 즉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가시덤불이 들려준 대답을 가리키고 있다. 라캉은 이것을 시니피앙이 결여되어 있는 지점, 상징적 질서에 구멍이 있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고 있다. — 그리고 이것은 강력하게 재귀적인 의미로, 즉 신은 우리의 언어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는 심원한 현실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은 단지 상징적 질서(큰 타자) 안에 있는 이 결여일 뿐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성한 ‘나는 스스로 있는 나’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실제로는 데카르트적 코기토, 빗금 처진 주체를, 언표된 모든 것에 의해 드러나는 언표의 이러한 순수한 망실점evanescent point을 예시하고 있다. 이 아무것도 없음無 — 그것의 대리인(또는 플레이스 홀더 place-holder [빠져 있는 다른 것을 대신하는 기호나 텍스트의 일부])가 *대상a*이다. - P204

이 사랑의 초점 또는 베유(Simone Weil)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이다.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타자의 분열…

나으분열… (읽어말어) 지젝어렵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은 실재계의 자리에 서서 라캉 정신분석학을 사회학으로 도약시키고 있다. 라캉이 주체와 욕망의 문제에 머물러 있는 사이, 지젝은 그 주체들을 둘러싼 상징계의 구조적 배제를 다룬다. "라캉이 말하는 주체화는 철저하게 순수 욕망과 연관되며 소외되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정립하는 과정인 데 반해, 지젝의 주체화는 결국 정치적 주체화, 즉 프롤레타리아 주체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김석, 2014:34). 지젝이 정신분석학 가운데 라캉의 이론을 따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라캉은 주체의 분열뿐만 아니라, 주체를 분열시킨 그 대타자조차 분열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2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상징계의 이데올로기가 실재계에 의해 전복되는 근거를 밝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의 이성이나 인식, 합리성의 문제를 넘어 실재계의 욕망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비록 ∼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인 듯이’ 행동하는 이유는 무의식과 실재의 문제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구조화하는가를 주로 다루었지만, 개인의 심리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루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답을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찾은 것이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실천 없는 냉소주의만 난무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씌어졌다. 책의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결국 지젝은 ‘행동하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멀리서 마르크스를 불러들이고, 포스트주의자들의 냉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헤겔과 라캉을 동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4-01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짓뿌렁~!! 🤣🤣

공쟝쟝 2024-04-02 09:15   좋아요 0 | URL
라고 뻥치고 싶지만 진짜라서 한숨..

단발머리 2024-04-02 0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 페이퍼도 만우절 이벤트? ㅋㅋㅋㅋㅋㅋㅋㅋ 어렵다! 뻥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4-02 09:20   좋아요 1 | URL
아…. ㅠㅠ 철학 입문서들과 원문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아는 데… 하우투 리드는 너무 재밌어서… 지젝은 날 괴롭히지 않을 거라 믿었는 데….. 레스토랑에서 한잔하면서 지젝은…… 나는 이 돼지감자놈이!!!! 야 그만해… 그만ㅋㅋㅋ 이러면서 읽고 있고 내일 반납일이고… 승부 본다… 남자가 어려워봤자.. 푸코만 하겠어… 현대 철학 대부분이 푸코보다 더함ㅋㅋㅋ 푸코 제일 나음ㅋㅋㅋ 어렵다 = 진심
그러나 난이도 지젝 <<<<<<< 내 인생
ㅋㅋㅋㅋㅋ 투덜투덜… 완독 일독에 체크합니다! 단발님 기다려영🚶🏽‍♀️
 

동생들한테 심심하다고 깨똑을 남겼지만 돌아오는 건 눈물의 여왕이나 시청하라고. (이미 다 했다는 말은 차마 못 남기고….) 고독해서 사유와 이해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그러나 날씨 너무 좋은 주말 투데이 오후 3:48분:
“칭찬받고 싶지 않아요. 이해받고 싶을 뿐이죠.”
하지만 누가 나를 이해해 주나. 그럴 땐 나도 이해 안 되는 지젝이나 읽자. 😩 #헤겔레스토랑 가야지.. 터덜터덜…!!🚶🏽‍♀️🚶🏽‍♀️🚶🏽‍♀️

“(21) 한나는 고독해야만 사유와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22) 한나는 이념적 사고라면 깡그리 거부했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적 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과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몸소 알려주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려고하기보다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결과 한나의 저서를 읽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정치 전통의 틀 안에서 한나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인데, 사실 한나의 관심은 오로지 ‘이해‘였으며 이처럼 규정하려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멀리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복잡한 과정으로 올바른 정보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활동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현실을 감내할 수 있다.”
“(25)“제 생각으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와 닮은 점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 한나는 사유하는 방법, 즉 행동을 멈추고 최근의 경험과 내 마음속 두려움, 욕망을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을 뿐이다.”

#한나아렌트평전 #사만다로즈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4-03-31 2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렌트의 관심이 ‘이해‘였다는 것에 저도 밑줄을 긋고 싶네요. 오로지 ‘이해‘. 필요한 건 ‘이해‘.....

공쟝쟝 2024-04-01 09:52   좋아요 1 | URL
그리고 그녀는 우리들의 이해의 대상이 되었다 🥺
 

내가 ‘나는 나다!’라고 말할 때 존재는 찢어진다. (여기서 존재Seyn는 주체와 객체의 결합을 표현한 말이다) —> 휠덜린의 질문을 헤겔은 아래와 같이 정리하는 데…

p.49 (반성하는 주체를 반성 이전의 존재로부터 분리시키는 비극적 간극을 존재 자체 속으로 옮겨 놓으며)  *‘존재’는 분리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때 나타난다*.”

여기서 타자화와 대상화의 문제 ㅋㅋㅋㅋ 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고요… 아주 간단한 깨달음을 적고자 하는데😩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당신이 헤겔 철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진지한 서양 철학의 독자들은 다 기독교인 (혹은 천주교인 혹은 종교인?)인걸까요. (지금 멘붕)

그르니까 나 같은 쌩유교걸은 없나요? (내면은 없고 수행성만 있는 본투비유교걸ㅋㅋㅋㅋ 수행성 개념보다 주체와 자아의 개념이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이해하기 더 어려웠던 존재 자체가 포스트모던인자 ㅋㅋㅋ who? 바로 나.)

가설을 세우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까지 가지는 못하겠지만.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 기도하는 내면이 없는 사람에게.  근대란? 자아란? 아니 한국의 (플랫폼+) 신자유주의라는 조건이란? 아 우리는 성공하는 개인이 되기에는 너무 너무 너무 집단이(천만 영화) 아닌가. 
질문 하나인데 파생된 질문 백 다섯개ㅋㅋㅋ

서울사람(;;;ㅋㅋ 더는 속지 않을 테다ㅋㅋ)이 되기로 결단하면서 글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n회 차의 상담을 끝내면서 주체가 되고 자아와 내면이 생긴 기분이더라. 그러고나니 읽는 책들은 모두 해체를... 권하고... 응? 여튼 내가 스스로를 구축/탈구축해 오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한국인에게. 나 같은 (신앙이 없는, 돈도 없는, 학부생 정도의 교육만을 받은, 읽거나 쓰는 것에 습관이 들지 않은,  자기만의 방 혹은 사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건지다. 

내가 제3세계 유교걸 어쩌고 하는 질문을 할 때면 친구는 여기는 이제 1세계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문제는. 민주화와 산업화(근대화) 모두에 성공해버렸다는 것. 그때부턴 내가 헤쳐온 어떤 상황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재미(라고 해야 하나. 고통과 쾌락이라고 해두자)는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를 미리 1세계의 선배들이 다 겪고 싸우고 때로는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치열하게. 무튼 그렇게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때다. 그건 현재 진행 중이며. 여성으로서의 나는 그들의 언어와 투쟁에 빚지고 있으며, (“초기 개척자의 사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읽기로 연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나를 포함한 한국 여성들의 몫이다.) 

지젝이 설명하는 독일관념론(철학) 흥미롭다. 음… 이걸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이 질문-존재-이 중요했을 종교적 베이스를 갖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한국에 이런 책이 번역까지 되어 있는 걸 보면 이게 궁금한 사람들이 공부를 했기 때문일터인데 이런 걸 누가 읽고 왜 읽는지가 문득 궁금ㅋㅋㅋ 존재라니요? 읭??? 심지어. 존재-언어. 그러니까 철학을 왜 공부하는 걸까. (나는 덜 진지한 편… 여전히 말장난 같다는 느낌을 받는 현타가 오는 거다. 중요한 거는 알겠는 데 마음이... 내 ... 마음이.... 대충 띄엄띄엄 읽기로 마음 먹음ㅋㅋㅋㅋ)
책에서 지젝은 최근 헤겔의 진지한 독자이며 관련된 명저를 쓰는 사람들이 모두 여성(말라부, 코메이 + 내가 알기로는 총명한 헤겔리안 주디스 버틀러ㅋㅋ)이라는 코멘트를 달고 있다. 왜 그럴까 나도 궁금하네. 

할튼 실은 라캉의 성차이론이 궁금했던 나는 어쩌다보니 좌파 지젝 less than nothing을 또 지 맘대로 스피박의 전략적 본질주의ㅋㅋㅋ와 겹쳐서 읽는 중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 문장에서의 고집스러운 질문들의 포인트는. 뭐랄까. 내 안에서 헤어지는 것의 어려움 사실은 분리되고 싶지 않음  따위라고 해두자.  

<서백남들이 차린 망하기 직전의 레스토랑ㅋㅋㅋ 표지가 재밌어서 찍어뒀다.>


궁극적 분리는 주체-객체의 분리가 아니라 바로 (주체-객체의) 분리와 통일 사이의 분리이다. 따라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공식을 ‘분리와 비분리의 분리’로 보충해야 할 것이다. 일단 이러한 단계를 완수하면 접근 불가능한 재귀 이전의 근거로서의 존재는 사라진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는 궁극적인 재귀적 범주로서, 자기 관계적인 분리의 결과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존재’는 분리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때 나타난다.* - P49

나는 정신분석과 헤겔 변증법이 상호작용(라캉을 통해 헤겔을 읽고 거꾸로 헤겔을 통해 라캉을 읽는 것)을 통해 서로를 구출하리라는 것에, 익숙해진 허물을 벗고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하리라는 것에 내기를 걸었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음과 같은 바디우의 주장이 이 책의 좌우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철학자 라캉은 철학의 재탄생의 조건이다. 오늘날 철학은 오직 라캉과 양립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 P53

즉 라캉은 자본주의의 가짜 위반들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현실이 기반하고 있는 환상들의 진상을 밝혀냈다. 하지만 라캉의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는 운명적으로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라캉을 통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큰 과제는 이런저런 버전의 주인 담화에 의해 다시 포획되지 않을 저항의 공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 P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