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148)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괴상한 동기라도, 동기가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범죄의 거대한 규모를 뒷받침하는 극악무도한 악이 존재하는 효과가 생긴다. 반면 동기가 없다고 가정하면(혹은 아이히만의 출세욕처럼 부적절한 동기를 상정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자체가 진부해지고 평범해진다.* 대량학살의 배후에 혐오스러운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편이, 아무 이유도 없을 때보다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실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통은 애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이 말은, 이 태도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나몰라라 하겠다는 것 역시 당연히 아니다. 


현실직시—아렌트는 현실을 직면하자고 했는 데,—물론 나는 동의하지만— 그녀의 요구와 이미 벌어진 고통 사이에는 어떤 심연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래서 감정을 떼어 낸다는 것이 불가해 할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것도 같)지만, 그렇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주문이 끝끝내 모두가 저지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심오한 윤리적 태도라는 것을 감히 이해한다. 


내 생각에 … 그녀는 ‘진짜’로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나는 거칠게 이렇게 해석한다. 아렌트를 비정하다고 공감 능력이 없다고 짜증스러워했던 (당시의 남자) 평론가들은 고통의 곁에 가까이 있어보마한(뭐 그것도 어느 정도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해두기로 하자. 한국의 현실은 좌우를 막론하고 아이히만만 드글드글 하니까.)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150)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아이히만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존재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막을 둘러치고 ‘현실’ 자체를 차단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비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왜곡이나 회피 없이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만큼은? 그러니까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결국 나를 당신을 지켜보는 모두를 … 어떤 사유의 지평으로 떠민다. 동정과 연민에의 호소보다 불편하기에 무정하다 욕하지는 말자. 감정은 편하다(이건 자동 반응이니까) 사유는 불편하다(이건 노동이니까) 그러나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고유한 인식 방법이 있고 가끔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보기’라는 방식으로 연대를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너무도 불편하면 사유라는 불편한 노동을 해야 한다. 단 쉬운 사유방식이 아니라 안 해 본 방식의 사유(사유 자체에 대한 사유?)를 해보아야 한다. 그게… 그게 어쩌면 이 고통의 의미일지도. 감히.


그러므로 이 무정하고 터프하고 강인하고 멋있어서 죽겠는 아렌트를 꼭 읽어야겠다. (요 며칠 간의 나는 심각한 정신적 치임에 성 정체성까지 위협받았다. 언니, 날 가져요. 엉엉) 


다시 돌아와서.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고통 자체의 참담함 앞에 가해자의 비인간성을 지목하며 이것을 우리 모두는 반복하지는 맙시다라고 말하며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혹은 이 구조가 나쁩니다, 이 구조를 바꿉시다 하며 연대를 공감을 싸움을 촉구(대체로 매우 추상적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만이 고통을 직면하는 태도인가? 그것은 정말로 고통에 필요한 감정 이입인가? 


내가 아는 한 현재진행형인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는 용기와 결단이야 말로 오만이고 위선에 찬 나르시시즘이다. 모든 자아를 타자를 위해 통째로 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테레사 수녀라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 고통이든 욕망이든 상관 없이 유아론이다.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입하는 태도를 가져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환장하겠게도. 


현재 진행형인 고통. 리얼리티로서의 고통. 은 통째로 고통이므로 그냥 견뎌지는 것이지 어떤 함량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더 수월해지는 것도 까닭이 있다고 해서 더 참을 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매는 그 이유를 알고 맞아도 아프고 모르고 맞아도 아프고 첫번째로 맞아도 아프고 마지막으로 맞아도 아프다. 아프다. 아픈 거다.


그리고 그것은 끝났다. 다른 종류의 고통이 시작된다. 

왜.

상황이 심각해지면 육하원칙까지 간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왜 그랬던 걸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돌아와버리는 같은 질문들이 무한대로 반복되고 고통은 리플레이 된다. 때때로 나는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잊으라고 말하고 아직도냐고 묻고 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 곁을 괴롭히는 것 까지도 고통의 연장선일까. 나의 고통이 정말로 벗어날 수 없는 것 처럼 여겨지는 극점은 내 상처가 내 곁을 상처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다. 


어쨌든 나는 살아야 한다.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씻어야할 설거지가 있고 벌어야할 돈이 있다. 

더는 리플레이를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건 나에게 밥을 주지도 않고, 위안을 주지도 않으며, 답을 주지도 이미 벌어진 고통을 없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자기 혐오와 인간 혐오의 상태만을 부추길 뿐이다.


이제 사유의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이유를 찾지 않는다. 같은 말로 의미 역시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이유와 의미에 원인과 결과에) 내 생각에 고통의 핵심으로 곧장 진입하면 결국엔 이유가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붙잡는 것은 좀 서글픈 기대이고 어쩌면 최면이다. 그거 없이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환상과 판타지 없는 인생이란 황량하기 그지 없을 것과 같다는 비유까지 들어가며. 현대의 뇌과학은 인간의 뇌가 인과론에 얼마나 익숙하고 음모론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려준다. 고통으로 변해버린 뇌가 정당한 이유를 찾다가 결국 음모론으로 안착해버리는 것 까지도—고통의 효과라고 생각하면 고통에 치가 떨리지만. 


나에겐 아렌트가 있다. (그리고 푸코도 있는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하자. 현실을 직면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기운내 서 생각하고, 타자와 현실을 공유하고 논쟁하자. 나를 보호하는 것은 맞지만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보호하진 말자. 


이유를 묻지 않고 까닭을 찾지 않으면서도 고통에 취해버린 뇌의 운동 방식을 끊어내는 방법.

취하지 않는 방법. 도피하지 않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 혹은 사랑하는 방법 어쩌면 아렌트가 승리한 방법. 


나는 한나 아렌트를 읽을 것이다. (!!!)


먹고사니즘에 팍팍한 만국의 노동자(ㅋㅋㅋㅋ)들이 기를 쓰고 읽고 쓰는 것들이 지적 허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우리들이 읽고 쓰자. 살아야 하는 거니까. 쉬운 이유와 연민에 안도해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으니까.


덧붙임, 아래의 인용문의 아이히만에 조주빈을 넣어보자. ㅋㅋ



그러니까 이는 결코 "공감능력empthy이 아니다. … 다른 사람의 관점을 가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견해로 보면, 그건 아이히만이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물론 그의 증언만 봐서는 그에게 감정을 느낄 능력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아이히만이 마비된 양심으로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건, 유대인에게 자기 자신의 입장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가 있다는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아이러니는 비록 조롱을 통해서라도 복수성을 실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말 자체를 꼬투리 잡음으로써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누구나 볼 수 있을 거라는 전제를 깔았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무감정한 수사라는 점은 복수성과 공감능력 사이의 간극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렌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간극을 넘지 못했다.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괴상한 동기라도, 동기가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범죄의 거대한 규모를 뒷받침하는 극악무도한 악이 존재하는 효과가 생긴다. 반면 동기가 없다고 가정하면(혹은 아이히만의 출세욕처럼 부적절한 동기를 상정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자체가 진부해지고 평범해진다. *대량학살의 배후에 혐오스러운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편이, 아무 이유도 없을 때보다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 P148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현실과 접점을 유지하고 타자와 현실을 공유하고 논쟁하는 데 철저히 실패한 원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렌트가 정의하는 "공통감"이다. "아이히만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그의 무능력은 ‘사유’의 무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아이히만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존재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막을 둘러치고 ‘현실’ 자체를 차단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현실에 직면하게 만드는 부류의 사유에 저항하기 때문에 독일의 도덕적 붕괴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 아이히만이 봉사했던 체제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무사유가 지적능력의 결핍 또는 교육의 결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아렌트는 무사유가 천성이나 사회화보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이 구분은 《정신의 삶》에서 핵심적 개념으로 발전한다. 사유가 도덕의 보루가 되고, 따라서 당연히 교육받은 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질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언어 안에서 복수성과 구체성은 현실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방어막으로 함께 어우러져 작용한다. 복수성은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그 거울상만을 보여주지 않으며, 구체성은―아렌트가 진델 그린즈판의 증언에서 보았듯―인간이 왜곡이나 회피 없이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하게 해준다. - P150

현실은 언제나 복수성과 공통감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와 세계를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은 ‘무언가가 전체주의로 이끄는가 아닌가’라고 믿었기에,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숙고에 대한 아렌트의 처방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으리만큼 명징했다. *바로, 모두 함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있는 그대로 공유하려는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아마 더 중요한 점은, "미리 숙고하지 않은 주목"으로 현실을 보기 위해서는, 잠시 참여를 멈춰야 할 만큼 불편한 수난의 양식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타인의 관점에 대입해 현실을 시험하는 일 역시, 우리 자신의 관점을 보강하고 확장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는 가치를 내재하면서도 위험성을 지닌다. 복수성에 가치를 두는 사유자는 그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정성 또한 포용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성은 현실을 인지가능하게 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해주지만, 현실의 사실성 자체는 우리를 지독하게 견디기 어렵게 할 수도 있다. 현실을 지키는 방어막(복수성과 구체성)은, 그렇다면, 아렌트의 사유와 감정의 철학에서 가압지점이기 때문에 더욱더 투철한 검증을 받아 마땅하다. *방어막 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도덕적·정치적·심리적 위험성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실패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아렌트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수양해야 할 자질보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데 실패할 경우의 위험성을 훨씬 더 힘주어 상술한다. - P152

요점은 *정신이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은 감정이 드러나는 방식을 통제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격정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자제력을 수련해 길러야 한다".(LOTM, 72) 공적 삶을 감정으로 오염시키거나 도덕적으로 위험이 다분한 무사유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고통을, 그게 아무리 압도적인 고통이라도 그저 순수하게 참아내야만 한다. 암묵적으로 오로지 시간만이 격정을 잠재울 테고 압도하는 감정을 잦아들게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요를 기다리는 행위를 무사유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보기에 무사유는 고의로 생각을 하지 않는 행위다. 아니, 그보다 사유를 ‘미루는’ 짓이다*. 무사유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며, 대체할 만한 사유의 양식으로 위로하고 달래주는 사유를 제시한다. - P173

"현실 직시"는 클리셰처럼 들리고 또 실제로도 아렌트와 매카시가 생각한 과정의 역동성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클리셰로 전락한다. 아렌트의 현실 직시 개념은 칸트의 ‘공통감’에 근거한다. 합리적 존재는 그 자체로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진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시각을 능동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공유한다는 개념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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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대가 아닌 고독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강인한 우정(혹은 이상주의)에 대하여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2-06-07 01:55 
    자리에 앉자마자 왜 한나 아렌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각자의 빠짐 포인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이데거 쓰레기 자식을 도합 열 번 씩은 외치고… 벤야민 이야기를 하다 갑작스럽게 도나 해러웨이로 대화의 주제가 이어지면서 우리 앞에 구워지고 있는 것이 삼겹살이라는 사실에 잠깐 아이러니를 느끼다가… 또… 에 … 그러니까 도나의 심오함은 너무도 심오해서 육식의 성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입장과는 핀트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 않느냐고 뭔지는
 
 
바람돌이 2022-06-04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읽고 있는데 왠지 진짜 멋진 언니들의 모습이 잔뜩일것 같은..... 그렇네요. 뭐 한나 아렌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니까 말이죠. 공쟝쟝님의 한나 아렌트 읽기와 푸코 읽기를 모두 응원합니다.

공쟝쟝 2022-06-04 13:08   좋아요 2 | URL
네.. 베유로 맛보고 아렌트로 정점찍고 메리 매카시로 미학으로 승화시킨담에 조앤 디디온으로 반성까지 해버리는 진짜 너무 좋은 책인데… 번역을 좀 너무 어렵게 해놓은 것 같아요 ㅠㅡㅜ! 응원받고 독려갑니다! 바람돌이님두 열시미 읽고쓰시긔😍

다락방 2022-06-04 1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도 이미 이 책 갖고 있지롱요~ 읽기만 하면 된다!! 😤

공쟝쟝 2022-06-04 14:1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이미 터프하신데 또 뭘 더 읽어서 터프하실라고 ㅋㅋㅋㅋ

2022-06-04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4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4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4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5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6 0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6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6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emistry reading

푸코와의 케미스트리 리딩 1일 째... ㅋㅋㅋ 🤷🏻‍♀️ 애석하게도 그와 케미가 맞아버렸으므로(단발머리님 페이퍼 참조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639537 ) 변호를 좀 해야할 것 같다. 

이이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 처럼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외모는 대머리에 부정 교합(말과 사물 책 표지 보니까 턱이..?)까지 있는 듯 하지만... 

저명한 교수였음에도 경찰한테 처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ㅋㅋ 몸빵 시위를 즐기는 용감한 좌파였으며ㅋㅋㅋㅋ 

자신의 철학을 살기 위해 자기 변형(transformation of the self)을 위한 다양한 성적 실천(m..ㅋㅋㅋ...?)도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철.학.을 하셨던 분이신 거죠...

(255) 푸코에 따르면 철학은 현재의 진단학, 오늘의 진단학입니다. 철학은 이렇게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오늘 - 여기 -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데카르트, 칸트 등으로 대변되는 ‘고전철학’과는 다른 ‘니체 이후’ 철학의 특징입니다. 푸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이란무엇인가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문제를 탐구했던 고전철학과 달리, 자신은 오늘 - 지금 ‘우리’의 문제, 곧 오늘 우리는 누구인가? 오늘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라고 말합니다.


<상당한 위험>역자 허경님도 나 같은(?) 마음이셨던 듯. (이 사람 글케 이상한 사람 아녜효....) 책 각주에 붙어있길래 <처음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찾아읽었는 데, 푸코에 대한 오해를 안타까워하면서 글을 시작하신다 ㅜㅜ 이 글은 생각보다 더 친절하고 쉽게 푸코의 철학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셸푸코와 자기변형의 기술' 부분나중에 복습하려고 갈무리,,,


신자유주의페미인 나는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푸코를 읽어보려고 한다... 라고 말하면 거창하지만... 

이젠 못 살아남아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이 인간의 고약한 문체와 문제 의식을 즐겨보마 싶다. 


나에게 있어 철학이란 나 자신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살기, 읽기, 쓰기, 친구들과 대화하기라는 도구로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했)고, 이건 삶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언제나 세계와 협상하는 문제였다. 나의 철학함이 일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만나는 전선(?)은 투표를 하거나 재테크를 하는 것이 아닌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것 이다. 


어차피 독서란 나 혼자하는 거고, 결국에는 글쓰기도 나 혼자하는 거였는 데, 그걸 깜빡할 뻔 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니까, 푸코 어렵다고 엄살 부리지말고 방법을 찾자. 방법을!  



푸코를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원으로 간단히 규정해버리는 시각은 푸코를 전공하지 않은 미국학자들의 관점을(본의든 아니든) 무비판적으로 흡수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략) 사유의 대부분을 거의 늘 근대에 대한 연구로 일관했기에 푸코에게는 ‘탈구축‘이 아니라 오직 ‘문제의 재구성 reconstruction‘ 혹은 ‘재再문제화 reproblématisation‘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탈구축이라는 말은 데리다와 데리다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상가에게 엄격히 한정해 써야 하는 용어이지 푸코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한편 용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이 역시 이른바 ‘탈구축주의 =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국 학자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범주로 묶기에는 좀..) 해체주의 아님 - P246

푸코의 사유가 어떤 의미로든 ‘구조주의적 함축’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넓게 잡아도 1969년에 나온 《지식의 고고학》까지이며, 1970년에 행한 강연 ‘담론의 질서’에서 푸코는 명시적으로 언어학적·기호학적·구조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 니체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담론 분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1975년에 나온 《감시와 처벌》을 구조주의적 저작으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요약하면, 푸코의 사유를 포스트 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은 우선 적지 않은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지칭 방식이고,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푸코에만 엄격히 한정해 불러야 합니다.
😫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포스트 구조주의는 <지식의 고고학> 까지만 - P248

푸코는 일단 우파 곧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중략) 푸코가 평생 지향했던 정치적 노선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좌파적 테제의 정립’ 입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좌파 자체의 몰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푸코는 잘 아시다시피 1970년대 이후 사르트르를 잇는 저항적 지식인의 대표이자, 엄청난 양의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는 등 지식인 투사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이는 푸코가 이론적으로는 좌파와 입장을 달리했지만, 실천의 측면에서는 늘 상당한 연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중략) 결론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마르크스 이후의 사유’라는 식으로 본다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은 옳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푸코의 사유를 ‘후기마르크스주의’라는 식으로 푼다면 어떤 경우에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은 그릇된 것입니다.
😫 푸코 당연히 우파 아님. 마르크스주의 아닌 좌파라서 그래ㅋㅋ - P249

푸코는 하버마스가 자신을 ‘비합리주의자’로 바라보는 게 자신이 하버마스가 유일한 합리성의 형식으로 생각하는 헤겔적 혹은 의사 소통적 합리성을 유일한 합리성 자체의 양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보고, 이를 ‘계몽주의의 협박‘이라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결코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며, 다만 합리성의 객관성, 보편성, 절대성, 유일성만을 부정하는 것이죠. 따라서 푸코에게 합리성의 형식은늘 복수複數이자, 다수多數의 형식, 곧 합리성‘들‘이라는 형식 아래에서만 나타납니다.
😫 하버마스 거부ㅋㅋㅋ 비합리주의 아님 ㅋㅋ - P251

그렇다면 니체와 푸코는 상대주의자 아닌가? 상대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수 있는데요. 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는 이미 고등학교나 어딘가에서 배운 ‘상대주의는 나쁘고 우리는 상대주의에 머무를 수 없다‘는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학습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니체의 주장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구분 자체를 공격하는 니체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아닙니다. 즉 니체에게는 절대와 상대의 구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인데, 니체의 주장을 이러한 논의가 옳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유의미한 말이 될 수 있는) ‘상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논점 선취의 오류라는 것이죠.
😫 니체의 관점주의 방식을 채택함, 진리는 구성된 개념일 뿐 - P259

우선 유의해야 할 점은 ‘권력의 계보학’이 이전 시기의 ‘지식의 고고학’을 다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푸코는 이전의 지식을 버리고 권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 - 지식’ pouvoir-savoir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늘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권력 - 지식의 복합체를 말합니다. 이렇게 푸코는 어떤 하나의 이전 개념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 이전 개념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기존의 개념을 부분 집합으로 넣습니다.
😫 푸코는 사유의 가성비를 추구...(응?) - P263

관련된 또 하나의 오해는 이러한 푸코의 관점이 미시적인 작은 권력들에만 사로잡혀서 정작 중요한 권력의 거시적 차원을 방기한다 혹은 그러한 차원에 대해 무력하다는 비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푸코의 미시 권력관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푸코의 미시 권력관은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이 탄생한다고 주장하며, 거시적 것은 이러한 무한하게 작은 미시적 권력들의 효과로서 드러나는 권력 현상의 가장 가시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푸코에게 거시 권력은 미시 권력이라는 보다 커다란 권력에 모두 포함되는 가장 가시적인 영역입니다. 마치 뉴턴의 거시 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완전히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한 함수로서 일정한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있는 것 처럼 말이죠.
😫 거시 정치를 바꾸려는 이유는 일상의 미시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관점에 기인한다 + 권력의 경제주의적 관점 비판 +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ㅎㅎㅎ) - P264

"나는 지식과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1960년대 내가 지식의 고고학이라 이름 붙인 작업을 통해 수행했다. 그리고 권력 문제에 대해서는 1970년대 초중반 이른바 권력의 계보학을 통해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주체가 어떻게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게 되는가라는 주체화의 문제를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윤리의 계보학은 하나의주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 권력관계에 대한 푸코의 시선은 당연히 개인들의 도덕/윤리에 대한 사유를 배태하고 있었던 거다.... 아.... - P267

푸코의 윤리의 계보학은 한마디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혹은 됐는가?라는 주체화subjectivation 곧 주체의 역사적 형성historical formation of the subject이라는 문제를 다룹니다.(중략) 다시 개인의 주체화로 돌아오면, ‘성의 역사’ 시리즈에서 푸코는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설립하는 방식의 역사, 곧 윤리적 문제화의 역사를 분석합니다. *문제화problématisation란 주체가 만들어지는 방식인 주체화, 대상이 설정되는 방식인 대상화objectivation, 그 사이의 인식이 확립되는 과정인 인식론화épistémologisation를 모두 합해 부르는 푸코의 포괄적 용어*입니다.
😫 아. 이렇게 자기에의 배려로 나아갔던 것... . - P268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보다는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가령 푸코가 묻는 질문은 ‘대한민국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는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되었는가?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과 같은 사회로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입니다. 푸코의 탐구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계기들, 지점들, 문제화, 문제설정들을 분석하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화 혹은 문제설정에 대한 분석은 또 왜 하는 것일까요? 푸코에 따르면 자신의 이러한 모든 작업은 자기 변형 transformation of the self 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푸코는 트랜스포머입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것, 철학 활동의 목적은 자기가 배우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삶에 자기 몸을 다 던져서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 앍ㅋㅋ 미셸푸코 트랜스포머설 ㅋㅋ 모순적이어 보이지만 일관된 사상가 푸코 되겟슴.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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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1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푸코 어려운데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더 어려운데....ㅠ.ㅠ
그래도 푸코까지는 열심히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던듯요. 그래서 푸코 너무 멋지다 했던 기억이 저도 있네요. 하지만 푸코 이후 데리다, 들뢰즈 라깡 뭐 이런 사람으로 가면 내가 읽는 것이 한글이 맞는것이냐하던.....

공쟝쟝 2022-06-01 11:20   좋아요 1 | URL
안냐세요 바람돌이님... 어렵겠죠..? (저 쌩모른 채로 후기 저작 부터 읽은 사람ㅋㅋㅋㅋ) 그런데 뭐... 흑흑ㅜㅜㅜㅜ 일단 덤비려고요.(하다가 안되면 말자 싶은 느슨한 맘으로) 독서는 항상 어려웠는 데 제 기준엔 이리가레가 가장 어려웠어요. (푸코는 참고문헌이라도 많지...ㅠ_ㅠ)
제가 믿는 건 저 자신인 데, 10년 전에 저는 정희진 선생님이 어려워서 울고 싶었는 데, 지금은 꽤 많이 이해하거든요.... 거기엔 읽고 읽고 또 읽은 과정이 있어서 그렇게 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일단은 좋아하려고요. 좋아해야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데.들.라 는 좋아할 맘이 없...)

단발머리 2022-06-01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십만년 전에 어디선가... <말과 사물> 첨 나왔을 때, 프랑스 대학생 가방에는 모두 이 책이 한 권씩 들어있었다, 뭐 이런 이야기 어디선가 전해 듣고, 두 번 시도해 보았으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처참한 패배의 아픈 기억만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푸코와 친해질 생각은 별로 없으나 <광기의 역사>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서 그건 읽어볼 생각이에요. <말과 사물>은 쟝쟝님이 나 대신 읽는 걸로 하고요.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공쟝쟝 2022-06-02 12:38   좋아요 1 | URL
기묘한 행복…. 저도 이 자의 글쓰기와 문체에 대한 정복욕이 들어 읽어보마 하다가 왜 읽고 있지? 이러고 있습니다 ㅋㅋㅋㅋ 잔혹한 패배 예상 ㅋㅋ

다락방 2022-06-02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의 철학함이 일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만나는 전선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것‘ 이라는 공쟝쟝 님의 문장에 고개 끄덕이며, 저는 오늘도 저의 철학함을 깨닫습니다!

공쟝쟝 2022-06-02 12:44   좋아요 2 | URL
철학은 철학인데 정치는 정치인가봐요 … 지방선거 결과를 보며 한나 아렌트를 반드시 읽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점심입니다. 대중이나 정치 엘리트나 현실의 고통을 직면하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 인가봅니다. 자꾸 이러면 더 고통스러울텐데… 고통을 이기는 내성을 견디기 위해 매운 카레 먹는 중 ㅋㅋㅋ

scott 2022-06-06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싫습니다(유아성애자 !) 그러나 장쟝님의 푸코글은 스킵 할수가 없어요 ㅎㅎㅎ

공쟝쟝 2022-06-06 10:14   좋아요 1 | URL
사아실ㅋㅋㅋ 스킵해도 되지만 스콧님은 읽어줘~!!!
그 유아성애자가 가짜뉴스라는 보도도 있더라고요. 저도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 읽지 않으려 발버둥쳤으나.... 읽다보면 그의 무의식까지 알 수 있어질랑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해지려고 끝까지 노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알아가봐야겠죠... 케미리딩 6일째인데 진도는 처참하고.. 제 눈엔 실핏줄만 터져있고... 오늘은 일 빨리 끝내고 열심히 읽을거(라고 써놓고 일하기 싫어서 북플에서 놀고있네요.)

난티나무 2023-04-15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니 이 글 본 기억은 있는 듯한데 내 흔적이 없네요???@@
글고 으아니! 재밌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6 12:58   좋아요 0 | URL
재밌떠용? >_<
 
상당한 위험 - 글쓰기에 대하여 철학의 정원 40
미셸 푸코 지음, 허경 옮김 / 그린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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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까지 와서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그건 안사라지는 것 같아요.” 

라고 내가 좋아하는 말하는 장강명이 말했다. (부연 나는 쓰는 장강명은 싫은데, 말하는 장강명은 좋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NyXr8FHufqM)


“(50) 나는 글쓰기라는 매우 거대한 의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런 의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글쓰기는 의미가 없는 것, 있을 법하지 않은 것, 거의, 다른 어떤 것보다 불가능한 어떤 것, 여하튼 우리가 관련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을 무엇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 도달하고, 아마도 우리가 첫쪽을 쓸 때일까요? 천 번째 쪽을 쓸 때? (…) 그런데 우리가 자신에게 부과한 이 작은 분량을 쓰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일종의 사면을 행하게 됩니다.* 이 사면은 하루의 행복에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행복한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에 달려 있으며 약간은 다른 어떤 것, 곧 실존의 행복입니다. (…) 이다지도 허무하고 허구적이며 나르시시즘적이고 자신을 향해 침잠하는 이 몸짓, 다만 아침 나절을 할애해 탁자에 앉아 빈 종이 몇장을 채우는 이 몸짓은 어떻게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대한 축복이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요?” 


실존에 대한 사면으로 서의 글쓰기. 


오랫동안 쓰고 있는 나의 내면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했었다. 그런 자세로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썼던 건 일기였으니까. 800페이지는 족히 넘는 두꺼운 갱지 노트를 사서 이걸 다 쓸거라고 마음 먹었다. 불행 일기장. 그래, 불행하다고 느낄 때 마다 여기에 글을 쓸거다.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시작하며서 조건을 붙였다. 반성하지 않는다. 이 일기장에 만큼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지, 다 이해해.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고 모든 일 들을 다 그럴 수 있다라고 받아들이면서 정작 나한테는 안해줬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해. (누구를 위해서?) 어쨌든 그런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잔인하게 —그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믿으면서— 굴었던 적도 있다. 그러고 나서 자꾸 반성을 했다. 왜 이렇게 노력했는 데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닌지 내일의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당연히 오래 못갔다. 30년도 못살았는 데, 더는 이렇게는 못산다고 몸이 먼저 알려줬다. 


무기력 속에서 불행 일기를 쓰는 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을 거다. 내가 이렇게까지 허접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긁어팠다. 글을 쓰면서 반성하지 않는 것은 참 힘들었다. 어찌저찌 분노하고 슬퍼하고 짜증을 내다가도 결국에는 반성을 해버리더라. 종국에는 아, 그래 이게 나인가보다 했다. 그렇다면 대충하는 반성은 아니어야지. 나 자신을 충실하게 해부한 반성문 같은 800페이지의 불행 일기장을 끝끝내 다 쓰고 난 후에야, 나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착한 딸. 아디오스. 대략 30년치의 인생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것은 매우 가슴 아프지만 사실은 후련한 일. 

나는 나한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고, 룰루😎 사는 게 재밌다.


나는 글을 쓴다. 내가 쓰는 것에 홀딱 빠진 채로, 이 나르시시즘을 즐길 때(!) 안녕과 행복을 느낀다. 안써본 사람은 모르겠지만 써본 사람은 알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아니 쓸 수 없으니 주저 말고 쓰시기를. 어떻게든 혼자가 될 시간을 확보해서 악착같이 써보시길.


자 그렇다면 이제 푸코의 글쓰는 법을 알아보자(응?).

“(27) 내게 글쓰기란 죽음에, 아마도 본질적으로 타인의 죽음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글을 쓴다는 것이 타인을 죽이거나, 타인에 반하여, 타인의 실존에 반하여, 타인의 현존을 제거하며, 내 앞에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 주는, 어떤 결정적인 살인적 행동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전혀 아니지요. 내게 글쓰기란 물론 타인의 죽음과 연관된 어떤 일,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존재로서 이해되는 타인의 죽음과 연관된 어떤 일입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여? 조금만 더 읽어봅시다. 


“(28) 사람들은 나의 글쓰기 안에 자신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낍니다. 사실, 나는 그보다는 훨씬 더 순진한 편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사람들이 이미 죽어있다고 가정할 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닠ㅋㅋㅋ 얔ㅋㅋㅋ 이게 더 이상하잖앜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좀.. 스포될까봐.. 여기서 더 인용하진 않겠사옵니다만... 뒤에는 더한 문장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진짜 푸코 개웃김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 뭐가 웃겼는지 너무 말하고 싶은 데… 읽고 계신 분들 있는 것 같아서 암튼 푸코의 유머는 29페이지에서 폭발합니다. 이웃님들아ㅋㅋㅋ 혹시 저와 같은 포인트에서 빵 터지시면 댓글 좀 달아줘요. (나만 웃겨? 또 나만 웃긴거야?) 


이 대담집에서 푸코는 현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그는 무언가를 되살리기 위해서 쓴다거나 삶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죽은 후’에 쓴다고 대답한다. 과거가 죽었기 때문에 쓴다. 과거를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어버린 무엇인가의 진실을 드러내는 시체 부검이 자신의 글쓰기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조금은 비틀렸지만 묘하게 타당한 푸코 특유의 윤리 감각. 어쩌면 시시각각으로 이슈가 휘발되고 갖가지 정서들이 즉각적으로 몸을 훑고 지나가는 요즘과 같은 과잉연결 시대에 필요한 글쓰기 일지도 모르겠다고. 


음… 헌데 이건 조금 크게 본 것이고 나를 변호하기 위한 글을 좀 더 써보자면. 


나 역시 현재보다는 과거를 쓰는 편이다. 그렇게 해서 삶의 해석권을 내게 가져오려고 한다. 나는 감정 전염이 싫다. (쓰고 보니 이상하네 감정이 전염병도 아니고…. 예, 제가 바로 감정이 없었으면 좋겠는 로봇 intj입니다ㅋㅋㅋ) 무엇을 느끼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느껴야 할것만 같은 상황이 싫다. 아마도 내가 그것에 매우 취약한 성분으로 구성된 종류의 인간이라서 그럴거다. 내가 쓰는 건 일기랑 일기와 다를 바 없는 독후감이 전부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그것들이 대체로 다 끝난 후에라만 글을 쓸 수 있는 몸 상태가 되고, 그걸 쓰지 않으면 매우 힘들어지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과거에 대해 쓰면서 드러나는 진실이란 결국 특정 시점의 ‘나’에 대한 진실 일 수 밖에 없고. 그건 나를 발견하는 것임과 동시에 나의 병을 드러내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지나간 것. 내가 느낀 것. 그게 정말로 내 느낌이었는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감정에 언어를 입혀 적어두는 것은 거리두기를 하기 위함이다. —“(58) 일종의 맹목적 과업을 묘사하고 윤곽을 그려 내고 명확히 하는 일, 우리를 멀리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무엇인가를 다시 포착하는 일... 이런 비가시성. *너무나도 가시적인 것의 이런 비가시성. 너무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이런 거리두기*”— 그렇게 써두고 주입해놔야 비슷한 투사나 전염이 일어났을 때 이거 맞아?하고 나한테 물어볼 수(라도) 있어진다. 어떤 사건들을 적어도 예감하면서(?) 당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만. 배우는 거지 뭐, 내가 얼마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인지. 나라는 심란하게 너덜거리고 빈틈많은 성긴 존재의 실체를… 까먹으면 안된다. 못 살아남아. 나 자신을 사유하지 않은 채 눈 딱 감고 믿어버리기엔… 세상이, 너무, 험해…


암튼, 나는 이 책이 너무 좋아서(…나도 알아 내가 중증인 거) 하지만 추천할 수가 없… (이런 사람 좋아한다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락방은 영혼의 소울메이트 크리스토퍼인데 나 정말 영혼의 소울메이트 미셸 푸코인거냐… 진짜 인정하기 싫어 죽겠는 데 푸코 조롱하기를 끊을 수가 없다… 하… 그만해… 근데 정말 푸코 나만 웃겨요???


“(25) 나를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독자들이 나의 글쓰기 안에 어떤 공격성이 존재한다고 즐겨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정말 특별히 누군가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믿고 싶습니다. (ㅋㅋㅋ원래 인간은 믿고 싶은대로 믿는 다지만ㅋㅋㅋㅋㅋ님하ㅋㅋㅋㅋㅋㅋㅋㅋ) 내게 글쓰기는 특히나 부드럽고 조용한 어떤 행위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저기요…?ㅋㅋㅋㅋㅋㅋ) 내가 글을 쓸 때 나는 마치 내가 벨벳을 쓰다듬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뭬....뭬야?ㅋㅋㅋㅋㅋㅋ벨..벳ㅋㅋㅋㅋㅋ? 누가 벨벳을 님처럼 쓰다듬냐고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같은… 


페이퍼를 왜 쓰고 있냐면, 엊그제 나의 글쓰기를 독려해주고 지지해주는 대천재님을 만나서, 똠양꿍에 소주를 마시며, 글을 쓰자! 우리 글을 쓰자! 라고 다짐하고 왔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 단단한 격려이고 나를 쓰게 해온 독려이면서 또 누군가를 쓰고 싶게 만들고 싶다는 모처럼의 오지랖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전염. (ㅋㅋㅋㅋ 이 감정 전염은 싫지 않았닼ㅋㅋㅋ🤭) 


암튼, 나도 해주고 싶어서요. 


당신이 서른이 넘었는 데도 여전히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 내가 가져온 푸코의 글쓰기의 의무를 말하는 문장에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이 글을 써야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잘 못써도 너무 늦은 것 같아도 일단 썼으면 좋겠다. 당신은 그런 불꽃을 가지고 태어난 거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의무다. 삶이 보내는 신호다. 써야하는 사람은 써야한다. 


잘쓰려고 하지 말고 일단 쓰기 시작하자. 무엇을 쓰게 될지는 쓰다 보면 알게 되고, 그 글이 데려다주는 곳이 어떤 곳일지는 모르겠지만… 쓰는 당신은 분명히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건 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글을 쓸 의무가 있다. 당신을 당신의 글 속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글쓰기의 경험—실존에 대한 사면, 그걸 꼭 해야한다. 왜냐면, 나는 그것 없이는 이제 못 살겠는 몸이 되었으니까. 나만 당할 수는 없다!!! 우리 함께 글쓰기의 저주를... ㅋㅋㅋㅋㅋ


“(32)글쓰기라는 절개 자체를 통해, 죽어버린 것의 진실일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일” — “나는 그 글이 어디로 갈지 어떤 곳에 다다르게 될지 내가 무엇을 증명하게 될지 정말 알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바로 그 움직임 자체 안에서만,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글쓰기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던 그 순간에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정확히 진단하는 행위이기나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 아니다. 예외가 있다. 이런 사람은 쓰면 안된다. 오늘 아침 트위터에서 본 짤로 대신한다. ㅋㅋㅋㅋㅋ 당신은 쓰지마라(단호!)!




그러나 우리의 소란스러운 삶을 문자들로 이루어진 불변의 소란스러움 속으로 서서히 흡수시키려는 우리의 시도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은 늘 종잇장 바깥으로 펼쳐질 것이고, 증식될 것이며, 결코 이 작은 직사각형 안에 고정되지도 않을 것이며, 신체의 무거운 부피 역시 결코 종이 표면 위에 펼쳐지기에 이르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가 2차원의 이 우주, 담론의 이 순수한 행렬로 옮겨 가는 일도 없을 것이며, 한 텍스트의 선형성에 다름 아닌 무엇인가가 될 만큼 우리가 충분히 가늘고 섬세할 수도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P54

<지식의고고학>은 푸코가 구조주의적ㆍ언어학적 용어인 에피스테메와 언표를 넘어, 니체주의적 담론 분석으로 옮겨가는 이행을 가능케한 분석을 담고 있다. 단적으로 <지식의 고고학>은 -역설적으로, 제목과는 상응/상반 되게도- ‘지식의 고고학‘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넘어, ‘권력의 계보학‘으로 옮겨 가는 이행을 가능케한 저작이다. <지식의 고고학>은 <말과 사물>을 잇는/잊는 책이다.
🤔 68혁명이 있던해 여름과 가을에 이루어진 이 대담은 <말과 사물>과 <지식의 고고학> 사이에 위치해있다. (보다 정확히는 지식의 고고학 초고 대강이 완성되었을 때) 1970년 이후 푸코는 글쓰기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사망 조금 전에 주체화 및 자기테크놀로지로서의 글쓰기에 대해서 언급할 뿐이다. (구조주의ㆍ언어학 -> 니체적 진단)
- P78

글쓰기는 이 대담에서 빈 공간, 죽음, 익명, 공간, 언어작용 등과 연결되면서, 결국 푸코가 이듬해인 1969년 2월에 프랑스철학회에서 발표한 글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예비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푸코가 발표한 논문의 제명이기도 한 질문의 형식에 주목하라. 논문의 제목은 「저자란 누구인가?」가 아닌, 「저자란 무엇인가?」다.* 이에 대한 푸코의 대답은 저자란 저자-기능ronction-auteur 이라는 것이다.이는 전통적인 저자 중심주의도 아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독자 중심주의도 아니며, 양자 사이의 텍스트 중심주의 마저도 아닌, 저자·독자·텍스트 모두가속하는 장, 저자·독자·텍스트 모두를 탄생시킨 장, 저자 독자·텍스트가 서로 동시적 · 상관적으로 생성되는 장, 곧 익명성의 구조, 익명의 언어 작용이 작동하는 체계를 지칭한다. - P86

이제 우리는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언어, 곧 언어작용의 두 갈래, 말과 글의 한 영역이다. *글쓰기란, 글쓰기 행위보다는 차라리 글쓰기 작용이다.* 우리가 읽은 글쓰기에 대한 푸코의 대담은 앞서 말했듯, 이 언어 또는 언어 작용이 부르는 마지막 백조의 노래다.
🤔 언어작용:주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통해 주체가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 작용을 통해 주체가 탄생하는 것 ....구조 또는 체계.. 주체가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주체를 만들어내는 언어작용... 응? 알듯 말듯. 역자 허경은 옮긴이의 말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저자ㆍ독자ㆍ텍스트 모두를 탄생시키는 언어작용*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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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mistry reading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2-05-31 12:29 
    애플 티비 <파친코>가 막 개봉했을 때였다.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는데, 토크쇼의 사회자가 배우 캐스팅에 대해 물었다. 감독이 말했다. "선자 역과 한수 역에 각각 3명의 결선 진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함께 오디션을 보며 최고의 케미스트리를 찾으려 했다. ...... so you have incredible, incredible actors, but the question is who has that magic touch with one
 
 
난티나무 2022-05-28 0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글 쓸 자격 없다… 저 인용구요. 늠 싫고!!! ㅎㅎㅎ

공쟝쟝 2022-05-28 08:2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웃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게 왜 떠오르냐곸ㅋㅋㅋㅋㅋㅋㅋ

2022-05-28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8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2-05-29 22: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올라온 거 보고 상호대차 신청해서 오늘 책 가지고 왔고요. 29쪽 펼쳐봤지만 웃음 포인트 아직 못 찾았어요.
앞에서부터 찬찬히 읽어봤는데도 재미 없으면 그 때는..... 흠,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눕시다!!!

푸코 이야기보다 쟝쟝님의 쓰기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요. 800페이지 갱지 노트 아무나 살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앞으로도 기대됩니다!!

공쟝쟝 2022-05-30 11:50   좋아요 2 | URL
.......... 안웃겨요.........? 으허헝....... 또 나만웃겼지....ㅜㅜ (울면서 달려나간다)

다락방 2022-05-30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는 여기 푸코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다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푸코를 좋아하고 소울메이트라 하고 재미있어하는 쟝님 넘나 신기해요. 이런 단어와 문장들을 받아들인다니... 어쩌면 쟝님은 푸코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공쟝쟝 2022-05-30 11:53   좋아요 3 | URL
아니야하.. 그런거 아니야하... 다른 철학자나 작가들 글 읽을 때는 와~ 우와~ 이랬는 데, 푸코 읽을 때는 자꾸 피식피식 하게 되요... 웃기달까... ... 나는 그가 왜 웃긴가... 왜 웃다가 정들어버렸는 가... 정말 푸코는 ..... 내 영혼의 소울메이트.... 인가... 나는 푸코처럼 생각하는 것인가.... (진지해짐)

mini74 2022-06-1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쟝장님은 글을 쓸 의무가 있다 ㅎㅎ 당선 축하드립니다 *^^*

새파랑 2022-06-10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장공장공쟝쟝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22-06-10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6-11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시에나 2022-09-22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벨벳 어찌고에서 ..특히.웃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웃은 사람 여기 있습니다.

저도 푸코의 글쓰기 좋아해요. (수줍...)

단..저에겐 푸코에게 약간 입을 삐죽대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자기배려와 관련해서) 그게 저에게 아직 안 풀린 숙제입니다. ^^

공쟝쟝 2022-09-22 21:02   좋아요 2 | URL
오호, 제가 그걸 아직 안읽어봐가지고요! 일단 저는 푸코 다 삐죽대긴 하는데요...(맘에 드는 거 하나도 없음. 생긴것도. 백인. 서양. 남자. 지식인 것도. 심지어 게이여...ㅋㅋㅋ) 그런데... 푸코의 그 뭐랄까 절대 누구도 깔 수 없는 괴랄한 자만심(?)은 좀 배워야할 거 같아요. 신.자.유.주.의. 시대의 페미니스트로서 남 눈치 안보고 나만 잘났다! 해야하는 데... 푸코가 나한테 뭐 그런 기술을 알려주면 좋겠다... ㅋㅋㅋ 응? (난 아무래도 아직 남 눈치를 넘 많이 봄 ㅠㅠ)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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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했던 아르바이트는 전단지 붙이기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내가 했던 알바는 대부분 유니폼을 입거나, 방긋방긋 웃어야하는 일들이었는데 사실 난 그걸 잘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받은 아파트 돌며 전단지 붙이기는 혼자할 수 있었고, 유니폼을 입거나, 희롱이나 추행을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걷는 게 운동도 된다고 생각했고(하지만 하루에 거의 3만보는... 살이빠지긴 했다), 무엇보다 서울 지리를 익히는 것도 좋지 않나?라는 순진한 생각 이었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몇 달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쓰면서 느끼는 건데 진짜 혼자 열심히 일하는 건 내 성향인가부다… 좀 섞여서살지…)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의 숨막히는 첩보작전이 종종 펼쳐졌고, 걸리면 싹싹 빌고 대체로 방면조치(?)됐지만 운 없는 날은 정말 디지게 혼나서 눈물 콧물 다뽑은 적도 있다. 이것도 너무 오래하면 안되겠다 싶어져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대치동 학원 알바를 구했다. 내 학력으로 서울에서 보조 교사자리 같은 건 어림없었고, 데스크에서 아이들 출첵을 해주면서, 이런 저런 잡무들을 하고, 시간이 비면 포토샵으로 학원 전단지를 만들거나 선생님들 얼굴이 환하게 들어간 책 표지나 웹포스터를 만드는 그런 일이었다. 전단지 알바보다는 훨씬 육체적으로 수월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일했고, 나중엔 퇴직금 비슷한 것도 받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이 신분제 사회라는 것을 알았다. 관념으로가 아니라 진짜 체험으로. 두 세명을 위한 전용 강의실에서 아이들의 시간표를 따라 나름 저명한 강사들이 맞춤 수업을 해주는 게 충격이었다. 과목당 지불해야하는 액수도 훤히 알 수 있었기에 문화적 충격이 거셌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아 ‘걔? 다리 건너서 왔잖아~’ 뭐 이런 종류의 말이었는 데.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북에 산다는 뜻이었다. 전 라도출신디여...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집에와서 동생한테 그 이야기 하다가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눈물은 억울함이라기 보다는 어이 없음의 눈물이었다. 내가 얼마나 세상과 현실을 몰랐는지에 대한. 

그때까지만 해도 난 우리 집안.. 아니 가문을 통틀어ㅋㅋ 최고 학벌이었다. (얼마 후에 셋째가 갱신했다ㅋ)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부모님의 근거없는 방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정말 막막했지만 한가지는 분명해졌던 것 같다. 내. 처지를. 알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나는 그래도 나 정도면 평균이라고 생각했는 데, 이 서울 공화국에서는 평균에 한참 한참 못미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생겼고, 자존감이 굉장히 떨어졌던 것 같다. 나는 이미 밀려나있는 존재이므로 저 안으로 진입하지 말자. 보이지 않는 어떤 부분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많은 것(그것은 가능성이었을까)을 내줘버리는 선택들을 했다. 

감지덕지. 작년에 황정은의 에세이에서 그 말의 더러움을 읽었는 데, 내 마음 어딘가엔 무슨 취급을 받아도 감지덕지라는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말들을 종종 들었다.)

얼마 안가 대한민국엔 수저 계급론이 유행했고, 헬조선이라는 이야기가 자조처럼 번졌다. 그 담론이 내 흔적을 없애주지는 않았다. 감지덕지 임을 알고 있지만 감지덕지처럼 보이면 잡아먹히니까 매우 씩씩하고 상냥하게 열심히 살았다. 그냥 하루하루를. 번아웃이 올 때까지.

*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나는 잘 웃을 수 있어졌고, 입가에 미소를 띄면서 머릿속으로는 욕을 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자주 뭔가를 모르는 척 했다. 서툰 척. 할줄 모르는 척. 그렇게 하면 누군가들(대체로 연상의 남성들)은 선의로 도와주면서 허세를 부렸고, 그렇게 조금이라도 존경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감정 노동을 하고 일을 덜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런 캐릭터가 구축(?)되면 내가 할 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어버리는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정서적 반응은 잘 캐치하지만 일에서는 약간 나사 빠진척 하는 페르소나로 사는 건 확실히 편했다. (10년 후 자영업자가 된 지금… 나는 할 줄 모르는 것도 할 줄 아는 척 전문가인 척 드럽게 허세를 부리면서 외주를 따낸다…ㅋㅋ 인생 뭘까😔) 여튼 그때 내게 주어진 역할이 그런 거였다. 젊고 어린 여자들은 싹싹하게 잘 웃고 너무 많이 알면 안되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게 몸에 배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이 알고자 하지 않았다는 거다. 중요한 것, 잘 해야하는 것들은 어차피 내 권한이 되지 않을 터였다. 나는 일한 만큼의 급여를 받고 싶었고, 급여가 오를리 없으니 할 일을 줄이는 것이 현명했다.

그렇게 월(급)루(팡)를 하며 지내던 전전직장을 박차고 나온 계기가 된 것은 같이 일하던 동료의 퇴사에 대한 경솔한 상사의 언행이었다. 나는 또 원래 개미였기 때문에 꾸준히 일을 다녔는 데… 내가 계속 일할 사람처럼 보였던 것인지…(ㅋㅋㅋ 그랬던것 같긴 함ㅋㅋㅋ) 요즘 애들은 빨리 그만둬서 못쓰겠다며 다음 번엔 어리고 젊은 여자애들 말고, 안.그.만.둘. 경력 단절 여성을 뽑아야겠다는 종류의 하소연이었다. 아 그러냐고, 새 직원 구하는 게 힘들겠다고 맞장구를 쳐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 나는 정말로 귀를 씻었다. 면전에 대놓고 하는 욕설보다 더한 모욕감을 느꼈다. 씻는 걸로는 분이 안풀려 남자친구에게 이야기 하다가 그날도 펑펑 울었다.

세상에서 내 존재가 얼마나 희미한 것인지 이젠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 데. 아직도 더 남아있다는 자각. 내가 그만두면 나 보다 더 좋지 않은 처지에서 나를 대신할 사람들이 있고, 이 상태(?)로라면 그 사람은 아마 미래의 내가 될 공산이 컸다. 몇달 후 퇴사를 감행했다. 그리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이대로 아무런 발전없는 나날들을 이곳에서 보내면, 언젠가는 정말로 감지덕지 하면서 이 일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너에게 기대다보면… 나는 계속 어떤 근육은 사용할지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와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

감지덕지.
전 직장에서는 의식적으로 감지덕지하려고 노력했다. 경계성 인격장애인 것이 분명한 대표의 매일 같은 폭언과 후려치는 언행, 종종 날아다니는 물건들(나한테 직접 던지지는 않았다), 재빨리 이어지는 사과와 회유와 그래봤자 빻은 말들. 여튼 귀를 열심히 씻는 것으로는 상쇄시킬 수 없는 일상적인 고용주의 갑질과 절대 끝나지 않는 일과 일과 일… 야근… 무엇보다 정기적 이벤트처럼 그의 분노가 폭발할 때 마다 쉽게 비워지고 또 금세 채워지는 옆자리…를 보면서 스스로를 타일렀다. 감지덕지를 당겨서 감각하자고.

아니다. 실제로 감지덕지였을 수도 있겠다. 여기 채용해준 걸 감지덕지인걸로 알아. 라고 누구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다들 그렇게 쉽게 그만두는 데 나는 쉽게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우는 담배 갯수와 함께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회사 안에서의 가치가 상승할 무렵… 나는 대표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야 말았는 데. 아, 그날의 기분 더러움이란.

존버를 정말로 해버린 나 스스로가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순간적으로 내가 이긴건가? 하는 이상한 승리감…도 없진 않았는 데. 그것은 일종의 스톡홀롬 증후군였던걸로 해두자. 사람이 학대에 익숙해지면 안된다…) 그건 뭐냐면, 이 따위의 일을 내가 함으로해서 전체 노동시장 구조의 불합리성…(ㅋㅋㅋ)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뭐 그런 자각이었는 데, 이내 그 오만한 생각은 “나는 그만 둘려면 그만 두지만, 여기 아니면 안되는 사람들은 정말로 못 그만두겠구나”라는 생각까지 가닿기 시작하고… 인간의 존엄을 갈아넣어 가족을 유지 시키는 중인 한반도 내의 딱한 생계 부양자들과 82.9% 중소기업 종사자들 모두가 함께 자신의 일을 때려치지 않으면 결국 구조는 유지되는 거구나라는 것까지 사유해내자(이것은 다 이렇게 사는 거야, 누가 좋아서 이렇게 사냐?라는 말들로 표현된다.) 조금 완화되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에게 풀면 안될 것 같아서,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은 만들지 않는 것이 나의 최선이야. 하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존감을 방어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매일 매일 비혼과 비연애를 다짐했던 나야말로 진정한 칸트 아닌가. (응? 🙄) 

근데 나 이거 왜쓰고 있냐. 아. 또… 내 글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분명히 지금 내가 쓰는 건 디디에 에리봉 (엘휘봉씨ㅋㅋㅋ)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의 언저리를 훑고 있는 걸게야 라고 생각하면서 난 이걸 열시미 써보겠다. ㅋㅋㅋ 쓰다보면 알게 된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아무튼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용을 베풀어서 써보자면 실제로의 나는 그렇게까지 감지덕지하지 않았지만 미래의 감지덕지를 위해서 참았던 것 같다. 배울 것이 있었고, 여기를 벗어나서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비슷한 지옥도가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난 썩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릴 때 부터 넌 참 수덕이 없다고 엄마는 말했었다. 그 숱한 잡코리아의 그 많은 허접한 일 자리중에 이걸 뽑았으니 어쩔 수 없지. 심각한 업무 스트레스로 위장에 빵꾸가 나서 반차를 쓴 것 말고는 나는 정말인지 열심히 일을 했고 배웠다.

*

지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세상이 나를 밀어내도 밀려나지 않을거다. 어떻게든 비좁은 틈을 비집고 살아남자. 그런데 가만, 그렇지만 이러다가 내 내면이 망가지면 어떡하지? 그때의 내가 가장 염려했던 건 그것이었다. 점점 남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고,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과 묻어가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지금도 안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출퇴근 길에 더 열렬히 책을 읽었다. 딱 그만큼은 나 자신을 위해서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게 독서는 자존감을 지키고,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기능했다.

또 자주 일기를 썼다. 나를 비난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대체로 이번 주에 맞닥 뜨렸던 거지 같은 상황에 대한 욕설이었다. 써서 찢어서 버렸다. 그렇게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해야한다고 심리학 책들이 말해줬다. 실컷 욕을 한 후에는 내가 느끼는 무력감과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무능력에 대해서도 공들여 주입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나는 비관하는 것을 좋아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 최상을 상상하는 것 보다 쉬웠다. 미래없는 행복보다 비참한 현실 인식이 체질에 맞았다. 비뚤어져서일까?라고 생각했는 데, 그런 방식으로 자아 효능감을 키워왔던 것 같다. 

대략 이런 내용의 일기들을 썼다.

감지덕지해. 여기 말고 어디를?  정신차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렇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대하면 안된다. 나도 누구도.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언제나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대하면 안된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대한 건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나 스스로에게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참 많이 했다. 왜냐면 20대의 나는 나를 아무렇게나 대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나마저 아무렇게 대할 수는 없다. 30대가 된 나는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를 소중하게 대해.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를 소중하게 대할 줄 알아. 오늘의 책을 읽고, 하루를 살고, 약속은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일기를 쓰고, 나를 아프게 하는 말들을 씻어내. 나의 한계와 작은 그릇을 정확히 인식해서,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은 떠안지 않고, 나로 인해 누군가 상처 받은 것을 알아차리면 사과도 해. 나는 잘하고 있어. 나는 나한테 더 소중해질거야! 

20대의 나는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고, 아무에게나 내던지곤 했다. 자기 비하는 습관이었고 수시로 나를 없애면서도 더 많이 없애지 않는 자신에게 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다그쳤다. 인정 욕구에 목말라 나를 교정하고 비난하려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귀담아 들었다. 휘봉씨는 스무 살 무렵에 자신을 감당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는 데, 나는 그보다는 좀 느렸다. 서른 살의 초봄이었다. 더는 20대 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은 건.

그러려면 나를 *감당*해야지.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나를 고치지 않기로 했다.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런 식의 대인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내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교정하려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단절이 필요했고 동시에 글씨들이 필요했다. 인간 말고 글씨. 내 삶을 해석하고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글자들에 의존하기로 했다. 책. 그리고 페미니즘.

디디에 에리봉은 이렇게 쓴다.


“(251~3) 푸코는 당황스러울 만큼 강렬한 기세로, 배제, 이방인 지위, 부정성, 강요된 침묵, 심지어 추락과 비극성이라는 어휘를 동원해 이를 표현한다. … 나는 푸코의 저작을 개시하는 이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텍스트들을 다시 읽으며, *그 속에서 내 안의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 규범의 권력에 맞선 주체의 대결에 대한 사유, 자기 존재를 재발명하는 방법에 대한 성찰. 이 지점에서 독자들이 푸코의 텍스트들과 어떤 접점을 느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여기서 독자란 일부 독자를 말하는 것인데, 대부분은 단순히 푸코의 텍스트를 학문적 참고 자료로 간주할 뿐이다). 그것들은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 안에 새겨진 단층과 균열, 즉 그들의 취약성에 관해, 더 나아가 거기서 생겨나는 *완고함과 불복종 성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55) 당시 나는 나 자신을 재발명하고 내 과거 모습을 다시 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책들이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는 내가 내 모습을 감당하기로* 결심했을 무렵이었다. … 나는 오랜 망설임 끝에 결정을 내렸다. 게이라는 사실에 수치감과 공포심을 갖고 고통스럽게 살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물론 너무나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다….”

*

나는 이 책을 디디에 에리봉 때문에 읽었다. (그전에 선물해준 친구가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땡큐!) 디디에 에리봉은 <미셸 푸코> 전기 작가로 내가 그 책을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작년(이제 재작년인가?)에 나는 꽤 공들여서 푸코의 <성의 역사1>을 읽었는 데 그 때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솔직히… 이해하진 못했다.) 좋은 데, 정확히 어떤 부분이 좋은 건지 푸코의 글이 너무 어려워서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되었다. 아, 그랬구나. 푸코는 자신을 더 이상 수치스러워하거나 비난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구나. 푸코가 공부를 그렇게 했구나.

“(231) 푸코가 1970년대 중반에 권력과 사회변혁 문제에 새롭게 접근해보겠다는 목표 아래 <성의 역사>를 쓰겠다고 계획한 것은 상당 부분 이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더 일반적으로 보면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대항해서였다.”

<미셸 푸코>를 읽으면서 의아했던게 심리학을 공부하던 푸코가 좀 격렬하게 자신에 대한 분석을 거부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는 게이라는 정체성이 기존의 이론들로 분석당하거나 교정당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마르크스도 프로이트도 자신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설명하자, 이러면서 공부를 열나해서 자기의 이론을 만든… 거라고 생각하니까. 본인의 이론과 글들은 모두 "자서전의 한 조각"이라고 표현했던 의미심장함이 확 이해되었다. 어쨌든.

징그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질문하는 푸코의 불명확한 글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어떤 정서를 디디에 에리봉도 느꼈던 모양이다. 오호라, 그럼 휘봉씨의 해석에 나도 묻어가자. 나 역시. 나를 더 이상은 비난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 였으니 에리봉이 푸코에게서 본 그걸 본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내가 뭘 쓰고 싶은 걸까… 궁금했는 데 결국 이거였군… 방금 나는 이 독후감으로 스스로를 미셸 푸코와 디디에 에리봉의 반열에 올려 놓고 말았으니. 다 덤벼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걸 쓰면서 아무것도 아닌 내가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서른 살 이후를 생각해 보았다. 가끔 자조하듯 그 시간들을 히키코모리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데… 돌이켜보니 휘봉씨처럼 “내가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 나자신을 분리시키려” 노력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 의지했던 친구가 내게도 있다. 

각각 나와 다른 나이와 성별의 두 사람인데 특별히 자주 만난 것은 아니고, 별나게 나를 응원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둘은 나를 발명하는 시간 동안 *단 한번도* 나를 비난한 적이 없다는 거다. 그들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되려 좋은 질문들을 내게 던졌고, 무엇보다 그냥 저 자신을 잘 살았다. 정말 정말 힘들 때 난 그 친구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한 명은 우울할 때 햇빛을 받으면서 산책을 하는 것을 알려주었고, 다른 한 명은 위로를 잘 못받아 들이는 내게 불행배틀이라는 이상한 위로 방법을 전수해주었다. 친구들을 떠올리면 나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둘의 공통점은 둘다 내게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어쨌든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봐 준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물론, 여전히. 나는. 종종. 어쩌면 자주. 나를 비난한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바뀌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안다. 그렇다. 나는 나를 발명해 낸 것 같다. 5년이 흘러있다. 벌써.

*

하고 싶은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책이었는 데, 1/5 정도만 쓴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232) 그러니까 특유의 상처 받기 쉬운 연약함을 품은 채로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경험하는 욕망, (길에서, 직장에서….) 불안감에 사로잡혀있는 이 욕망 말이다. 더더구나 이는 모욕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인 수신자가 아니라도 듣게 되는, 비꼬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폄훼하고 창피를 주는 온갖 말들로 인해 가중된다. ‘호모새끼’와 같은 말들은 일상적 대화 속에서, 학교에서, 가족 안에서 강박적으로 되돌아 온다. 당신은 그 말들 때문에 깜짝 놀라고 불타오르고 얼어붙는다.”


자, 나는 이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화장실 몰카… 달라붙는 시선. ‘호모새끼’에는 창녀, 김치녀, 맘충….

“(248) ‘동성애자 야간 출몰’ 공원이나 주차장, 숲, 고속도로 휴게소 등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장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남자에 관한 신문 기사를 아직도 종종 접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내가 경험했던 모든 장면이 되살아나 일종의 저항감과 불가해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왜 나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가? 왜 영원히 위협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가?


자. 이것을 오늘날의 페미사이드와 연결 시켜보자. 여자라서 조롱 당하고 맞고 죽임 당하고…. 여자라서 맨날 죽잖아요? 오늘도 어제도... 일상이라 공기처럼. 그럼 여자들은 왜 항상 이러한 폭력을 감수해야하는 거죠? 그래서 페미니즘 한다고 하면 왜 페미하냐고 하고 (궁시렁 궁시렁) 뭐, 게이 소수자인 휘봉씨와 불행배틀을 하자는 불순한 의도는 아니다라고는 말을 못하겠네?ㅋㅋㅋ 소수자로서 그가 느낄 수 있는 불안과 위협을 여성들은 언제나 당하고 있었다는 걸 좀 말해둬야지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더구나 남자들에게 “호모새끼”라는 멸칭은 사실 “여자”에 다름 아니지 않나? “호모새끼”=“여자”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푸코의 철학이 페미니즘적인 통찰을 제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면서도 그토록 여성 혐오적이었던 까닭을 직관적으로 느껴버리고 말았다. 푸코는 유럽/남성/부르주아/지식인… 다 갖췄는 데 딱하나 못 갖춘 게 게이라는 본인의 섹슈얼리티라서… 그거 하나 못 갖춘게 그르케 한이 맺혀가지고 <성의 역사>를 비롯한 여러가지를 썼나 보다. (웃으면 안되는 데 여기서 피식 웃게 됨) 호모새끼가 잘못된 거면 여자도 잘못된거라는 것 까지 밀고 나가긴 좀 어려웠겠지? ㅋㅋㅋ 원래 사람은 자기 상처가 젤로 커 보이니까….

아무튼 이 책은 디디에 에리봉 자서전인데 왜 나는 또 푸코푸코하고 있냐. 이놈의 푸코 자식…
에효… ㅋㅋㅋㅋㅋㅋ 뭐 언제는 안 그런적 있나? 암튼... 여까지 쓰고 잘란다.


나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분리해내야 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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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탈출한 사람만이 되돌아갈 수 있어요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2-04-28 14:59 
    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의 회고록이다. 자신이 속했던 노동자 계급을 떠나고 가족을 떠났던 에리봉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과거와 가족의 계급적 과거를 탐색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무슨 말을 더할까. 에리봉의 책을 읽기 전 혹은 읽은 후, 읽는 도중에도 100% 유용할 것이 분명한 쟝쟝님의 글을 링크해 둔다.https://blog.aladin.co.kr/trackback/jyang0202/13492598 탈출. 어떤 상황이나 구속 따위에서
 
 
잠자냥 2022-04-07 08: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드디어 푸코와 엘휘봉 씨 반열에 오른 쟝쟝 님! 그 기념으로 칸트 한 마리 들이시는 거예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2-04-07 08:4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제가 여기서 말한 친구 중에 한명이 살아있는 칸트라서요 ㅋㅋㅋㅋ 푸코는 칸트를 싫어하는 데 (??? 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ㅋㅋㅋ?? 그냥 일단 이렇게) 우리우정 막지마 ㅋㅋㅋ 암튼 그렇다고 내가 푸코는 아니지만 ㅋㅋㅋ 푸코가 좋긴 하지만 푸코가 싫기도 하고 ㅋㅋㅋㅋ 그런가 하면 내가 칸트라고 하기에는 진짜 칸트가… (뭐래는 거야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4-07 08: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 <봄의 제전> 읽어야 하는데 자꾸 이 책 읽고 싶게 만들지마……

공쟝쟝 2022-04-07 08:50   좋아요 2 | URL
아이패드 아이패드!!!! 저 책임감 범위가 좀 더 넓어져서 홉스 말고 새냥 들이면 이름 랭쓰 하기로 함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4-07 09:22   좋아요 2 | URL
오! 냥이 이름으로 랭쓰 너무 좋은 것 같아요!! >.<

공쟝쟝 2022-04-07 09:26   좋아요 2 | URL
홉쓰! 랭쓰!!! 스 돌림 ㅋㅋㅋㅋ 하지만 아직은 홉스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우리 사이 너무 좋고 그래서 ㅋㅋㅋㅋㅋ 미래의 랭스야 아직은 널 만날 때가 아니당 🙄

수이 2022-04-07 09: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잘 썼는데, 진짜 잠자냥님 말씀대로 다른 책 읽고 있는데 디디에 에리봉 읽고 싶게 만들어지는 훌륭한 리뷰입니다. 락방님께 건의해서 이 책 여성주의 읽기에 포함시켜도 좋을 거 같네요. 좋은 책 담아갑니다. 책 잘 팔 거 같아 쟝쟝님 ㅋㅋㅋ

공쟝쟝 2022-04-07 09:12   좋아요 3 | URL
페미니스트인 저는 일단 유럽 남자 진보 지식인에 게이가 썼다고 해서 새로운 친구가 선물해주지 않았다면 안읽었을 거 같아여 ㅋㅋㅋㅋ 이건 페미니스트로서의 편견 ㅋㅋㅋㅋ (남자 지식인 서구 유럽…ㅋㅋㅋㅋ 째리고 보기… 게다가 게이는 지난 시기너무 많이 우려졌잖아? ㅋㅋㅋ) 잼써여 ㅋㅋㅋㅋㅋ 진짜 잘써진 책 ㅋㅋㅋㅋ 내 자서전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

다락방 2022-04-07 09:26   좋아요 2 | URL
노노. 이 책의 분류가 ‘사회학‘ 이므로 이 책은 각자 알아서 읽는 걸로.. 흠흠.

공쟝쟝 2022-04-07 09:2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기도 하고 여자 인권이랑 1도 관련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도 이 몸이 재밌었던 걸 보면 훌륭한 책 맞음 ㅋㅋㅋ

건수하 2022-04-07 0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푸코가 섹슈얼리티 하나 못 갖춘게 그르케 한이 맺혀가지고 - 에 해당하는 사람 많더라고요. 직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가지를 쓴 사람은 많지 않지만? 유발 하라리가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나니 <사피엔스>에서 여성에 대해 남성의 우월함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왜 그렇게 썼는지 얼버무렸는지 이해가 되더라는..


남자들에게 “호모새끼”라는 멸칭은 사실 “여자”에 다름 아니지 않나? “호모새끼”=“여자”

애트우드 <마녀의 씨>에서요. 감옥의 죄수들이 연극을 하는데 여자 역할은 절대 안하려고 해요. ‘빠는‘ 대사가 있는 요정도 절대 안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면 감옥 안에서 지위가 하락할까봐.. 그래서 여자 배우를 밖에서 데려오고, 그 여자 배우가 그래요.

‘여자가 된다는 건 꽝이니까요, 그렇고말고요.‘

엘휘봉씨 읽어보고 싶긴 한데 넘 어려워보임...

공쟝쟝 2022-04-07 09:38   좋아요 2 | URL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오천년치의 여성억압이 안보이는 건 선 자리와 몸이 달라서 이겠죠. 여자들은 여자들의 위치에서 여자의 몸으로 그이들이 만든 언어를 가지고 이제 자신에 집중해서 자기것을 쓰십시다. 나는 그러기로 했어요. 수하님. 휘봉씨 책 어렵긴 한데, 쉬워요! 쉬워요! 쉽다! 왜냐면 그가 민중계급ㅋ ㅋㅋㅋㅋㅋ 출신이예요 ㅋㅋㅋ 민중계급ㅋㅋㅋ 아니었으면 휘봉씨 처럼 못써요 ㅋㅋㅋ 민중계급 이면 용어 몰라도 대충 때려 맞출 수 있게 잘써짐 ㅋㅋ 제가 에토스 아비투스 이런거 알겠습니까? 대충 그런거구마 ㅋㅋ 하면서 읽었지 ㅋㅋㅋ 알리딘에 좋은 해제격의 리뷰도 많아요 ㅋㅋ 추천추천합니다!

건수하 2022-04-07 10:36   좋아요 2 | URL
자신에 집중해서 자기것을 쓰자!
공쟝쟝님 계속 써줘요~ (저도 노력)

공쟝쟝 2022-04-07 13:30   좋아요 1 | URL
삶을 살고 책을 읽고 글을 쓰자 💕 당연히 저는 이러려고 (알라딘에서 읽고 글쓰고 좋은 우정 나누려고) 살아간다고요!

미미 2022-04-07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쉬지않고 한번에 다 읽었어요. 쟝쟝님 휘봉씨 이야기에 공감하실 수 밖에 없었겠네요! 쟝쟝님 또한 글로 풀어내신게 쟝쟝님을 지금의 알라딘 칸트에 이르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어보니까 휘봉씨 책도, 푸코의 <성의 역사>도 꼭 읽어야 겠어요. 그 텍스트 안의 자기고백과 자기치유를 읽어낸 쟝쟝언니! 멋있으면 다 언니~♡.♡

공쟝쟝 2022-04-07 09:39   좋아요 1 | URL
칸트는 다락방님이고 전 비트겐슈타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오늘부로 알라딘의 푸코…(는 하기 싫다…) 안할래요. 다 안하고 나는 공쟝쟝 할래요 ㅋㅋㅋㅋㅋ

미미 2022-04-07 09:55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이 칸트예요?!! 저는 보부아른줄 알았어요~^^♡

다락방 2022-04-07 09:57   좋아요 3 | URL
저는 안젤리나 졸리인데요? 🙄

공쟝쟝 2022-04-07 09:58   좋아요 1 | URL
아 맞네…. 나 갑자기 물감님 생각 났어 ㅋㅋㅋㅋ 알라딘의 이동욱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4-07 11: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단.... 성의 역사 3권까지 헉헉대던 사람에게 크나큰 위로를 주었으며,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강한 욕구를 한껏 불러내었습니다. 계급을 넘어서고 싶지만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도 알고 싶구요.

인용한 구절들 주옥같이 좋지만 나는 쟝쟝님 글이 더 좋아요. 오랫동안, 오랫동안 읽고 써줘요. 나는 아직도 목마르다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4-07 13:33   좋아요 2 | URL
은제 3권까지 가고 있었어요? 아저도 봐야할텐데 ㅋㅋㅋㅋㅋ 나 푸코 좋아하는 사람치고 푸코 안읽는 사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오래오래 한결같이 삶을 안놓치고 쭉 읽고 쓰는 사람들의 발견이 제가 저를 발명하게된 주되는 동력이예요. 크리스테바가 글쓰기야 말로 사랑이라고 했어요. 사랑합니다..*

단발머리 2022-04-07 13:44   좋아요 2 | URL
갑자기 우리 강명씨 생각나네요 ㅋㅋㅋㅋㅋ 장강명 좋아하는데 책 별로 없는 나 vs 장강명 안 좋아하는데 신간 다 사는 쟝쟝님 ㅋㅋㅋㅋㅋㅋㅋㅋ 강명씨, 미안해요. 내가 잘할게요 (느닷없이 팬심고백)

공쟝쟝 2022-04-07 13:5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 ㅋㅋㅋㅋ 나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괜찮아 아무렴 내가 아무리 이상해도 푸코보단 낫지 ㅋㅋㅋㅋ (푸코를 좋아하면서 푸코를 조롱하기 바쁜 나)

난티나무 2022-04-07 15: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져부러요~~~ 엘휘봉씨 책도 찾아봐야 쓰것어요.^^

공쟝쟝 2022-04-07 19:40   좋아요 1 | URL
2009년인가? 프랑스 베셀이었다고 어디 책소개에 적혀있었어요 ㅋㅋㅋㅋ 실물보면 알랴져요 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4-08 0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
왜....왜...!!!!!
나 혼자 밤에 읽어서 그런가???

공쟝님은 절대 아무렇게 대할 사람이 아니죠!!!
앞으로 높이 모셔야 할 사람!!
나 다락방님 글 읽어보니, 사람 볼 줄 아는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 좀 받았걸랑요~ㅋㅋㅋ
공쟝님의 글은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어요. 안아주고 싶군요!!! 이리 와봐요~내 안아줄게~🫂🫂
공쟝님의 글을 읽고 나니 아니...에리봉이 누구길래??? 저도 읽어봐야쓰겠어요.
공쟝님이 계속 쓰신다면, 끝까지 읽겠어요.
사랑스런 공쟝님♡

공쟝쟝 2022-04-07 22:00   좋아요 2 | URL
울었쪄요? ㅋㅋㅋㅋ 내가 언제나 말하잖아요. 나 인생 길이는 짧(이젠 짧지도 않다)아도 밀도만큼은 압축적이라고 ㅋㅋㅋㅋ 인생 단짠 좀 아는 여성입니다 💕

share 2022-04-12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를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기오늘의 문장으로 선정되셨습니다

공쟝쟝 2022-04-12 12:03   좋아요 1 | URL
오늘 하루만 갖기는 너무 약하죠🤔 이번주의 문장으로 해주세요😤

시에나 2022-04-12 1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재미있어서 눈팅만 하다가 댓글 남깁니다. 저도 이 책 너무 좋아서, 이런 글쓰기(흉내)를 언젠가 꼭 해보리라 생각하거든요. 푸코가 다 갖췄는데 동성애 하나만 문제라... 그거 결핍된 걸로 책 썼다는 데 빵 터졌어요. ㅎㅎㅎㅎ

그렇게 보면 부르디외는 프랑스인+백인+이성애자 지식인임에도 출신 계급 무시당한 거에 한 맺혀서 ‘구별짓기‘ 쓴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래도 푸코는 의사집안 출신이었는데... 에리봉은 노동계급 출신 +동성애자...아 에리봉이 두 양반을 이겼네요? ㅎ

공쟝쟝 2022-04-13 00:11   좋아요 1 | URL
그쵸… 저도 읽고나서 흉내내서 회고록(ㅋㅋ) 함써봤는데 저의 수치심이 휘봉씨의 수치심에는 좀 못미치는 듯 ㅋㅋㅋ 사람이 너무 깨끗함 ㅋㅋㅋ 응(?) 😩
ㅋㅋㅋㅋ 그러네요. 사실 부르디외는 제가 잘 몰랐지만 그렇겠거니 추측했어요. 그래서 에리봉이 이 어려운 이야기를 이렇게 민중계급인 저도 무리 없이 이해가게 써버렸으니 승자입니다! 저는 엘휘봉애 한표!!
그에 반해 푸코는 … 그 대머리 물음표 살인마 자식은…. ….. ㅋㅋㅋㅋㅋ ㅇ ㅑ 니가 의사 아들이면 다냐!? ㅋㅋㅋ (제 페이퍼에서 언제나 고통받는 푸코 ㅋㅋㅋ)

새파랑 2022-05-07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당선 축하드려요. 하시는 사업(?)도 번창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즐거운 휴일 보내셔요~!!

공쟝쟝 2022-05-07 08:33   좋아요 1 | URL
사업이 바빠지니 읽고 쓰기를 통 못하네요 ㅠㅡㅠ!! 심하게 새파랑님은 휴일이라 또 책과 벗하시지요? ㅋㅋㅋ (부럽뜨아….) 당선축하인사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5-0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러블리땡 2022-05-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이름을 기억하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뇌가 당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7과 1/2가지 진실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변지영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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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비휴머니즘(실상은 반휴머니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랏님이 부덕하여 역병이 창궐한다는 미신처럼, 인간이 잘못해서 지구가 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나름의 미신을 좀처럼 떨쳐내기 어렵다. 어느 때 보다 빠른 속도로 백신을 내놓아도, 변이를 거듭하며 인류에 옮아다니는 바이러스 앞에서 모두가 좀 더 겸손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겸손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딱히 가지고 있는 답은 없지만ㅋ, 내 경우 다소 터프한 어떤 정념(;;)이 확고해졌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는 별 기대를 하지말자. 이대로라면 우리는 얼마안가 멸종한다. 혹은 이대로 멸종한대도 지구님께 억울해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잘한 건 없으니깐요😬에 가까운 자세와 태도랄까… 물론 이 따위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몸짓을 가진 사람치고는 퍽이나 열심히 운동하고, 고기도 덜 먹고, 사회적 거리를 지나치게 두며, 플라스틱에 신경을 많이쓰지만… 에 또, 그거랑은 별개로 ㅎㅎㅎㅎ 


그런데 뭐 나만 그런 건 아닌건지 얼마전 넷플릭스에서는 아리아나 그란데가 나와서 우린 다 죽었고 곧 망한다고 정신 좀 차리라고 노래를 부르더라ㅋㅋㅋㅋ 아놔, 1월 1일에 보기에 매우 적절한 영화여서 보다가 빵터졌잖수. 지구가 이 지경이 된 데에는 분명히 미국 놈들의 탓이 8할 이상인 것 같은 데… 그걸 자기 자신이 풍자하면서 고걸로 또 돈을 벌어들이는 이 미국 놈들에게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내가. 




어쨌든 ‘코로나19라는 대위기를 인류가 어떻게 힘을 모아 극복 할 것인가?! 지금은 힘들지만, 우리는 언제나 처럼 답을 찾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하는게 아니라 ‘휴먼, 당신들 되게 중요한 종족인 줄 아는 것 같은 데, 너 자신이 너무 소중하다고 이렇게 민폐를 끼쳐야 되겠냐? 정신 좀 차려. 니들 그러다 진짜 X된다’라고 생각 중이던 인간 종의 개체1인 나는 <이토록 뜻 밖의 뇌과학>을 읽고 별 다섯개⭐️⭐️⭐️⭐️⭐️를 꽝꽝 박을 수 밖에 없었으니… 여러분 좀 읽으세요. *인류여, 우리 이걸 읽고 자기 객관화를 하자.*


그러니까 최신 뇌과학의 연구 결과를 쉽게 풀어쓴 이 책의 제목이 ‘이토록 뜻 밖’인 이유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기관인 인간의 ‘두뇌’야 말로 진화의 최종 산물이며, 이 ‘두뇌’를 잘 굴리는 사람이 가장 ‘인간다운’ 훌륭한 사람이다.” 라는 종류의 믿음을 엿바꿔 먹으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 네. 그렇습니다. 제가 그런게 아니고요. 뇌과학의 최신 연구가 그렇다네요?🙄 과학자 말을 듣자, 여러분! ㅋㅋ



리사 펠드먼 배럿 교수는 본격 강의에 앞서 맨 먼저 인간 두뇌가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31) 뇌의 핵심 임무는 이성이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상상도 아니다. 창의성이나 공감도 아니다. 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할지 예측함으로써 가치 있는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해내도록 신체를 제어하는 것, 곧 알로스타시스를 해내는 것이다.”

알로스타시스. 이 무슨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며 인간 중심의 근대를 열어제낀 데카르트 아저씨가 관 뚜껑 열고 나와 호통칠 소리냐 싶겠지만… 인간의 ‘생각’이란 것은 이 알로스타시스(배럿의 용어를 풀어말하면 신체 예산 조절 능력)를 하는 데에 조금 더 도움될까 싶어 진화 과정에서 우연찮게(?) 만들어진 부산물 쯤에 불과하단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이라면

“(50~51) 더욱이 다른 동물들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들을 진화시켜왔다. 우리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없다. 우리는 자기 체중보다 50배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우리는 절단된 신체 부위를 재생시킬 수 없다. 이러한 능력들은 우리에게 초인적인 힘으로 여겨지지만, 작은 생물들은 늘 해오던 일이다. 박테리아조차 당신의 장속이나 우주 공간과 같이 혹독하고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 같은 특정과업들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게 해낸다. … 자연선택은 우리를 향해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특정환경에서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도록 돕는 특정 적응력을 갖춘 흥미로운 동물 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동물들이 인간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다. 동물들은 각자 독특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주변 환경에 적응한다. 당신의 뇌는 쥐나 도마뱀의 뇌보다 더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르게 진화한 것이다.”

지구 상의 수많은 생물들이 인간보다 열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흥!🐯!! 자자, 생각하는 인간은 겸손해집시다. 니들 아무리 생각해봤자 박테리아와 다를 바가 없다구!! 


‘생각하는 뇌’라는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면 ‘종으로서의 나’와 ‘자아를 갖춘 나’ 모두는 더불어 겸손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나의 두뇌는 나의 본질이 아니지만, 굳이 몸의 부위 중 어떤 것을 본질로 삼아보자면, 그것은 심장보다는 두뇌일테고 두뇌를 선택한 까닭은 나의 기억과 감정과 생각(자아)이 들어있다고 믿어서기 때문인건 데… 정작 내 뇌의 주되는 사용처는 생각이나, 기억이 아니었다고 하면, 캬~ 이거 좀 반전이잖아ㅋㅋㅋㅋ 나만재밌나 또 나만 재밌어? 여~알라딘 소설파들아, 비문학 좀 읽어다오. 나랑 놀자~


이 사실이 놀랍거나 말거나 내 뇌🧠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씩씩🔥🔥 거리며 문단을 구성하는 데에 그 기운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운영하고 조절하는 데 본인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살짝 또 바꿔서 생각하면? 그렇다면 내 몸이란, 내 뇌를 거의 다 써서 운영되고 있는 내 몸이란!!!! 그저 살아있기만 한 걸로도 얼마나 대단하고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밥도 잘 먹이고 잠도 잘 재우고, 운동도 좀 시키고 해야할 것 같았으므로… 지난 달 이 책을 완독한 저는 곧바로 쿨하게 필라테스 6개월을 현금 플랙스 하고 왔답니다(응?). 뇌의 수고로움을 좀 덜어주는 데는 돈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아직까진 주3회 잘 다니고 있어여….


여기까지😤!! 이 책의 도입부 만을 소개해 본 것인데, 이 후에도 뜻 밖의 뇌과학은 계속해서 펼쳐지므로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 맞다. 그런데 또 여기까지 쓰니까 제가 오늘치 뇌를 다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책을 통해 알아가시면 좋을 듯 하네요🥱. (졸려서 급하게 마무리) 


-- 다음 날 아침, 이어서 ---


지금 읽(다말)고 있는 <느끼고 아는 존재>에서도 의식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뇌와 따로 떨어뜨리는 것이 불가능한 신경계와 몸 전체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한다. 똑 따로 떼어낸 두뇌라는 것이(있을 수도 없지만) 인간에게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될 때(뇌의 자기객관화ㅋㅋㅋ)… 이성(뇌-인간-남성-주체)과 감정(몸-자연-여성-타자)을 분리해내던 쉬운 이분법들은 그 설자리가 또 한번 희미해지는 듯도 하다는 말을 적고 싶었다. 


언젠가 김상욱이 양자물리가 등장하던 1920년대시기의 과학자들은 1차대전의 생존자들이었다며 인간 이성을 의심하는 급진성을 띌수 밖에 없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양자물리라는 급진적인 과학 이론을 내놨다고 말했던걸 들은 기억이 있다. 비슷한 느낌으로 최신의 뇌과학이 가리키는 방향이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을 흔드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은 추세라면, 그를 기준으로 이 시대의 분위기를 추측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훗날의 인류는 코로나19 전후의 과학을 인간 중심주의에서 지구 중심주의(?)로라고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대세는 역시 비휴머니즘!!!;;;;;;;; 그 어느 때 보다 인류의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더하기, 다락방의 2045 인류 영생론에 맞서 그전에 인류멸망 할거다를 여기서 또 주장하고 있는 나…)


또 나는 이 책에서 이 부분도 재밌었다. 

“(115~6)하지만 군인의 뇌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의 뇌는 외부세계의 감각 데이터들이 있는데도 예측에 집착했다. 이런 일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일어날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는 뇌가 그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뇌는 정확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배선되어 있다. 당신의 뇌가 정확하게 예측했다면 그 뇌는 당신의 현실을 만든다. 예측이 틀렸을 때도 뇌는 마찬가지로 현실을 만들어내며, *바라건대 그 실수를 통해 배운다.*그 군인의 동료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상황을 다시 보게 해 뇌가 새로운 예측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상식을 위협하는 마지막 결정타를 살펴볼 것이다. 바로 이 모든 예측이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과 ‘반대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무언가를 감지하고 그다음에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적을 보고 그 다음에 소총을 드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뇌에서는 감지가 사실상 두 번째에 해당한다. 뇌는 집게손가락을 방아쇠로 가져가고, 그 움직임을 지원하기 위해 신체 예산을 변경하는 것과 같이 행위에 먼저 대비하도록 배선되어 있다. 또한 뇌는 이러한 예측들을 감각계로 전송해 손가락 끝의 차가운 강철의 느낌과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예측하도록 배선되어 있다. 군인의 뇌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고, 손을 총으로 옮기고, 존재하지 않는 적을 보도록 이끌었다. *그렇다. 뇌는 당신이 인식하기 전에 행동들을 개시하도록 배선되어 있다.*” 

이 역시 내 입말로 좀 더 풀자면 … 우리의 두뇌는 신체 예산 조절능력을 가장 효율화 하기 위해 항상 예측하고 있고, 생각을 한 후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에 따른 행동을 두뇌-몸이 미리 하고 있다는 요지인데,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배럿 여사는 이러저러한 예시를 들어가며 이렇게 말해준다.   


“(123) *오늘의 행동은 내일 뇌가 내놓을 예측이 되며, 그 예측들은 자동으로 당신이 앞으로 할 행동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당신에게는 새로운 방향으로 예측하는 뇌를 길러낼 자유가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당신이 져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할 수 있을지 모두가 폭넓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에게든 어느 정도 선택의 여지는 있다.”

이 부분을 이러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선택을 의심할 것.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 당한 것일 가능성이 높음.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다는 것. 인식도 전에 몸은 이미 행동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한계 속에 엄연한 자유가 있으니, 당신 뇌의 배선을 더 신경써서 가꿔가기 위해 오늘을 살아갈 것. 바라건대, 당신이 실수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를.


“(118)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행동을 개시하는 예측들은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손톱을 물어뜯지 않았다면 지금 물어뜯는 일도없을 것이다. 친구에게 던진 후회막심한 말들을 아예 배운 적이 없다면 지금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새콤달콤한 맛에 길들여지지 않았더라면 트위즐러를 그렇게 먹어치우지 않았을것이다. 뇌는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한다. 마법처럼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오늘 당신의 뇌는 다르게 예측할 것이고 다르게 행동할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세상을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물론 과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조금 수고를 들이면 앞으로 뇌가 예측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약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배울수 있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활동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오늘 배우는 모든 것은 내일을 다르게 예측하도록 뇌에 씨를 뿌려줄 것이다.” 


뇌과학을 ‘자기 계발서’처럼 읽는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뇌가 이렇게 저렇게 생겨 먹어 작동하니까, 당신의 뇌를 위해 바로 지금(!)부터라도 조금 다른 선택과 경험을 해보고, 새로운 것을 배워라~, 용기를 내라!는 종류의 권유들은 나에게 확확 와서 팍팍 꽂힌다. 그것은 내가 조금은 더 잘 살고 싶은 방향으로 내 뇌의 예측 배선을 변화시켜왔다는 걸까나. 응. 나는 노력했다. 


요즘의 나는 내가 노력해온 것들을 운이 좋아 수월하게 얻어낸 것 처럼 이야기하지 않기 위한 연습 중이다. 처한 환경과 조건 하에서 나를 먹여살리고,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에 모든 알로스타시스를 쓰고 돌아와 미세하게 남은 여분의 뇌 역량으로 꾸준히 책을 읽었다. 그것 역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과거의 내 노력들이 자랑스럽다. 먹고 사는 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당장 쓰일 곳도 없는 스펙(?)과는 무관한 책을 읽은 것. 그리하여 이제는 책을 읽는 종류의 인간이 된 것. 읽고 쓰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할 수 있는 것이 기쁘다. 


새벽 세시 스탠드를 켜놓고 예닐곱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뒤적이다가 시간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나를 만날 때, 인류멸망주의자(?)는  2045년 인류 영생 쪽으로 아주 살짝 마음이 기운다. 아, 이 모든 것을 실컷 읽고 소화하려면 영원히 사는 쪽에 배팅해야하는 것일까나. 이토록 뜻 밖의 반전이라고? 


내 친구가 자주쓰는 말이 있다.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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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1-15 1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간중심주의나 이성-감정 이분법을 극복하도록 하는 방편 중 하나가 된다는 점이 특히 의미있는 것 같아요!! 근데 생각이 생존을 위한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로 설명된다면, 물질이란 실재에서 생각이란 관념이 발생된다는 논리적 비약이 발생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논리적 비약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신념을 위해 효율이나 생존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인간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ㅎㅎ

공쟝쟝 2022-01-15 10:46   좋아요 3 | URL
저는 거의 극단적인 유물론자라서 (인간 의식-관념 조차 물질이다) 라파엘님이랑 읽기의 접근 자체가 다른 것 같아요.
인간 뇌 자체는 신체를 유용하는 예측기계에 불과합니다. 관념은 그 기계의 예측을 더 잘하기 위해 여러 신체 반응처럼 고안된 부수적인 기능 중에 하나이고요. 신념은 해당 인간이 고유하게 고안해낸 예측방식이겠지요? 전 이렇게 건조하게 읽었지만 ㅋㅋ 그렇다고 배럿이 저처럼 막말을 하진 않아요 ㅋㅋ 대단히 인간 종을 사랑한다고 느꼈어요 ㅋㅋ
물질-관념에 대한 부분을 이슈로 두고 읽지는 않은데다 벌써 읽은지 한달이 넘어가서 ㅋㅋㅋㅋ 대답해드리기 어렵지만, 라파엘님의 접근 방식으로 이 책을 독해할 때는 어떤 식으로 읽힐지도 저는 궁금합니다. 짧고 얇고 쉬운 책이니 읽고 리뷰 하나 써주세요 ㅎㅎㅎㅎㅎㅎ 인간의 ‘의식’의 본질에 관한 뇌과학 책은 지금 읽고 있는 <느끼고 아는 존재>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어요 ㅋㅋㅋ 저는 읽을 건데 ㅋㅋㅋ 그 친구 자꾸 밀리네요 ㅋㅋㅋ 아 주말이 얼마 안남았다 ㅋㅋㅋ

라파엘 2022-01-15 10:57   좋아요 2 | URL
인간의 의식이나 관념조차 물질이라고 설명하려면 뇌과학만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 저도 조만간은 아니지만 나중에 뇌과학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쟝님 말씀대로 비문학도 정말 재밌어요!! ^^

공쟝쟝 2022-01-15 11:03   좋아요 2 | URL
적어 주신 첫 문장의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그를 심오하게 톺지는 않아요. 말씀 주신 그 ‘공백’ 혹은 비약이 비약처럼 느껴지지가 않는 다능!! 그런데 종교를 갖고 계시는 단발님은 그 부분을 아주 중요하게 보고 끝까지 파보실(?) 작정이신가 보더라고요 ㅋㅋ 그리고 그런 맥락으로 양자역학에서 신을 도출하고 계셔서 제가 놀랐던 페이퍼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당 ㅋㅋㅋ (저는 저를 놀라게 하는 책과 글과 말과 사람을 애정합니다)~~ 아 정말 인류는 싫은데 개별 각각의 인간은 재밌습니다. ㅎㅎㅎㅎ

라파엘 2022-01-15 12:35   좋아요 2 | URL
양자역학은 양날의 검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신존재의 근거도 될 수 있고 유물론의 근거도 될 수 있고요.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것은 인간의 한계와 이 세계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시간 날 때 단발님 페이퍼도 찾아봐야겠네요 ㅎㅎ 쟝님 말씀대로 인간은 재밌고 또 사랑스럽기도 해요 ^^

psyche 2022-01-15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완전 끌려요!

공쟝쟝 2022-01-15 10:52   좋아요 1 | URL
오늘도 이렇게 영업에 성공하고 마는 알라딘 관계자도 출판 관계자도 하다 못해 넷플릭스 관계자나 뇌과학관계자도 아닌 저 자신 ㅋㅋㅋ

잠자냥 2022-01-15 14:34   좋아요 1 | URL
쟝쟝/ 홉스 관계자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1-15 15:01   좋아요 1 | URL
오로지 홉스랑만 관계자 ㅋㅋㅋ ㅋㅋㅋㅋ

sijifs 2022-01-15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아리아나 그란데 끌리네요.ㅋㅋㅋㅋ 노래가 뭔지 궁급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1-15 11:14   좋아요 1 | URL
소개가 늦었습니다. 영화는 <돈룩업>이고요 대 유잼이니 넷플릭스 구독자면 보시고요, 노래는 저스트 룩 업 인데요 ㅋㅋㅋ 진짜 가사에 맞게 아주 노래 너무 잘해버림 ㅋㅋㅋㅋ

persona 2022-01-15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류는 더디게 발달하는 열등한 종입니다. 짝짓기 가능할 때까지 최소 12-18년을 키워야 하고 독립할 때까지 20년은 끼고 살아야하는 동물이 어딨습니까. 또 자유의지 그딴 거 없습니다. 자유 의지 발생하기 직전에 그 생각을 쏘아올리는 다른 뇌파가 있’읍’니다. 사실 내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유전자가 널리 퍼지려는 방향으로 나를 이용하는 거죠. 그리고 정신 못차리고 이렇게 살다간 멸종합니다. 자기들끼리 물고 뜯고 싸우다 지구 자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행성과 박살이라도 나버려라… 지구가 절딴나지 않아도 우리에겐 곧 종말이 다가옵니다. 이상기온과 역병. 인간들은 지들끼리만 비극이라고 하지만 지구를 위해선 아주 굿초이스고 지구도 진화하니까(?) 자신이 생존 가능한 방향으로 상황이 선택되는 겁니다. 다른 생물종들을 위해서 인간이 사라지는 건 아주 해피한 현상입니다. 등등등 저도 그런 생각이 가득 차있었는데 양자물리 신경과학 진화학을 공부한 탓이죠. ㅋㅋㅋ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생물처럼 그냥 거대한 회로 기판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학과 종교가 필요한 거 같아 수혈하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맑고 뜨겁고 따뜻한 열정으로 구라를 쓰는 소설이 제일 좋아요. 제가 살려면 따땃한 게 필요해. 배운 거 다 쓸따리 없네요.

공쟝쟝 2022-01-15 12:36   좋아요 2 | URL
아놬ㅋㅋㅋ 펄손아님ㅋㅋㅋㅋ 지금 이 댓글 인티제 완전 돋아버린 것임 ㅋㅋㅋㅋㅋㅋㅋ 이 지독한 파괴욕망ㅋㅋㅋㅋ 뒤에 오는 잔잔한 가능성에 대한 희미한 바람 ㅋㅋㅋㅋ 나도요 ㅋㅋㅋ 나도 비슷해 ㅋㅋㅋㅋㅋㅋ

persona 2022-01-15 12:43   좋아요 2 | URL
인생과 인간들은 환멸나지만 그런 이유로 죽을 순 없고 저희에겐 고양이와 돌멩이가 있으니까 흥분하지 말고 참아야지. 어쨌거나 언젠가 심판 받을 때까지 삶은 일단 계속 돼야 하니까요. 삶과 죽음은 제 자유의지의 영역이 아닌건데, 납득은 가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곧죽어도 싫으니 죽음에도 자율성을 허하라 주의잡니다.
오늘은 마음을 정화해야겠어요. 🖤

공쟝쟝 2022-01-15 12:44   좋아요 2 | URL
죽음에 자율성과 고양이까지 ㅋㅋㅋ 개똑같아서 소름돋았당 ㅋㅋㅋㅋ 저는 스파이더맨 볼거야 ㅋㅋㅋㅋ 우하하하하 개싄나!!

persona 2022-01-15 12:45   좋아요 2 | URL
전 고양이 없는 인티제. ㅋㅋㅋ 저는 반려 돌멩이들 데리고 산책 다녀올게요. ㅋㅋㅋ

공쟝쟝 2022-01-15 12:48   좋아요 2 | URL
전 달리고 들어가는 중ㅋㅋㅋ 주말 잘 보내고요 ㅋㅋㅋ 암흑의 검은 하트 감사해요 🖤역시 내 심장의 색깔은 블랙 ㅋㅋㅋㅋㅋ 이거 레드 하트보다 좋은 거인거 난 알아본다 ㅋㅋㅋ

persona 2022-01-15 12:52   좋아요 2 | URL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
속이 씨꺼멓게 타들어가도/ 썩었어도 심장은 뛴다가 희망의 메시지라는 거. 알쥬? ㅋㅋㅋㅋ 좋은 주말 되세요!

난티나무 2022-01-15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공쟝쟝님을 존경합니다. (존경은 이모티콘이 없네요…❤️‍🔥❤️‍🔥❤️‍🔥 불타오르네~^^)

공쟝쟝 2022-01-17 12:23   좋아요 0 | URL
퐈이어여어어어~~ 퐈이여어어어어~~ BTS의 비쥐엠이 깔리는 비주얼의 댓글!! ㅋㅋㅋ

단발머리 2022-01-15 20: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에서 ˝생존을 위해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할지 예측함으로써 가치 있는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해내도록 신체를 제어하는 것, 곧 알로스타시스를 해내는 것˝이 뇌의 제일 주요한 기능이라는 저자의 뜻은 알겠어요. 인간 중심주의 타파, 좀 더 겸손해지자는 맥락도 이해하고요. 그럼에도 여전히, 제 안에 남아있는 끈질긴 인간 중심주의ㅋㅋㅋㅋㅋㅋㅋㅋ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는 그 ‘신념‘이 인간에게 혹은 인간에게만 ‘의식‘ 혹은 ‘영적인 영역‘이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 자리를 전 아직은 ‘뇌‘라고 생각하기에 그 흔적을 찾고 싶습니다.

118쪽의 내용은 자기계발서처럼 읽힌다기 보다는 너무 ‘자기계발서‘라서 좀 그러네요.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내일은 바꿀 수 있고, 그 변화는 오늘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아, 뇌과학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이런저런 생각은 많은데 정리할 시간이 없네요. 요즘은 상반기의 책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페미니스트>에 푹 빠져있거든요. 거기에서도 생각이 많은데 정리가 잘 안 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렇게 재미있고 진지하며 유익하고 지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내 친구라는 사실에 무한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쟝님이 아니라 쟝님의 뇌가 아닌가 싶어요. 굿나잇이요!!!

공쟝쟝 2022-01-17 12:31   좋아요 1 | URL
제 뇌 말고 절 좋아해주시면 안되요? (꺅-)

인간 중심주이가 우얘 나쁘겠습니까. 다만 시간이 흐르고 장점보다 단점이 더 두드러지는 현재... 인간 아닌 것들과의 공존이 그 휴머니즘 이라는 전제 안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인간이 그래왔듯이 판을 뒤집어서라도 다른 길을 모색할거라는 것.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최신 과학 책과 최신 영화에서 그런 맥락들이 보이는 것도 같아서 리뷰를 써 보았습니다. 모처럼 쓰면서 신났음! 에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