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덮고 자려는 데 스탠드 빛과 책표지의 조화가 기기묘묘해서 이때다! 찰칵! 했지만 역시 똥 손.... 사진 잘 찍고 싶다.

중고서점에서 건진 책.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총으로 죽이는 것이지만, 총은 시계나 라디오에 비해 살인 쪽에 편향된 기술이다(P.25)” 마찬가지로 우리의 디지털 미디어 기술도 어떤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아직 덜 읽어서 그게 무슨 편향성인지는 모르겠음 ..)

기계에 최적화된 인간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이 편향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제해야한다. 저자는 디지털 미디어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기 위한 법칙을 알려준다고 하시는데....
막연히 생각은 해본 토픽들이 지적 자극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긴 하나.. 세네번 같은 문단을 읽어도 아리까리한 번역이 흥미를 잃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나저나 과잉 연결이 지친다며 페이스북 끊어놓고 보름도 안되서 인스타에 취미 붙인 나는 진정한 소셜미디어의 노예이자 주커버크의 호구이자 기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인간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sns에 꼭 올리고 싶은 역설적 반성의 시간을 보내며 심지어 그것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까지 착잡해지는 것이다. (책의 번역어투를 흉내내 보았다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아로파 총서 1
권혁범 지음 / 아로파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쓰연 세번째 책

그러지 말자고 해놓고 또 단답형을 원했다. 그래서 죄악이라는 거야, 죄악이 아니라는 거야? 하고.
조금 혼란스러운 개념의 정의들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저자는 결국 판단을 유보하는 듯 했다. 섣부르게 결론 내주길 원하는 스스로의 조급함을 제대로 직면했던 독서..

현실 속에서 민족주의가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부분들을 잘 알고, 민족주의 또한 근대에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어쩌면 승리해버린!!!)임을 인식해야 한다. 작금의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만큼이나 압도적인 현실임을 인정하되 다른 정체성들 (계급, 페미니즘, 소수자, 환경 등등)이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정도로 이해했다.

모임 덕분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읽지는 않았을 것 같은 책인데, 다 읽고나니 몇가지 물음표들이 더 생겼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더 엄밀히 읽고 싶어졌고, 한국인의 민족주의 (혹은 민족적 감수성)도 공부해볼까 싶어졌고 무엇보다 “식민지 남성성”을 알아야 겠다 싶어서. 관련된 책들로 넘어가는 독서를 하고 있다. 모처럼의 사회과학 분야 독서는 역시... 재밌지만 좀 피곤해..

공기처럼 당연히 학습되고 있으므로 ㅡ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 가장 단순하게 쉽게 빠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떤 민족주의냐 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스스로 민족주의자라고 여겼는 데, 어떤 집단에 대한 동일시가 나의 정체성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민족주의자도 그렇다고 여성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조금 슬픈 감정이었다. 내가 혼융되어 있던 어느 시기의 그 강렬한 느낌들을 떠올렸다. ‘함께’라는 느낌에 마음을 성큼 무장해제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은 갑자기 오십년 늙어버린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임을. 


"(p.175)(20)에서처럼 민족을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1950년대 독일 나치즘을 지지하는 민족주의도,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에 대한 농민적 지지도 현실적 힘이 아니었던가? 민족의식이 부정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사회의 변화/변혁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그것을 견제해야지, 따라가야 하는가? 가령 자본주의는 현재로서는 절대적인 현실이자 힘이다. 그것을 전면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자가 되어야할 필연적 논리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주의를 수용하고 활용하기보다, 그것이 당분간 없어지지 않을 강력한 이데올로기라면, 그것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제어하는 사회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p.217) 물론 이 필연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데에 인간의 자유가 자리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한 깨우침과 훈련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구체적 이익을 보장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니까 자신의 이익에 관계 없이,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훼손함에도 믿는다. 민족주의적 선동에 의해 일어나는 대중의 감정적 동요를 비판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민족주의가 지속되는 복합적 그물망에 대한 고민을 쉽게 넘지는 말자. 민족주의는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여러 다른 정체성과 경합하다 승리한 이념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이고 현실이며, 그것은 ‘있음be’이다. 나와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라는 주제를 끌어오면서 저자가 깊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없음, 무, 초월, 피안’이었다. 보통은 생각하지 않고 살기에 읽는 동안 아스라한 기분이 들면서 하염없어 질 뻔했다. 그래서 피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하염없는 기분, 난 싫다. ⠀⠀⠀⠀⠀⠀⠀⠀⠀⠀⠀⠀⠀⠀⠀⠀ ⠀⠀⠀⠀⠀⠀⠀⠀⠀⠀⠀⠀⠀⠀⠀⠀


기대한 만큼 아주 깊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책은 환기시켜주었다. ‘현재와 세계와 삶’에 대해서는 때때로 아주 심각하게도 고민하는 내가 이토록 ‘죽음과 없음과 세계가 아닌 것’에 대해선 무관심해 왔다는 사실. 그 이면에 대한 지독한 외면 - 이는 무엇에 대한 억압인 건 아닐까.

대단히 선명한 유물론자인 내가 완전히 동의하고 매료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다만, “없는 것과 관계 맺으려는 사람들”을 나만의 편협한 진리관으로 무가치하다고 평가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움켜쥔 하나의 기준 만으로 빈곤하게 세상을 살아가기에, 마주치는 관계는 너무도 많고 스치는 우주들은 너무도 다양하다. 각각의 빛나는 우주들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싶다. 일단은 좋은 독자가 되어야지! 😏
⠀⠀⠀⠀⠀⠀⠀⠀⠀⠀
“(p.156)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잇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점검해봐야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흑과 백으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두번재 채사장의 책이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류의 마케팅이면 안볼 것 같다. 너무 돈냄새가 펄펄.
넓고 얕고 대중적인 것도 좋지만, 더 깊고 자세하고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하고 싶은 채사장의 이야기를 푸는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안팔리겠지만! 그 스스로도 지금쯤은 갈급해하지 않을까. 나의 생각이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102)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젊은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가 가진 생각과 기분과 세계관과 계획에 대해서 들어고보 싶다. 그리고 나는 단 한마디도 그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고맙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의 불완전한 삶 전체에서 잠시나마 충만함의 기억을 선물해준 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하였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이 구절에서 놀랐다. ‘단 한마디도 그 때의 나를 가르치려들지 않을 것이다’라는 단호한 결심. 나라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다. 가르칠 것이다. 그 때의 내가 대화는 커녕 입도 벙긋 못하도록. “그 사람은 만나지마. 그애를 사귄다면 좋은 경험이 될거야. 그들의 목소리를 너무 신경쓰지마. 그 이야기는 마음에 담아두지마. 겨우 그 일로 그렇게 슬퍼하지마. 그 후배는 너무 믿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 공부는 별 도움이 안돼. 네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술 좀 그만 먹어. 끼니 좀 거르지마. 요가나 스트레칭을 열심히해.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 니가 믿는 것이 너를 가장 힘들게 할거야. 적당히 의심해. 그 사람 존경하지마!” 등등등. 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혹시 모르니까 리스트를 좀 적어둘까.

그러나 알고 있다. 그 때의 나는 아주 도전적인 눈을 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지금의 나에게 말하겠지. “낙장불입이야. 내가 책임져. 난 지금 누구보다 진실하고 진지한 선택들을 하고있다고. 잔소리 그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완전함과 충만함으로 당당했고, 이상에 가슴이 뛰었다. 용감하고 겁없는 그때의 반짝이는 나를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부끄럽지만 보다 더 많이 사랑스럽다. 그래도 덜 사랑스러워도 좋으니까 조금은 늙은 생각을 하면 좋겠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너무 진지했고 너무 마음을 많이 바쳤기 때문에 훗날의 네가 많이 부서질지도 몰라. 그러니 너무 열심히 하지마.”



*

팟캐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들은 것과는 별개로, 채사장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었다. 열한계단은 어쩐지 읽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도서관에 꽂혀있어서 빼온 걸지도) 그리고 책을 읽는 순간, 책이 .. 들렸다!!! 정확히는 책에서 채사장의 목소리가... (-_-;;)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채사장 톤으로)

성경과 자본론이라니.
읽을 생각을 하면 하품부터 나올 것 같은 고전들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은 딱 지대넓얕의 그 느낌이지만, 사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고전마다 담겨있는 채사장의 성장서사였다. 덮고나니 한편의 잘 만든 성장 영화를 본 것 같기도. (일러스트 내 취향)

넘겨짚자면 채사장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에 앞부분 보다는 뒷부분에 있는 듯하다. 티벳사자의 서-우파니샤드 등으로 정리된 죽음과 내세, 혹은 내면과 영적자아(?) 같은.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통해서도 슬쩍 내비친 것 같긴 한데, 정작 인기를 얻은 것은 ‘세계에 대한 쉽고 재밌는 지식’이라는 컨셉이었던 듯 하고.

“(p.333)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넣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한 논의가 미스터리 서가에 버려져있는 것이 아쉽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죽음 이후의 문제를 어덯게 다루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기 대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후에 대한 논의 없이 삶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죽음 이후를 배제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행위는 실제 인간의 삶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 두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당신 스스로의 이해. 학문은 죽음 이후에 대해 논의하지 않아도 문제 없지만, 당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서구 근현대 합리주의의 파수꾼이 아니라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창조자 이길 바란다.”


아마 최근에 나온 책이 이 주제를 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대중적인 소재도 아니거니와 약간 사이비 냄새도 나고(ㅋ) 해서 돈 안되는 것과 비효율을 증오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전작들 만큼 먹힐라냐 싶긴 한데- 그래도 채사장인데 먹히겠지뭐. 괜한 남 걱정...

<열한계단>을 읽고나니 개인적으로는 채사장이 권하는 이쪽 분야(죽음, 자아, 영적 세계, 내세, 내지는 초월)에 관심이 생겼다. 물론 팟캐스트로 들을 당시에는 “와, 이 인간 특이하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

“(p.401)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책의 처음에서 세네카의 격언 "출항과 동시에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고 해서 그가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항해를 한게 아니라 오랜기간 수면위에 떠있었을 뿐이다." 언급했던 채사장은 책의 말미에서 다시금 바다로 돌아온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시작하며 열한계단-열두 계단 째를 올랐지만 그가 도달한 어떤 결론은 - '자아'란 결국 수평선(눈에 보이는 경계이지만 사실은 어져있는, 이어져있음으로 닫혀있는)과 같지 않겠느냐는 말 같기도 하고. 알듯 말듯. 일종의 열린/닫힌 결말인건가.

듣기만 하다가 글로 읽고 나니, 채사장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또 진지하고 지극히 진지한 사람인 것 같다. 자기 삶을 어떤 서사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이기도 하고. 어쩌면 사춘기 때 이후로는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들에 대해 채사장 덕에 생각해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내일은 채사장의 다음책을 읽어봐야겠다.

(덧, 그러고 보니 알쓸신잡 제목 지대넓얕 따라했다더니..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의 제목도 채사장의 ‘열한 계단’을 카피한 것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ㅋㅋ)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8-09-18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대넓얕 정말 열심히 들었는데... 책은 한 권도 안 읽었네요.
그래서 저기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가... 들려요 ㅋㅋㅋ

공쟝쟝 2018-09-18 23:21   좋아요 2 | URL
열한계단은 재밌었어요~!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이나 시민의 교양 같은 책들은 뭘 두번을 듣나 싶어 안봤지만요~!

고양이라디오 2018-09-28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채사장책 다 읽었습니다. <열한계단>이 가장 좋았습니다^^

저도 과거의 저를 만난다면 멘토역할을 하고 싶긴합니다...

공쟝쟝 2018-09-29 01:49   좋아요 1 | URL
호오~ 저는 지금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읽고 있어요. 확실히 열한계단이 더 좋네용 ㅎㅎㅎ 채사장 책은 채사장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착시(?) 현상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00페이지가 넘는 많은 목소리와 증언을 읽었지만, 가장 인상 적이었던 부분은 이 목소리들을 기록하는 저자-알렉시예비치-의 관점이었다.

“(p.272)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작은 것, 평범한 것, 오류와 나약함, 감정, 일상과 느낌을 훑어내는 그녀의 기록들은 (보다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본질과 비본질 등을 나눠서 생각하기 익숙했을) 소비에트 당국에게는 아쉽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측컨대, 때문에 이 글들은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녀도 권력과 불화하지 않았나 싶다.

“(p.36) ..나는 그저 녹취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작고 연약한 사람을 크고 강인한 사람으로 빚어내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을 모으고 그 자취를 좇는다. 인간이 자라고 성장하는 그곳에서.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더이상 말 못하는 벙어리도,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그 사람의 영혼조차 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권력과 갈등을 빚는 이유는 뭘까?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17년후) 옛 일기장을 펼쳐본다.... 일기를 쓸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없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살았던 나라도 이젠 없다.“ 

_

어쩐지 여성과 전쟁이라는 주제보다는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책. 

당국이 그녀의 기록을 재단하는 수준의 경직성을 빨리 쇄신했더라면,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 하려는 욕망(p.188)“을 누그려뜨릴 수 있었다면, 책 속에서 말하는 ‘작은 의문들’을 포용할 수 있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었던 소련의 사회주의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까. 입맛이 썼다. 아쉬워서. 제국주의를 쳐부수자면서 제국주의 만큼의 유연성도 없었던 그곳 혁명가들의 모습이.

그녀의 작업과 초창기 글들에는 (당국의 입장에서는) 문제적인 지적이었을 지언정 분명 애정이 배어있었다. 질문을 용납하지 못하는 검열과 적대가 결국 작가가 애정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만약을 뒤로하고 어쨌든 세월은 흘러버렸다. 그들이 강조하고 싶었던 승리는 물론,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조국마저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삭제시키고 싶어했던 기록들은 남았다. 작고, 사소해서 교훈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증언들은 고스란히 책으로 출간되어 2015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게 된다.

_

그리고, 두번의 역설. 
현실의 사회주의가 삭제되버린 현재의 나는 소련당국이 강조하고 싶어했던 부분-그들의 위업, 이념, 이상, 대의-의 텍스트를  오히려 찾아 읽기 어렵다. 그들이 남기고자 했던 내용들없이 그들이 버리고자 했던 남은 원고 더미를 더 먼저 읽게 된 것이다. 
다행이 알렉시예비치는 성실하게 기록하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수집한 증언들에는 작은 것과 큰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나는 (당시의) 큰 목소리를  어렴풋이 유추해보았다.

“(p.317-8)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어. 스탈린이나 레닌을 믿은게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믿었지. 나중에 사람들이 이름붙인 것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믿은 거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복.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행복. 바로 그걸 믿었어. 그들이 꿈꾸는 자들이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해. 하지만 눈먼 자들이었다는 의견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 절대로! ... 신념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군대처럼 그렇게 강력하고 군기가 센 유럽 전체를 호령한 그런 무서운 적을 물리치지 못했을 거야. ..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공포가 아니라 신념이었다고, 공산당원의 명예를 걸고 당신한테 말할 수 있어. 나는 전쟁중에 공산당에 가입했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산주의자야. 나는 내 당원증이 부끄럽지 않아.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 내 믿음은 1941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

2차대전당시 소비에트 군대에는 무려 백만명의 여성들이 자원입대해 용맹하게 싸웠다고 한다. 맹목적 선동과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내면화된 국가주의 만을 소녀병사들의 동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에 와서야 허망하게 들리는 어떤 ism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젊음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기실 그들의 참전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도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_
그래서 조금 복잡해졌다. 그녀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야하는 것 인지.. 그저 가엾게만 여긴다거나, 숭고한 희생이라고 마냥 찬미한다거나, 전쟁을 기념/반대하자 뚝딱 정리해버린다거나, 혹은 모른체 한다거나 - 여타의 쉬운 방식으로 간단히 교훈! 끝! 하는 거야 말로 기껏 듣게 된 목소리를 오독해버리는 느낌이라서. 

작은 것을 작다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없어져 버렸다.
알렉시예비치가 적었듯. “한 사람 만으로도 벅차다.  ... 그 안에서 길을 헤맬 만큼”

“(p.267)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잇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나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저자는 가장 어려운 길을 내놓는다.
사랑. 
그거야 말로 역사보다 전쟁보다 난해한 것 아닌가.

_
정말로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가? 
쉬웠으면 좋겠다, 단순했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뭉툭한 생각이 어떤식의 폭력으로 비화되기도 하는 지를 되짚는 요즘이다. 
나는 조금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서도 애시당초 인간은 불가해한 존재라서 이해할 수 없음을 끌어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_
아아, 결론내지 않겠다. 
당분간은 결론내지 않음을 견디는 연습을 하려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