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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 산처럼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7년에 만난 인물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사람. 가네코후미코. 그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박열>. 영화를 본 후 박열보다 후미코가 더 짙게 마음에 남았었다. 깊이 매료되는 대상이 있다면, 그 인물이 가진 매력과 함께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차였다. 내 안에 무엇이 그렇게 그녀에게 공명했는지 알고 싶었고, 평전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인 식민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던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후미코에게는 ‘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자신과 같지는 않았지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할머니 보다는 친근한 존재로서 곁에 있었다.(p.74)”
그녀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았다. 무적자, 일본인, 여성, 그리고 부모에게 마저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 어쩌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깊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후미코는 다른 이의 고난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에만 몰입되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울음을 울면서 타인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회주의 사상이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통해 형성된 나의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확인해주었을 따름이다. 나는 가난했다.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혹사당하면서, 가혹한 대우를 받으면서, 괴롭힘에 짓눌린 채 살아왔다. (p.114)”
나는 가난했다. 지금도 가난하다. 한번도 부자였던 적이 없다. 꾸준히 이어지는 물질적 결핍. 나는 그녀가 가난해서 좋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후미코가 놓쳐버린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박열과 한참 사상운동을 하고 있을 때, 활동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그들의 경제생활을 고려하여 간이식당을 낼 것을 제안했다. 후미코는 자신들에게 처음 찾아온 행운을 즐겁게 승낙했다. “정말이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운명입니다. 나는 나물 무치는 법까지 연구했는데..(p.426)” 물론 식당을 낼 겨를도 없이 그녀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식당주인이 된다해도 그들이 부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가난과 싸우고, 생계와 싸우면서도 세계의 생겨먹음을 걱정하고 천황제와도 싸웠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싸웠다.
“이런 세상에서는 고학 따위를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소위 훌륭하다는 인간들만큼 하찮은 자는 없다는 것을 나는 명확히 알았다! 사람들에게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참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바로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지금껏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성들의 장난감이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p.115)”
기성의 가치관에 편입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살 수 없다면 훌륭할 필요도 없다는 것.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 거듭 마음 먹는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세상과의 투쟁.
나 또한 끊임없이 궁구하고 있다. 나 자신을 살면서 누군가와 연대하는 방법. 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헌신하는 방법. 세상과 싸우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는 방법..
“‘당신은 민족운동가이십니까... 나는 사실 조선에서 오랫동안 산 적이 있기 때문에 민족운동에 몸담고 이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조선인이 아니어서 조선인처럼 압박당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3.1운동에 깊은 공감을 보였던 후미코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그것은 후미코가 자신이 밑바닥 체험과 피차별의 경험을 거울삼아 조선인의 해방운동에 지속적으로 깊은 공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기가 억압민족에 속해있는 까닭에 피억압 민족인 조선민족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124)”
내가 그녀에게 푹 빠진 강력한 이유 중 하나는 솔직한 단호함이다.
당신과 함께 싸울수 있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다.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고 하여 섣부르게 그를 다 이해했다고 단정 짓지 않는 모습.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연민과 동정 또한 평등일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했던 박열은 빈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일본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민족적 체험에 입각점을 두고서 열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 박열의 이렇듯 철저한 투쟁자세는, 지금까지 만났던 일본인 사회주의자의 기성가치관에 대한 타협적 태도와 달리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자서전에 후미코는 박열을 만나고서 “저다지도 그를 힘차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후미코는 박열이 “직접적인 민족운동가는 아니지만 언제나 자아에서 출발하여 그 운동을 위해 생명을 걸 수 있는 힘을 가진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후미코가 박열을 자신에게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후미코가 자기를 철저하게 투시함으로써 비전향 즉 반천황제를 꿰뚫고자 했던 데 비해, 자기 사상의 기저에 민족을 두고 있었던 박열은 그녀만큼 자아를 깊이 있게 탐색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은 내셔널리즘으로부터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억압받은 식민지 민족의 구성원에게는 개인의 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하는 과제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민족과 개채로서의 자아의 관계를 심도 있게 묻지 않은 것이 박열이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 조선민족으로부터 이반하여 천황제에 굴복하고 전향한 내적원인이 아니었을까. (p.142)“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살기 위해 분투했던 후미코와 투쟁에 헌신적이었으나 자아를 탐색하는 데는 서툴렀던, 그러나 분명 탁월한 조직가이자 혁명가였을 박열. 그 둘의 마지막 모습이 같지 않았던 이유는 두 사람이 처한 민족적 입장이 다르기도 했겠지만, 남녀 성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끊임없이 침해당하는 것이 기본값이었던 “여성” 후미코에게는 스스로의 안을 깊이 더듬어서 그것을 지켜내고 빛내며 살아가는 것-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박열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겪은 남성 동지들 중에는 ‘지키는 운동’을 하더라도 ‘확장’이 기본값인 경우가 많았다. 즉, 현상을 해결하고 일이 잘되게 되는 데-타인을 설득하는 것-중심을 둔다.
“....동시에 여자로서도 박열에게 만족하고 있었기에 몇 가지 문제를 뛰어 넘어 박열과 함께하는 죽음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미코는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서도, 한 달에 60전 이상 차입해줄 여유가 있다면 박열에게 주고 싶다. 뭔가를 먹게 하고 싶다. 자신을 포함에서 동료들의 박열에 대한 몰이해가 실패의 희생물로 그의 쇠약한 신체를 옥사에 갇히게 하고 말았다고 말한 뒤 ‘그가 뭔가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랍니다. 그의 부탁은 가능하다면 뭐든 들어주세요’라면서 박열에 대한 아내로서의 생각을 적고 있다. (p.312)
사랑꾼 후미코. 부러워서 열심히 연표를 뒤적인 결과, 스물 세 살의 짧은 생애 동안 박열과 함께 살았던 시기는 대략 1년 6개월 정도.. 한참 뜨거울(?) 때 형무소가 갈라놨으니 이 절절한 편지가 더욱더 이해되는 바,
그렇다 하더라도 재판장에서 마저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 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박열 후미코 재판기록 748족)”
이런 뜨거운 고백을 할 정도인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흐흐.
영화 속 대사와 책속의 이 구절은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여전히 내 마음을 떨리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에게서 머무르지 않는다. 투쟁하게 한다. 연대하게 한다. 각자의 이상을 실현시키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녀의 사랑은 박열 개인에 대한 사랑임과 동시에 일본 천황제(일제는 천황제를 바탕으로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곧바로 제국주의로 나아갔다)에 대한 목숨을 건 투쟁이자,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연대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실행해 보’는 것 이에는 그것을 시험할 만한 적당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리얼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실천가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생각, 자신이 말한 것만은 모조리 실행합니다. 적어도 실행해보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말이나 훌륭한 논리가 내 앞에 널려있습니다. 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말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실행의 시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확실한 것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실행해 봅니다. 한 곳에 고착되지 않고 흐르면서 자신의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는 나는 내일 일을 걱정하여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영악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어제 말한 것에 얽매어 오늘을 말하고 싶은 것을 거둬들일 정도로 갇혀있지도 않습니다. (p.308)”
그녀는 실행을 통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고, 또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녀의 삶과 그녀의 사상은 일치했다. 그녀의 일관됨이 좋았다.
“불령사 동인의 회합 장소였던 박열의 집에는 ‘불령사’라는 표찰이 당당하게 걸려있었다. 이층벽에는 붉은 잉크로 커다란 하트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안 에는 검은색으로 ‘반역’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씌어있었다.(p.168)”
시대가 그들을 반역자로 몰지 않았다면, 다소 급진적인 자신들의 생각을 이처럼 개구지게 표현하면서 앳된 스물세 살의 얼굴을 하고 살아갔겠지.
슬픔과 고난으로 엉겨붙어있는 그녀의 짧은 생을 사랑한다.
평등과 존엄을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해서 살아보고자 했던 그녀와 같은 사람 덕분에, 나는 감히 아직까지는 ‘모든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선언이나, 제도가 아니라 - 자신이 선언하고, 평생 지켜가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를 닮아가고 싶다. 정말로.

p.5-6 자신의 삶을 초점으로 하여 사회적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실천적 삶을 통해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개인의 삶은 ‘역사적 삶‘으로 비약한다. 그리고 역사적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쉼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당신들은 당신의 생명과 정신의 진정한 주인인가? 주어진 삶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노예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나 체게바라 그리고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 등은 기존의 제도와 가치관이 부여한 삶이 ‘노예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기꺼이 탈주의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정신의 파르티잔이다. 새로운 삶과 사유를 꿈꾸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정신의 파르티잔! 그들은 필연적으로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인 삶에 안주하는 범인들의 눈에 그렇게 비칠 따름이다. 그들에게 이상은 현실처럼 구체적인 모습이었을 터.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과 <미성년>에서 낙원에 대한 그리움 없이는 인간으로서 살 자격은 물론이고 죽을 자격도 없노라고 예언한바 있지 않은가.
(p.7)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이유에 기초하여 ‘연약한 성을 지닌’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런 전제 위에서 내게 제공되는 모든 은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상대를 주인으로 간주하여 시중드는 노예, 상대를 노예로 간주하여 딱하게 여기는 주인, 이 둘 모두를 나는 배척합니다. 개인의 가치와 평등한 권리 위에 선 결속 그것만을, 오로지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상호간의 정당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와 타인의 모든 교섭을 그 기초 위에서 구할 것임을 나는 다시금 소리 높여 선언합니다.
p.126 근대 일본인은 서구의 근대에서만 인간해방의 이념을 구했다. 근대일본은 일본문명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조선인을 멸시하거나 아니면 무관심의 저편으로 추방해버렸다. 그것은 서구의 문명대국을 정점으로한 세계지배와 차별구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구조속에서 자신만이 ‘선진국민‘으로 올라서기만 하면 그 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환상 속의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미코는 역으로 일본문명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일원인 박열의 모습에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대세계의 지배질서 맨 밑바닥에 놓여있던 인간의 해방을 향한 길에서 자기 해방을 서로 포개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길이었다.
p. 310-11 "그러나 나에게는 백 명의 동지보다 나 한사람의 자아가 훨씬 소중했으며, 설령 적과 우군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아 감옥문을 넘는 순간 자살을 한다 해도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라고 그당시 후미코는 생각했던 것이다. 박열과 그녀의 사상에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박열의 행위가 실패함으로써 자신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미코가 그와 함게 죽겠노라고 각오한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대역사상을 갖고 있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사상적 차이를 뛰어넘어 박열과 함게 투쟁해야할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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