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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ㅣ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평점 :
11월 쯤의 야근(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업무 량)은 상상을 초월해서, 엄마랑 넷플릭스로 워킹데드를 보며 이런 대화를 했다. 엄마. 저거 좀비들, 죽여도 죽여도 또 나오잖아?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나오잖아? 저거 우리 회사같아. 나좀 살려줘. 저 사람들은 죽기라도 하지, 니는 죽지도 못해야. 그러네, 맞네. 좀비영화 보다 현실이 더 무서웠다. 엄마 엄마,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좀비물이 인기가 많다는 분석이 있대, 나는 왜 그런지 느낌으로 알것 같아. 게다가 한국 좀비는 겁나 빠르잖아? 왜 빠른지도 알것 같다니깐? 내가 뭐라고 하건 말건 상관 없이 이미 워킹데드에 빠진 엄마는 오메오메 징그러워라! 라고 하면서 시즌2까지 끝내버리셨다. 나는 드라마를 볼 체력마저 다 쓰고 오는 날들이었으므로 좀비물을 보는 엄마를 구경하다 잠들었다. 엄마는 좋겠네. 저거 시즌10까지 있다? 서울 올 때 마다 한시즌씩 봐.
(후일담 : 2달 뒤, 시즌3를 내놓으라는 엄마에게 스위트홈을 틀어드렸고. 엄마는 흡족해 하셨다. 그 후로 2달이 또 흘렀고.. 나는 백수가 되어 내일 본가에 넷플릭스 깔아드리러 내려간다. 시간 난 김에 고향 집에 넷플릭스 하나 놓아드려야겠어요, 아버지랑 오손도손 좀비물 보시라고...)
***
“OO씨 꼴초 다됐네요?” 자주 옥상에서 담배를 나눠피던 동료가 놀렸다.
그는 입사 초반엔 내가 담배를 피우는 지도 몰랐다고 했다. 하루에 세개피 정도 피우던 담배가 퇴사 할 때 쯤엔 사흘에 한갑으로 늘어있었다. 맞네, 내가 헤비스모커네, 하지만 담배는 죽으려고 피우는 게 아니랍니다? 살려고 피우는 거지. 우리는 안 피우면 죽어요, 스트레스로. 흡연은 폐에는 나쁘지만 허리와 척추 건강에 좋다는 통계가 있는 거 알아요? 봐봐, 우리도 주기적으로 허리 펴러 일어나잖아. 니코틴이 딱 땡길 때 허리 쫙~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아는 거죠? 제가 이상한거 주워읽고 유리한 것만 기억하기를 잘한답니다? 의외로 취미가 독서거든요. (취미없는 모든 사람들의 취미는 영화와 독서이기 쉬우므로 보통 그런가보다 하고 대화가 넘어가야하는 데, 갑자기) 저도 취미가 독서인데, 무슨 책 읽으세요?
무슨 책을 읽냐고요?? (순간 당황) 그 당시 읽고 있던 “1.성의 역사요*” 라거나 “2.페미니즘 책이요**”라고는 대답할 수가 없었으므로 (*예상답안 1-1: 성의 역사? 하고 많은 역사 중에요? 제가 관심이 많아요. 특별히 성에 대해. 👉🏻 이후 섹드립을 날릴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므로 괜히 드립을 날렸다가 사회생활이 서먹해질 수 있었음. / 예상답안 1-2: 그 책은 어떤 내용인가요? 네 이 책은 미셸 푸코라는 머리카락 없는 사람이 지은 책인데, 총 4권이고 성의 역사에 대해서 다루는 데 내용은..... 👉🏻 문제는 당시 나는 책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음. 98%는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설명도 할 수 없는 책을 읽는 사람의 심리에 대해서 설명하다보면 역시 다음 날 부터 사회생활이 서먹해질 수 있었음) (**예상답안 2-1: 페미니즘이요? 혹시 당신이 그 말로만 듣던 메갈..? 👉🏻 그런 넌 한남? 👉🏻 역시 사회생활이 어려워질 수 있었음. 예상답안 2-2: 페미니즘 🤔 하고 다음날 부터 담배 동료가 나를 피하기 시작하고...역시 사회생활이 서먹해짐. 예상답안 2-3: (만에하나) 저도 페미니스트예요. 👉🏻 이건 내쪽에서... 그냥 마음의 거리가.. 사이가 서먹해질 수있음..) (*** 여하튼 이 모든 계산은 매우재빠르게 1초만에 머릿속에서 이루어졌다ㅋㅋㅋ) 저는 두꺼운 책을 읽습니다. 두꺼울 수록 의욕이 돋더라고요? 라고 말을 돌리며
“아, 모르겠다. 빨리 때려치우고 밀린 책이나 읽고 싶네요.” 라고 대꾸하는 데,
가만 이거 어디서 들어본 대사인데? 뭐였더라.
는 몇년 전에 본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이라는 웹툰이었다. 내가 아마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으로 유료 결제까지 해서 본 웹툰일것이다. 주인공은 조폭에 잠입한 경찰인데, 독서가 취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서모임에 나가고 있다.
계속 해서 쌓이지 해결이 안되는 업무 폭탄💣 “지쳤어.. 이런일들..”
잔소리 총알이 피융피융🔫 “다 때려치우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래처의 전화 🛎 “어서 밀린 책이나 읽고 싶네…”
나는 어쩐지 그날의 대화 이후로 마치 좀비를 물리치듯 조폭들과 대결하며 밀린 책을 읽고 싶어하던 독서 중독자 주인공이 문득문득 머릿속을 지나가곤 했더란다. 웹툰의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 데, 그의 피로한 표정과 이중생활이라는 설정은 선명했다. 현대인이란 누구나 이중/삼중/사중생활을 하겠지만, 회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던 그 즈음에 내가 느꼈던 자아분열은 최고조에 달해서 내 사회생활용 페르소나가 진짜 나로 굳어진 것 같은 기분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더더욱이 그랬다..
아무튼 그렇게 악전고투하며 최고조로 바쁜 11-12-1월을 보내고,
마지막 뼛속까지 남은 기력을 곱게 갈아서 우려 내어서 차로 타드리고,
나는 퇴사를 하였지롱.
해피엔딩,
벚꽃엔딩.
***
그리고 실컷 책을 읽었냐고요?
물론 처음 사나흘 정도는 의욕적이었읍니다!
읽고 싶은 책들 목록을 적으며 흡족했지요!
이제 나에게는 이걸 다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우하하!!! 하면서...
***
근데, 왜지?
왜.... 저번 달과 이번 달에 읽은 책 권수가 별반 다르지 않지?
갑자기
.
.
열린결말..?
물론, 독서는 하고 있다. 근데...
이거 저거 의식의 흐름대로 뒤적이다보니.. 정작 완독한 책은....
엉?? 나 이렇게 살아도 돼?
갑자기 자책을 할뻔 했으나, 이젠 그러지 좀 말자라고 가까스로 생각했다.
그제는 <노멀피플>을 읽고 슬픔에 허우적 거리다가 천장을 보게 되었다.
하얀 집천장에 미세한 무늬가 있다는 것을 처음알게 되었다.
아!!
?
!!!!
쉬는 것마저 열심히 할필요가 없다는 진정한 돈오가 찾아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
누워있다.
누워만 있다.
계속.
누워있다.
글도?
누워서 쓰는 중이다.
...
...
귀찮다.
...
다
귀
찮
다
.
그리고 귀찮아도 된다.
세상에서 나한테 뭐라고 할 사람 나밖에 없다.
나만 그짓을 그만 두면 되는 거다.
***
어제는 위의 예의 담배동료가 카톡을 보내왔다.
OO씨. 잘 쉬고 있죠? 모하고 지내시나요.
나: 누워있어요.
휴식의 기쁨이네요. 아직도 누워있어요?
나: 당연히, 누워있습니다. 일어나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세시간째 누워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놀라실수 있겠지만 일어나기 귀찮아서 담배도 끊어진 상태예요.
.
.
.
그리고...
오늘도 역싀 누워있는 중이다.
사실 담배가 피우고 싶은 데...
나가기 귀찮아서.. 어쩌다보니 사흘째 금연....중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오늘은 그제의 깨달음이 두터워져서, 일어나지 않기로 해보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려면 일어나야하니까 폰으로 누워서 웹툰을 보기로 했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을 다시 결제했다. 작가는 찐이다. 이 사람. 진짠데? ….
나 요즘 딱 저자세로,
저런 상태, 저런표정이다?
읽고 싶었던거 다시 읽기.
다시 읽고 다른 감동먹기.
자랑자랑 자랑자랑 자라라라랑
하기 싫은 거 안하기
하고 싶은 거만 하기
자랑 자랑 자자자랑
회사 다닐 때는 엄청 책 읽고 싶었는 데,
막상 쉬면서 슬슬 회사독이 빠지기 시작하니까,
책에 대한 열망이 500%에서 50% 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
사회에서 든 병이 조금씩 빠지나보다.
기분이 좋다.
지쳤어, 이런일들... 다 때려치우고 어서 밀린 책이나 읽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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