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픽을 하려했으나 쓰리픽을 해버림…

어쩐지 찜찜하다. 왜냐면 내가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데에는 페미니즘 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철학이 아닌 것인가? (나는 명백히 철학이며 가장 앞에 있는 사상이라 생각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철학이 아니라고 한국 대표 남철학자가 후려치더라. 아직도 그러시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이건 그냥 내 뇌피셜 힌트인데. 도나 해러웨이!!! 이렇게 써놓고 걍 넘어가려고 한다. (해러웨이 혹은 버틀러 그외의 숱한 페미니즘 사상가들 이 문제를 거의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상황적 지식이라거나 부분적 관점, 그리고 본질주의 해체... 잘은 모르지만 이런 모든 페미니즘의 도전과 성과에는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에 대한 인식이 함께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냥 다 추측이다.. 뭔지 모르겠는 데 알고 싶은 거기에 내 공부가 있는 것 같은데 이럴 때 마다 나는 너무 초조하다ㅋㅋㅋ)


아렌트는 분명 여성을 일반화(혹은 보편화?)시키는 식의 사유는 전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도 현재의 페미니즘 철학과 어쩐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아, 이걸 쓰자니 공부도 부족하고 너무 멀리 갈 것 같다. 


여튼 20세기의 사상가들의 열공 덕분에 ‘보편’이 다 해체 되었단들 ‘보편’을 인식의 범주로 사용하지 않는 현대인은 없을테다. 그건 생각을 생각하는 습관적 방식이고, 다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다른 몸을 살지 않은 채로 다른 인식론을 채택하는 것은 사실 부단한 공부가 아니고서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역지사지의 어려움) 나의 경우 그걸 페미니즘 공부를 하면서 배우고 있는 중인 것 같기 때문에... 정말 내 경험에 착목하여 이런 의미에서라도 나는 인류의 절반 여성에게 여성주의야 말로 반드시 배워야 하는 ‘철학’이라고 생각하지만… (아… 너무 공부가 하고 싶다… ㅜㅜ 선생님 공부가 하고 싶어요)… 오늘의 업무량을 마치지 않았으므로(오늘 일 집중력 너무 안 좋아서 밥먹고 조느니 이거 쓰는 중) 지금처럼 옆으로 새지 않고 뚝딱뚝딱 적어보기로 한다. 


아직 아렌트의 사상으로 직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주제인 (ㅋㅋㅋ) 내가 한나 아렌트에 꽂힌 페미니즘 적인 이유. 


그녀가 개념을 다루는 데 능숙한 인물이며, 단독자로 사유했고, 추상화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통상 약 반만년 동안 ‘남성적인 자질’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뇌는 남자 뇌인 것 같다… (응? ㅋㅋㅋ 또 여기서 아렌트랑 자기 엮는다고 비웃는 잠자냥 보인다. 잠자냥, 당신은 잠자냥이 가장 좋아하는 사상가…니까… 저를 비웃으면서도 이해 할 거라고 믿어요.) 물론 남자 뇌, 여자 뇌 그 딴 뇌는 없지만ㅋㅋㅋㅋㅋㅋㅋ 물론 나는 울프 식의 의식의 흐름 기법에도 능하지만 ㅋㅋㅋㅋㅋㅋ 내가 긴긴 이야기(소설)보다 더 선호하는 쪽은 추상화된 개념(사회학/철학)들이 맞다. 그런 지식들을 습득하면 달칵 뭔가가 좀 맞춰진 것 같고 좀 살 것 같다. (반 칠십에 하는 공부의 맛) 


언어화되지 않던 것들이 언어의 형태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어쩐지 다룰 만한 것이 되어 나는 덜 불안해지고, 그 언어들이 응축된 개념들이 만나면 또 더 반갑고. 개념들이 의미있는 지식으로 어디선가는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고(물론 탈맥락적인 보편은 없다/ 여성주의는 그것을 가장 잘 말해준다/ 아래 거다 러너 글 참고) 그것은 소통의 가능성… 처럼 느껴진다(나는 항상 소통이 어려웠다). 


책에서 언어와 개념을 발견해 이름을 붙여두는 방식으로 내가 겪은 아픔들이 더는 나를 해치지 못하게 글씨로 가두어서 분리시키면서 나 자신을 보호해 왔다. 가장 즐거운 언어들을 제공한 것은 역시 페미니즘이고, 페미니즘 에세이도, 페미니즘 소설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이론서(???? 연구서?? 학술서??? 이런 장르를 뭐라고하지요? 일단 이론서라고 씀ㅋㅋㅋ)이다. 이번에 <디지털...> 읽으면서 더 느낀건 데 그이들의 책은 논문이라 할지라도 논문 아닌 것 처럼 적혀져 있고 딱딱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페미니즘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보부아르는 이렇게 쓴다. 


“(821) 여자는 세계의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를 뿐만아니라, 거대한 혼돈의 성운 속에 놓인 것처럼 이 세계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맨다. *그녀는 남자의 논리를 잘 사용할 줄 모른다.* 스탕달은 여자도 필요하다면 남자와 마찬가지로 논리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논리는 여자가 거의 사용할 기회가 없는 도구다. 삼단논법은 마요네즈를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도,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도 소용없다. 남자들의 이성적 사유는 여자가 경험하는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남자의 왕국에서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않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은 어떤 기획에도 작용할 수 없으므로 꿈과 다를 바 없다. *실효성이 없는 까닭에 그녀는 진실에 대한 감각이 없다. 이미지와 말을 상대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모순된 주장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어쨌든 자기 능력 밖에 있는 영역의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지독하게 막연한 지식에 만족한다. 여자는 정당, 견해, 장소, 사람, 사건들을 혼동하고 있다. 여자의 머릿속은 기묘한 혼란 상태다. 그러나 결국 명확히 사물을 보는 것은 여자의 일이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교육 받았다. 따라서 자신을 위하여 비판하고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보다도 우월한 계급에 일임한다. 그 때문에 남자의 세계는 여자에게 초월적 현실, 하나의 절대처럼 보인다. *‘남자는 신들을 만들고 여자는 신들을 숭배한다’고 제임스 프레이저는 말한다.*”


스탕달 말마따나 여자도 필요하다면 남자와 마찬가지로 논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여자의 삶에 불필요하기 때문에 잘 안쓰고, 잘 안쓰는 능력은 당근 퇴화된다. 내 생각에 우리의 대천재 아렌트 머모님은 남자들보다 더 그걸 잘 썼다. (쓰기만 했냐 그걸 살았다고 한다… 증멜로… 찐 철학자 아닌가?) 그건 남자 뇌/여자 뇌가 따로 없음을 말하지. 


보부아르로부터 어언 70년. 현대의 똑똑한 여성들은 ‘지독하게 막연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현실에서 발견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식을 ‘추상화’된 개념의 언어로 만들어낼 필요가 분명, 분명히 있는 것이다. 여자도 하면 더 잘한다를 먼저 보여주신 분들에 보부아르와 아렌트가 있다!! 



거다 러너는 이렇게 말한다. 


“(384) 서구 문명의 기초가 된 그리스 철학, 유대-기독교 신학, 법적 전통에 체화된 그 같은 *상징적 구성물*을 토대로, 남성들은 그들만의 용어로 세계를 설명하였고, 자신들을 언설의 중심에 놓는 중요한 질문들을 정의하였다. 

*‘남자’라는 용어가 ‘여자’를 포섭하도록, 그리고 억지로 그 용어가 인류의 대표성을 갖는다고 사칭함으로써 남성들은 그들의 모든 사상 속에 막대한 분량의 개념적 오류를 구축하였다.* 반쪽을 전체로 간주함으로써 남성들은 비단 자신들이 설명하는 것에서 본질을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볼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을 왜곡시켰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한 남성들은 그것의 실제, 기능, 우주 속에서 다른 물체들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경험·시각·관념이 인간의 모든 경험과 사상을 대변한다고 남성들이 믿는 한, *그들은 추상적인 개념을 올바르게 정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 서구문명의 모든 정신적 구성물 속에 형성되어 있는 남성중심적 오류(androcentric fallacy)는 단순히 ‘여성을 추가’함으로써 교정되지는 않는다. 교정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인간성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평등한 부분들 속에 존재하며 인간 존재에 대해 내려지는 모든 일반화 속에 양성의 경험, 사고, 통찰력이 반드시 재현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받아들이도록 *사고와 분석을 근본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 당분간은 여성중심적 (woman-centered)”이 될 것을 요구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자질을 이렇게 언급해 주시는 데… 난 이 문장이 정말 젤로 좋다.


“(397) 아마도 사고하는 여성에게 가장 큰 도전은 안전과 승인을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비여성적인 자질—세계를 다시 질서짓는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최상의 자기과신인 *지적 오만*— 로 옮겨가려는 도전이다. 신을 만드는 자의 *자기 과신*, 남성 체계건설자들의 과신으로.”


남성 체계 건설자들 수준의 *지적 오만*(오만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히 진심의 수준 높음!)과 니들이 뭐라든 난 신경쓰지 않아요~하는 *자기 과신*의 자질은 단독자 아렌트가 이미 다 보여줌ㅋㅋㅋㅋ 물론 이이의 훌륭함과 태도에 확 끌려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 내가 아렌트 읽어보려고 하는 이유는 한국의 심란한 정치 현황을 *똑바로 보고 싶다(전체주의의 기원)*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그리고 현실주의 하면 아렌트 빼놓으면 안되지. 아렌트~ 아렌트💕💕  



“전체주의적 해결책들은 전체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언제든 다시 나타날 강한 유혹물의 형태로 살아남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


곁다리. 분단 상황과 지역 감정을 동원하는 (전체주의적) 한국 정치는 이제 여성혐오를 카테고리에 하나 더 추가한 듯 보인다. 이준석의 등장~ 짜라란~ 심란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미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서 젠더는 극우 정치인들이 활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당연히 그것은 페미니즘 때문(이게 일베들 논리 아니냐고, 제발 여남 모두 나빠요 웅앵웅 양비론 좀 선택하지마. 계급… 알겠는 데… 그 논점으로 물타기해서 자기가 지성인인 척 한다고 한들 2번남들이 1번남 될리 없으며 여자 유권자들만 양쪽 다에 정털려서 투표 안함. 하나 더 팩폭하면 한국은 한번도 노동자들이 자기 계급 기반해서 투표한 적 없음ㅋㅋㅋ)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혹독한 현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그게 앞에서 똥 싼다고 같이 바지 벗는 것 같은 혐오와 비슷한 논리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옳지도 않은 진술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능력주의 담론 다음으로 그나마 가장 대중화되어 있는 게 페미니즘인데… 이걸 일베랑 동급으로 엮어서 같이 혐오라고 묶어서 결국에는 여자들 입을 막으려 드는 담론을 유포하는 최소 석사 이상의 배운 자들 너희는 누구십니까? 정치인은 그것이 업이니까 어쩔 수 없다 치고 지식인은 그러지 말아라 진짜(점점 더 빡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호흡을 고르겠습니다).


세상을 똑바로 보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한 쪽 눈으로 보던 세상을 두 눈 뜨고 똑바로 보게 하기에 페미니즘만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도 공부 안한 사람이 페미니즘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응 그것은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인데 말이야.... 라고 하면서 주절주절 안하고... 가장 쉽게(나는 쉬운 사람) 아래의 두 문장을 외워서 대답해주려고 한다. 


계급은 젠더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계급은 젠더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계급은 젠더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서 노예제를 가능하게 했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서 노예제를 가능하게 했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서 노예제를 가능하게 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무의식인데.. 이건 어려워~ 아직 정리 못하였슴.. 

아무튼 프로이트도 라캉도 남자라서 제대로 못 본 무의식의 세계를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똑바로 본단다~. 



“(299) 라캉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아이들은 거세와 결핍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상징계 질서로 진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거세에 대한 라캉의 이론이 지닌 문제점은 그것이 계속해서 상징계 질서를 가부장적인 것으로 구성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우리가 가부장제적이지 않은 상징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정신병이 상징계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라캉의 상징계가 가부장제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 테레사 브레넌

(339) 크리드가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오히려 가부장제를 자연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외부는 없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것의 외부를 상상하는 것에 언제나 실패하는 것 자체일 지도 모른다*. 가부장제는 필연이 아니라 매우 우연한 상황의 조합 끝에 이 세상에 도달한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야말로 가장 우발적인 성체계인것이다. 우리는 우리 언어의 가부장성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창조해 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징 체계인 언어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이제 비명이나 유령의 언어로 말할 것이 아니라, 다른 소통 가능한 언어로 말하는 방법을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언어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통해 언어의 다른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일 터다*.

가부장제는 오랜 시간 여성을 ‘괴물’이자 ‘유령’으로 만들어왔다. 그것이 여성에게서 ‘언어’를 박탈해 온 역사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시민으로 존재해야 할 때다. 크리드가 비평을 통해서 열어준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통찰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글 좀 많이 쓰세요. 더 많이 쓰세요. 여자들아. 당분간은 언어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 말고는 답 없어요. 


이 페미니즘, 저 페미니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니 엄마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니 할거 없이, 좀 서로 틀리면 치열하게 논쟁해서 싸우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게 맞는 거 같음… (그런 식으로 페미니즘이 70년도 안되서 정말 많이 발전한 거 같아요.) 치열하게 사유하고, 빡세게 토론하고, 친구 없으면 나 자신과 토론할 것이며, 굳이 이념적 동료 찾지 말라고(그거 잘못하면 전체주의 된다고 ㅋㅋㅋ) 단독자 아렌트 머모님이 이미 살아서 보여주셨으니 아렌트를 또 배우자! ㅋㅋㅋ


이제 우리 여성들에겐 언어와 글씨와 투표권과(ㅋㅋㅋ) 자원 낭비 없이 아무말 대잔치해도 좋은 기술 인터넷이 있음다. 신자유주의 덕분에 남자한테 의지 안해도 내 입 하나는 포도시 건사할 저임금의 일자리도 생겼고요.ㅋㅋ 여자 임금 어차피 후려쳐진 상황이니까 그냥 바깥냥반한테 돈 많이 벌어오라고 하고 집에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면서 가부장제에 내부를 교란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정말 훌륭한 방법이고요, 대신 여자들 더 죽지 않도록 페미니즘 악착같이 읽고 쓰세요~ 각자~ 취향에 맞게 알아서~~


그리고 여자 지식인들은 그런 여성들의 언어들을 부단히 개념화해서 단 한번도 제대로된 보편(을 사칭한)을 구축한 적이 없는 대문자 남성들의 철학과 역사를 낙후시켜 버리시면 되겠고요. 아, 물론 성공 안해도 상관은 없음. 인류는 남자들이 망친 것이기 때문임. 굳이 여자가 구원할 필요? 없음. 


그럼 나는? 

그냥, 재밌게 페미니즘 공부하면서, 아렌트도 좋아하고. 

돈벌다가 일하기 싫으면 이런 글을 쓴다 우하하!

어차피 마감 닥치면 내가 다 하더라고 ㅋㅋㅋ (마감이 내일이라서 세상 모든 것이 다 재미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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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9-27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전철에서 비웃다가 빵 터짐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남자의 뇌, 믿어주마. 반칠십 쟝쟝~~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9-27 17: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 근데 남자뇌라고 말하니까 뭔가 기분 나쁘니까 ㅋㅋㅋㅋ 인티제뇌라고 하자

공쟝쟝 2022-09-27 17:2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인티제뇌!!!!! 이거네 ㅋㅋㅋㅋㅋ 인티제였어 ㅋㅋㅋㅋㅋ 남자뇌 아님 퉷퉷! 그냥 개념이랑 직관을 더 쓰는 게 수월한 뇌!!!

잠자냥 2022-09-27 17:27   좋아요 2 | URL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잠자냥

공쟝쟝 2022-09-27 17:28   좋아요 2 | URL
역시 잠자냥이 최고 최애 하는 페미니스트 잠자냥 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7 17:29   좋아요 2 | URL
아놔 오만해 ㅋㅋㅋ 근데 그거 알아요? 난티님의 원픽은 난티나무고 다락방의 원픽은 다락방일 게 확실하므로 ㅋㅋㅋㅋ
공쟝쟝픽 최애는 공쟝쟝이 되야하는데 …. 아ㅠㅠ 전 아직 안되겠어요 ㅠㅠ 조금 더 살아갈게요…

주제가 흥미로워서 2022-09-27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찾아보니, 영어로는 아렌트와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꽤 많군요. 아렌트를 누구는 페미니스트라고 보고, 다른 누구는 anti-feminism이라고도 보고, 또 누구는 젠더중립적 페미니즘(gender-neutral feminism)이라고도 하나 봅니다. 누가 정리 좀 해줬으면 좋겠네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2-09-27 17:4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ㅋㅋ 역시 영어를 공부해야하는 것인가….. (좌절…)

2022-09-28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8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28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22-09-28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충격적인 건 대학을 간 딸아이가 여성학 과목 들으라는 나의 권유를 2년째 계속 미루는 겁니다... 같은 과 남자애들에게 ‘페미니스트‘로 찍힐까봐 몸 사린다는 건데... 1990년대도 아니고 2022년을 사는 내 딸아이가 이럴 수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딸이 이럴 수가... 충격 먹었지만 부모라고 내 가치관을 애한테 강요하는 게 될 까봐 요리조리 꼬시며 참는 중임다. ㅠㅠ

공쟝쟝 2022-09-28 20:11   좋아요 0 | URL
네… 그만큼 여성혐오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ㅋㅋㅋ 저도 대학다닐때는 된장녀 되기 싫어서 개념녀인척 했어요 ㅋㅋㅋ 뼈말라야할거 같아서 다이어트도 하고 ㅋㅋㅋㅋㅋ 좀 뒤늦게 공부해도 결국에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날이 올거예요… 이 곳을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ㅠㅠ 그르니 냅 두셔요ㅋㅋㅋ
 

작년 이 무렵의 나는 <제2의 성>을 읽고 있었다. 난 보부아르가 증말 좋다. 하지만 뭐랄까… 보부아르 보단 한나 아렌트가 쫌 더 좋은데 사실 그녀의 단독자 스탠스 때문인 것 같다. 한나 아렌트를 페미니즘으로 독해할 능력은 1도 없고, 여튼 보부아르와 아렌트 이 두 머모님을 이렇게 양쪽에 든대하게 올려두고…  (순위를 매길 수는 없는 대사상가) 현 시점에서 젤로 좋은 페미니스트 사상가를 꼽아보고 싶어서.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분명히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읽을 때는 이리가레에 끌렸는 데, 이리가레 넘나 어려워가지고…
아… 그리고 파이어 스톤도 나(의 급진적인 뇌구조)랑 뭔가 통할 거 같은 데, 또 넘나 어려워가지고… 못 읽음.
언젠가는 그들이 열릴 것이다. 이 독서를 멈추지 말자.


여하튼 현시점(2022년 9월) 에서 내가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들 정리해둬야지!!!

1군
크리스테바 (생각하면 짜릿할 정도로 좋음) = 거다 러너 (사이다 먹은 듯 속 시원해서 좋음) = 에바 일루즈 (사는 데 필요한 소금 같아서 좋음)

2군
도나 해러웨이 (신박해서 좋음) = 마리아로사 달라코스따 (성별 분업으로 패기 좋음) = 실비아 페데리치 (난 이탈리아 페미들도 참 좋드라ㅋㅋ) = 주디스 버틀러 (아름다워서 좋음)

3군
이리가레 (포부가 좋음) = 필리스 체슬러 (메시지가 좋음. 요즘 카불… 페이퍼 보면서 더 좋아짐…ㅜㅜ) = 엘렌 식수 좋음(흑… 이분 없었음 글 안썼다) = 마리아 미즈(몰랐음 모르지만 알고는 안 좋아하기 힘든 페미니스트 아닌가?!)

N군 : 아직 못 읽었지만 좋아하게 될 게 틀림 없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
오드리 로드(너무 좋을까 걱정스러움, 이분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들 글 다 좋앗음)/ 파이어스톤 (처음부터 영혼이 통한다고 생각했음, 어쩌면 내 마음 속 1위임ㅋㅋㅋ 그저 어려워서 못 읽었을 뿐임ㅋㅋㅋ)/ 사라 아메드(최근에 호기심 급격히 돋음. 감정, 정동 연구 관해서 계속 언급됨. 곧 읽어보마 싶음) / 로지 브라이도티(아… 열린 상처라니요, ㅠ_ㅠ)/ 캐런 버라드 (빌런에 빗대서 죄송한데 타노스 급이실듯ㅋㅋㅋ 일론 머스크 대항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대 중입니다, 제가 ㅋㅋ )

순위는 언제든 지 바뀔 수 있는 데… 현 시점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거다 러너, 에바 일루즈 입니다!!!! 여기저기 안 들쑤시고 이 세 분만 좀 공략해도 될텐데… 내가 너무 문란한 독서가라서 미안해요 온냐들…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페미니즘 너무 재밌다… 진짜 너무

혹시 주말에 심심한 이웃님들아~
당신의 원 픽 최 애 페미니스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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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렌트를 페미니즘적으로 독해할 깜냥은 안된다고 썼지만…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2-09-27 23:43 
    어쩐지 찜찜하다. 왜냐면 내가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데에는 페미니즘 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물론 한나 아렌트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철학이 아닌 것인가? (나는 명백히 철학이며 가장 선진적인 사상이라 생각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철학이 아니라고 한국대표 남철학자가 후려치더라. 게을러 게을러 ㅉㅉ 아직도 그러시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이건 그냥 내 뇌피셜 힌트인데. 도나 해러웨이!!! 이렇
 
 
난티나무 2022-09-2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윈픽! 그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다니! ㅎㅎㅎ
저는 아직 원픽할 만큼의 책을 읽지 못했기에…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꼽지 않겠습니꽈? 그래서 못 꼽음 ㅠㅠ
그냥 저 할래요. 가장 확실한 페미니스트. 말 뿐이라 하더라도. 윈픽 페미니스트,라고 물으셨지 학자페미니스트라고 묻지 않으셨으니 ㅋㅋㅋㅋㅋㅋㅋ 첫 댓글로 망쳐놓고 도망가는 이 기분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4 16:08   좋아요 0 | URL
그럼 나도 원픽…. 페이퍼 수정할 까요? ㅋㅋ 일루즈 옆에?ㅋㅋㅋㅋㅋ 난티나무 (곧 사상가되실 것 같아서 미리 좋음)

난티나무 2022-09-24 16:14   좋아요 1 | URL
아 나 일루즈 읽어야 하는데…@@ 크리스테바 이리가레도… 뭐 나머지도 마찬가지…네요? ㅋㅋㅋ 책을 읽자!!!!!
사상가는 쟝쟝님에게 더 잘 어울리는 수식어!!!!
(제 댓글은 장난으로 그냥 넘겨주심 감사하겠슴돠 여러분..^^;;)

공쟝쟝 2022-09-25 13: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맞아요, 일단 읽자!!! 근데 진짜 너무 좋음ㅋㅋㅋ 공부하는 거 행복해 ㅋㅋㅋㅋ 아 페미니즘 진짜 너무 너무 좋네요 ㅋㅋㅋㅋㅋ 저는 사상가보다는 실천가 ㅋㅋ

단발머리 2022-09-24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조 보부아르, 거다 러너, 에이드리언 리치
C조 필리스 체슬러, 케이트 밀렛, 마리아로사 달라코스타, 벨 훅스, 마리아 미즈
A조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5 09:41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정희진은 0군 입니다!!! 당연히!!! 제가 외국 페미 사대주의에 빠져가지고 ㅋㅋㅋㅋㅋ 정희진이 저에겐 0-0 맞심더!!!! 보부아르!! 아렌트와 같은 선상 ㅋㅋㅋㅋㅋ!!! 선생님 없이는 페미 못했죠 ㅠㅠㅠㅠㅠ

공쟝쟝 2022-09-25 09:53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단발머리님 b조에 거다 러너 방가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필리스 체슬러도 단발님 덕분에 넘 좋아요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5 12:34   좋아요 1 | URL
거다 러너 내 슨상님이야 ㅋㅋㅋ내가 마니아 1위다 보부아르도 정희진도 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5 12:40   좋아요 1 | URL
근데 나는 아렌트 선생님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아직도 결정 못 함ㅋㅋㅋㅋ미결이당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5 13:0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사유하는 태도 만큼은 누구보다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요!!ㅋㅋㅋ 좀 더 페미니즘 적으로 독해할 필요있겠지만 깜냥은 안되고 ㅋㅋㅋ 뭐랄까 거다 러너가 지적한 추상화 작업을 제대로 해내신 분…!!? 저 공부 더해볼 꺼예요!! ㅋㅋㅋ

바람돌이 2022-09-25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좋지만 그래도 아직 원픽을 정할만큼 읽은게 없어서...... 외국의 페미니스트학자들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기도 하지만 아직 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해서요.
다만 정희진 샘은 그냥 0순위 원픽입니다. ^^

공쟝쟝 2022-09-25 15:03   좋아요 2 | URL
한국 여성들에게 정희진 샘은 축복이죠… 정희진 샘 덕분에 이 모든 여성 사상가들을 알게되었으므로 제 마음속 0순위역시 희진샘이 맞습니다..ㅋㅋ

잠자냥 2022-09-27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잠자냥이요.

바람돌이 2022-09-27 13:24   좋아요 1 | URL
동의합니다

잠자냥 2022-09-27 13:2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7 13:33   좋아요 1 | URL
그럼 나도…

잠자냥 2022-09-27 13:49   좋아요 0 | URL
쟝쟝/ 다부장 아니고?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7 14:57   좋아요 0 | URL
이분법을 거부한다. 잠자냥 다부장 그들은 내게와서 공쟝쟝이되었다...
 

0.


쟝님이 논문을 썼다면 꼭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요? 라고 김예란의 글(행복을 향한 그녀들의 움직임 : 디지털 페미니즘의 정동)을 읽던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었다. 과연? 두구두구두구 아마도 그렇다. 미셸 푸코, 사라 아흐메드,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에 알랭 바디우까지 저자가 인용 해온 학자들을 내가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알고 싶은, 읽고 싶은 사람들이다. 즉, 집에 책만 쌓여있다. (읽겠다는 약속, 미래에의 의지, 살아야 하는 이유, 초조함의 원인… 여타 등등)



1.


언젠가 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그건 고통에서 삶을 건져 올려 다시 복구하는 방법이라고 했었다. 어쨌든 어떤 시간들을 무사히 빠져나와 지금과 그때의 나 자신에게 골똘해질 수록 상처받고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냥 삶이 구동되는 방식이라서 나의 경우 내 상처를 보편성을 획득한 어떤 언어와 개념들로 상대화시켜서 아픔을 방어해보려는 전략을 취하게 된 것도 같다. 


사회학은 사회를 다루는 학문일테고, 물론 체스판의 말을 두듯 분석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문제가 되는 그걸 연구의 방법으로 자신까지 포함해서 분석하는 건… 좀 멋지다. 그렇게 살지 않았을 수 없었던 그 사람들의 태도가 보이면 좋다. 읽고 이해해보려 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식의 치유?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읽지 않은 채로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 요즘엔 좀 많이 초조하긴 하다. 그렇지만 나는 또 내 삶을 잘 돌보면서 나를 생산하고 재생산할 의무가 있다고 맘을 다잡는다. 가끔 그걸 도외시 한 채로 책 속에만 들어 앉아있고 싶을 때 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그건 좀 슬픈 것이고 슬픈 것은 울면 빠져나간다. 아, 술은 마시지 말자 라고 생각한다. 마취 없이 애도하기.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처럼 느낄 때가 있다. 



2.


“막연한 물음들을 가진 채로 행복에 대한 희원을 품으면서 행복에 대한 앎을 시도 한다. … 나의 행복의 ‘윤리’는 그 가치 판단과 의미 설정이 주체가 자신과 육체적·정신적으로 맺는 관계 안에서 제기, 생성, 추진되고, 주체가 자신을 실행하는 규칙 및 방법 역시 자아의 실천 속에서 형성됨을 주장한 *푸코의 윤리학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예란은 행복에 대한 앎을 시도하기 위해 푸코의 윤리학을 가져온다. 


“행복의 윤리적 주체는 이미 규범으로 정해지거나 주어진 것과 연관되는 동시에 다른 행복을 욕망하고 그 실현을 위해 고투하는 과정 안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나도 행복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심히 오염된”, “남용되는 통속적인 행복 개념과 단절”되어야 한다. 시장이 환영하는 상품의 형태여서는 안된다. 쉽게 소비하고 휘발 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종교나 정치 혹은 제도가 수월하게 약속하는 것과도 같을 수 없다는 건 이제는 제법 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모든 행복 담론의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아, 저 말은 못 들어 주겠어… 빻은 세계와 물리적으로 단절되기 위해 방구석에 들어 앉았다가… 스마트 폰에 중독되어 버리는 그런 드릅게 취약하고 평범한 인간이다. 저자의 말대로 일련의 *행복장치*들로부터 나의 ‘행복’을 발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그 과정. 그렇다면 나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등장하는 ‘미투’하는 그녀들. 그녀들 역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읽는 사람이 남자면 모르겠지만 여자면 안다. 나는 알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데… 그래도 이렇게 말해 놓고 안알랴줌~! 이러면 너무 치사하니까 쫌 써드리면, 그건 내가 맨날 맨날 강조하는 ‘몸’ 때문이다. 이 놈의 몸… 마이 바디… 비루한… 코로나 후유증, 요통, 복통, 생리통, 위염, 장염으로 고통 받는 너무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곧바로 죽겠는 내. 몸. 뚱. 아. 리… (인정하자, 이젠 방탕하게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어…)



3.


하필이면 나는 한국에서, 여자 몸으로 태어나서, 현 시대를 살아버린 것이다. 그토록 모르고저 모르고저 모르고저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는 미투에 대한 이해와 동감은 원천적으로 ‘몸’에서 비롯함을 의미한다. 너무나 자명하게도, 미투에서 말해지고 미투를 말하는 것은 바로 몸 그 자체이며 더욱이 그 몸은 폭력과 혐오로 고통 받은 몸이다. 상처 입은 몸들의 발언으로 미투를 이해할 때, 우리는 말과 몸이 상호 결합된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지니는 취약성과, 나아가 그들이 공통적으로 발하는 전복적인 정치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이 글이 좋다. 아주 많이 이해 할 수 있다. 물론 ‘전복적인 정치성’에 대해 실눈 먼저 떠지는 몸인 것도 나지만… 그래도 이상주의자 답게 한껏 낭만화해서 “아니, 왜 저 난리래, 여자들 왜 유난이야?”라는 말에 대항해 떠들어 볼 수 있는 어떤 직관이 내게 있는 것 같다. 나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몸 반응에 나의 소망을 약간 섞어서 저자가 쓴 단어에 형광펜을 긋는다. 임계점. 


그렇다. 임계치라는 것이 있다. 5천 년 넘도록 당연했던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를 더 이상 당연시 할 수가 없는, 이렇게는 못 살겠는, 두고는 못 보겠는, 내 몸이 못 견디는 임계치라는 게 있다. 모르고저하면 모를 수 있는 메일 바디를 지닌 사람들과 다르게 스마트 폰으로 연결되어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어버리는 시절에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 사건을 조금만 알게 된다면 또 죽었구나, 몸이 덜덜 떨리는 분노와 함께 한껏 비참해지는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다 그런 거야. 원래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섹스 안해주면 죽을 수 밖에 없어”라는 온 사회의 협박 속에서 살기위해 단단히 더 코르셋을 씌우고 내재에 스스로를 가두는 여자들도 많겠지만. 그런 식의 통치 방법을 능란하게 다루면서 여자들에게 입닥치라고 유난 떨지 말라고 윽박 지르는 게 한국의 정치 현실이고 우세한 목소리처럼 보이지만. 니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난리를 피우고 유난을 떠는 것을 안 하면 안되는 몸을 가진 여자들도 있는 것이다. 그녀들 모두를 한번에 없앨 수는 없겠지. 우리는 계속 난리를 칠 거고, 세상은 시끄러워지겠고 암탉이 울었으니 망하겠지. (누구 좋으라고 이딴 세상을 유지 시키나) 그게 버틀러가 말하는 ‘전복적인 정치성’인가?


“이 점에서 몸은 취약성과 행위성을 모두 지니며 “할 수 있음doing”과 “당함being done to”의 상충적 층위들이 한 몸에 얽혀 있다(Butler, 2004: 21-23). 아울러 주체의 취약성은 말의 차원에 있어서도 작동한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말로써 하고, 말은 그 자체가 효과를 발생 시킨다. 몸과 말이 서로 구성하고 작용한다는 점에서, “말하기란 그 자체가 육체적 행위”이다(Butler, 1997: 10)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이처럼 부득이하고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몸이, ‘홀로’로서가 아니라, ‘함께’로서 무엇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누군가의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몸은 다른 상처 입은 몸을 위해 애도하고 연민할 수 있다. 타인을 위한 진실한 “슬픔”은 가장 단단하고 격렬한 지지이며 사랑과 연대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 같은 “육화된 관계성embodied relations”으로부터 현재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를 꿈꾸고 바라는 대담한 “환상”이 생성될 수 있으며, 그 환상에 집합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이 더해질 때 사회변혁적인 운동력으로 실체화될 수 있다(Butler, 2004: 28).”


내가 겪었던. 미투에 감응할 수 밖에 없는. 그 말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고통과 혐오에 쩌든 여성의 몸, 그것도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비참한 몸’ 에 대해서는 오늘의 페이퍼에는 쓸 수 없을 것 같다. 투 비 컨티뉴 ㅋㅋㅋ (걔 중에 약한 걸로 가장 나 답게 가장 풍자와 해학을 섞어서 써주겠다!!!!! 여하튼 어떠한 수련(?)의 결과로 이제 나는 제법 강해져서 어떤 상처들은 유머와 조롱으로 방어할 수 있어졌다 ㅋㅋㅋㅋ)



4.


음… 나는 푸코를 읽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좀 알고 있다고 보는 편인 데… 이 논문을 읽으면서 조금 더 명확해졌다. 결국 나는 푸코가 제안한 ‘권력’ 개념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올 수 밖에 없는 푸코의 ‘윤리학’이 궁금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써뒀던 글이 있어서 좀 더 다듬어 붙여 넣기 해본다. 


나는 나를 잘 살고 싶었다. 가까이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워보려고 했더니 자꾸 인생이 이상한 길로 빠졌다. 그래서 사람들이랑 연을 끊고, 틈틈이 책을 읽었다. (문학은 아니었다ㅠㅠ) 나는 아들러식의 목적론(자기계발서)이나 프로이트식의 인과론(심리학, 정신분석학)으로 충분해지지 않았을 때, 푸코를 읽다가 뭔가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하는 게 맞나? 더 읽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어려웠다. 그것을 읽기 위해 읽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느껴졌다. 


어쨌든 푸코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리하면 인간의 삶이 복잡해져 더 이상은 권력의 개념을 빼앗아 가져올 수 있는(소유하거나 쟁취할 수 있는 종류의)것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거다. 권력이라는 것은 어떤 ‘장’안에서 중력처럼 내 몸 전체에 작용한다는 것. 어떤 상황에 맞닥 뜨렸을 때, 우리는 생각하던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어 인과 관계를 찾지만(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현실은 대체로 역학 관계라는 것. 내 몸—그(들)의 몸에 작용하는. (그러니 주로 인간에게 왜를 따져 묻기 전에 그가 어떤 힘과 힘들 사이에 위치해있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을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의 가끔은 소름끼쳤던 이면에 대해…)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내 몸 전체를 침범하는 신자유주의-미소지니-능력주의-여타 등등을 어떻게 무력화 시킬건 가. (모두 한꺼번에 무력화 시키려면 죽으면 되는 데, 당장은 죽을 수가 없으니까… 어디까지는 적응하고 어디까지는 반항해볼 건가.) 내 언어로 말하면 나를 다 내어주지 않은 채 나를 어디까지 보존할 건가. 훼손되어 버린 나를 어느 수준까지 복구 시킬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 장안에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완전히 그것들을 무력화 시킬 수는 없지. 방법이 있을까? … 


… 당장은 모르니까 푸코를 읽어야 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내 시간과 가용한 자원이 활용하는 하에서. 그걸 읽고, 그걸로 써보는 거. 그리고 그걸 고민했다는 흔적들을 남겨두는 거. 훗날의 내가 이걸 보면서 기특해 하도록. 너는 니 삶을 통째로 그것들에게 다 내어주지는 않았어. 내가 그걸 끊임없이 따져 묻는 사람이라 나는 외롭지만,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런 몸이 되어 버렸으니까. 


음… 나는 그런 훈련을 하고 있다. 조금은 더 혹독하게 읽고 쓰는 훈련.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녁에 읽을 수 있을 만큼 낮 동안 무리하지 않고 일하고… (주경야독ㅋㅋㅋ)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쓰고. 나를 포섭하려드는 말들(그것은 내가 읽는 것들도 포함된다)에 나를 홀랑 다 맡겨버리지 않게 내 말과 내 해석과 나만의 각주를 다는 훈련. 미래의 나를 위해 물음표를 남겨두고, 또 미래의 내가 대답할 수 있었으면. 


현 시점에서 나에게 이상형이 있다면(음… 그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 자신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것으로 오로지 그것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삶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 (그렇다… 고백한다… 나는 푸코를 좋아한다… 그는 나를 좋아할 리가 없는 데… 억울하다… 그래서 이 고백은 오늘만 하고 말 것이다 ㅋㅋㅋㅋ)


나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나여, 50살에 만나자.



요컨대 행복의 윤리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동성, 나아가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면서도 그에 지치지 않고 또 하나의 도약을 시도하는 용기, 이러한 받아들임과 행함의 반복을 거듭하는 충실한 인내와 격렬한 운동성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음이라는 이 상태, 이 상태가 지속되도록 하는 온갖 노력, 이 찰나의 사건들은 모두 행복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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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9-20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직 읽기 전 ㅋㅋㅋㅋ 책 링크 좀 ㅋㅋㅋㅋ 해주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9-20 11: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일단 하트 누름 아직 읽기 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0 11:32   좋아요 0 | URL
앗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또 긁붙에 집중하느라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책을 안 넣으셨네요. 책 좀!!!! 넣으시고요.

정희진 선생님 강의 갔을 때, 정확히 주제가 생각은 안 나고요. 아무튼 그 말도 맥락에는 없던 말이었는데요.
여성들(구체적으로 여성 노인)만의 책읽기 플러스 여행 모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밑에서 다섯번째 문단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저도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에는 열심히 일해야겠지만요. 일을, 밥 먹을 정도로 하면서, 남은 시간에 전투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많은 시간 여행하기를.... 꿈꿔봅니다. 푸코 공부 마치면 연락 좀 주세요, 번호는 010-***1-**1*입니다.

공쟝쟝 2022-09-20 11:50   좋아요 0 | URL
아, 밥돌리느라 책을... ㅋㅋㅋㅋㅋㅋㅋ 안넣었네 방금 넣었습니다..

공쟝쟝 2022-09-20 12: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려면 체력도 좀 보완을 해야하고요, 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친구!!를 사귀어야하겠지용?ㅋㅋㅋ 할일이 많습니다.
질문을 멈추지 않으면서 명랑하게 잘 살기!! 푸코 공부는 당분간 마칠 수 없습니다… 그는 나와함께 갈 동반자… 대머리…

수이 2022-09-2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계속 쉰 이야기 하셔서 쟝쟝님 쉰 진짜 어떨지 궁금합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2-09-20 12:00   좋아요 1 | URL
그러려면 일단 비타와 러브레터를 많이 써야합니다…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0 12:05   좋아요 1 | URL
얼레리꼴레리 💕💕💕

초원 2022-09-20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치지 않도록 혹은 지치도록 글을 쓰는 공쟝쟝 님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쉰을 준비하는 모습도 좋아보입니다. 그걸 못해 여즉 헤매고 있는 사람이라 꼭 성공하시길 바라며 ....읽은 흔적 한번 남겨봅니다.

공쟝쟝 2022-09-20 15:1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원님, (방금 서재 컨닝하고 왔어요!) 헤매시다뇨.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 분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이미 성공하신 분!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하냐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건 걸 합니다....... 읽지 않고 글만 써 대는 세상에 읽은 티를 내는 짓(찡긋-) 돈안되는 나의 물음표를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 (샤라랑~)

다락방 2022-09-20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옳지, 잘 읽는다, 잘 읽고 잘 쓴다. 이 책 읽고 쓸 거 많을 것 같지요? 후훗. 좋은 책은 사람을 글 쓰게 만든다..

공쟝쟝 2022-09-20 15:17   좋아요 0 | URL
아.................... 살기 싫다가도 살고 싶어지는 ................공부의 기쁨이여라... ㅜㅜ

책읽는나무 2022-09-20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얘기 나왔을 때 밑줄 그으면서 저도 공쟝님 생각했어요. 저는 글이 알듯말듯 어려워서 공쟝님께 설명해 달라고 물어보려다...ㅋㅋㅋ 한 번 기다려보자!!!
기다렸는데..역시!!^^
근데 공쟝님의 글도 제겐 좀 어렵네요?ㅋㅋㅋ
근데 공쟝님의 사유는 조금 읽혀서 푸코 책이 더 궁금해지긴 합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하면서요^^
앞으로 좀 더 푸코에 대해서 계속 써 주세요.
공부 좀 더 하고, 좀 더 많이 친근해졌을 때...
그때 푸코를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더 친근하게 만들어 주세요~ㅋㅋ

공쟝쟝 2022-09-20 17:38   좋아요 1 | URL
푸코 하면 쟝쟝 떠올리는 어떤 시냅스를 구조화해버린 나다 🤣🤣🤣🤣🤣 푸코 너 알라딘에서는 나땜에 유명하다 아냐 모르냐?

난티나무 2022-09-20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오 지금 당장 푸코 책을 펼치고 싶은 마음 들게 하는 글!!!!!!!

공쟝쟝 2022-09-21 10:32   좋아요 0 | URL
읽는다고 읽는 것이 아니랑께요... 그거슨 글씨.. 그저 글씨일 뿐...

난티나무 2022-09-23 18:53   좋아요 1 | URL
저 푸코 책 펼쳤어요!!!! 당장은 아니고 담날이었지만 어쨌든 이 글이 기폭제가 되엇따!!!!
심지어 읽었어요!!!! ㅋㅋㅋ 이거 뭐야 심지어 읽었어요 라니 ㅋㅋㅋㅋ
와 근데 푸코… 세 글자가 떠오르더라고요. 말 장 난 …. ㅎㅎㅎ 장난 아니구나….

공쟝쟝 2022-09-23 20:02   좋아요 0 | URL
천재 난티님 만의 푸코 해석법 기다리겠습니다😝

2022-12-08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09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Philos Feminism 8
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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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어디까지 아는 지는 써봐야 안다고 했다. 이번 독후감은 책을 펼치지 않고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를 써보자. 감정 각본, 생명 정치 + 선택… 키워드는 이 정도인데 아마 다 못쓸 것이다. 


지금은 휴머니즘(의 오용)을 비웃는 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냐고? 그건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거다. 자, 여기까지는 하나 마나 한 소리.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당연히 단백질로 이루어져있다. 즉 마음은 따로 떼내어진 심장이나 두뇌가 아니라 몸이다. 경험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내 마음은 내 몸이다. 내 마음을 속이지 않으려면, 내 몸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 (물론 의식하고 속일 수는 있다. 그건 기술이지.) 어쨌든 내 마음을 가장 잘 속이는 것은 나 자신이고 나를 가장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이다. 


당연히 내 몸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은 내 몸의 일부인 뇌의 특정 부분을 조금 운영하는 작용일 뿐이지만 (뇌과학은 나의 뇌의 대부분이 ‘생각’이 아니라 뇌 자신을 포함한 신체를 운용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성과 생각이란 그 과정에서의 부산물일 뿐이다.) 오만하게도 우리는 내 생각이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자기계발서가 신화라는 증거다. 그러나 나는 자기 계발서 좋아함). 여하튼. 내 마음과 내 몸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 처럼 내 이성과 감정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근대가 임의적으로 설정해둔 이분법이다. 대개 언어로 하는 생각(이성)을 몸의 말(감정)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어쩌면 부단히 극복해야하는 습관적 사고방식이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네가 소중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책에서는 사라 아메드 등의 정의를 인용하지만 오늘은 찾아보지 않고 내가 아는 만큼만 써보기로 했으니까 ㅋㅋㅋㅋ) 나에게 *감정*이란 내가 거쳐온 모든 경험들을 체현하고 있는 내 온 몸이 무의식까지 포함하여 순간적으로 상황을 해색해낸 반응이다. 나의 생각은 지식의 섭취 분량과 종류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생각 역시 감정의 일부이지만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이다. 내 몸은,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내 감정은 고유하다. 중요하다. 소중하다. 


나는 내 몸을 내 감정을 나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내게 그것은 ‘노력’해야하는 종류의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몸(얼굴과 표정)을 알 수 없는 가상공간 속의 언어들은 그것이 언어(글씨)일 뿐이라서 의식적으로 기만할 수 있기에 위험하다. 자신의 감정을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것을 속이는 글을 쓸 수도 있다. (👉🏻 이것은 그냥. 내가 글을 쓰면서 해보는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글들을 올려두는 것이 가끔 나를 대단히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가 믿고 안도하는 것은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을 거라는 거다ㅋㅋㅋ 나는 글을 통해서 상대방을 추측해보고 파악해 보려고 하는 것을 이제 제법 멈췄다. 그러니까 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뿐. 내가 그런 것 처럼. 또 믿는 것 하나는 2022년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글을 읽지 않는다는 것. 


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의 밀도를 높여갈 수록 타인을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물론 너의 몸은 다른 모습의 다른 삶을 살아온 나와는 다른 물질적인 실체이겠지만, 원리는 같다. 내 감정을 소중하게 대하고, 내 감정만큼 너의 감정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십계명에 나와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쨌든 ‘네 이웃을’ 앞에 ‘네 몸과 같이’ 이므로 나는 내 몸을 더 잘 돌볼 필요가 있다. 그런 윤리로 세상을 대하려면 어쩌면 은둔생활이 필수고, 박애보다는 편애가 편하여… 나는 이렇게 된 것인가.



1.


임신중지. 부제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다. 당연히 감정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 책에서 ‘감정 각본’이라는 말이 매우 흥미로웠다. 재생산에 얽힌 인간들의 감정이란 말이지🤔 나의 흥미는 제외하고 또 이 역시 내가 이해한 만큼만 써보자. 


번역자는 낙태를 ‘임신중지’라고 번역했다. (난 임신중단 쪽이 좀 더 좋은 것 같다) ‘낙태’라는 언어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가 유발하는 감정들을 떨쳐내기 위함이었음을 짐작해본다. 아주 건조하게 말하면 ‘임신’이란 이성애 삽입 섹스의 결과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정자를 여성의 몸에 넣은 남성을 제외한 타인들이 더군다나 국가가 거기에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만약 국가가 내가 임신의 결과로 낳은 아이를 약 95%정도 책임지고 돌본다면, 나 역시도 그런 국가의 돌봄의 산물이라면 예외다. (국가에 가족을 대입해서 넣어보자. 이것이 한국 사회의 웃픈 현실이다.)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관리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효율/합리적’으로 국가를 운영해야한다고 믿는 가부장주의적 무의식을 저변에 깔아둔 사회는 ‘낙태’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유포하고, 임신중지 여성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특정한 감정을 느껴야할 것 같은 상황에 몰린다. (/법- 규범/ 이부분은 잘 모르겠다 건너 뛰기/ 수치감. 대략 규범에서 벗어난 개인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인데. 이것도 기억 안남. 건너 뜀.) 



2.


임신중지에 대해 ‘수치주기’를 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침묵한다. 내 생각에 사회가 세팅한 수치감을 느끼게 되는 것 보다는 ‘수치주기’에 따르는 작용으로 ‘침묵’의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문제적인 듯 하다. 임신중지는 여성의 1/3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일인데도 당사자 여성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임시중지법’의 논쟁이 오고가는 공적 담론이 펼쳐지는 자리인데(이 책은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 토론이 인용되는 데 재밌고 빡친다. 토니 애벗 입을 때리고 싶다. 역시 젠더는 정치의 최종 심급이 맞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절반인 남자를 설득해야한다. 임신을 경험할 일도 경험할 수도 없는 세상의 절반 남자(…국가 역시 남자들이 만들었다)들은 여성들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지들 입맛에 맛는 감정만 을 취사 선택한다. 


그들에게 임신중단을 좋아하는 여성은 없다. 기구한 팔자 때문에 (미래 혹은 현재의) ‘좋은’ 엄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임신 중단을 선택하는 애통한 여성!!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런 연민과 동정에의 호소는 힘이 세서 실제로 법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임신중단이 공적인 자리에서 논의될 때 사용해 온 이 전략들은 ‘모성’이라는 (남자들이 원하는) 여성성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더욱더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즉, 임신중지법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선택한 동정과 연민에의 호소는 역설적으로 여성의 임신중단을 더욱더 수치스럽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 각본,의 강화. 권력(자본)은 이제 법과 처벌이 아닌 내면화된 규범과 담론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전염시키는 것, 감정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특정한 감정 만을 지지적으로 수용하는 것, 감정(몸)을 이성(생각)과 분리시키는 것은 중요해진다. 



3.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은, 그것에 대해 개별의 몸들이 느끼고 감각하는 감정은, 그 남자들이 말하고 받아들이는 그것과 같은 것인가? (물론 감정은 사회의 작동 방식과 따로 떨어져 갈 수 없지만, 동시에 개인의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 확실히 아니다! 아니다. 아니라는 걸 말해야 하고 더 많이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남자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정을 호소하는 말을 하는 여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겠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살려면 말해야 함.  


하여 지난 날 고통을 강조하며 연민에 호소하는 방식을 전략으로 선택한 임신중단의 ‘감정’ 정치란 양날의 검이 되고만 것이다. 임신중지만 그러겠나. 나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전시하는 전략. 가시적인 성공은 쉽지만 재빨리 나의 힘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더 거센 후폭풍이 반드시 따른다. 아니나 다를까 몇달 전 미국의 임신중지 법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 되었다. 명백히 퇴행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게 *연민*이란 얼마나 주기도, 거두기도 쉬운 감정인지. 나는 연민의 대상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숭배나 추앙의 대상도.)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는 좀 연민한다. 약한 주제에 도움도 구할 줄 모르는 이렇게 생겨먹은 몸으로 사는 것은 좀 짜증스러운 일이다. 나는 도움을 좀 구할 줄 알아야 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해야해. 어떻게? 모르겠다. 노력하자. 


아무튼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가까스로 성취한 법도 폐지되고 이러는 걸 보니 그런 생각도 든다. 동정심으로 안먹히면 원칙은 하나 인가. 결국 힘 결국 힘? 결국? 여자들아 어떻게 힘을 가질래? 


(그러니까 이 ‘감정의 정치’라는 것 말이다. 고통마저도 취사 ‘선택’하는 이 ‘정치적인’ 감정에 대한 ‘정치적인’ 판단 말이다. 여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할 것 같다. 감정도 공부해야하고 정치도 공부해야하고 생명권력도 공부해야함. 읽을 것- 사라 아메드, 한나 아렌트, 미셸 푸코. 한숨… 그런데 왜? 안해도 된다. 누가 시킨적 없다. 하지 말자.ㅋㅋㅋㅋ 하지만 50살의 나한테 약속했는 뎅 ㅜ_ㅜ, 울프 선생님?)



4.


대부분의 나라에서 임신중지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고. 그 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여성 자신의 안녕과 신체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페미니즘적 담론은 실종 되고 말았다. 그렇게 임신중단을 ‘선택’한다는 것이 마치 모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처럼 등치된 채 (정말 각자 좋을대로의 해석 아닌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마치 현대의 여성들이 자기가 스스로 모성을 ‘선택’ 한 것처럼 여겨져보이게 한다.  


- 여: 나 혼자 낳았니? 나만 낳았어? / 남:네가 원해서 낳았잖아! 내가 강제로 낳자고 했니? 

그러나 그것은 정말 ‘선택’인가? 선택일까. 선택. 


- Girls can do anything!

선택. 소녀들이 정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의 끝인가? 아니다. 절대. 그것은 시작일 수 있으나 그대로 두면 백래시된다. 


임신중단을 둘러싼 ‘선택’이라는 수사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의 각본들을 추적한 책이다. 생각할 것 들이 많다. 

이 책의 마지막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끝난다. 


“(250) *선택*에 특정한 감정을 섞으면, 엄격하고 규범적인 정체성(모성으로서의 여성성)이 자유라는 환영으로 희석된다. 오늘 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비쳐야한다. 그래야 규제가 유지된다. 이 책에서 보았듯, 반임신중지 운동 역시 ‘정보를 갖춘’ 선택이라든지 ‘진정한 선택’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정책의 목표는 (물론 이게 바로 그 효과이기도 한데)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오히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게끔 방지하는 정책*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4B란, *선택*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넘어설 수 없는 젊은 여자들이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성애를 포기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4B인가? 아니다. 나는 비자발적 어쩌다 보니 4B인 것이다. ㅋㅋㅋㅋ 절대 이 프레임을 낙후시키기 위한 대의적 실천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생겨 먹어버린 실존적 선택임. 나는 선택의 프레임에 포섭되지 않은 존재다, 으하하하하! (짠내난다,,,)

 

현 시점에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나의 고.유.한. 감정을 소중하게 대하자. 미디어와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에 쉽게 전염되지 말자. 나 자신한테 잘 물어봐주자. 이거 니 감정 맞아? 아, 유튜브 끊어야하나. 아, 넷플릭스 끊어야하나. 그러나 나는 세속의 인간. ㅋㅋㅋㅋ 별 수 없다. 희진샘이 알려주신대로 시간내서 공부나 하자. 하지만 오늘은 이거 쓰고 일 해야 함. 내일은 유튜브 만들고.. 쩜쩜... 응... 내 연휴 다갔네? 근데... 다 쓰고 나니 역시 내가 천재인 것 같다. 정말 나만 몰랐네? 또 나만 몰랐어 ㅋㅋㅋㅋ



덧, 

* 바뀌면 좋겠는 번역들: 임신중단 주체의 탈자연화? / 모성적 무아성 규범? / 태아적 모성… 태아적 모성… 

* 책 읽는 도중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최초 여성총리였던 줄리아 길라드의 임기기간을 다룬 <강력한 여성 지도자>라는 영화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m5QAwJJ)를 보고 왔는 데, 거기에서 토니 애벗이 나온다. (저메인 그리어도 나오는 데… 내가 아는 그 저메인 그리어 맞는 것 같은 데… 저메인 그리어 좀 이상함.) 줄리아 길라드로 여성혐오 정치하는 수준이 아주 이준석이 보고 배운 것 같았는 데, 그 자식 결국 총리되었다. 딸 셋을 가진 아빠라면서 아주 입으로 자꾸 똥을 싸는 데, 이 책에서도 임신중지에 관한 그지 같은 똥을 많이 싸 놓았다. 아주 나쁜 새끼다. 아스팔트에 얼굴 문대고 싶다. 이렇게 욕을 해줘야 내 감정이 좋아질 것 같다. 푸하하. 

선택으로 환원된 정치는 근본적으로 개별화돼 있다. 그런 정치가 참조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자율적 주체란 허구일 뿐이다.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자발적인 선택의 주체는 철저하게 여성화된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에 완전히 의존하며, 이로써 유지된다. ‘여성이 그런 노동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 선택했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라는 가정을 되풀이 하는 와중에 경제적/정치적/사회경제적 맥락은 제거된다. - P250

오늘날 선택의 주체는, 이를테면 여성이 무한한 선택지를 가졌고,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모성을 선택한다고 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여기서 그 주체는 여성의 재생산적 신체라는 차원에서, 선택에 깃든 긴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균형은 꺠지기 쉽다. ‘자율성‘과 ‘선택‘이 있는 곳에 ‘제약조건‘과 ‘의존‘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정치적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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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종(種)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어.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5-06 21:06 
    1.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인 <빈 옷장>을 읽으려다가 또 실패했다. 작가의 낙태 경험으로 시작하는 책의 첫 페이지는 자궁에 막대기를 집어넣는 묘사가 있다. 에르노의 <사건>을 온 얼굴을 찌푸리면서 읽어버리고 다시는 읽지 않고 싶다 냅다 내던졌던 기억이 난다. 독서 경험은 강렬해서 그걸 지우고자 <레벤느망>(은 <사건>을 영화한 작품이다)을 꾸역꾸역 다 보았는데… 그 이미지들은 더 괴로웠다. 프랑스 영화는 역시 좀
  2. ‘젠더’가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는 현실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2-18 18:01 
    어제는 정희진처럼 쓰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5권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재독했다. 작년에 읽을 때는 ‘공부’에 대한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부분에 꽂혀서 읽었는 데, 이번에는 논쟁의 구도나 지식의 전제 같은 부분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차피 또 읽을 거라서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다가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을 좀 적어두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님이 줄곧 주장해오신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미소지니misogyny로 바꿔
 
 
미미 2022-09-10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출산률 세계에서 최하위라는데 이것이야말로 거짓없는 몸의 반응이겠죠? 이준석 같은 자들이 힘을 갖게 될수록 그래프는 가파르게 치고 내려가겠죠. 그리고 원래 천재는 자기가 천재인거 모르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10 16:38   좋아요 2 | URL
이 감정에 진심인 한녀들아! 사랑한다! ㅋㅋㅋㅋㅋ 아무리 미디어가 슈돌같은 거 틀어줘도 꿋꿋해라 ㅋㅋㅋㅋㅋ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 복잡한게 ㅋㅋㅋ 재생산에 진심인 이민자(난민과 인종문제관한 책을 우리 곧 읽게 되나요?)들이 있죠. 실제로 한국청년들이 원룸에서 코인으로 채굴하는 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육체노동 많이하고, 돌봄노동도 여성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하고요. 선진국의 난민 인종문제가 더는 한국에서도 남 일이 아닌 것 같음. 우리의 공부 더 심오해져야합니다! 미미도반님 ㅋㅋㅋ!!
(앗, 그럼 나 좀 천재인거 당분간 모른척 할게요 속닥속닥…)

등롱 2022-09-10 2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아적 모성!!! ㅋㅋㅋㅋㅋ 번역 바뀌면 좋겠는 용어들 적극 동의합니다 ㅎㅎㅎ

자기 자신의 감정과 언어를 알아가려면 그조차 공부를 해야하는 존재가 약자라니… 슬프지만 그래도 답은 독서와 공부네요, 하지만 공부는 힘들어도 재밌으니까…!
전 이 나이가 되면 이제 스스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요. 아직도 알아가고 공부해야할 게 너무 많아요!

공쟝쟝 2022-09-10 23:02   좋아요 1 | URL
앗! 등롱님의 댓글과도 상통하는 공부하는 기쁨에 대한 페이퍼들을 방금 제가 올렸네요?!?!!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를 돌보는 공부하는 약자가 가능성이고 상상력이지 않을까.
저 역시 제가 이나이 먹고 이렇게 머리털 뜯어가면서 책읽고 있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니 그렇게 해야만 사는 게 사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

얄라알라 2022-09-11 16:52   좋아요 2 | URL
저도 태아적 모성 원어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어요 .저는 실은 fetal이 훨씬 익숙한데 저자는 foetal motherhood라 쓰더라고요.
그런데 달리 번역한다면 어떤 용어가 가능할까요? 등롱님께서는 혹시 생각해보신 표현이 있으신지.. 조심스럽게 여쭈어봅니다^^

등롱 2022-09-12 12:05   좋아요 2 | URL
저는 아직 너무 잘 몰라서 표현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뭐뭐 적이라는 표현보다 더 적당한 단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념 번역이라는 게 정의와 맥락 모두를 아울러야하니 어렵긴 하지만요… 원어를 찾아볼 생각은 못했는데 얄라알라님 덕분에 원어를 알았네요!

공쟝쟝 2022-09-12 14:37   좋아요 2 | URL
제가 영어를 못해서 ㅋㅋㅋ ‘태아에 대한 모성‘(대체 그것이 있다는 것이냐? 왜?ㅋㅋㅋ) 정도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물론 말이 좀 길어지긴 하겠지만요. 아니면 왜 그렇게 번역했는 지라도 일러주면 좋았을 듯하고요. 하지만 저는 역자님을 매우 애정합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언어를 쓰는 공부가 될 수 밖에 없네요 페미니즘은.)
임신중지도. 임신중단!이 뭔가 제 어감상 더 좋더라고요. 임신한 상태를 중단 시키는 거니까. 중지는 좀 더 어렵게 느껴지게 해요. 암튼, 너무 좋은 책이라 번역이 더 안타깝네요 ㅜㅜ 우리는 참 좋은 독자들이다.

얄라알라 2022-09-1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3장 다 읽고, 막상 적으려니, 공쟝쟝님처럼 자신의 언어로 좌르르 자신감 넘치게 쓸 수 없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써봐야 하는 건 가 봐요. 제가 진짜 이해했는지...

<임신 중지>를 꼼꼼하게 다시 읽고 있으니, 어느 때보다 공쟝쟝님의 이번 페이퍼 내용이 쏙쏙 박힙니다. 읽지 않은 책을 다른 분이 쓴 리뷰로 읽는 것과, 내가 시간 들여서 고민해가며 읽은 책을 다른 공부마니아분께서 쓰신 글 읽는 게, 천지차이입니다.

즐거워요. 오늘 <임신중지>로 리뷰를 올려주신 공쟝쟝님, 감사드립니다!!!!

공쟝쟝 2022-09-12 14:39   좋아요 1 | URL
저 공부 마니아?!? ㅋㅋㅋㅋㅋㅋ
얄라님, 저도 고심해서 읽은 책을 공들여서 쓴 리뷰와 독후감을 볼 때 되게 뿌듯하고 좋아서 알라딘을 참 좋아해요!!!
내 언어로 써보는 것(올해들어서 엄두내기 시작한 듯)은 제가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는 증거인 것 도 같아서 기쁩니다.

얄라알라 2022-09-1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고 저도 공감백입니다.

˝나는 글을 통해서 상대방을 추측해보고 파악해 보려고 하는 것을 이제 제법 멈췄다. 그러니까 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뿐.˝- 공쟝쟝님 9월 10일 페이퍼에서 뽑은 문장들!!

공쟝쟝 2022-09-12 14:40   좋아요 1 | URL
수줍어서 도망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9-1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빌려놨는데.. ‘태아적 모성‘?? 대체 뭔가요? ㅎㅎ
감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말씀 맞는 것 같습니다. 약간 결이 다를 수도 있지만 <당신이 옳다>도 생각나네요. 그 감정이 어떤 것이든 느끼는 것이라면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친절한 비댓 링크 타고 왔습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2-09-14 17:3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여자들이 태아에 모성을 느낀다나봐요ㅋㅋㅋㅋ 남자들은 정자에 부성 느끼나봄 ㅋㅋㅋㅋ
앗,감정말구 선택요 ㅋㅋ 선택은 정치적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선택하는 주체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에 의미부여하지 맙시다 ㅋㅋㅋ
 

땀찍찍 흘리고 책장정리 샷을 찍고 난 후부터 오한이 온 것을 시작으로 발열 몸살 인후통 기침 가래(비체ㅋㅋ) 초 스피드로 넓게 잡으면 3박 4일 짧게 잡으면 72시간을 아주 스피디 하고 강렬하게 코로나 바이러스와 몸이 만나 융합ㅋㅋㅋ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하고 아주 상쾌하다. (아직 남은 비체들이 재채기로 튀어나오긴 하지만... 기침할 때 빼곤 안아프다) 한바탕 앓고 나니 가벼운 기분, 여러분 알아요?

 

대부분 잤고 깨어있을 동안에는 누워서 책 읽고 북플하고 다시 자고 약먹고 밥먹고 자고 (편했다 마음이) 일어나 밥먹고 약먹고 책읽다 잤다. 잠이 안오면 정희진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었고, 읽으면서 아파서 좋았다. 정희진 샘의 가장 띵문이라면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 아니겠나요? 코로나가 상처내고 있는 몸으로 정희진의 신간을 읽는 것이야 말로 진짜 앎에 가까워 지는 😮‍💨 무튼 ’의 다른 말은 아픔인 것을... 아픈 채로 알아가니까 죽을 것 같고 아주 좋았다.

 

“(19)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rebirth 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regeneration을 할 수 있을까.”

“(155) 융합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로지르기이며 앎의 변화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는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평생 확신해 왔던 자기 인식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간혹 지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낭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 시키지 않는다.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하는 앎.

 

아는 것은 힘이다혹은 세상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흔해 빠져 지구를 해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오랜 기간 나의 위치는 ... 나는 종종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는 데 (지금은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하지만) ... 많이 가르칠 필요 없는, 너무 무식하지는 않은 적당히 알 것 들만 알면 되는 그런 계급, 계층의 여자애였고, 나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공부란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을 스스로가 알아차려 주지 못했다. (공부를 탁월히 잘했다면 조금 달랐으려나?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의 포지션은 알아도 모르는 척이 미덕이었고, 아는 척은 비호감으로 찍히기 좋은 자질이었던 것 같다.

 

요 근래까지도 스스로 알고자 하는 용기를 과계몽이라면서 은근히 탓(물음표가 많은 나를 사람들은 속 시끄럽다며 좋아하지 않았다)했다. 몰랐으면 좋았을 걸하면서 운 적도 많다. 사실 대부분은 그 이유로 운다. 모르고 싶어... 엉엉... 하면서 운다. 무튼 살아오는 대부분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쓸 데가 없을까봐, 삶을 해칠까봐 두려웠다. 나는 너무 알고 싶은 데, 알수록 알면 알수록 외로워지니까. 내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으니까. 내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과 헤어지거나 다르게 살 용기까진 없었으니까. 음. 뭐. 그랬다.

 

그래서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이라는 문장은, 지식을 구하는 이들에게 태도의 전환의 촉구하는 이 문장이 주는 어떤 무거움은, =권력으로 작동하는 삶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와 닿는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나처럼 최선을 다해서 아는 것을 겁내온 사람보다는? (지금은 지적 오만을 떠는 것이 목표로 바뀌었을 만큼... 다 아는 척하면서 와구 와구 씹어 먹고 싶은 지적 허영의 결정체가 나다. 쿄쿄.) 얼렁얼렁 공부 잘해져서 가까운 미래의 나는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이 무겁게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은 그냥 모든 앎이, 다 통째로 새로워서, 거진 무분별함.

 

어쨌든 (분야를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는 일련의 것들로 한정한다면) 나의 지식은 그다지 공부를 하려 한다 거나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덕에 기성의 언어 오염이 덜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던 얄팍한 앎들이 그다지 깊지 않아, 나를 붙잡아 세우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지식을 섭취/생산하기 위한 *기존 앎의 폐기*는 상대적으로는 수월한 부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프게, 혹은 아파야 알게 되는 것들.

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할 말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수월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있고, 아프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대충 검색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 같은 정보들을 수월한 앎이라고 하고, 알았다고 느꼈던 것을 하나도 몰라지게 되어 버리는 순간을 아프게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자후자는 지적인 희열이나 쾌감과는 조금 멀다. 그 모름(혹은 몰랐음) 속에서 반성을 할 때도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떨 때도 있고, 나의 순진함을 탓할 때도 있고, 하염없이 겸손해질 때도 있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일상의 유지를 위해 합리화(부정)를 한다. 다시 말해 더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려면, 아는 걸 다 몰랐다는 걸 인정하고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생각해야하는 그런 앎을 섭취하는 것은 어쨌든 기운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기운도 없고 아프기도 싫어서 알기 싫었는데, 요즘엔 아프더라도 아는 쾌감을 알아버려서 (독학 변태의 탄생...) 뭔가 많이 바뀌어 가지고 지금의 난 모르고 싶은 것일 수록 어쭈? 더 알아봐?하는 식의 긁어파는 악취미를 갖게 된 것도 같은 데, 오늘 쓰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 

 


나에게 가장 아픈 앎을 가져다 준 첫 번째 책은 당연히 정희진이 쓴 <페미니즘의 도전>이었다. (뭐, 이에 관해서는 굳이 쓰지 않아도 다들 비슷하게 겪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서 가장 외롭게 읽었던 책은 <정희진처럼 읽기>였다. 아니, 읽고 난 뒤에 가장 외로워져 버린 책 이려나.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라는 문장 하나로 정희진은 가해자들을 이해하려는 나의 치열한 노력과 지난한 시도들을 가뿐히 중단 시켜버렸고, 난 덕분에 자유로워졌다. 이미 이별했지만 좀처럼 떠나오지 못하던 많은 것들과 더 단호하게 이별했고, 아주 가끔 인생이 무거워질 때 알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것만 빼면 대체로 나 자신이 잘사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경험은 뭐랄까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기 전에 바늘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아픔 같은 거라서... 검은 피 좀 보고 나니까 트름 나오고 방구 뀌고 그럴 수 있게 되어서... 손 따는 거 이제 안 무섭다. 그러므로, 아프게 아는 맛을 두 번 알려주신 정희진 선생님.

 

그렇다 하더라도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을 때, 나는 외로웠다. 너무 너무 외로웠다. 소스라치게 외로웠다. 그 때 처음으로 진짜 외로움이 뭔지 알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이 책을 권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그 책의 문장들을 이야기한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너무 너무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는 데, 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단.한.명.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방금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거 읽고 쓴 독후감에 당시 모르는 사람1 알라딘 셀럽 다락방이 오셔서 홀로 외로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했습니다. 푸하하 인생은 정말인지 예측불허) 세상에 정희진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만 존재하는 것 처럼도 느껴지는 외로운 독서였다. 독서의 외로움. 선생님 어쩌라고요. 그러니까 어쩌라고요. 나는 이걸 알고 이제 그냥 살면 되나요? 나는 너무 너무 외로웠지만 외롭더라도 정희진 처럼 읽어야 (어쨌든 이걸 아는 정희진은 살.고.는.있으니까) 다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심오한가? 아무튼 난 심오했다. 살았고. 읽었다.  

 


세 번째로 동급에 올려놓고 싶어진 이 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읽으면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 아프다는 건 감각 하나하나가 날 서는 것이라 약 없이 견뎠던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첫날 밤은 들숨과 날숨에도 세포가 공기에 쓸리는 것 같았다. 바이러스 덕에 내게 피부라는 얇은 막이 둘러쳐져 있어,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 내부가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형체를 갖춘 채 공기와 접촉하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세상과의 경계면을 고통을 통해 선연히 느끼다니(크으-) 이것이 바로 몸으로 깨우친 앎ㅋ이올시다.ㅋ


 “(167) 한 가지 시각으로는 문제를 파악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아니, ‘해결’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해결인가? 피해의 기억은 투쟁을 통해 재해석할 수 있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나마 자기 갱신만이 해결에 가까울 뿐이다.

“(171)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에서 시작한다.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이다. 크게 두가지 방식이 있따. 개념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개념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로서 융합이다.

“(222) 객관성은 중립의 대명사다. 그래서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너의 객관’이 ‘내겐 폭력’인 경우가 많다. 객관은 스스로 선재先在한다고 여겨지지만, *상황적 지식*은 지식이 만들어진 조건을 파고든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 그 과정을 알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만사에 적용되는 지식은 없다.

아프게 알게 되는 앎. 머리로 수월하게 깨우치는 지식이 아니라 온몸으로 상황으로 삶으로 겪어가면서 배우게 되는 종류의 앎들. 기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내게 맞는 언어를 절박하게 찾다가 발견해내는 내 숨을 틔워주는 문장들.

 

이번에 앓으면서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먼저는 분별없는 인류로서 언제 한번은 바이러스와 융합·공존(?)해야 하는 데, 시의 적절 맞춤 하게 바이러스가 찾아와주셔서(?) 마음 편히 앓았기 때문이었고


다음은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읽으면서 앓았기 때문인 건데.

읽으면서 이런 것들을 새삼 다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 년동안 정희진을 읽으면서 아프고 외롭던 시간을 지나, 그가 써내는 글들과 소개한 책들을 꾸준히 따라 읽고 쓴 덕에 획득하게 된 어떤 이해력과 언어가 지금의 나에게 있다는 것.


내가 글을 쓰게(공부하게) 하는 고통을 맛 보여준 삶의 경험들이 있다는 것. 걔네들은 이제 맞춤한 글자들만 발견하면 되겠다는 듯 자신들이 재해석 될 날(물론 나는 공부를 해야한닼ㅋ)을 기다리며 일종의 자원으로 고스란히 내 몸과 무의식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함께 읽고, 쓰며, 공부해 온 알라딘의 <여성주의 책 읽기>를 통해서 만난함께 융합을 이야기 해볼 수 있는 도반들이 있다는 것ㅠㅠㅠㅠㅠㅠㅠㅠ (<정희진 처럼 읽기>를 읽을 때 제가 얼마나 외로웠던가요........여러분......... 크흑흑흑 )

 

나는 그래서

웃으면서 ^^

앓았다고 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 증보판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26)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그래도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는 사람들에게, 단 한 사람일지도 나를 격려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변화한 성 평등의 현실 앞에, 이 체제에서도 세상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수 많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심리적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감사는 예절이나 긍정적 태도,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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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08-14 10: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궁 쟝님 이제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지만 고생 많으셨어요. 몸에 좋은 것 좀 챙겨드시고 쉬엄쉬엄 읽으세요 ^^

저는 <페미니즘의 도전>보다 <정희진처럼 읽기>를 먼저 읽었는데 제 책읽기에 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

이번 책 얼른 읽고 싶네요 (라고 말만 며칠째)

공쟝쟝 2022-08-14 10:34   좋아요 3 | URL
자가격리 심심해요 ㅠㅠ 그래도 병(?)이어서 아푸니까 난잡하고 게걸스럽게 읽기는 중단 중입니다 ㅋㅋㅋ
<정.읽>이 수하님께도 전환점이었다니, 아아 좋아요, 좋네요 🥲 희진샘 자기 글 읽는 독자 적을 거라고 겸손하시지만 독자 가성비(?)만큼은 정말 최고이신 복받으신 분.
놀라울 정도로 이젠 외롭지만 외롭지 않아요.

라파엘 2022-08-14 12: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쟝님의 서재는 전체 글들이 마치 한 편의 성장서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ㅎㅎ
몸도 마음도 건강이 나아지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후유증이 없도록, 무리하지 마시고 평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

공쟝쟝 2022-08-15 20:22   좋아요 1 | URL
마흔이 다 되어가는 데... 여전히 성장 중 인 게 좀 남사스럽긴 합니다만 ^^;; 난 나니까~

바람돌이 2022-08-14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삶과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경험이 대학입학 광주 이영희선생님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였어요. 쟝쟝님에 비하면 올드하죠. ㅎㅎ
이 때의 경험은 기존의 내 삶과 가치관과 앎의 체계 전체를 부정하는것이어서 충격이 장난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때의 경험은 이후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걸 좀 더 쉽게 할수 있게 했달까 그런게 좀 있는거 같아요. 어쨌든 그 이후로도 쭉 이어진 다른 생각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온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테고요.
쟝쟝님 나아간다고 자만하지 마시고 휴유증도 있어요. 저는 코로나 낫고 난 이후 한동안 체력 저하로 허덕였습니다. 우리 정신만큼 몸도 소중하니까 아껴주자고요. ^^

공쟝쟝 2022-08-15 20:27   좋아요 1 | URL
전환시대의 논리....는 80년대 책 아닌가요?.... (바람돌이님 연배가?;;;?) 하하 저도 대학 시절에 빨갱빨갱한 처음보고 참 많이 놀라고 그랬는 데요, 그래도 그건 머리로만 충격이었는 지 그렇게까지 막 외롭고 힘들고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거덩요.(사실은 나 이만큼 똑똑한 사람이야~ 이러면서 즐겼던 것 같기도 해요...) 물론 과거에 목숨 걸고 읽던 분들 만큼은 아녔겠지만, 페미니즘 책읽기는 읽기 시작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관계와 사랑에 대한 개념을 다 땅에 처박아야한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끼게 되는 그런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체력 저하라... 전 미각 상실로 인한 입맛 저하 ㅜㅜ... 꾸역꾸역 챙겨먹긴 합니다만.. 확실히..ㅣㅣㅣ 후유증 후유증 명심하겠습니다 ^^

잠자냥 2022-08-14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 자를 넘어 이 만자 이상 긴 글 쓴 걸 보니 몸이 아픈 건 다 나았군요?! 자, 이제 공부를 위해 아파봅시다요. 융합하는 공부로 아픈 몸을 겪고 변태의 과정으로 고고!

공쟝쟝 2022-08-15 20:28   좋아요 1 | URL
변태 변태 변태합시다. 비 또 쏟아지려는 모양예요. 자냥 남은 휴일 잘 쉬시고 내일도 무사 출근 하소서!

persona 2022-08-14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헐… 조금 더 충분히 쉬셔서 비체들과 완전히 이별하시길 바랄게요. 고생하셨어요!

공쟝쟝 2022-08-15 20:30   좋아요 1 | URL
네, 오늘까진 남들 쉬는 것 처럼 거의 쉬면서 슬렁슬렁 일했습니다. 완전이별 하고 미각과 후각이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ㅜㅜㅜ 일단 저도 걸렸다능.. 펄손아님 아직이죠?ㅠㅠ 끝까지 살아남아라!

persona 2022-08-15 20:35   좋아요 1 | URL
에고… 얼른 후각과 미각이 돌아오길 바랄게요. 파이팅이요!
저는 코로나보다도 요즘 계속 더위먹고 아무거나 주워먹고 토하고 설사하고 자고의 연속입니다. ㅋㅋㅋ 매해 어떻게 역대급 더위를 갱신하는지 목에만 땀띠 났었는데 올해는 온 몸 땀띠예요.

공쟝쟝 2022-08-15 20:48   좋아요 0 | URL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저도 여름은 체력적으로 항상 힘들었던 것 같아요 ㅜㅜㅜ 자면서 더 지치는? ㅋㅋㅋㅋㅋ 큰물 피해라도 좀 피해가시기를...ㅜㅜ 힝..ㅜㅜ 물 많이 마셔요... 더위 그만먹구 ㅠㅠㅠ

persona 2022-08-15 20:50   좋아요 1 | URL
입추도 지났고 조금만 지나면 더 괜찮아지겠죠. 열대야 줄어든 건 다행인 것 같아요. ㅎㅎ 여튼 힘냅시다. 잘 먹고 잘 자고요. 파이팅!!

단발머리 2022-08-14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 창조로서의 융합(171쪽)

... 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더 아련하게 무언가, 무엇인가 멀어지는 걸 느낍니다. 오래오래, 쟝님의 도반이 되고 싶어요.
코로나 후에 몸이 가벼워진다는 내 말, 맞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다 나을 때까지 무리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2-08-15 20:35   좋아요 0 | URL
확실한 건 이 책에서 ‘융합‘이라는 단어 만큼은 희진샘이 확실히 재해석 해체 해버리시고, 의미를 생산해버리고 다양화해버리시고, 창조로서 융합해버리신 듯 해요 ㅋㅋㅋ
읽는 건 어떻게든 독서 목록들 베껴가며 따라 읽어볼 수 있겠는 데, 사유나- 쓰기- 만큼은 아아, 희진 샘이 아무리 엑기스 쏙쏙 뽑아 일케 잘 알려주셔도 따라서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내지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예요. 오래오래 제 도반이 되어주실거죠?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미리미리 감사합니다🙏🙏

등롱 2022-08-15 0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얼른 완전한 쾌유하시기를 빕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저도 정말 외롭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요 ^^ 왜 그리 독서의 기록도 외롭고 쓸쓸하고 저도 그렇게 혼자서 나누지도 못하고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요새 계속해서 북플 타임라인에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가 올라오는데 저도 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쟝쟝 2022-08-15 20:45   좋아요 2 | URL
여성주의 읽기의 숨은 새멤버 등롱님! 역시도 외롭게 읽으셨구나 ㅜ,,ㅠ 아... 정말............ 외로워서 몸에 발진생길 거 같은 외로움이었........... 그러게요 왜 그렇게 혼자서 나누지도 못하고........... ㅜㅜ ㅜㅜㅜ ... 그런데........ 그렇잖아요 ㅜㅜㅜㅜㅜ 그냥 나눌 수가 없는 게 ... 그거 읽고 외로워지는 것 보다, 그거 나눠보려다가 하나도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그 괴로움이 ㅠㅠㅠㅠㅠ 어떤 상처는 개별적이고 내밀하고 너무너무 난해한 거라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나 나누는 것 조차도 상상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ㅜㅜ 뭐 전 이제 인생 자체가 그런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서 읽어보세요. 상처에는 마데카솔 보다 역시 공부가 짱 입니다.

등롱 2022-08-17 17:48   좋아요 1 | URL
바로 사러 갑니다 ㅎㅎㅎㅎㅎ 상처에는 마데카솔보다 공부가 짱! 이거 명언이에요!!!

그레이스 2022-08-15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 괜찮으신지...
속히 나아지시길!

공쟝쟝 2022-08-15 20:46   좋아요 1 | URL
네 너무 괜찮은 데. 제가 사랑하는 커피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요 ㅜ_ㅜ
그것만 빼면 속히 다 나아버렸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입니다...^^

시에나 2022-09-16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처럼 읽기를 처음 읽고 바로 정희진 선생님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책 읽고 일주일 아팠어요. ㅠㅠ 모든 문장이 어찌나 저를 난도질하던지....


공쟝쟝 2022-09-16 17:19   좋아요 0 | URL
마이 아프셨쥬?.... 전 정희진샘을 한번도 미워한 적이 없지만 ㅜ_ㅜ (선생님을 미워할 수는 없쥬. 오로지 아프게 알 뿐.)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수 있습니다. 난도질.... 세상이 난도질한 상처에 빨간약 발라주신 분.. 정 희 진.... 저는.. 좀 마니 쓰립디다...ㅋㅋ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