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 한국인 유일의 단독 방북 취재
진천규 지음 / 타커스(끌레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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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 읽어야 하는 책!! 문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읽었다는 바로 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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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한정 평양지도 증정이라는 마케팅에 홀랑 넘어가 교보에서 집어왔는데 같이 사는 사람이 이미 저자 사인까지 받아서 책장에 꽂아뒀더군. 두권을 두기에는 집도 비좁고, 널리 읽혀야 할 귀한 책이라 놀러온 친구에게 선물로 들려 보냈다. 

그리고... 나는 역사적인 9월의 평양회담을 맞이하여 이제사.. 읽고 있는 것이다!! 
(원래 책은 안읽을려고 사는 거 아닙니까?ㅋㅋ 빌린책 읽느라 산책 못읽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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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 그동안 세상에 공개된 북녘에 관한 책과 사진은 대개 외국 기자가 취재한 것이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나는 그런 한계를 깨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감정과 생각까지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재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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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규기자가 방문하던 2017년 10월(작년)까지만해도 남쪽인사의 방북은 불가능했다. 그는 2010년 5.24 조치 이후 한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방북 취재에 성공했다. 변화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는 북녘의 모습이 책에 사진으로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런데 지금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북한의 곳곳이 방송되고 있다. 정말 남북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는 생각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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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이 보이는 용천평야,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의 시가지, 아무리 봐도 우리집보다 좋은 고층 살림집,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보고있는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은 수도의 시민들. 어쩐지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정말 곧 직접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아, 이제는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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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79) 평양에서 내가 놀란 것 중 하나는 젊은이들의 정신력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굳건하다는 것이다. 계속되어온 경제제재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는 젊은이들은 없었다. 미국과 대등하게 협상해 한반도에 평화가 완벽히 보장되면 자신들은 더욱 풍족한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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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문대통령이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뉴스를 보면서 선생님 한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북의 지도자와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난다고 푸념하니까, 실질적으로 지금 북은 김정은-김여정으로 대표되는 젊은 30대들이 주도적으로 사회를 이끌어 간다고 하셨다. 그러긴 할거라고 짐작했는데 막상 전문가한테서 자세히 들으니 조금 놀랐다. 상상이상으로 북의 사회는 체계적으로 조직이 되어있고, 세대 갈등도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평화가 정착된다면 앞으로 북의 사회는 아마 쭉- 잘 풀려 갈 거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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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 분야 만큼은...
뭐랄까 우리세대가 가진 자신감이라는 것은...쩜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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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든 좋다. 요즘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린 정세는.
공부할 것도 많아지고, 생각할 것도 많아지고, 그리고 꿈꿀 것도 많아져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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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정상회담때 김정은 위원장은 남한보다 30분 이르게 가는 북의 표준시를 늦춰 서울의 시간과 맞췄다. 이제 우리의 시간은 평양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이것은 어떤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난 이 변화하는 현실이 감동적이면서도 어쩐지 불안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우리들은 더 자주 더 많이 ‘함께’ 하게 되겠지. 

나 개인이 민족사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동포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들을 공부하고, 여행해서 만나는 것 정도이지 않을까. 
그것이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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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믹스가 놀랍다고 한 맛의 대동강 맥주. 안주로는 ‘부근부근(폭신폭신)’한 녹두 지짐이. 
책을 읽고나니 다른 준비는 아직 모르겠으나, 먹고 마실 준비는 완벽히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암! 우리는 먹방과 야식으로 다져진 배달의 민족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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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 자기를 돌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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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할 때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자라서 결국 공부가 업이 되어버린 저자 엄기호의 책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망가지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하느라 바빠 공부를 잊어버린 오늘의 우리에게 자신과 화해하는 ‘공부’를 당부하는 책.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보다, ‘자신을 배려하는 일에 서투른 사람’이나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특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p.18) 그렇기에 공부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세상을 바꾸는 자유와 해방의 도구이자 과정이다. 다만 이때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데 집중하느라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점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아니,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록 더 나락에 떨어진 세상이 만들어진다."

엄기호씨 책답게 우리가 무심히 넘겨오는 단어들의 개념 -공부, 배움, 겪음, 자아실현, 자기배려, 다룸, 한계, 자유, 기예 등등 -을 엄밀하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읽다보면 왜 한 말을 또 하나 싶을 때가 있지만, 그 한 말을 또 되풀이 해서 읽는 동안에 그동안 내가 안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단지 내가 ‘안다고 믿은 것’들일 뿐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읽는 이가 모른다는 것-한계-을 알게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일지도.

*

거칠게 감상을 적자면, 나는 일반적 의미로서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단,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워 깨닫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라는 것은 두루뭉수루하게나마 알고 있다. (그래서 이책 저책 뒤적이고 기웃거리는 걸지도) 젊었을 때의 난 어떤 물음표들이 다가왔을 때 골똘히 생각할 줄 몰랐다. 불안해 하지 않으면서 혼자일 줄 몰랐고, 멈춤의 시간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세상 속에서 살기도 했으니까. 공부에서 느꼈을 기쁨의 순간들은 내게서 익어갈 충분한 시간을 부여받지 못함으로서 어떤 결실로 연결되지 못했다. 성과없는 배움을 쳐주지 않는 사회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할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즉, 나는 배웠으나 배우지 못했다.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 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핑계를 대자면 과정을 생략해버린 사회에서 무언가를 ‘익힐’ 충분한 시간이란 - 곧 비용이었고, 비용이 없으므로 용기내기 어려웠다.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인간.
무언가를 제대로 익혀본 적 없는 인간.
자유를 모르는 인간.

(p.241) 익힘의 과정이 부재하므로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어진다. 대신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오로지 외부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문제만 해결되면 자기는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기예의 문제를 조건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배움을 넘어 익힘을 통해서만 연마되는 기예가 늘 리 없다. 나는 이것이 지금 한국 교육이 처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조건만을 탓하게 된 불만쟁이.
안타깝지만 그게 지금의 나다.

그러니 이제라도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자아실현이 목적이 아닌, 자기배려가 출발점인 저자가 촉구하는 그 ‘공부’ 말이다.
먼저는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p. 178) 그러므로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말하는 타자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모르는 존재, 타자로 대해야 한다. 모를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시작도 않아놓고 다소 섣불리 언젠가를 다짐하자면..늦으막에 시작한 나의 ‘공부’가 마지막 당부대로 사회를 외면한 자기배려에서 안주하지 만은 않았으면..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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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엄기호씨 책은 역시 재독-삼독 해야 빛이 나는 거 같다. 세번째 읽고나니 텍스트가 새롭게 보였다. 책 자체에서 저자의 공부 흔적이 역력하다.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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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08-28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 않고 꽂아만 둔 책인데,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공쟝쟝 2018-08-28 21:58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어보세요. 정말 좋습니다 ㅎㅎ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 학살의 문화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수기 통일역사문화신서 1
최태육 지음 / 작가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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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대단한 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의식 과잉의 20대는 가고, 일상을 조근조근 밟아나가는 것이 새삼스러운 요즘. ‘무엇’보다 ‘왜’보다 ‘어떻게’라는 물음이 따라 붙는다. 이 물음표의 단어는 삶이 조금 축적 된 후라야 중요해지는 것 같다.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 - 방법과 시간을 들였을 때 천천히 나타나는 류의 어휘랄까.


그때는 ‘무엇’이 중요했다. 뜻, 혹은 명분 어쩌면 실리였을 수도 있겠고. 그러나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어떤’이다. (그 무엇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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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단종.
많은 것을 이루어낸 세조.
그러나 사람들은 세조의 업적보다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산책길을 기억한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은 세조가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단종이 ‘어떻게’살았느냐이다.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던 단종에게 무엇을 이루겠다는 목적이 있었겠는가?
이 땅의 세민도 단종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할 뿐이다.
단종과 세조의 삶은 이른바 좋은, 심지어 효율성이 있는, 그래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목적을 달성할 때조차도, 어떻게 행동했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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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육 목사의 수기이다. 그러나 목회수기가 아니다. 그는 강화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도중 교인들의 삶에서 한국전쟁과 학살에 관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독교와 학살 관계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과정에서 들은 바와 느낀 바를 적은 책이다. 특이한 것은 정리된 논문 형식이 아니다. 읽으면서 나는 마치 시같다. 라고 생각했다. 쉽게 읽히지 않았고 머릿속에 ‘어떻게’로 생생해졌다.

그런 것 같다.
가까운 과거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웠고, 또 왜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당시를 살다간 이들에게는 그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를 살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벌인 ‘어떤 참혹함’만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만이 전해지겠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역사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들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두환이 광주학살을 저지른 데에도 ‘무슨’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두환을 여전히 믿고 따르는 이들은 ‘무엇’을 보라고 말한다. 당시의 ‘북괴’를 보라고. 그가 구현한 ‘업적’을 보라고.
역사를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로 바라본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에 먼저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두환, 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네가 ‘무슨 짓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라.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의 가치관과 이념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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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라기도 하고, 만기라기도 알려진 백정,
경찰 황씨가 총살을 하다가 힘들면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만기에게 쏘라고 했다.
정신연령이 낮았던 만기.
정신지체 장애인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해도구가 되어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었던 경찰은 빌라도처럼 막걸리에 손을 씻었다. 그렇게 최소 120명이 살해되었다.(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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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증언자들은 각양각생이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노파, 사람을 다시는 믿을 수 없는 피해자, 70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증언하기위해 평생 사건을 곱씹었을 할아버지, 남의 일 인양 관찰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학살 가담자, 죄의식이 있는 자, 죄의식이 없는 자. 북을 치는 할머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 사람. 끝까지 반성하지 않으며 본인에게 도래할 천국을 위해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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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서산·태안에서는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겠다는 두 가지의 목적이 충돌하였다.
그 결과 사람의 상식과 양심, 그리고 일상적 삶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목적의식이 경직되면서 사람들이 학살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실상의 일부를 조사하고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를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아마 무엇인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기업, 회사, 시민단체, 학교, 신념에 넘치는 종교단체, 이념에 넘치는 국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무엇이라는 목적이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 일 것이다.
강화 교동면에서는 한국전쟁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지나도 가해자 씨족과 피해자 씨족이 함께 농사를 짓지 않는다. 소원면에서 정씨와 국씨는 한 그릇에 담겨 있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다소 불분명하고 지엽적이지만 전쟁과 학살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전쟁과 학살이 사람들에게 남겨 놓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아저씨가 조카를 죽일 수 있다는 것, 제자가 선생님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친구가 친구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바로 이 두려움이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한 것이다. 학살은 사람에게 두려움에 뿌리를 둔 근원적 불신을 심었다.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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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삶을 대하는 방식은 사회·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동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분류, 배제하는 사고방식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 ‘삶에서 무엇을 더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만나 타자를 절멸시키는 ‘학살’의 옹호자·가담자·가해자로 수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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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무엇’이 아닌 ‘어떻게’를 배웠다. 
‘학살’의 역사를 제대로 치유하기는커녕 직면조차 한 적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혐오, 분류, 배제는 당연한 귀결이다. 국가와 이웃에 의한 직접적인 살해 – 살해에 대한 입 뻥긋 하지 못함 까지도- 그야 말로 ‘존재의 소멸’이라는 공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은 그냥 그저 세대가 간다고 해서 사라질리 없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의식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해법을 찾아야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나 개인은 더러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당장 쉬운 태도를 갖추지 말아야지. 내가 쉽다는 것은 이미 의식화조차하지 못한 채로 생각이 끝나 버렸다는 것이고, 그것은 멈춰버렸다는 것. 어떤 완고함. 그것을 경계 해야지.

삶에서 ‘어떻게’가 중요해진다는 것은 만들어 가겠다는 시간을 염두한 다짐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비워야 하고 물렁물렁해야하고 움직여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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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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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천주희 외 지음 / 낮은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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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있다.
가족과 애인, 아주 안전한 친구관계 몇몇.
독서와 생계, SNS. 1년 가까이 된 것 같다.
쫄았다. 사람들한테.
관계에 들여야하는 ‘마음’이 마른걸레 쥐어짜듯 했다.
마음이 안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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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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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려있는 동안 수심깊은 곳에 헤묵어있는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았고, 내가 세상에 얼마나 겁먹어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나를 돌볼 수 있을 정도로만 강해지자. 그 때 까지, 누구도 돌보겠다고 섣불리 노력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계속 침잠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무서웠다.
-
“인간은 취약하다. 병든 개와 걸인 여자 같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취약하다.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 속에서 살아가고 죽는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지위로서의 존엄성은 인간의 독립성과 자립, 자율성만이 아니라 인간의 ‘취약함‘을 포함한다. 약하고 상처 입기 쉽기에 그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의 취약성이다. (...) 상처와 취약함을 부인하는 사람은 의존과 돌봄을 열등함, 또는 무력함과 바꿔치기한다. 상처와 취약함을 부인하는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존엄성을 함부로 취급한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열등한 것이 아니고 도움을 받는 것이 무력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낙인찍는 사회가 열등함과 무력함을 인간의 취약성과 의존성의 가림막으로 사용할 뿐이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잘나고 제 힘으로 설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상처와 약함을 서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계기라고 한다면, 상처에 대해 뭔가 하려는 반응이 존중일 것이다. (p.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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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주면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 그게 미치도록 힘들었다.
요즘은 다 끊어낸 그 최소한의 관계에서마저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취약함을 인정하고도, 누군가에게 의존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건강한 ‘의존’이란거 안해봐서 잘 모르겠다. 침범하거나 흡수하거나 흡수되거나.
그래도 안다. 손 내밀어야 한다는 걸.
타인을 ‘실감’해야 한다는 걸.
그의 약함을 서로 알아보고 싶다. 건강한 의존을 하고 싶다.
내가 알아본 그의 상처가 나의 상처를 열등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싶다.
존중하고 싶다. 너를.
그래서 한발짝 더 나가고 싶다. 인간.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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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
부모가 사는 세계는 침묵의 세계 이지만, 자녀는 두 세계를 오가고, 부딪치고 충돌하며 세계를 점점 확장해 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도 ‘장애‘라는 말로 설명할 수없는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확장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장애‘라는 말로 장애인을 동질한 집단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세계든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그곳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듣지 못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손짓과 표정과 몸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타인이 나의 손짓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친절하고 크게 표현해야한다. 그 이야기를 전달 받은 사람은 상대의 손짓이 끝날 때 까지 응시해야한다. 나는 상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상대는 응시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 사이에서 언어와 관계의 윤리성을 배운다. 다큐에서 한창 김장준비로 바쁜 엄마에게 불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소리 없는 세계는 목소리보다 다양한 손짓과 눈빛으로 다양한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가 다중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감각은, 신비롭고 어렵고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다.

p.47
‘마음에 들면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하니, 당시 나로서는 이게 웬떡이냐 싶기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돈이 오가는 세계에서 ‘마음에 들면‘이나 ‘원하는 대로‘같은 말이야 말로 가장 악질적인 어구일수 있다는 걸 몰랐다.

p.49-50
‘무제한의 수정‘과 ‘원고 불채택(퇴짜, 작업비 지급일 지연)‘등을 제멋대로 행사한다. 노동 시간에 따른 임금을 지불해야한다는 대원칙은 실종된다. 약속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수정해도, 정해진 결과물에 따른 최종 지급비는 변하지 않는다. ‘을의 을‘ 입장에서는 다음번 일감도 받아야 생계가 유지 가능하기 때문에,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다.
업체 입장에서 갈수록 많은 일을 외주화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비용을 절감하고, 손쉽게 노동자를 쓰고 버릴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떠한 책임‘도 없이 사람을 사용하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용하는 데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외주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책임없는 자유, 리스크 없는 이익, 일화용처럼 쓰고 버릴 수 있는 인적자원에 대한 열망이야말로 이 시대의 꿈이자 시대정신이다.
...
‘책임없는 자유‘는 최종적으로 ‘죽음의 외주화‘로 실현된다.

p.77
대학원이라는 조직에 10년 넘게 자신의 청춘을 바쳐온 젊은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잘못된 사람이 나간 것, 이라고 간편하게 규정지어버렸다. 나 역시 그랬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이가 한 절박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도 응원과 지지보다는 외면과 비난을 택했다.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기 보다는 조직의 논리에 공감했다. 나를 감싼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주변인들과 함께 괴물이 되어갔다. 누군가의 면전에 퍼붓는 욕설이나 물리적 폭력만이 무기가 아니다. 외면하는 것 역시 당사자에게 겨누는 날카로운 칼이 된다.

p.97
여기서 모든 인권의 초석인 모든 사람의 공통된 지위로서의 존엄성은 자리를 잡기 어려워진다. ‘공통된 지위‘를 부인하게 되면 위계와 서열을 정해야하고, 위계의 가장 센 정당화는 ‘열심‘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이유로(이주 노동자다, 여성이다, 장애인이다 등등) 보통의 ‘열심‘에 낄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은 이중 삼중으로 차단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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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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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장강명이 제안한 ‘독자들의 새로운 문예운동’이라도 하는 듯 비장한(!) 각오로다가 독후감을 쓴다. 어쩐지 힘이 들어간 글이라서 더 못 쓸 것 같긴 하지만... 오랜기간 암흑물질(?) 독자 인생을 접고 나름의 코멘트로 죽어버린 한국의 출판-문학 시장을 살리는 데 기여해야겠다!!!!!!!! (부릅!)

당선, 합격, 계급.
또! 장강명이다. (이쯤 되면 팬인 것 같다. 인정해야할 듯.) 10년 치 기자짬밥 뚝뚝 묻어난다. 아, 이런 르포도 쓸 수 있구나. 멋지다.

문학공모전에 관심 1도 없었던 데다가, 400쪽이 넘어가는 두꺼운 책이었는데도, 한 번의 지루함 없이 시원하게 읽어 내려갔다. 원래 르포라는 장르가 이렇게 흥미진진한가? 추리소설 같기도,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쓴 에세이 같기도 하다. 공모전과 공채 시스템, 혹은 간판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계급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밝혀내고 있으며, 작가 나름의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모전을 준비하는 개인들을 위한 팁까지. 속속들이 깔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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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지대는 인정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 된다.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그 지대에 놓인 사람들로서는 그 기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필사적으로 애쓴다. 어떤 기준을 적용해도 평판에 손해 볼 일이 없는 사람 (핵심에 있건 완전히 경계밖에 있건)만이 그런 논쟁에 무관심할 수 있다. (p.294)”

완전한 경계 밖.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박탈감 같은 게 들었다. 여지껏 시스템에 들기 위한 간절한 노력들을 해본 적이 없다. 시험도 공모전도 공채도 도전해 본 적이 없다.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욕심이 없었다.

이미 그럴듯한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므로, 노력해도 제도권 안에 들기는 어렵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시험을 잘풀기 위한 공부는 하기 싫었고, 돈을 벌고 싶었지만 회사에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생활이 싫었다..) 노력해도 안되는 세상을 통째로 비웃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노오력은 커녕 노력조차 하지 않았구나 싶다.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고 근근이 끼니를 때우지냈다. ‘남들 다 그렇게 살아’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기를 쓰고 살아야했다. 그렇게 외곬으로 제도의 바깥에서 씩씩대며 분투했지만, 세계는 견고했다.

서른이 되자 현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하던 알바에 실력이 붙어서 개인사업자를 냈다. 월세, 건강보험료, 통신료, 세금들이 딸려온다. 1인분의 몫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 하루를 빠듯하게 써도 최저 생활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어제는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면서 근로장려금 신청도 했다. 근로장려금은 일을 하고 있지만, 소득이 적은 일하는 사람에게 국가가 주는 지원금이다. 


“대체로 어떤 시험을 치고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신비로운 권위를 얻는다. 그 집단은 주류문단일 수도 있고, 명문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일 수도 있다. 시험에 합격해서 그 단체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한번 들어가고 나면 쉽게 퇴출되지 않는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 단체 구성원이 되는 입시에 통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자격증처럼 작동한다.
이 신비로운 권위를 ‘간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p.289)”


꼭 간판을 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공채나 공모전에 도전하지 않아도, 영세 사업자인 나의 삶은 너무 바쁘고 책 한권을 읽기 위해 고독으로 침잠할 수 있는 겨를 조차 없다. 난 계급상승을 포기한 흙수저다. 한국사회가 인정투쟁을 하다가 탈락된 이 말고도 애초에 인정받을 생각이 없는 이들까지 ‘루저’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세속의 기준에서) 난 ‘루저’다.

공모전과 시험을 준비한 사람들만큼 절절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나는 약간은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책을 읽었다. 간판을 욕망해본적도 없다는 사실이 어떤 도덕적 우월감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127만명의 청년들이 ‘9급 공무원’이라는 비생산적인 시험에 몰두하는 것은 분명 사회적 낭비이지만, 시험을 안봤다고 내 인생을 안낭비 한 건 아니라서.

경계지대는 인정투쟁이 치열하겠지만, 인정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생계가 치열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하물며 간판이라는 신화를 쟁취한 이들-합격자들의 세계-라는 것은 몇 억 광년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런 내가 이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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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자에게는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당위성을 줘야 먹혀요. 그 당위성을 위해 문학상이나 명사의 권위가 필요한 거고요. 학교에서 ‘꼭 읽어야할 책’같은 독서 목록을 받아왔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런 식으로 책을 고르는 것 같아요.”
이건 독자들에게 장편소설 공모전이 좋았던 이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읽어야할 책을 골라야하는 수고를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딱지가 대신해주었다는 얘기다. (p.49)”

르포 초반, 시기별로 내러티브를 가지고 전개되는 문단-한국문학의 흥망성쇠(혹은 명과암) 부분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아아, 이런 모습으로 한국소설이 흘러왔구나 눈에 그려졌다. 그리고 오랜기간 잊고 살았던 ‘퇴마록’과 ‘드래곤라자’ 이후로 끊겨버린 ‘식음을 전폐한 책읽기’가 그리워졌다... 갑자기 재밌는 장르문학 읽고 싶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상금이나 역사가 아닌 ‘독자가 문학작품을 고르는 데 게을러서’라는 식의 분석 일리 있다. 그러고 보니 딱히 문학작품을 즐겨 읽지 않지만 굳이 눈도장을 찍은 소설은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읽고 난 후, 박민규 소설 말고는 다 노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수년간 한국소설은 읽지 않았고, 요즘 들어 한권 두권 찾아보며 알게되었다. 한국문학이 재미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취향을 찾는 데 참 게을렀던 거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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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불이익은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 없이도 발생한다. … 여기서 분명히 밝혀둔다.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가 없어도 부조리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현재 아무도 악의가 없다.’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시험을 합격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넘어선 우월의식을 틀림없이 품고 있다. 과거에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미자격자, 무면허자로 몰아 배제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다만 그런 흉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 싹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이런 구조에서 배제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기리라는 이야기다.” (p.285-287)

거대한 악의가 없다는 의미에서 악의적인 이 시스템. 구조적 불의와 개인의 내면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단단히 얽힌 매듭을 칼로 잘라내 버리듯, 사회를 뚝딱 개혁 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비가 촉촉하게 스며들어 언땅을 녹이고 새싹을 틔우 듯. 개인들의 작은 노력과 섬세한 제도개혁이 황폐한 한국의 계급사회에 스며들어야 할 것 이다. 장강명이 주문하는 정보의 확대도 좋은 방법이다.

현 체제를 일단 그대로 인정하고 시종일관 세밀하게 접근하는 저자에 비하면 나는 조금 더 급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현실을 ‘지양’하기 위해서 저자만큼 현실을 가지고 치열하고 치밀하게 고민해 본 적 있는 가? 사실 없다. 고민이 세밀하지 못했기에 내는 결론들도 뭉툭하지 않았었나 반성한다. 조금 더 섬세해져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살아가고 있는 청년으로서 – 청년을 주요 소재로 소설을 쓰고, 또 청년들의 겪는 문제에 진지하게 르포까지 써낸 (중년의) 장강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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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빠서 글쓰기는커녕 읽는데도 오래걸렸다. 2주 넘은거 아니겠지.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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