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7-9월 도서 안내, 그리고 기록

책은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원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자체를 완전히 해설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식은, 책에 나온 언어를 규정하고 알게 해주는 근원이 된다. 물론 그런 해설이 종결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결코 없다. 
 - <젠더트러블> 초판 서문 79페이지


주디스 버틀러의 말대로 책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을 아우르며 이어져 있다. 


책의 원천이 되는 책들을 읽어두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온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소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책이 낯선재료로 조리되어 속에 얹히더라도 역시 읽어두는 게 좋은 것은, 그러니까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단 눈으로라도 읽어놓는 것을 권하는 이유는, 어차피 "해설이 종결되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은 내가 이해한만큼을 열어 보여줄테고, 또 나는 남은 여분의 이해를 위해 이어지는 책들을 읽어가겠지. 혹시라도 이 책에 대한 거의 완전에 가까운 인식에 닿게 되는 날, 그날이 바로 그 책이 내게서 만큼은 흥미를 다한 죽은 책이 될테니 이제는 읽기 어려운 책이 몇년 전 처럼 많이 겁나지는 않는다. 


서문을 읽으면서 약간의 당혹감과 또 약간의 흥분에 휩싸였는 데, 내가 지난한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의 과정을 통해서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할수는 있을 만큼의 독서 근육이단련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오래 전부터 나 자신도 놀랄만큼 후기 구조주의자들을(-_-;;;;)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서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방식으로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데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다? 아아. 당혹스럽다.


버틀러의 이런 문장들에 엄청 동의한다. 


(p.61) 게다가 문법이나 문체는 둘 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다. 지적 화술을 지배하는 법칙을 배운다는 것은 *규범화된 언어를 주입당한다는 뜻이고, 그에 순응하지 않은 대가는 가독성 자체의 상실*이 된다.  

(p.63) 나는 또한 배제당한 삶의 폭력성의 실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삶'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며, 그런 삶의 유폐 상태는 삶의 중지나 유예된 사형선고를 의미한다. (…) 이러한 탈자연화의 글쓰기는 단순히 언어와 유희하려는 욕망에서 행해지거나, (…) 극적인 익살극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다.

(p.69) 나는 후기구조주의(…), 그것은 '나'라는 것이 유효한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런 '나'는 부분적으로 언어 속에서 인칭의 가능성을 지배하는 문법의 결과이다. 나는 나를 구성하는 언어 바깥에 있지 않지만 그런 '나'를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자기 표현의 결속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당신에게 나의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문법을 떠나서는 당신이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문법을 투명한 것으로 간주하면 인식 가능성을 설정하고 해체하는 바로 그 언어의 국면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설명한 대로 그것은 나 자신의 프로젝트를 좌절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까다롭게 굴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 없이는 어떤 '나'도 나타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모으려는 것뿐이다. (…) 언어 안에서 '나'의 불투명성을 이해하려는 노력(…)  


허허..😂. 저 글들을 또 내 맘대로 거칠게 정리하면, 목 넘김이 좋은 진부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의 사용과 글들은 사회가 환영하는 문법들 속에 있는 언어이므로 소화하기 수월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사회가 배제하는 이들의 말과 글은 부담스럽고 괴이하다. 그것들은 때때로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내 안에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을 말하고 쓰고자 한다면, 아마 그 언어들은 괴상하고 혼란스러운 모양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와 소통하고 싶어 그것을 사회화된 글로 다듬는다면?! (사회화에 성공하면 소수자의 글쓰기가 아닐테고, 그러나 사회가 배제하는 것들을 지적해야는 겠으니) 그 어려운 소수자-지식인의 줄타기로서의 몸부림이 버틀러 식의 어떤 난해한 글쓰기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같다는~~ 정도로 풀어쓰고,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져 와보는 다음의 문단(참고로 아래 에세이의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의 충실한 역자기이도 하다).





그들은 다시 살기 위해, 제대로 살기 위해, 계속 살기 위해, "주어진 말이 아니라 찾아내야만 하는 말"(모리스 블랑쇼)을 발굴하려고 한다. 그것은 첫 번째 말이기에 터무니 없고, 들릴 수 없는 말이기에 미친 것이고, 삶으로 충만할 말이기에 쾌락이고, 가난한 말이기에 맑다. "A는 A"라고 하는 사회적 언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죽은 말이다. 죽은 말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이 아플까. 아니 그것은 모욕이다. *나의 유일무이한 느낌과 경험, 삶을 위한 말은 남들도 쓰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 지금까지 나의 말은 장황하고 뒤죽박죽이었다. 나의 말, 결함이 많은 말, 말 같지 않은 말을 알아들으려고 계속 여기에 머물렀다면, 이제 당신은 당신의 동의를 구하길 거부하면서 어쩌면 당신을 공격할 수도 있는 다음의 문장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불구의 삶, 사랑의 말> 89~90페이지.


저자가 이후에 인용해온 글은 모리스 블랑쇼의 글들로 블랑쇼는 누구냐면 우리의 미셸 푸코가 탐독했다던 문학평론가 되시겠다.ㅋㅋㅋ 나는 지난 달에 신나서 블랑쇼의 책을 사고 한문단 읽고 바로 책장 꼭대기 층 맨 오른쪽에 박아 두었다. 단 한 줄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은둔자셨다고 하니, 본인의 책이 유폐당한 들 제자리를 찾았구나 싶을 거다 생각한다. 어쨌든 난해하기로 유명한 버틀러의 글쓰기가 이러저러저러이러한 근거에 의한 글쓰기였다면, 조금은 읽어보마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러분. 너무 겁내지 마. 주디스버틀러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 것 같아.) 


렇다 하더라도 어렵기는 분명한 책이라서 나역시 가까스로 읽어나가겠지만, 

그래도 이 책 <젠더트러블>을 읽으면서 기뻤던 것은 이미 함께 읽어둔 책들이 있어 든든했기 때문! 

(우리 개 멋짐 뿜뿜 🥰)



- 먼저 읽었기를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던 책 - 





























모두 알라딘 서재안의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멤버들과 함께 읽었거나, 읽다보니 목록이 겹쳐진 책들이다.  위의 세권은 함께 읽지 않았으면 절대 완독 못했을 책이었다. 이 글이 함께 읽기의 아름다움으로 끝맺어진다면 좋았으련만...그러나 문제는... 이 책이라는 잔혹한 뫼비우스의 띠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의 나를 이런 가당치도 않은 장바구니 보관함으로 인도하고 있다. (끔찍한 혼종 같아 보이지만 나름 내적 일관성이 있는 도전 목록이다) 푸하하하하하하!!!


게일루빈이랑 맥키넌 꼭 읽어야겠고,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너무 읽고 싶어졌고, 그러려면 프랑스 현대철학이랑 현상학, 실존주의, 여타등등 좀 더 알고 싶고... 으아앙!!! 😭 나 부양 고양이 있는 가장인데, 언제 다 읽노..  미쳐따. 이와중에 기본소득 - 사회주의 - 젠더분업화 - 가사노동 - 등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으아아// .... 



- 버틀러를 만나 장마 때 개천 불어나듯 불어나고 있는 나의 알라딘 장바구니 - 


































책들이 막 다 한권에 삼만원 넘는것도 있고.

문제는 저 책들을 집에 꽂아둘 데가 없고. 저놈의 책들 이고 지고 2년마다 이사다닐 생각을 하면 으어어. 

책도 사고 집도사야 하니까 아무래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주식... 주식으론 부족해... 그래... 코인... 펀드...!!!!...중얼중얼...

그렇다! 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스트!!다!!!!!



미니즘 책 읽기로 시작하여 어느덧 채콴자(책환자)가 되어버린 이의 결론은 부동산. 자본의 자기증식보다 더 빠르고 심각한 욕망의 도서목록 증식. 제가 하고 있는 이 말같지도 않은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너무 어렵게 느껴지신다고요? 이것은 문체 스타일의 문제로 근대가 채 포섭하지 못한 사회화되지 않고 남은 잔여물이 마저 사회화되기 위한 몸부림.

책은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원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자체를 완전히 해설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식은, 책에 나온 언어를 규정하고 알게 해주는 근원이 된다. 물론 그런 해설이 종결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결코 없다. - P79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1-07-06 14: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으악 저런 문장들을 읽고 동의하시다니 ㅜㅜ 전 뭔소린가 싶습니다..(먼산)

공쟝쟝 2021-07-06 15:11   좋아요 4 | URL
저 개정판 서문은... 책이 어렵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자기가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합리화의 문장인듯 하옵니다.

난티나무 2021-07-06 15: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존경합니다. 많이!!

공쟝쟝 2021-07-06 15:28   좋아요 2 | URL
우리 함께 읽다보면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있는 모습을 1년안에 발견하실 겁니다. 나만믿어요. 함께하자!!

다락방 2021-07-06 15: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젠더트러블 읽는 동안 쟝님 페이퍼 여러번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기 살구칵테일 저거 나 있다? 있기만 해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06 15:2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버틀러 안좋아한다고 ㅋㅋㅋ해놓고 버틀러 옹호하고 있고…. 푸코 싫다고 하면서 푸코 구글링하고 있고…. ㅋㅋㅋㅋㅋ 클났어 우씨…

유부만두 2021-07-07 1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채콴자 365호 인사 전합니다. 앗, 제가 0을 두개 빼먹…

공쟝쟝 2021-07-07 10:28   좋아요 1 | URL
🙇🏻‍♀️아니 이런 365호라니 높은 기수!!! 저는 4865호입니다!! 슨배님!

syo 2021-07-07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겁나 똑똑이!

공쟝쟝 2021-07-07 16:47   좋아요 1 | URL
시끄럽지만 그와즁에 똑똑함이 바로 내 코어!

잠자냥 2021-07-07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콴자 이거 너무 좋네요.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07 16:48   좋아요 2 | URL
그쵸 ㅋㅋㅋ 이거 유행어로 밀어봐야지 !!! 채콴자!!!! 알라딘 채콴자들~~~

단발머리 2021-07-13 15: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냥 내 생각이에요. 쟝쟝님 열씸히 부지런히 버틀러 읽게 해놓고, 천천히 쟝쟝님 페이퍼 따라 읽으면서 버틀러 정리해야겠어요.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에요! from 아직 버틀러 시작 안 한 1인

난티나무 2021-07-13 16:48   좋아요 3 | URL
어쩜, 제가 한 생각과 꼭 같습니다. 저도 공쟝쟝님 페이퍼 따라 갈려구요.

공쟝쟝 2021-07-13 17:52   좋아요 2 | URL
오늘치 버틀러는 다 읽었고 (젠더트러블 집어던지고 버틀러 해설서 읽음ㅋㅋㅋ) 저는 어쩐지 그리워진 여혐문청 스팅고를 만나러 소피의 선택을 펴봅니다…

유수 2021-07-14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이 글은 일단 참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읽었기를 다행인 책 저는 아무것도 안읽었으니까. 나에게 우쭈쭈…! 저는 구월부터 하는 젠더트러블 공부모임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칠월에 글자만 구경할거예요 글자만..

공쟝쟝 2021-07-14 22: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글자 구경!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해야하는 것! 그러다보면 나의 자산이 되는 것! 걍 읽기 ㅋㅋㅋ 함께 읽으면 글자만 읽어도 신납니다🤗

건수하 2023-03-2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해서 일 거의 안하고 서재에서 놀았더니 마음이 급해서 안 읽혀요...
마음이 안 급해도 잘 안 읽힐 것 같긴 한데 ㅋㅋ

(출근해서 다시 읽었어요)
 
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메리>

메리가 사랑한 사람들이 다 죽은 게 아니라, 메리는 죽을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느낀 것이다. 오늘날의 임상심리학 도움을 받았더라면 그녀의 죽음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은 데. 아, 딱한 메리. 그렇지만 병약 (중요 💫별표)소년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p.15) 동정심의 노예”라는 사실에 일단 호감을 느꼈고(허영심의 노예, 성욕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보단 낫지 않아요? 호호)… 동정심이 일면 상냥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뜨끔해지고 말았는 데(낫고 말고가 어딨냐. 노예 안 하면 되지. -_-;;) ….

“(p.18) 그러다 메리는 앤이 아프거나 불행한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상냥한 마음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와 마음을 채우는 바람에 온갖 상념은 밀려났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의 질병과 친구의 불행, 자신의 불안으로 인해, 메리의 감수성은 자극을 받았고, 또한 발휘되었다.”

가족안에서 돕는 역할이 기대되는 방식으로 양육되고, 또 사회 전체가 ‘미덕’이라는 명분으로 칭송하며 그 모습을 강요한다면. 그가 아무리 독립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을 타고났다 한들, 어쩌면 그 독립성과 사색이 바탕이되어 되려 더 지독하게 헌신하는 형태로 ‘자아 실현’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메리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형질의 마음을 앓아본 적 있는 나는 책을 읽다 말고 그런 생각을 했고, 노트에는 이런 문장을 적어 놓았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 대한 생각 해보기’

만약에 방탄소년단 말대로 ‘선한 영향력’이라는 게 있다면은 그것은 ‘영향력 없음’에 가까울 걸?이라는 주장까지하게 된 내가 오랫동안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항상 필요하다는 요청 앞에서 모질지 못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조직에 헌신하길 기꺼워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는게 참 헤펐다. 

필요한 사람 혹은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무력감? 영향력? 뭐 이 정도까지 사색을 진전시켜보다가 이내 그만두고 만다. 이 문제는 내 마음 안에서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그러니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나 자신에게 더는 무가치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 나는 한 뼘 자라난 것 같다. 뿌듯해. 흐흐.

“(p.49) 여인들은 메리처럼 지각 있는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둥, 시시한 말로 평범한 위로를 시작했지만 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는 손을 내저으며, 견딜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이 부분은 페미니즘의 대모 울스턴크래프트 님의 블랙 코미디적 연출이 돋보여서 가져와봄. ㅋㅋㅋ

“(p.65) 사랑할 사람을 갖는 것에 익숙한 메리는 애정을 쏟을 상대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면 외로웠고, 위로받을 수 없었다.”

아. 그러게 말이다. 왜 우리는 사랑할 사람을 갖는 것에 익숙한 걸까. 왜 우리는 애정을 쏟을 대상을 필요로 하나. 인간은 정말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가. 메리야 말로 자신의 넘치는 애정을 쏟기 위해, 대상들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메리의 상냥한 동점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그들은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 가까운 지인들에게 종종 (임시적) 탈연애를 권하곤 했었는 데, 쉬지 않고 애정을 쏟을 대상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덕질을 하라고 권했다. 눈을 떠!! 그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할 사람이 필요한 너의 환상이야!!!! 제발!!!! 그 지인들은 연애도 하고 덕질까지 함께 했다. (뭐랄까..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현명하다!!!) 쓰다보니 결혼해서 잘들 사는 지 모르겠넴ㅋㅋㅋㅋㅋ 

덕질도 사흘 이상은 하지 못하는 저는 애정을 쏟는 대신 애정의 조건에 대해 분석해 봅니다. 아아, 그저께 읽은 책에서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p.156) 연애 감정도 결국에는 어느 정도 구성되는 것이다. 사랑은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발동되는 ‘부호화된 감상’ 일 수 있다. 문화는 감정 경험을 조직화하고 해석하는 틀이다. 우리 사회의 높은 연애 농도는 어떤 관계든 조금만 친밀하거나 만남이 잦으면 금방 로맨틱하게 버무려버린다. -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아무튼,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노희경 시인의 시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당신의 남는 사랑력에 대상들을 이용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울스턴 크래프트는 알고 있다.

“(p.99) 그때까지도 메리는 체념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헛된 희망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2. <마리아>

“(p.127) 여성이 겪는 고난은 억압받는 인류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이들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

라는 멋진 서문으로 시작하는 소설 <마리아>는 등장하는 모든 여성인물들의 고난이 너무 켜켜해…. 숨 막혔다. 아이쒸, 진짜 18세기 여자의 일생… 소설로 읽으니 더 처참했다. 당연히 마리아 보다는 제미마의 이야기를 유심히 읽었고, 종종 계급 문제를 등한시 했다고 비판받는 울스턴크래프트는 깊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p.185-6) 
“어떻게 자유를, 그리고 윤리 향상을 옹호한다고 하면서 작가들이 가난이 악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어요.”
마리아가 껴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가난의 독특한 행복에 관해 설명하기도 하잖아요. 그 행복이라고 해봐야 사람이 양식도 제대로 벌 수 없다면, 그저 동물처럼 아무것도 안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정신은 작은 방에 갇힐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그 방을 지키는 데 정신이 팔려서 밖으로 나다니며 향상을 추구할 시간도 없고요. 날마다. 힘겨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는 책은 닫혀있어요. 그리고 사색이나 정보에 자극받는 호기심은 썩고 있는 무지의 호수에서는 움직이는 일이 드물어요.
제미마가 대답했다. “제가 지켜본 바로는 가난한 이들은 우연히 생겨난 편견에 고집스럽게 집착해 더 나아질 수가 없어요. 그들은 어느 정도 사고하거나 반성할 시간이 없어요. 모든 방면에서 충족감을 주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행동의 원칙을 세울 만큼 정신을 단련시키지도 못하고요.””

2021년의 대한민국. 가장 페미니즘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고. 요즘 나의 페미니즘 공부가 주춤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꾸 어딘가 갸웃거리게 되는 지점들에는 분명 계급의 문제가 있다. 
나를 다른 이들의 자리에 세워보려는 생각. 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마음의 여력, 시간, 결국 돈, 그러니까 자유.

“(p.220) 사실 우리가 사귄 첫해 동안에 조지는 내 마음에 조금도 들지 않았어. 하지만 그는 종종 나와 의견이 같았고, 내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가졌지. 그리고 달리 애정을 가질 상대가 없었으니 나는 숙부의 제안을 기쁘게 들었단다. 하지만 연인을 얻기보다는 자유를 얻을 생각이었지. 겉으로는 내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척, 조지가 내게 당시의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재촉했을 때, 내 가슴은 감사로 벅차올랐단다. ”

자유를 얻기 위해 선택하는 게 결혼이라니…. 근데 페미니즘을 알기 전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요? 지금도 많이 그렇게들 생각하지 않나요? 솔직히 원가족 보다 나은 가족을 만들게 되면 조금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는 살아봐야 안다는 점에서 어쨌든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결혼’이라는 거대한 가부장제의 사기극을 울스턴 머모님께서 무려 1788년에 소설로 써서 낱낱이 이미 밝혀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결혼을 싫어했는지는 소설 <메리>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는 데, “(p.121) 메리는 장가도 시집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ㅋㅋㅋ 앍ㅋㅋㅋㅋ 주인공이 죽으면서 마지막 대사가 천국엔 결혼이 없다고 하는게 실화냐고 ㅋㅋㅋ

읽기에 좀 더 즐거운 번역을 가져와 본다.

“(p.40) 두 번째 저작인 소설 「메리(Mary, A Fiction,1788)는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고드윈의 평가처럼 사건은 별로 없으며, 폭력적인 아버지와 약한 어머니에게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딸이 강한 여성으로 성장하면서 절친한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성장기 가정환경과 파니 블러드와의 관계가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메리는 친구 앤이 죽은 다음 결혼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도 약해져 가는 건강상태 속에서 “결혼하는 일도 없고 결혼당하는 일도 없는 별세계”(that world where there is neither marrying, nor giving in marriage)로 가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이 우울한 서술 속에는 당시의 결혼제도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회의적인 태도가 드러나 있다” -한정숙, 여성주의 고전을 읽다


3. <마틸다>

읽기 전에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감동이 아직 덜 빠져서 기대했는 데, 재미없었다. 음… 메리 셸리가 도전적인 천재 작가라는 건 잘 알겠다. 아… 뭐랄까 급진적인데 안 급진적이야…ㅋㅋㅋ 작가님 무슨 말하고 싶으셨을까요? 제가 그 뜻을 아직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짬바가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문단은 적어 놓도록 할게요.

“(p.393) 나는 나 자신에게, 후회와 사라진 희망만을 영영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존재에게 몰입했다.
내 삶은 할 일도 없고, 쓸모도 없는 삶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폭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백합은 일어나서 전처럼 꽃을 피운다고는 말하지 말라. 내 심장은 죽음의 상처로부터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살 수는 없었다. 종종 겉보기에는 고요했지만, 절망과 우울이 찾아왔다. 그 어떤 것도 흩어놓거나 극복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삶이 싫었고, 아름다움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발작적으로 나를 거의 소멸하곤 했다. 아무리 평온 한때라도, 단 한순간도 죽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무로 기꺼이 변화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틸다여, 본인 소유의 오두막도 있고 도망친 그곳에서 마저 하녀가 있어서 그래요… 
하녀 없었으면 할 일 많았을 걸요?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비뚤어진 마음…ㅋㅋㅋ)

책 읽고, 알라디너가 추천해주신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영화도 봤다.
영화는 책으로 읽게 된 메리 셸리에 대한 정보… 딱 그 정도? 그저 그랬다.


***

아휴. 5월의 도서를 끝냈다! 6월의 도서를 읽기 전에 독후감 써서 다행이다..
사실, 3월 4월 책들이 훨씬 재밌었는 데… 역시 글은 너무 잘 쓰고 싶어 하면 못쓴다.
앞으로도 막쓰자…;;;;; 응? 일단 쓰자.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05-31 14: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고 며칠은 끙끙대야 써지는데 일단 쓰자 하고 써도 나중에 다 고치게 되요.^^;;

이 책 리뷰가 계속 올라오는데 언제 읽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1-05-31 18:52   좋아요 3 | URL
전 읽고 독후활동을 꼭 하자라고 마음은 먹는데, 다음책 빨리 읽고 싶어져서 ㅠㅠㅠ 미루다가.. 하하하하하… 메모는 많이 하는 데, 쓰는 양은 항상 처참… ㅋㅋ 하지만 다음달엔 다시 태어날거야!

다락방 2021-05-31 14: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ㅋㅋ 마틸다 읽고 저도 그생각했어요. 뭐여..세상하고 등져도 하녀 있고 돈 걱정 없고.. 라고요 ㅋㅋㅋㅋㅋ

5월 책 완독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리뷰 적느라 또 고생하셨고요. 우리 6월달에는 재미진 책으로(제발) 만나요! 그래서 열심히 열심히 쓰도록 합시다. 여성주의 책읽기 만세, 만세!!

공쟝쟝 2021-05-31 18:54   좋아요 3 | URL
ㅋㅋ 앍ㅋㅋ ㅋㅋㅋ ㅋㅋㅋㅋㅋ 그쵸 ㅋㅋㅋ 하녀?? 읭??? 역시 ㅋㅋ 우리들의 킬링포인트ㅋㅋㅋㅋ
6월의 책아 기다려라!!!! 난 6월에 새롭게 태어난다!!

미미 2021-05-31 14: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틸다>요기조기에서 <프랑켄슈타인>의 느낌을 감지하고 신기했어요! 이것도 가수들의 ‘지문‘같은 작가만의 색깔인지 동일 작가란걸 몰랐어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기‘라도 내 색깔좀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됨요. 다음달도 파이팅입니다~^^♡

공쟝쟝 2021-05-31 18:57   좋아요 4 | URL
일기라도 내 색깔 갖고 싶다!는 말 공감이요. 저만 쓸 수 있는 독후감 쓰려다가 언제나 못쓰고 말아버리지만…. 일단 쓰는 것 부터 해보아요!! 🥳 힘내자 힘 🥳

붕붕툐툐 2021-05-31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완독 축하드려요! 그냥 막 써도 잘쓰실 거면서~😉
6월엔 진짜 나로 다시 태어나기!ㅎㅎ

공쟝쟝 2021-06-01 08:38   좋아요 0 | URL
태어났다!!!!

난티나무 2021-06-0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 동안 많이 삐딱했었습니다.ㅎㅎㅎ

공쟝쟝 2021-06-03 14:25   좋아요 0 | URL
그런다니깐요 ㅋㅋㅋㅋ 내 밥그릇 내가 치우는게 페미니즘인데.. 하녀라니.. 하녀라니...
전 돈벌기 힘들고 육아 힘들어서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도움받는 것 찬성하는 데...
그래도... 할일이 없다니..없다니..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없을 수 있지.. 없.... 그치만.... 암튼 마틸다 좀 그랬어...
해설 읽으면서 그럴 수도? 그랬지만 별로였...

공쟝쟝 2021-06-03 14:27   좋아요 0 | URL
라고 쓰면서 갑자기 든 생각인 데, 현재시점에서 놓고보면 ‘마틸다‘가 일종의 우울증이나 기분전환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치면 또 하녀나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퍼뜩 이해가 되네요 ^^? 하아.. 정말 저란 사람.. 여자에게 무한히 관대한 매력적인 사람 ㅋㅋ

난티나무 2021-06-03 14:46   좋아요 1 | URL
돈 안 벌어도 되고 육아도 안 하는 여자가 가사도우미 쓰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수한 질문임...^^
아 그래서 저 이 책 알라딘서 인쇄불량 반품 받아준대서 그냥 반품할까 교환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입니다. ㅎㅎㅎ
공쟝쟝님 = 매력적인 사람!!! 완전 !!!!

공쟝쟝 2022-03-12 01:52   좋아요 0 | URL
여성 가사도우미에게 월급 500주면 쌉 가능! 더 비싸게 주면 쌉쌉 가능! 내가 그 집 가서 일함.

공쟝쟝 2021-06-03 15:04   좋아요 0 | URL
일단 돌봄노동이랑 가사노동 등에 대한 가치가 너무 평가 절하되어있는 것도 문제예여. 뭐랄까 가치 재평가해서 돈이 확 올라가면... 평균임금보다 많이요! 가사노동, 남자 주부, 남자 베이비시터 많이 생겨날거라고 생각해요. 부작용? 생각 안해요 ㅋㅋ 일단 도입해보고 ㅋㅋ

난티나무 2021-06-03 16:46   좋아요 0 | URL
도입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내가 그 집 가서 일함‘ ㅋㅋㅋㅋ
 

동생이 차곡차곡 모은 스타벅스 쿠폰(?)으로 타다준 2020년의 몰스킨 일기장이 4/5는 채워져있지 않은 고로(작년에 거의 못씀) 2021년의 일기를 2020년 일기장 빈칸에 색깔이 다른 펜으로 적는 중이다(종이를 아껴쓰는 착한 사람입니다). 가끔 작년의 일기를 읽으며 어제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곤하는 데... 2020년 4월 29일의 나는 맥주에 안주로 고로케를 세개 먹었다. 


“고로케 세개는 느끼하다. 과유불급. 두개에서 딱 끊어야 한다. 내일부터 연휴다. 나는 맥주 책 영화 그리고 또 맥주 책 영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잖아. 너무 좋잖아!! 행복은 정말 언어가 없나보다. 쓸말이 없다. 그냥 어. 음. 행복하다.”

휴일. 맥주. 책. 영화. 네가지 조합으로 언어마저 잃은 행복감을 느끼던 나를 떠올리니… 오, 역시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바뀌는 법. 요즘은 매일 매일이 휴일인데 영화는 볼 생각이 안들고, 책은 슬슬 지겨워지고, 맥주는(!) 주말 말고는 안마신다!! (고도 적응형 알코홀릭에서 벗어나려 미세한 노력 중) 매일 매일 행복하긴 하지만 은은한 행복이라서… 고작 3일 연휴로 격렬한 행복함을 압축해서 느끼는 당시의 일기를 보니… 작년의 내가 너무 짠해😭 (정말 고생 많았다 과거의 나여) 어쨌든 일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동네 고로케 집은 문을 닫았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컸겠지만, 생각해보니 그 후로 난 고로케를 사먹지 않았던 것 같아, 친절했던 주인 아주머니 죄송해요. 자주자주 조금씩 사먹는 거였는 데, 무식하게 간식을 배불리 먹고 질려서 잊고 지내버렸… 😢 모처럼 생각나서 찾았다가 문닫은 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겨우 1년, 쉽게(그러나 분명히 매우 어려웠을)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잠깐의 애도를.

***

또 이런 메모도 있다.

“나는 대체로 슬프고 아주 가끔 행복하다. 인생뭘까.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

작년 초봄에 술을 마시며 친구에게 이렇게나(!) 시적인 말을 해줬던 것도 떠올랐다. 당시 N번째의 시험과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트레스로 졸도를 해버린 썰을 풀며 인생뭘까 진지하게 묻던 그를 나는 쉽게 위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스스로도 이 악문 채 하루들을 버텨내고 있었고, 친구의 상황도 나 못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만했으면 그만두라는 말은 말이 쉬운말이라서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견뎌야 하는 시기들도 있었고, 결국은 그만두는 결론을 내더라도 내가 나에게 지는 느낌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게 우리가 하는 위로의 암묵적 룰이었다.

솔직히 정말 너무너무 힘든거야. 맨날 욕먹고 야근하고 야근해도 다 못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눈물이 터지는 겨. 알지? 나 잘우는 거. 어느 날 또 평소처럼 아 존나 힘들다 쓰바 엉엉 울고 싶다 이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차올랐는 데, 춥기도하고 차마 눈물을 떨구기가 싫어서, 눈에 힘 꽉 주고 그렁그렁 한채로 걸었다? 근데 가로등 빛이 반짝 반짝. 그래서 울락 말락 하는 와중에 그 생각이 들더라. 어, 이쁘다. 하나만 하지. 슬프려면 슬프고 이쁠려면 이쁘고. 근데 슬픈 와중에 이쁘니까. 좀 살거 같았어. 그러니까, 인생은. 인생은 원래 대체로 슬픈건데- 눈물 꽉 찬 그 와중에 뭔가 가로등 빛 같은게 눈물이 뿌연대로 보이고, 그게 보이는 나는 울다 말다 울면서 빛 번지는, 찰나, 엉? 이러면서 콧물을 막 먹으면서 그 와중에 또 이쁘다 이러고 있는 나한테 피식 웃어주는 거. 상황은 눈물나도 나한테 내가 웃어주는 건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오오. 근데 이거 내가 말해놓고 보니 그럴듯 한데? 나중에 써먹을테다. 앗싸. 킵킵.

일년 넘게 지난 시점에서 써먹기 위해 적어둔 두줄짜리 메모 발견하고 그날의 불행배틀 술자리를 생생하게 떠올려버렸다ㅋㅋㅋ. 그러고 보면, 기억… 뭘까? 작년에 먹은 세번째 고로케의 느끼함은 기억이 나는 데,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데 또 울면서 봤던 가로등의 반짝임은 어제 본 것처럼 잊히지가 않고.

무튼 아주 진심으로 그 이야기를 했다. 인생 밤길에 울다가 만난 가로등 빛 같다고. 엄청 슬픈데 또 슬퍼야만 보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너나 나나 지독히도 의미를 찾아야하는 의미주의자인데 힘들고 슬픈 것 자체도 언젠가는 교훈이 되겠지..? (눈치) 알아, 위로 안되는 거. 나도 위로 안돼. 미안해 ㅜㅜ 위로 안돼서.. ㅜㅜ.. 그냥.. 힘든게 꼭 힘들기만 한건 아니라능.... 인생 단짠단짠... 내 인생 짠짠짠짠짠단짠... 니 인생은 짠짠짜라자라자짠짠짠단짠짠짠.. 뭐...? 술이나 마시라고? 알았어. (한숨) 취하자! 짠!! 이렇게 아마도 우리는 재빠르게 술이나 마시고 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 날의 위로에 대해서 생각한다. 친구는 아마 잊었을거다. 나도 저 두줄을 써놓지 않았다면, 저걸 꺼내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기억하지 못했을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친구를 위로해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말대잔치처럼 말로 꺼내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가 보았던 가로등 빛의 웃픈 반짝임 역시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거다. 이 글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로등? 메모? 아니, 위로. 더 정확하게는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와 진심이었던 내 마음. 덕분에 글이 보존시켜 줄 것들은, 얻어걸린, 웃펐던 겨울의 가로등.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상한 것, 슬픈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불편한 것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언어화 시키지 않은 채로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담아둔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느꼈던 것들을 더 생생한 언어로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난 후에서야 안다. 내가 그것들을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하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기장에 휘갈기듯 적어놓거나,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메모해둔다. 짤막짤막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메모와 문장들에 기대어 요즘의 나는 제법 긴 글을 쓴다.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그 느낌들을 온전하게 복구시킬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하게 클라우딩 되어 있구나 싶어진다. 요 몇년간 그런 식으로 글을 써왔다(기억이 맺히는 방식으로의). 기억해 둠직한 시간들을 후루룩 쓴 복사본(노트들과 메모장에)으로 잔뜩 가지고 있는 편이다. 예전 일기는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고발 리포트 느낌이 강했으나, 요즘의 일기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아, 요즘의 나는 행복의 순간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어하는 구나.

***

반대의 경우에도 쓴다. 어떤 대화의 순간이(좋고 싫고와는 별개로) 인상적이었다면,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때때로 길게는 한달 까지도 내 안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이 빼곡히 쌓인다. 대화의 상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나자신에게 되짚어 물어 보아야할 질문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나는 또 그 질문들을 메모해둔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질문 자체를 해석하는 글을 써본다. 이 경우는 쓰면서 점점 더 명료해지는 편이다. 쓰지 않았다면 기분이나 인상으로 휘발되어버릴. 글로 적어 내리다보면 열에 일곱은 엇비슷한 내용임을 알게된다. 나 자신이 결론일테니 결국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쪽의 글 이란 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서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즐겁다. 비슷한 방식으로 서재에 독후감을 쓴다. 어떤 책이나 문장을 만나고 왜 거기서 눈길이 멈추었는지 나에게 거듭 물어보면서 떠오르는 심상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치킨을 먹기위해 만난 독서가들은 소설 읽기에 각자의 포인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포인트를 듣는 것은 너무 즐거웠다. 각자들의 포인트를 훔쳐서 그런 기분으로, 그런 눈🥺을 하고서 읽고 싶어졌다. 아마 나는 또 내 멋대로 오독하겠지만, 오독과 오독 사이에서 확인되는 서로의 다름이 언제나 기꺼웠던 것은 우리, 책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이니까. 진심은 통한다. 아아, 상투적인 표현이라 서글프다... 상투적 ‘진심 통함’이 아니라 각자의 진심들이 있으면, 달라도 어딘가는 통해서 그 다름이 더 사랑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다. ... (아, 이역시 상투적이야.. 지울까?)

몇개 째의 닭 조각을 삼키고 배가 부를 때 쯤엔 구관이 명관, 간장맛이 나는 순살 치킨은 역시 교촌이 최고인 듯 하며 속으로 궁시렁댔다. 톨스토이도 도스트도예프스키도 읽지 않았지만 여전히 읽을 생각이 없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나는 오로지 최은영에 대한 팬심으로 “소설가는 맘 속에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 같아여!!!” 라고.. 말해.. 버렸다. 톨스토이와 쿤데라와 제임스 설터와 줌파 라히리(이름도 어렵네) 사이에 갑분 최은영 던지기!!! (작가님 미안. 그래도 나에겐 톨스토이보다 당신이야…) 저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데, 이게 문학시간에 배운 주제찾기 이런 학습효과 일지도 모르겠지만(쭈굴), 어쨌든 제가 좋아서 비명 지르는 소설은 제가 하고 싶었던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소설이예요. 그래서 저는 최은영이 짱이예요. <내게 무해한 사람> 짱....😫 내가 전하는 소설 읽기 포인트에 한 이웃은 자기도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는 것 같다고 동조했고 다른 이웃은 신기해했(던 것 같)다. 뭐, 나는 항상 그래왔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버렸고. 어쩐지 최은영까이면 내가 까인것 같더라니…. 엉엉, 그런데 내 마음 같은 최은영 작가님 다음 소설 언제나와요…? 


나의 자랑스러운 책에 미친(?) 이웃들은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으로서 읽게 되는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는 데, 맙소사 그 이야기들도 너무 신기했다. 저렇게(방식) 읽으니까 그렇게(양) 읽을 수 있었구나. 우리 자주 만나요. 저랑 많이 놀아주세요!!! 우리집에서 비록 1시간 45분 걸리지만 저 자주 놀러올수 있어여!!😤

전두엽과 측두엽에서 이 사람들을 붙잡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 내 뇌를 알콜과 맛있는 것으로만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 좋아하는 걸로 대화하는 거 너무 좋잖아!! (명랑한 은둔자 2달째.. 사람 그리웠구나 나..) 엄청 행복해하며 이야기 듣다가 나는 그다지 ‘쓰는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서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는 물론 있었지만(cf. 정희진, 푸코, 양효실, 정성일, 보부아르, 엄기호, 김혜리, 신형철 - 대부분 에세이 or 사회과학, 순서는 애정도 순서)… 이것은 사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지? 나도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뇌에 즐거운 자극을 주는 이웃들로 부터 파생되기 시작한 질문 하나.
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여기에 닿자 조금 소름이 끼쳤고, 어렴풋이 그것은 굉장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와, 시기심과, 비교와, 약간의 안도와, 결국은 또 질투와, 자기부정과, 시샘과, 질투와, 또 질투로, 점철된!!!!!!! 똑똑. 여보세요들. 많은 작가님들? 혹은 작가지망생, 예비 창작자님들아..? 당신들의 속 안에 어떤 독한 것이 앙금처럼 맺혀있을지내 모르겠으나.. 인생이 뭐냐면요.. 아아, 그것은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이라오. 독기 뺄려면 많이 우세요.. 토닥토닥.. (또... 슬퍼짐.. 아, 그 인생 살지도 않았는 데, 생각만으로도 너무 슬퍼😭)

***

난 다행스럽게도 나를 알기 위해서만 쓴다. 썼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서른 살 이후 부터는 더 그랬다.
질문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보자. 내가 쓰는 중심 이유가 나를 알기 위해서였다면, 나는 왜 이토록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일까. 본격 일기쓰기 만4년, 오늘에 와서야 슬쩍 대답해봐야겠다.

오랫동안 자신을 없애 나를 먹이는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나는 성인이 된 후 사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을 어렵사리 폐기처분하면서, 사랑하지 않고-존재하고-싶다 생각했다.

‘사랑=(인어공주처럼)물거품이 되는 것.’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내게 체화된 사랑의 능력이란 게 그런 거였다. (바란다, 내게 인이 박힌 일종의 고정관념을 남을 생을 다써서라도 바꿀 수 있다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어떻게 ‘있을’ 것인가? 이제와 끼워맞춰보는 것이지만 나는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몰래 일기를 썼다. 나는 왜 이모냥일까로 점철된, 대체로 사랑하는 게 힘들고 슬퍼서 쓰는 글이었다. 어쨌든 글을 쓰고 있을 때라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또한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그 기억이 생생할 수록 적어도 당시의 나는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억을 글로, 글을 기억으로 남겼다. 그렇게 해두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최근에 울컥한 아이유 노래 가사처럼) ‘겨우 내가 되려고’ 써왔다는 사실을 느끼는 지금, 안도한다.

나를 ‘있는’ 존재로서 자명하게 대하는 것이,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큰 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요즘들어 공부하는 페미니즘과도 매우 맞닿아있는 것이라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질끈 마음 먹어 본다. 이는 스타일을 구축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사라지고 싶지 않다, 존재하고 싶다’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 글은 <메두사의 웃음> 때문에 썼다. 드디어 페미니스트들의 인용글로만 접하던 엘렌 식수를 만나버렸다. 통째로 밑줄을 다 그어서 그냥 안 긋는 게 낫지 않을까? 거듭 읽고 싶었고 문득 쓰고 싶었다. 끝없는 분열을 쓰면서도 명료해지길 원해 부끄러워하던 내 과거의 글쓰기가 사랑스러워지려했다. 나는 불분명한 채로, (알수없음)의 괄호 속에 묶어놓고, ~인 것 같다로 언어의 끝을 애매하게 흐리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로 판단을 유보시키더라도 글을 써보기로 한다.

묶어두지 않은 채로 쓰기. 존재하기 위해 쓰기. 나 자신을 쓰기. 내 몸을 쓰기.
이미 쓰고 있었지만, 쓰는 사람이 되기.

















“(19) 그대 자신을 글로 써라, 그대 육체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무의식의 거대한 자원이 분출할 것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여성과 그 성, 여성과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존재와의 탈-검열화된 관계를 ‘실현’시킬 것이다. 탈-검열화된 관계는 여성에게 여성의 행복, 여성의 기쁨, 여성의 기관들, 봉해진 채로 유지되어 왔던 여성의 거대한 육체적 영역을 되돌려줄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은 죄인이라는(여자는 매번 모든 것에 대해 유죄이다. 욕망을 가져서 죄, 욕망을 갖지 않아도 죄, 냉담한 죄, 너무 ‘뜨거우’ 죄, 동시에 둘 다가 아닌 죄, 지나치게 어머니인 죄, 충분히 어머니이지 않은 죄, 자식을 둔 죄, 자식을 갖지 못한 죄, 먹을 것을 먹인 죄, 먹이지 않은 죄…) 늘 똑같은 자리만 마련되어 있는 초자아화된 구조에서 여성을 끄집어 내 줄 것이다. ... 반이성적인 무기를 벼루어 가지기 위해 글을 쓰기. 모든 상징 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절차 속에서 여성 마음대로,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 관계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 - <메두사의 웃음/출구>, 엘렌식수 -

“(443)엘렌식수는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즉 생각할 수 없는 것/생각되지 않는 것을 글로 표현할 것을 촉구했다. 엘렌식수가 여성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 그러한 종류의 글쓰기(표시하기, 낙서하기, 휘갈겨 쓰기, 메모하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항상 변화하는 강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내포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엘렌 식수가 남성과 연관시킨 글쓰기는 이른바 축적된 인류의 지혜를 총망라한다. 남성적 글쓰기는 사회의 공식적 승인 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너무나 큰 책임을 지고 있어서 변화하거나 이동할 수 없다. -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자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알라딘 eBook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지음) 중에서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21-04-27 1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쓰기의 시작지점에서 이 수준이라면 1년쯤 뒤에는 거장 되겠네?

공쟝쟝 2021-04-27 12:30   좋아요 2 | URL
이웃님의 읽는 스타일을 들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새파랑 2021-04-27 1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왠만한 에세이 보다 더 재미있고 잘 쓰신 것 같아요 ㅎㅎ
무엇보다 최은영 작가님에 관심이 가네요 ^^

공쟝쟝 2021-04-27 13:09   좋아요 3 | URL
ㅠㅠ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과몰입...하기 때문에 아주 조심히 읽고 또 가끔 그리워 빼들어 한 줄만 읽고 덮어요.... 정말 제게는 유해한 최은영님... 사랑합니다.. (댓글에다 대고 또 고백해...)

단발머리 2021-04-27 13: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무 일 없이 누워서 읽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마무리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메모, 기록들, 짧은 일기, 긴 일기, 핸드폰 속까지 삭삭 뒤져서 ‘쓰는‘ 쟝쟝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전해주세요. 진지한 독자, 집중해서 듣는 쟝쟝님의 독자가 될께요!!!

공쟝쟝 2021-04-27 13:12   좋아요 2 | URL
단발님...................... 최고다....... 제가 방사형으로 쏟아낸 이 글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제대로 캐치해버리시다니 ㅜㅜ 나 이런 독자 가진 쓰는 사람인거야??? (행복해서 운다) ....... 맞아요. 저. 흩어져있는 그 것들 표현인지도 몰랐던 그 부스러기들이 식수가 말하는 여성의 글쓰기였다는 거 보고 심장이 짜릿해서 이거 썼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덥썩... 단발님 사랑해 ㅜㅜ

단발머리 2021-04-27 14:35   좋아요 3 | URL
아이러브유! 😍😍😍😍😍😍😍😍😍😍😍😍😍😍

모나리자 2021-04-27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부터(뒤늦게)ㅎ 정희진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인용하신 문장을 보니 책에서 느꼈던 그분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공쟝쟝 2021-04-28 18:49   좋아요 2 | URL
정희진슨샌님을 좋아하신다면, 모나리자님은 인생의 단짠을 즐길줄 아시는 분이라 생각되옵니다. 절절하게 함께 읽어요!!

라파엘 2021-04-27 15: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제가 보고 배워야 할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공쟝쟝 2021-04-28 18:56   좋아요 2 | URL
라파엘님 반갑습니다. 알라딘 서재라는 곳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 않나요? 사실 책벌레라는 종족은 한반에 많아야 두명 정도였던 희귀종족이기도 해서... 저는 이 날까지 책읽는 친구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뒤늦게 알게된 이곳은 읽고 또 쓰는 것에 너무 진심이고 독려해주는 분위기가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붕붕툐툐 2021-04-27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출판은 언제 하시는 거예요? 그거죠? 그거 맞죠? 책 낼려고 회사 그만 두신 거잖아요~🙆

공쟝쟝 2021-04-28 18:58   좋아요 2 | URL
이제 진심으로 써보려고 하는 새싹에게 책이라니....(하지만 어마어마한 칭찬이라 몸둘바를 모르겠다) 😝 회사는 힘들어서 그만 둔거예요. 오늘도 알차게 놀았답니당!!! 깔깔

scott 2021-04-27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장쟝님
고로케 3개 이상 먹는 1人

일단 요기에
공장쟝님 출간 예정작
예약 축하 꽃다발 놓고감
 〃∩ ∧_∧
 ⊂⌒( ・ω・)
  \_ っ💐c

공쟝쟝 2021-04-28 19:00   좋아요 2 | URL
얽, 고양이가 꽃을 놓고 갔네? 두리번 두리번~ 줍줍!! 🪴화분에 심어서 잘 키워봐야지 ^^

수이 2021-04-28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멋진 이 사람들. 치킨 먹으면서 어떻게 그런 심오한 이야기를 마구 나눌 수 있었던 거죠. 아 치킨 모임 못간 1인은 웁니다. 쟝쟝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침이야. 은둔 생활 당분간 지속하면서 다음번 치킨 모임에는 꼭 불러주셔요.

공쟝쟝 2021-04-28 19:01   좋아요 1 | URL
은둔생활 중인데 왜 또 이번주만 약속 세개 됐지?.... ( 저 은둔 지겨워 졌나봐요... 악.. 앙대..)
 

동정심, 혹은 연민, 불쌍함에 대한 어쩌지 못함. 내 욕구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활짝 웃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나의 상처를 능숙하게 감추는 일.
요구를 요구한 적이 없어서 이따금, 도대체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모르겠는 거.
그래서 되려 타인의 요구 뒤에 숨는 것.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누군가를 도울 때만 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나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거. 그건 사실 내가 누구보다 의존하고 싶다는 것의 반증.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타인의 판단에 맡겨버리는 거.
책임감과 의무감, 해야한다 속에서만 기능하는 삶. 그것이 없다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거칠게 단정짓던.

‘나’를 마주보게 된 것은
사실 전적으로 프로이트 덕분이다.

내가 내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너무너무 잘 아는 데, 그걸 해결할 도리가 없어서. 거기에는 나도 미처 모르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걸 거라고, 네 어린시절의 상처를 톺아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너의 관계 맺기와 선택들을 ‘의식화’해야 한다고 그의 이론을 풀어쓴 책들이 일러줬을 때.

엉망진창인 내 무의식 속의 상처를 들여다 보는 것은 약간의 부담스러운 비용과 꽤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나의 경우는 특별히 아주 많이 울어야 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울기 위해, 각잡고 울기 위해, 그만 둘 수 있는 것은 다 그만두고, 시간내서 울고, 힘이 빠질 때 까지 울고, 울기 위해 밥을 먹고, 밥먹고 기운차려 또 울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고, 골이 울릴 때까지 울고, 아무튼 어쨌든 울다가 가끔 한번 씩 눈물의 의미를 묻는 일기를 쓰고.. 그렇게 반년 정도 보냈나? 그렇게 프로이트의 제자들에게 돈을 쓰고, 도움을 받아, 건진 것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이다. 

그 시간들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살았을 거다. 

나는 나를 알고 싶다. 내 삶과 상처를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수학 공식을 풀거나, 1000조각 퍼즐을 맞추는 것 처럼 나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계속 변할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도 변하고 있고. 내 몸이라는 유기체도 매 순간순간 변한다. 프로이트를 알게 된 이후, 내가 새롭게 가지게 된 나에 대한 자세는 나를 공부하되,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단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알기 위해 노력할 것. 살아있는 한 꾸준히. 그렇게 지낼 것. 

그리고 그것을 유난 떤다고 취급하는 이들과는 친구하지 않을 것.

*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에서 내가 가장 기대했던 파트는 6장 정신분석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대표적으로 미움받는 위인을 딱 두명만 꼽자면 하나는 마르크스요 그와 동급 혹은 한단계 위에 프로이트가 있는 듯 하다. 20대 내내 나는 마르크스를 좋아했고(세상을 미워했다), 30대가 되어 프로이트를 만나 조금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았다.

프로이트를 공부한 상담샘에게 비용을 꼬박꼬박 지불한 덕에 이별하는 방법(분리되는 방법)을 겨우겨우 습득하였고, 인생은 실전! 비싸게 배운 그 기술을 프로이트에게 아주 잘써먹고 있다. 한 때, 사랑하고 의지했던 두 아재들이 페미언냐들에게 욕을 배불리 먹고 있는 광경을 팝콘각을 하고 아주 재밌게 즐겁게 관전하는 것이다. 

원펀맨 느낌으로 한번에 죽사발을 만드는 싸움도 좋지만. 정말 즐거운 관전 쾌감 포인트는 적의 무기로 적이 제 발등을 찍을 때인 데. (부연하자면 쿵푸팬더가 자기의 힘이 아니라 적의 힘을 반사하는 기술로 싸움에서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의?) 특히 마르크스가 그랬다. 캘리번과 마녀 등을 읽으며 마르크스가 보고도 못 본 ‘재생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땐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아!! 이겼다!! 언니들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겼어!!

그들이 만든 언어와 논리안에서 그들의 맹점을 논파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서양 철학사 전반이 그렇다고는 하나, 철학도 역사도 언어도 지금껏 여성의 것이 아니었기에 철잘알, 역잘알, 말잘러인 언니들이 제대로 각잡고 고고한 철학자 아재들 뚝배기 깨는 글을 읽는 건 더 큰 쾌감. 쾌쾌쾌감. 

그래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를 비판 + 갱신한 것 처럼,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도 어떻게 보면 더 악독한(?) 프로이트를 호로록 갈아서 마셔버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 데. 슬프게도 아직까진 “프로이트 이 바보, 그걸 몰랐어? 으이그, 아재여. 옛다. 니 전제부터 갱신해🥱.” 이렇게 해준 언니는 없는 듯 하다. 
“(314) 대부분의 현대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을 넘어선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비가부장적인 정신분석 페미니즘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할지는 열린 질문으로 남아있다.”

이리가레 부분을 읽으면서(당연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많이간 거 아녀? 싶긴 했는 데 “쥘리아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착한 딸’ 이라면 이리가라이는 ‘못된 딸’” 이라는 종류의 언설을 보면, 아직 가야할 길이 더 있나봄. 라캉의 딸.. 그것도 못된 딸이라니. ... 그런데 나도 못된 딸이어서 이리가레 좋다... 핫!

“(307)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정의를 전복하기 위해 .... 여성은 여성에 대한 정의를 ‘과도하게 실천’하기를 시도하다가 무심결에 그 속으로 다시 함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여성은 모든 기회를 활용해 상징적 질서에 소란을 일으켜야만 한다. 앞의 논의를 살펴볼 때 궁극적으로 명칭화와 범주화 과정을 끝내야만 한다는 이리가레의 확신과 어쩔 수 없이 이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경쟁적 확신 사이에 분명한 긴장이 드러난다. 뤼스 이리가레는 자신의 글에 나타나는 모호성과 양가성에 당혹감을 느끼는 대신에, 점점 더 즐거워했다. 뤼스 이리가레에게 자기모순은 남근중심주의가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이리가레 글쓰기가 불명료하다고 비판 많이 받은 모양인 데, 그걸 즐거워하신다고... 멋져.

“(p.410-여성주의고전을 읽다: 뤼스 이리가라이) 이리가라이는 가부장제 문화적 근간 전체를, 상상계와 상징계(언어) 그 자체와 그것을 반영한 지적 체계의 핵심을 모조리 문제삼는다. 그 효과적인 대상, 가부장제 사회와 문화의 저변을 담당하는 것이 철학이기에, 그녀는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켰던 남성-동일자의 표현양식인 서양 철학사와 철학전통 전체의 계보 곳곳에 깃들어 있는 남성중심성을 저며내고, 성적차이를 사유하는 새로운 지평, 새로운 초월의 방식을 만들고자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같은 책 413) 그녀는 1974년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의 팔루스중심주의를 비판한, 두 번째 박사학위 논문 ‘스페큘럼’을 간행한다. 이 책의 출간은 이리가라이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직업적으로는 평생의 어려움을 가져다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벵센느 대학의 교수자리를 잃었고 라캉학파에서도 파문되었으며, 말년까지도 프랑스 대학에서는 정식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리가레의 글쓰기 스타일도 멋있는 데, 서양 철학사 통째로 씹어드시겠다는 그 포부도 멋지고, 살아온 인생은 더 멋져버린다. 팔루스중심주의 얼마나 대차게 깠길래 (읽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고추중심주의ㅋㅋ를 공부해야하는 가?? ) 라캉학파에서 파문당한거여..😮😱  교수도 못됐으면 뭘로 먹고 산거여.. 언니야😭ㅜ_ㅜ... 이렇게 멋짐이 뿜뿜한 이리가레가 궁금해서 뒤져보았으나, 그의 생애사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하는 데, 까닭은 여성 사상가를 하나의 일대기로 축소시키는 전기론(의 가장 큰 예시가 선배 보부아르)에 반대하는 이리가레 본인의 신념인 듯 하다고 위의 책에서 그러더라. 아 일관되다. 대쪽같은 사람이야. 참! 

어쨌든 생애사는 글렀고, 그의 사상을 요약한 것을 읽었으나 (이해는 거의 못한)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리가레가 엄청 훌륭한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라는 건 알겠지만,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는 내 지식의 비루함이 좀 슬펐다. 뭐 스페큘라까지는 먼 훗날에 읽어보기를 기약하더라도 최근에 나온 신간 <식물의 사유>는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생각해보니까 파이어스톤도 좋다고 좋다고 그래놓고 <성의 변증법> 어려워서 못 읽었다. 

에효. 진짜. 책읽고 싶어서 책을 더 읽어야 하는 상황이 연거푸 발생하는 중인 데-... 결국.. 공부해야 하는 가. 
프로이트도 모르는 데, 라캉을?.... 로 ㅏ.......캉...?

*

어쨌든 앞서 밝혔지만, 나는 나를 아는 게 중요하고. 적어도 요즘의 나를 알아가는 데에는 페미니즘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이 독후감을 쓰면서 알아낸 나 자신은 이러하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그리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느라 한 권의 책에 도통 집중을 못한다. 그런데 또 어떻게든 읽기로 한 책은 읽는다. 독서 자체는 아무 목적없이 즐기는 편이다. 다만 집어든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은 전적으로 ‘책임감’ 때문이다. K-장녀에게 책임감이란, 의식화를 해서 떨쳐내려고 해도 골수에 박혀있는 DNA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의 숙제는 책임감의 범위를 어떻게든 협소하게 줄이고 줄여 홀가분해지는 거다.) 그러므로 평소처럼 오로지 즐기기 위한 독서에 머물렀다면 나는 이름만으로도 어려워했던 이리가라이를 조금이나마 알게되는 즐거움을 놓쳤을 거다. 

결론 : 이토록 좋은 ‘책임감’을 심어주신 알라딘 서재 마을에 서식중이신 페미니즘 벽돌책 깨기 집단에게, 새책을 사면서 땡스투로 꼭 보답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라딘에게만 좋을 일이다. 결국 승자는 알라딘이다. 아이씨. 아직 추석전에 시킨 택배도 덜 왔는 데 또 사고 싶다. 아까 안사기로 마음먹었잖아... 황정은, 백수린은 언제 읽을건 데.. 올해엔 소설도 좀 읽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잖아. 그런데..... 10월에는 10월의 책이 있어.. 이번엔 두권이야.. 하지만, <식물의 사유>....ㅜㅜ 오오 이리가라이여. “이리가레에게 자기모순은 남근중심주의가 요구하는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 나는 저항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 나는 모순이다... 나는..... ....

....

과연 나의 장바구니는....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티나무 2020-10-06 0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x 10개입니다.

공쟝쟝 2020-10-06 07:56   좋아요 0 | URL
그 좋아요 나도 좋아요 ㅠㅠㅠ

반유행열반인 2020-10-06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를 모르는 존재로 대할 것. 알기 위해 노력할 것. 그리고 내가 책을 사 봤자 배때기 부른 건 알라딘이지만 내 배도 조금 부르길 바라며 ㅋㅋㅋ 저는 한 달에 소설 다섯 권 읽기 시집 한 권 읽기 하고 있는데 쟝쟝님도 소설 한 권 할당제 도입합시다 ㅋㅋㅋ사회학 여성학 한 세트 당 소설 한 권 2 1 같은 거ㅋㅋㅋ

공쟝쟝 2020-10-06 07:59   좋아요 1 | URL
저의 든든한 한국 소설 친구 ㅋㅋㅋㅋ 이미 땡스투 몇번 쐈는데?? 몰랏죠?? 사회학, 여성학?? 그거 안읽은지 오래 ㅋㅋㅋㅋ 요즘 저의 읽기는 모두 에세이로 수렴됩니다.. 에세이 넘 좋아, 에세이 쵝오! 소설도 좋은데 중간에 끊으면 너무 힘들어서 ㅠㅠㅠㅠㅠ 중간에 끊기는 소설은 재미가ㅠ없고 ㅠㅠ

수이 2020-10-0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얹어놓고 갑니다. 쟝쟝님 쌩얼 같은 글이라서 더 좋은.

공쟝쟝 2020-10-06 19:26   좋아요 0 | URL
이 글에 좋아요가 백만20개 되었다!! 비록 탈코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지지)글이라도 코르셋을 벗고 생얼로 쓸 수 있다면..!

다락방 2020-10-06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x 10개입니다. 2

쟝쟝님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또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주는 것 같아요. 쟝쟝님과 대화 하다가 나도 모르게 위로받았던 적도 있었거든요. 얼마전에 책읽기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고 말했지요? 저는 책읽기를 같이하려고 만났다가 좋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게 되어서 좋아요.

:)

2020-10-0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0-06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 사장님 전화번호 좀 줘봐요. 전화 좀 하게요.
나는 쟝쟝님 글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싶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공쟝쟝 2020-10-06 19:35   좋아요 0 | URL
전 그분의 번호는 물론 회사의 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의식적 잊음도 아니고 ㅋㅋㅋㅋ 이건 진짜 무의식이 기억을 방해하는 듯ㅋㅋㅋ 기다렸다니 ㅠㅠ 우왕 ㅠㅠㅠ 나 막 또 쓴다..?

syo 2020-10-06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발 일 좀 줄이고 글 좀 더 써봐요.... 잘하잖아...

공쟝쟝 2020-10-06 19:39   좋아요 2 | URL
앗싸! 어디를 잘썼는 지는 모르겠지만 잘쓰는 사람에게 칭찬 들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 타자와 괴물을 몰아낸 기반에 뿌리 내린 철학에서, 여성은 타자다. 타자로서의 여성은 자신의 입말이 아니라, 자기를 탄압하고 옥죄는 언어로 사유와 철학을 시작한다. 여성을 타자로 규정한 철학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얼어붙고 어두운 시기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공간에서 온 힘을 다해 힘겹게 머무는 일이다.”

“(12)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J헤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 여섯 명의 여성 사상가이자 철학자는 주로 20세기에 활동하면서 근대 주체를 비판하고 근대 이후를 모색했다. 이들은 타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성찰하고, 타자를 동일성의 범주로 판단해버리지 않고, ‘즉시 이해가능하지 않은’ 겸손한 지평에서 타자와 맞닿았다. 말을 길어 올려 새로운 사유를 끌어낸 그들로부터 알게 된 것은, 동일자로 호명되어온 인간이 실은 이방인이며, 타자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여성철학자들을 단일한 혈통의 계보로 묶기보다는, 이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벌인 치열한 사유와 아직 쓰이지 않은 삶에 대한 전망을 축으로 엮었다. 확실히, 사유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살기 위한, 삶을 계속하기 위한, 함께 존재하기 위한 깊은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오랫동안 홀로 생각해온 여자들과 이제는 같이, 문턱 너머 저편으로 건너가고 싶은 갈망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존재하려는 열정이 그녀의 몸에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가 서로를 발견할 때까진,우리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에이드리언 리치).’”


까지 책정리를 했는 데, 혼술에 취해서 뭔가 더 이상 책을 정리할 수가 없다.


괴물과 잠을 자기에는 너무 쫄보고(생각하기가 싫어요), 그러나 그게 궁금하긴 하니까 괴물이랑 잔다는 소문을 듣고 영화 쉐이프 오브 워터를 보고 실망한....(응?) 나로서는, 제목부터 넘나리 매력적인 책이었지만, 여기에 나오는 그녀들을 다 모르는 거라... 그래서 내가 읽는 책 중에서 나오면 한편 씩 독파해야지! 마음먹고 읽기를 어언 2년(참 길었다)... 2018년 4월부터 읽던 책을 이제야 다 읽었다. 쥘리아 크리스테바와 도나J해러웨이를 도통 어느 텍스트에서도 만나기 힘들었는 데... 다행스럽게도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 에서 다들 등장해주셨다.

연휴의 막날이라 안취하기 싫은 데, 한 줄이라도 써야할 것 같아서. 
흩어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한줄 쓴다.

나는 언제나 처럼 아마 내일도 후려쳐질거다. 절반은 노동자이기 때문이겠지만 절반은 ‘나이들어가는 여성’ 노동자이기 때문이기도 할거다. 네가 여길 벗어나서, 가봤자 얼마나 좋은 곳이겠어?를 묵음처리한 말들이 펼쳐질 것이고, 때때로 호의를 가장하지만 그래서 더욱 비참해지게 하는 염려의 말들을 들으며, 속에서는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방긋 웃겠지. 씩씩한 척도 할거다, 아마. 매일매일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런 말들을 들으면서, 표정관리와 멘탈관리와 근태관리까지 하면서. 아무리 의식적으로 싹싹 그러모아도 원체 빈약한 내 자존감은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어나갈거다.

술을 (적당히)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대화를 하거나, 운동장 트랙을 달리거나.... . 깎여나가는 것 만큼의 자기애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지친채로 악착같이, 애써하다가,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위장에 구멍이나고(여기까진 슬픈 실화), 쌍코피가 줄줄 흐를 수도 있다.

*

여성이 자아를 축소하고 겸손해지길 독려하는 사회에서 기실 내가 배워왔고 익숙한 것은- [겉으로] 일은 완벽하고 빈틈없이 쨍쨍 잘하면서도, 공은 티나게 티내지 않고 그래도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와중에 겸손해야 하고 또 그게 너무 내숭떠는 것처럼 보여선 안되는. [속으로] 사심없는 헌신인 양 애쓰면서도 은근히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응큼하고 모순적인 것들. 분열적이고 때로는 징그럽기도 한.

생각해보면 이미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에서 미치지 않고 적응하려면(변혁하는 방법도 있지만 진즉 투항했다), 역시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더 수월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자기비하와 자조좀 섞어 투덜거리는 게 그나마 건강하다는 생각이다. 또 그런 모습이 - 적어도 자기애가 막 만땅에 차있는 것보다는 덜 이질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잘 정제된 자기혐오나 잘 포장된 자기연민을 난 좋아한다. 타인을 미워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게 난 익숙한 데, 그거 마저 이쁘게 포장하는 정성스러움이 느껴지면, 기분이 좋크든요. 유머러스한 고오급 자기혐오.

*

오늘 모순에 대한 지적을 희열로 받아들였다는 어느 페미니즘 철학자를 읽으면서. 한발짝 더 내딛기로 했다. 나를 망치지 않겠다(는 소극적 자세)에서 한 걸음 더. 개소리 하지마, 나는 더 건강해질 거고, 아주 아주 잘살아버릴거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당신 보다 잘 살고 있다.!!! 감히 너따위가 걱정해줄 나님이 아니시란 말이다!! (아니... 이걸 인제 깨닫다니 ㅠㅠㅠㅠㅠㅠㅠ 오 나여,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쪼렙이여..) 으하하하하! 언젠가 곰곰히 생각해서 적어볼 기회가 있다면 써보고 싶다. 

나는 나를 긍정하고 나를 사랑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신보다 잘 살아버리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어째서
자기혐오나 자기연민보다 더 어려웠는 지.

*


자야겠다. 내일은 여섯시에 일어날거다.
생각하는 (한국) 여자는 고양이와 함께 잠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