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 로맨스에서 돌보는 마음까지,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하여 앳(at) 시리즈 3
신성아 지음 / 마티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오늘의 잘한 일:
이 책을 이웃의 글에서 발견한 일.
책을 공유한 문장에 몸을 떨고 당장 도서관에 가서 펴서 읽은 일.
그리고 이 책을 돌보면서, 초조해하면서, 눈치 보면서 읽는(었던) 이들에게 선물한 일.
우리에겐 내 삶을 억압하는 말들을 찢어낼, 삶과 일상과 사유에서 건져올린, 더 많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필요해요. 

언니, 안 읽고 뭐해요? 안 쓰고 뭐해요?



“(100) 그는 알아야 했다. 그를 비롯해 이 시대 남자들의 돌봄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 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소도시 변두리에 느닷없이 들어선, 먼 나라의 르네상스 양식을 조야하게 흉내 낸 왕궁 예식장 같은 키치다. 책에서 본 성평등을 흉내 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간해방을 추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가부장제인 가짜 성곽이다. 또한 그것은 밀란 쿤데라의 키치, 똥을 부정하다 못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태도로서의 키치다. 돌봄의 현장은 어디나 처절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똥기저귀처럼 추하다. 그런데 이 체험에 동참하지 않고 부정하며 아름다운 환상으로 돌봄의 정의를 새로 내리는 한국식 라떼파파의 태도가 바로 키치다. 독박 육아의 현실을 부정하고 말뿐인 가사분담, 공동육아를 앞세우며 좋은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으로 행세하려는 허위가 바로 키치다. 그들은 돌봄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끝내 모른다. 이 키치적 돌봄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라는 키치의 특성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모성이 타인이 만든 환상이라면 부성은 스스로 만든 키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여전히 이해하고 싶다. 용서나 체념은 답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남편에 비해 부당할 정도로 과도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또 그가 잘한 것도 아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남자가 자행하는 ‘남녀차별’을 철폐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 때마다 스스럼없이 기대온 바로 그 어깨에 언제쯤 정치적 잣대도 나란히 드리울 수 있을까? 아포리아다.”


그는 알아야 했다. 그를 비롯해 이 시대 남자들의 돌봄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 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소도시 변두리에 느닷없이 들어선, 먼 나라의 르네상스 양식을 조야하게 흉내 낸 왕궁 예식장 같은 키치다. 책에서 본 성평등을 흉내 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인간해방을 추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가부장제인 가짜 성곽이다. 또한 그것은 밀란 쿤데라의 키치, 똥을 부정하다 못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태도로서의 키치다. 돌봄의 현장은 어디나 처절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똥기저귀처럼 추하다. 그런데 이 체험에 동참하지 않고 부정하며 아름다운 환상으로 돌봄의 정의를 새로 내리는 한국식 라떼파파의 태도가 바로 키치다 - P100

모성이 타인이 만든 환상이라면 부성은 스스로 만든 키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여전히 이해하고 싶다. 용서나 체념은 답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남편에 비해 부당할 정도로 과도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또 그가 잘한 것도 아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남자가 자행하는 ‘남녀차별’을 철폐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 때마다 스스럼없이 기대온 바로 그 어깨에 언제쯤 정치적 잣대도 나란히 드리울 수 있을까? 아포리아다 - P10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4-03-20 14: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맹이 없는 돌봄이라도, 그런 돌봄의 시늉이라도 내는 남성이라도,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공쟝쟝 2024-03-21 10:29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곰곰 생각해보아요. 시늉과 위악과 선의와 의도. 구조와 언어. ☺️🥹

자목련 2024-03-20 17: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출연한 다큐를 보고 책이 궁금했는데 쟝쟝 님은 바로 읽으시네요. 기민하게 실천하는 모습!

공쟝쟝 2024-03-21 10:30   좋아요 1 | URL
궁금하게 많은데 그걸 모참는 조급한 사람을 기민하다 해주시니 몸 둘 바!!ㅋㅋㅋ
 

-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참고 살아야지. 여기 말고 어딜 가겠어. 너 땜에 산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물론 할머니는 대체로 내게는 천사셨다) 관절 마디마디가 부어오르는 병에 걸리도록 같이 사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견뎠는데 엄마가 우리에게 했던 아주 많은 조언의 말이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이었다는 걸 이젠 안다. 그 말은 딸들에게 겸손의 미덕, 자기 한계 짓기, 엄마 때문에 살아야 할 것 같은 저주로 작용해서. 우리들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낮은 자존감과 알 수 없는 분노에 허덕였다. 


페미니즘이 필요했다. 엄마를 죽도록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처음엔 엄마의 노동(돌봄)은 안 보였고 나를 억압한 말들이 작용하는 지점들이 보였다. 엄마라는 제도에 묶인 엄마의 말들. 그러니까 언어. 그 자신을 살리기 위해 타이르는 말이 자신을 죽이는 말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기도 한다. 


일기 너무 쓰면 자의식이 오만해져서 (주체가 되어버려서) 안되니까 기록 남기지 말고 그냥 물 흐르듯이 사는 것도 방법이라고 서양 철학의 한계 어쩌고 글로 먹고사는 인문학을 한다는 남자들이 실은 자기 삶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한테 하던 말. 들은 삶에 언어가 부족해서 지식인(가끔은 스님…)의 고견을 들으러 온 여자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 여성으로 호명하기도 전에 미리 엄마로 호명하고, 부르는 자신의 위치는 탐색하지 않는 채로 들어주는 대상을 넘겨짚음이 역력한(그때는 몰랐다) 마이크의 말들. 나는 또 불리는 대로 불렸고 유명인의 말을 유명해서 탐욕스럽게 섭취했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공부를 독려하지 않았다. 그건 지들에게도 힘든 거니까. 아니, 엄마가 될 사람은 엄마를 공부해야지. 오은영 선생님께로 떠밀려진 것 같기도. 여튼 내가 쓰지 않아도 될 까닭은 너무 많았고 넘쳤다. 페미니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서른 이후의 일기 쓰기. 아니 페미니즘.


가끔, 글을 쓰는 까닭을 거창하게도 살기 위해서라고 썼던 것은. 가부장제라는 판타지, 아버지라는 보호막이 찢어져 버린 imf 이후를… 시어머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엄마의 말들만으로 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들이. 다른 대타자의 말들이 필요했다. 평범한 한국 여성에게 쏟아지는 아주 많은 무거운 중력을 지닌 말들은 돌처럼 날아와서 나를 퍽퍽치고 휘청이게 하였다.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말로 일기를 써야 했다. 그 인문학자의 말처럼 주체가 되기 위해서 자의식을 갖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칫하면, 내가 나를 돌보는 말이 없으면. 타인의 말들에 자기를 검열하다가 뼈를 말리면서도 베이글녀가 돼야 하고. 너무 똑똑하면 안 되지만 개념은 장착해야 했던 20대를 지나. 


남부럽지 않은데 취직은 하되 특정 나이 대부터는 일하지 않기를 독려 받으며… 혹… 안정적 직장이라면 워킹맘이라는 이중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자책하고, 전업주부라는 사실로는 기생충 취급을 받고, 노처녀라서 히스테리인가 봐. 시집가 시집이나 가. 좋은 남자 만나야지. 사랑 못 받는 여자들은. 그런 너를 누가 사랑해 주니.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그것도 아니면 돈 성공 돈 성공.


<서른 이후의 일기장들. 많이도 썼다.>


나를 말에 맞게 더 바꿨다간 흉측한 히드라가 될 것 같아서. 공부. 모든 말들을 어쩌면 30년 치를 한꺼번에 급속하게 찢어내는 과정에서 내 삶은 유달리 심각해졌고 결과적으로는 남들이 뭐라든 무서울 게 별로 없다. 120살까지 80년. 이제는 공처럼 날아오는 말들을 라켓으로 팡팡 튕겨내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 다만 억압이 여성 하나만은 아닌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성별은 정말 거대하고도 기본적인 억압이다. 여남 모두에게.) 겹겹이 싸인 다른 담론들. 


나는 나를 잘 보호하고, 나의 곁을 이루는 나와 손잡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분석하고 사유하고 적합한 저항의 말을 함께 찾아보고 싶다는 나름의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저 말들에 포획되지 않기 위해 셀프 자아 규정을 해야겠다 / 주체가 되어야 합니까? 해체되기 위해서? / 주체가 되고자 하는 나는 본질주의자인가? / 정체성의 정치는 불가능 한가? 


라고 좌충우돌 물었던 질문들을 지나. 


1월에는 책으로 라캉과 바디우를 만났고. 사건으로서의 주체에 대해 힌트를 얻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기를 쓰지 말라는 인문학자들의 말은 (부분적으로) 맞다. 모두를 끊임없이 소비자로 호명하는 자아 중독의 시절, 근대적 의미의 주체는 인류세의 원흉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감히 쓰고 싶다. 재현의 윤리, 잘 모르지만 그것도 탐사해가면서 읽고 쓰면서 내게 맞는 말들을 찾는 재미, 쾌락. 내 공부. 인생은 생각보다 더 길고. 이 재미를 멈출 수는 없으니. 찬찬히 더듬더듬 읽는 나는 진지하고 쓰는 나는 좀 허심해지자고 같이 읽고 쓰고자 하는 친구들과 말했다. 


지금의 최선. 나의 적정선. 



2024.02.2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4-03-2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지 않아도 될 그 많고 많은 이유를 넘고 넘어서 이제 읽는 인간, 쓰는 인간이 되신 거 축하드려요.
여성이라는 하나의 억압만 존재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성별억압의 그 음흉하고 끈질김을 우리 같이 파헤쳐봐요.
주체와 해체와 전략적 본질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나는 시간이 많아요…. 🤔🤪

공쟝쟝 2024-03-21 02:27   좋아요 1 | URL
분명 2월에는 읽고 쓰기 따위 … 이러면서 돈이나 벌자고 하던 나는…. 막상 못하게 되자 너무 그리워졌고… 청개구리 ㅋㅋ 저도 시간이 많아요 😫😩
 
공교로움. 해체되어야 합니까?
내가 내게 일어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

내가 경계하게된 종류의 화법이 있다. 나 자신은 저들과 무관하다는 자기 인식이 드러나는. 너도 그래, 너도 똑같아라고 뱉어주려다가 참는다. 말해줘도 못 알아먹으니까. 어쨌든 나 자신은 무고하다고 항변하지만 이 구조 속에 있는 한 모두 한 비탈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무고하고,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이들을 인정하고 있다. 헌데 그게 백인성이고 그게 근대성이고 그게 애석한 (가끔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남성성이다. 바람을 피우지 않았으니 너를 때려도 되고, 성매매 업소에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좋은 남성이 된다. 그들의 자긍심에 훼방을 놓고 비아냥을 투척하고 싶다. 당신의 무고함에 나의 피해는 상쇄되지 않으며. 집단으로서의 남성은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억압해왔다. 그건 사실이다. 나는 전제를 질문하는 데, 너의 억울함이 고작 성 구매를 하지 않았다 일 때. 그게 억울해? 고작? 그렇게 치자면 나도 꽃뱀 아니야. 나도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아니야. 그게 억울하면 군대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감정적 불쾌함 말고 무슨 도움이 되는 거지?  


내 입 말로 구조주의는 그런 질문과 반성에서 시작되었고(우리 모두가 어떤 시스템 안의 가담자라는), 포스트구조주의는 그렇다면 그 안에서 그걸 넘어설 수는 없단 말인가.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발본색원을 위한 사유 방법을 제안한 거라는 생각이다. 구조 안에서 구조를 넘어서는 (서구 지식인들의) 반성, 반성문이다. 각자가 넘어선 방식은 다르지만. 조건은 치열해야 한다는 거. 그러려면 일단 먼저는 심각한 구조주의적 태도로 생각해 보아야 했던 것이 맞다. 요즘엔 치열하게 자신을 분석한 한 사상가의 정신분석/자서전을 읽고 있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치밀하게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만들어지는지를 대목마다 발견한다. 벗어날 수 없구나. 선택할 수 없구나. 때로는 선택했다고 믿어야만 살 수 있었겠구나. (물론 이러한 사후 해석으로는 불충분한 우발성까지도 그는 이야기하겠지?ㅋㅋ)



노오력 하면 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조건을 문제 삼지 않은 채로. 너와 나의 관계성을 부정하는 것. 코기토적 자아를 전제하는 것. 즉 대상화. 타자와의 연결을 끊고 외부를 만드는 것. 그러한 인식의 전면적 재생산이 자본주의(근대)의 시작이며 결과는 2차 대전과 인류세다. 물론 이전에도 폭력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폭력이 (물리적 폭력 포함 언어, 제도, 인식과 시선까지도) 대량 생산되며 속속들이 개별 인간을 (셀프포함) 통치하지는 않았을 거다. 대상화의 시초는 잉게보르크 바흐만 전기 영화 속 그녀의 주장대로 여성에 대한 타자화에서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근대적 주체성은 젠더화와 동시에 본격화되었다.* 때문에 근대적 주체 혹은 본질주의는 부지런히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사람들은 자기가 근대의 인식구조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걸 위해 공부가 필요한 것 같은 데. 대체 누구라서? 나의 물음표는 그러한 공부의 조건을 겨냥한다.)  


언젠가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까? 해체되기 위해서?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4315328)



지금은 그렇다.라고 임의고정 해두겠다. *해체되기 위해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규정당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규정해야 한다. penis/pen을 들고 써야 한다. 구조 안에서 억압의 인식. 그것을 쓰는 데에 내가 본질주의자라는 혐의를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억압이 없다고 생각하면 적응해 살면 된다. 못 살겠으면 내가 억압받고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명목상의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그건 꽤 어려운 일이다. 


별수 없다. 읽고 써야 한다. 내 안에 있는 것들.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들. 나는 감히 그렇게 느낀다. 크게는 문명에 역사에. 작게는 나 자신의 일기장에 나 스스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가 있으니까. 나는 없지 않으니까. 여성의 목소리는 역사에 기입되지 못한 채로 오랫동안 수다 혹은 잔소리로 휘발시켜졌으니까. 자아를 만들지 못해서 타자를 매만지다가 클리셰가 되어버린 엄마들 또는 신경증으로 고통받았던 여성들. 마녀들. 역사(문자) 이후의 여성의 역사. 그들과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나타난 18세기의 일부 여성들.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글 쓰는 여자들. 명예 남성들.)이 탄생했고. 그리하여 애석하지만 페미니즘은 1세계의 것(부유함과 한가함을 일부 여성에게도 풍족히 나눠주었던)이 맞다. 


“(29) 푸코는 글쓰기와 욕망의 대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푸코는 *근대 욕망이 언어, 그중에서도 특히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30)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가 지금까지 오해되어 왔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야 할 어떤 것으로,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해방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섹스에 대한 이런 재현들은 근대적 성에 특정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는 특정한 형태의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 푸코가 말했듯이, 18세기와 19세기 동안 욕망이 개인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까지 육체의 표면에 놓여 있던 에로티시즘을 효과적으로 대체하는 광범한 언어화 과정을 촉발시켰다. 성담론은 이런 유형의 쾌락을 더 근원적이고 자연적이지만 여전히 환상적인 욕망의 대체물로 보았다. (31) 억압되어 왔다고 가정되는 성의 형태를 언어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과 문화에 의해 부여된 개별 정체성을 구별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구별을 통해서는 문화와 자연을 상호 의존적 구성물로 다룰 수 없다. 이 상호 의존적 구성물은 문화가 수행하는 정치적 기능이다. 푸코만이 성의 연구를 욕망의 본성에서 욕망의 정치적 효용성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근대 욕망이 글쓰기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욕망과 글쓰기의 대립을 거부한다.  … 다시 말해 *푸코는 억압을 수사적 비유일 뿐 아니라 욕망의 생산수단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33) 내가 주장하려는 논점은 근대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여성적 영역과 남성적 영역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언어의 해체가 일어났다는 점, (34) 나는, 젠더화된 근대 주체성은 19세기 시와 심리이론에 기호학을 제공해 주기에 앞서 먼저 여성용 글쓰기에서 여성적 담론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성담론이 사람들의 상식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들이 타인에게서 욕망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18세기의 인식론적 논쟁이 아니라 젠더화된 담론*이었다.” 

- 낸시 암스트롱 <소설의 정치사>


글쓰기(혹은 언어)와 자꾸 엮어서 생각하게 된다. 추측건대 스피박이 말하는 *전략적 본질주의*는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규정 당하지 않기 위해 규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규정한다는 것은 본질주의라는 혐의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셀프 규정도 마찬가지. 어쨌든 우리는 엮여 흐르고 있는 의미들을 끊어내 절단면을 만들어 냈을 때만 의미화 할 수 있지 않는가. 얼마나 날카롭게 잘 끊어냈느냐가 잘 쓴 글의 척도 아니겠는가.) 언어활동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본질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정교하게 끊어낸다 한들 실재 일 수는 없다. 라캉. 결여. 언어.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내장된 결여. 언어로 다 포섭되지 않는 나머지(실재). 우리는 거기에 다다르고 싶어 하지만. 언어로는 실재를 완벽하게 잡아챌 수 없다. 언제나 의미의 여분이 남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시니피앙. 결국 그걸 가지고 하는 게임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의 언어로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타자들의 언어? 아니라면… 그들의 목소리에서 가까스로 추출해낸 나의 언어.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해체되기를 언제나 염두에 두며.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근대가 규정하는 타자로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때때로 나의 입장에서 잠시 같이 서줄 사람들의 시야와 공명하는 것이며. 그건.


“(52) 다시 한번 우리는 ‘본질주의’의 문제, 즉 모든 여성이 실제로 억압받는 공통의 위치와 단일한 공통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도나 해러웨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인식론자들은 확실히 서로 중첩되는 여러 억압의 형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또한 수많은 ‘부분적 시각 partial perspectives’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각 각각은 실재의 어떤 차원에 관해서는 통찰력이 있지만 다른 차원에 관해서는 왜곡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해러웨이의 은유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어떤 양상을 보는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특정 타자에 대해 특권을 갖는 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앨리슨 스톤 <페미니즘 철학>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을 가지는 것. 즉, 나는 점점 더 무고하지 않아질 테다. 언어를 가질 거니까. 나에게도 나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마 나는 아주 엉망으로 개념들을 활용/오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공부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결단한다. 나에겐 내가 쓰는 것의 진위 여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없지만 부지런히 읽었다는 것으로 정당화하련다. 부끄러움마저 책임지고 감당하기로 한다. 해체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허심해지기로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떠들었다면 그건 기꺼이 고치면 된다. 다 허물어도 된다. 파도는 덮치고 모래는 쓸려간다. 자국은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 자신이 구축한 판타지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무리 어떤 성을 쌓고 그림을 그린 대도. 바람은 파도는 불가항력. 


나는 내가 만든 것들이 폐기처분 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들어 내는 과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세계의 문제는 자신들이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건 세계에 속한 내게도 있다. 


앎비앎 친구님의 글속(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259889) 아래 문장에 영향받아 썼다. 종종 탈식민주의/포스트구조주의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미소지니적 인식에 나는 분노와 같은 밀도의 긴장감을 느낄 때가 있다. 타자의 피로 세공된 눈.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내가 발견한 파농은, 탈식민을 시도하는 지식인이되, 완벽한 인간 백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백인 여성이 필요한 혹은 백인 여성을 ‘도구화’  해야만 하는 유색인 남성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렌즈로 ‘니그로’로 규정된 남성이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타자화,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 혹은 인식이 내 읽기 방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내게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렇게 읽혔다. 이 책의 저자는, 파농을 그렇게’만’ 읽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 단발머리, <전략적 본질주의>


(덧, 또 민원들어오겠네. 알아먹게 쓰라는ㅋㅋ 아직은 공부가 부족해서 안되겠습니다. 10년 뒤에는 도전해보겠습니다.)


댓글(3) 먼댓글(1)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저항주체인 여성의 전략적 본질주의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4-01-30 11:01 
    첫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텍스트가 가진 독특함이다. 저자 이경원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딱히 자서전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문학술서로 보이기도 힘든 이 책은 정신의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의 온갖 범주를 넘나든다. (55/624) 파농의 정신과 삶은 사망 이후, 그가 선택한 조국 알제리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서서히 흩어지고 만다. 오히려 파농을 가장 ‘파농답게’ 기억한 곳은 생전에 파
 
 
단발머리 2024-01-29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잘 써서 놀랍고 빨리 써서 놀라워요.
나의 앎비앎 친구글에 먼댓글 써야 하는데 이번주에 우리 교회 부흥회라 나 지금 교회 가요!
일단 아멘!! 하고 올게요! 😘😘😘

공쟝쟝 2024-01-29 17:43   좋아요 2 | URL
아. 나는 왜 이렇게 좋은 글을 빨리 써버리는 것인가. 대체 사유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저 대신 회개 부탁드리오며..... 나 내일 마감인데 이거 쓰고 있어서 지금 똥줄 타기 시작... 주여. 제게 체력을 주세요.

단발머리 2024-01-29 17:45   좋아요 2 | URL
그걸 중점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주님! 우리 쟝님에게 체력을 주소서!
새 힘을 주소서! 🥰🥰🥰
 

푸코 진지하게 읽는 여자 손톱 보라고 언니가 놀리길래, 오는 전철에서 이 손톱을 하고 읽은 책 꺼내서 보여줌 ㅋㅋㅋㅋㅋㅋ


짜쟌 ✨ (깔맞춤)



내 인어 공주 손에 대해 변명(?)하자면 일주일 다녀온 생애 최초 동남아 가족여행의 일정 코스 중 하나였고💅💅(남성들도 함께 관리 받았음다) 그곳 여성들의 마사지 노동 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하는 네일 아트 노동을 받으며, 엄마는 아빠를 향해 선언하셨다. 이거 유지하기 위해서 돌아가서도 밥은 안 할 거다!!!ㅋㅋㅋㅋ

돌아와 일하기에 손톱이 무겁다고 느낀 나는 외국에서 예뻐진 젤네일을 긁어내기 위해서 한국에서는 더 비싼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는 동생 말에 걍 이 부담스러운 예쁨을 유지하기로 한다. 쉽지 않다. 이 모든 것이 교차되는 가장 복잡한 사유는 무엇? 바로

#페미니즘철학 ㅋㅋㅋ 



이 책의 경제적임은 말해 입아프다. 아니, 페미니즘으로 하는 사유가 얼마나 철학적으로 경제적인지에 대해 나는 이야기해보고 싶다. 언제? 책 다 읽고. 혹은 읽으면서.




"(40) 여성의 종속subordination 대한 페미니즘의 주장들은 항상 해석적이다. 그 주장들은 사회의 본성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서로 다르고 상충하는 해석들을 인식하는 일을 좀처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만약 그들이 철학자들이라면 확실히 피할 수 없다. *페미니즘 철학자로서 우리는 특정한 형식의 페미니즘을 완고하게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이 기울고 있는 페미니즘 형식의 이점을 솔직하게 고려해야 하고, 다른 페미니즘 철학자가 또 다른 페미니즘을 대표하여 구성해낸 논증들을 가능한 한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 종속되어 있다는 페미니즘의 신념을 주장하는 일은 *이러한 종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종류의 사회 변화가 가능하며 바랄 만한 것인지에 대한 열려 있는 —철학적— 논쟁에 참여하는 일과 양립할 수 있다. 회의론자는 여전히 여성이 종속되어있는지에 대한 논쟁에 있어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결코 열려 있을 수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페미니즘 철학자라면 여성이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러한사실이 페미니즘 철학자가 여성의 종속에 관한 서로 다른 해석들에대해 제한 없이 논쟁하는 일을 막지는 못한다." - P40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1-16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하고 깔맞춤이군요.

공쟝쟝 2024-01-16 10:41   좋아요 0 | URL
너무 이쁘죠?? (책이)

단발머리 2024-01-16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어나서 한 번도 안 받아봤지만요 ㅋㅋㅋㅋ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맨날 하녀로 살다가 내돈 내고 받는 진지한 공주 대접에 주위 아기 엄마들은 열광하더이다ㅋㅋㅋㅋㅋ
너무 이뻐요! 책도 손톱도! 저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며 페이퍼를 내놓아라!

공쟝쟝 2024-01-16 12:3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울엄마 공주대접 더 많이 해드릴거예요. (하지만 7일 내내 시집가 공격 당해서 피폐해 짐.) 여행내내 엄마 “밥걱정 안해서 너무 좋다, 그게 제일 좋다.”

독서괭 2024-01-16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손톱이 더 예쁘네요~~ 10여년전에 몇번 해본 기억이 전부인데, 무겁다는 말 공감 ㅋㅋㅋ 이왕 한 거니 예쁨을 누려보아요~💅

공쟝쟝 2024-01-16 20:12   좋아요 0 | URL
10여년전에… 그쵸…. 10여년전… 나는… ㅋㅋㅋ 괭님은 예쁘니까 자신을 누려요 ❤️💕✨

꼬마요정 2024-01-16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톱 너무 예뻐요!! 책이랑 깔맞춤 ㅎㅎ
공쟝쟝 님 손도 예쁘네요. 부럽습니다. 저는 손이 못나서 예전에 네일 하고 손톱 찍으면 뭔가 못났었거든요. ㅎㅎ
요즘은 운동하니까 네일은 꿈도 못 꾸기고 하고, 손톱을 워낙 바싹 깎아서 아깝기도 하고... ㅋㅋ

공쟝쟝 2024-01-16 20:15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요정님은 무슨 운동을 하시기에!!! 여행지에서 수영할때는 반짝반짝 물속에서 더 예뻤는데…!! 한국에 오는 순간 거추장스러워지는 마법ㅋㅋㅋ💅

꼬마요정 2024-01-16 22:52   좋아요 1 | URL
주짓수 해요!! 손톱이 길면 상대방이 다치거나 제 손톱이 들리거나 해서 짧게 깎는답니다. 원래 짧은 손톱 좋아해서 좋아요 ㅎㅎ 물 속에서 진짜 예뻤겠어요. ㅎㅎ 지금 한국이 겨울이라 아쉽네요. 햇빛에도 반짝반짝 예쁠 거 같아요!!

공쟝쟝 2024-01-19 09:54   좋아요 1 | URL
요정님… 아이디는 요정인데… 무술 운동하는 멋진 여자!!!!! 주짓수 하는 사람!!! 으아아아!!! >_< 짱 멋있어요!!

수이 2024-01-16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랑 깔맞춤 인어공주 네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극강의 무기는 똑똑함. 거기에 더해 극강의 다정함. 이제 거기에 영어까지?! 맙소사!

공쟝쟝 2024-01-16 20:17   좋아요 0 | URL
나는 완벽한 사람입니다. 거기서 영어는 빼주세요… ㅎ ㅏ….!!!!
 
[임신중지] 선택을 선택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는데요?

어제는 정희진처럼 쓰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5권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재독했다. 작년에 읽을 때는 ‘공부’에 대한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부분에 꽂혀서 읽었는 데, 이번에는 논쟁의 구도나 지식의 전제 같은 부분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차피 또 읽을 거라서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다가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을 좀 적어두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님이 줄곧 주장해오신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미소지니misogyny로 바꿔 부를 데에 대한 요청인데… 지금까지 난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고. 여전히 “그건 미소지니예욧!!!”라는 말로는 저들의 말(과 행동)을 무력화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으잉~? 지니??🧞‍♂️ 소원을 말해봐??! 할 것이 뻔함. 그에 비하면 “그건 여성혐오예욧!!!” 가해자가 되길 꺼려 하는 세상에서 거북함과 거부감을 끼얹는 공격의 언어로 매섭고 날카롭지 않나? 어차피 말로 상처주는 세상. 나도 니들을 상처주고 싶은 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혐/남혐의 이항대립 구도를 강화시켜서 더 중요한 다른 문제를 은폐하게 돼버리는 현실에 대한 지적은 중요하다. 용어를 바꿔쓰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에 내 눈에 *쎄게* 읽힌 부분은 바로 이 문장들이었다. 


-(180) (특히 20, 30대를 중심으로) 사안에 따라 젠더 문제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모두 ‘여혐, 남혐’으로 몰고 간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서로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일 놀란다. 일단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젠더 갈등, 젠더 전쟁으로 미화되고 있다. 


-(183) 검찰 문제를 다루는데 왜 배우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들먹이며 비난하거나 반대로 개방적인 척 하는가. 윤 씨 측의 물타기인가, 진보 진영의 무지인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검찰 문제는 은폐되었다. 위 두 가지 사안은 복잡한 현실을 젠더로 은폐하거나 젠더 문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젠더만 동원된 것이다.


특히 나의 어떤 부분을 긁은 것 같은 문장. 


-(236) 이제까지 여성주의자들은 사회 구조로서 젠더를 가시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노동 시장의 성차별, 성별 분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젠더는 동시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기도 한다.* 김건희 씨 사건의 경우 젠더는 본질적인 문제(검찰 개혁)를 은폐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더구나 내가 가장 좌절한 점은 김건희 씨가 여성성이라는 자원을 활용한 점을 비판한 페미니스트도 없었고, 이를 문제 삼은 내가 여성주의자들로부터 ‘여성 혐오’라고 비난을 받은 사실이다. 이는 현재 한국 여성주의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김건희 씨는 억울하다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여론은 그를 도왔다. ‘회원 유지(Yuji)’와 ‘쥴리’는 비판이든 조롱이든 냉소든 그 자체로 윤 씨를 삭제하고 문제의 성격을 이동시켰다.


지역 감정과 분단 현실을 이용한 (하, 슬프게도 한국 사회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일까) 선동 정치는 신자유주의의 직격탄(노동시장 자체에 진입 어려움 ㅠㅠ)을 맞은 2030세대가 헬조선/흙수저 담론으로 본인들의 위치성을 자각하는 것 보다 여혐/남혐 대결을 조장하는 것이 통치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습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젠더를 정치에 활용하는 것, 그게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정치를 보면 안다(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 정치인 줄리아 길라드와 관련한 여성 영화(트랙백 참고)를 본 적이 있는 데, 정말 정말 속상했다). 1세계들의 민주주의도 젠더가 정치의 최종 심급이 되어버린 현실. (희망적으로 보아야 하나? 미국 페미니즘 책 보면 뭔가 희망이  꿈틀 느껴지기도...) 


그런데 한국은. 논쟁의 구도가 여혐/남혐으로 정리돼버리면 백전백패다. 왜냐면 남자도 여자 미워하고 여자도 여자 미워하거든. 심지어 여성주의자도 여자 미워함. 이러다 젠더(성역할 고정관념)를 문제화 하는 데 주력해온 여성주의적 성과마저도 다 무너지는 꼴이 날 지도 모르겠다. 한 줌의 빨갱이를 골라내려다가 후퇴한 민주주의가 얼마인가. 한국은 보수/진보 였던 적이 없다. 레드 콤플렉스와 지역감정을 이용한 정치였지. 언제나.  


논의를 이항 대립으로 끌어서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정치는 대단하게도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  됐고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점점 더 유효해질 것 같다. 마치 종북논란처럼 논의를 산으로 끌고 가는 데 여혐/남혐 이라는 정치적 선동 구도는 말이다.


-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가부장제의 일시적 패퇴*다. 물론 성차별은 여전하지만 그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 역사상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경제 패러다임은 없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계급과 젠더 질서를 가시적으로 변화시켰는데, 이 가시성이 지나치게 과잉 재현되어 ‘남성 역차별’이라는 난센스를 낳았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남성과 남성의 차이, 여성과 여성의 차이가 커졌을 뿐인데, ‘흙수저 남성의 군 입대 vs 중산층 여성의 사회 진출’로 왜곡되었다. 이 왜곡은 이대남 현상, 페미니즘의 대중화, 현실 정치에서 젠더 이슈의 비중이 높아진 점(정치 지도자들의 성범죄와 남성 유권자의 분노) 등으로 드러났다.


사실 이는 *여성의 지위 향상이 아니라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이라는 기존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실업의 만연화로 남녀 모두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다. 저출산, 비혼, 1인 가구의 등장, 남성의 계급분화의 가속화는 실업에 대한 대응이자 현실이다. 취업과 결혼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에게 가족 내 성 역할이 아닌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부분적으로 부여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기술 발전의 산물인 1인 매체, SNS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가 남성과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되었다. 여성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비록 여성 노동시장의 질은 100위권 밖이나, 한국 여성의 높은 교육 수준은 여성주의 언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다. 남성 지배 문화에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개인화는 신자유주의 가장 원치 않은 결과이다.  (릿터, 31호 <정희진 ‘모두가 작가인 시대’를 사는 법-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아와 글쓰기>)


나는 똑똑하다. 얼마나 똑똑하냐면. 취업과 결혼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ㅋㅋㅋ)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넘나 기력과 체력이 없으므로 반려묘 돌봄 + 자기 돌봄도 간당간당한 처지에, 돌봄을 동거인 남성 및 낳게 될지도 모르는 자식에게 제공할 여력이… 그래… 나는 없다… 나는 내게 그런 대단한 에너지와 사랑이 없다는 것을 슬프지만 인정해야했던 것이다.


여성의 개인화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원치 않는 결과이긴 했겠지만… 내가 신자유주의 덕분에 암튼 저임금이나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아주 좋고… 하하하하하!!! 성역할 때문에 왠지 해야할 것만 같은 돌봄 안 하는 대신 자기 돌봄에 매진하며 책 읽고 독후감 쓸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은 데… (ㅋㅋㅋ 내 자랑 그만하고)


남성vs남성의 차이, 여성vs여성의 차이가 / 남성vs여성의 차이보다 더 커졌다는 지적이 맞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가시화라기 보다는 내 현실에서... 사회의 노동력이 되어야 하는 진입 단계에서랄까. 어쨌든 IMF이후 이젠 일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면 나보다 윗 세대 여성 대부분은 돌봄과 관계된 저임금의 일자리와 자영업을 할테고, 그녀들은 나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와 동생들(여남 둘 다 해당된다)이 사회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은 또래 여성/남성들과의 불화가 아니었다. 이미 기득권이 되어있는 윗 세대 (가부장)남성 집단의 빻음—무능력, 일대신 정치, 각종  허세, 눈치 없음, 갑질, 행패, 멸시, 희롱, 추행, 성 역할 강제 및 저임금 강요(이중 노동) 등등—이다. 나는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영화를 보다가 엉엉 운적이 있었는 데... 존경할만한 남자 어른을 만나는 것이 로맨스보다 더 심각한 판타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 뭐 그래 이것도 흙흙수저 우리 가족 기준 일반화다. 내 친구들은 여자 상사 비위 맞추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나도 그런적 있고. 직군과 직종마다 또 다를테지. 여초회사에서는 여성들 간의 문제가 더 도드라질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생각했었다. 젠더 보다 계급보다 지역에 대해. 흙수저 그리고 지방수저가 있다고. 월급 180을 받던 지방 출신 나는 월세로만 50만 원을 냈다. 같은 월급을 받던 동료는 집에서 다니면서 시드머니를 모았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다르다. 다르더라. 나는 쪼잔해지지 않기 위해서 퇴근 후에 치맥이라도 한잔 할라치면 기꺼이 반띵을 했지만, 옷 좀 사 입으라면서 상사한테 은근 비교 당할 때는 정말 화딱지가 났다. ㅋㅋㅋㅋㅋㅋ (옷 안사고 치킨 먹고 맥주 마시는 게 더 중요햇!!) 


직장 동료와 나는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일자리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이직으로 경력 물타기하면서 버텨야하는 사회 초년생의 처지는 많이 다르진 않았다. 다 흙수저였고 나는 좀더 흙흙이었다는 소리. 그런 우리에게 일도 주(떠넘기)고 모욕도 주는 상사/대표 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권력에 도취되어 눈치없이 쩝쩝대는 생긴것 포함 한남스러움의 표본이 바로 *선출*된 현 대통령이시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남혐에는 근거가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이것도 생물학적 남성이라기보단 개인적 인격과 그 위치가 근거란걸 인정해. 그리고 일반화/유형화 할 수 있을만큼 그런식으로 사회화된 인간들이 득시글 거리지.  


그런데 동년배 또래의 남성들에겐? … 곰곰 생각해 봤다. 인터넷에서 여성 혐오하는 이상한 놈(이 치들의 포르노에 쩐 뇌에 대해서는 내가 그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포르노는 너무도 너무도 대중화 되어서  다 똑같다. 정도의 차이지만 관대하게 패스하겠다.)들 말고, 일상에서. 남자들. 어떤 종류의 대화를 하면 너무도 역지사지가 안되는 데다가 맨스플레인을 일삼지만, 나는 말을 잘해서 내 앞에서는 차마 맨스플레인을 하지 못하지 니들. 그래.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나는 모른다. 


생각해보면 젠더 갈등은 남친이랑 했고, 동료 남자들과는 그냥 담배나 노나 피면서 윗사람들 욕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직격탄을 맞은. 취업 시장에서는 경쟁했었어야하며, 결혼 시장에서는 아마도 미리 탈락된. 나와 비슷한 계층의 또래의 남성들에게. 인간적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든다.…  (근데 그걸 포르노로 풀고 여혐으로 풀면 안되지 않을까? 하, 됐다. 입아픔) 


어쩌면 정말은. 또래 남성들에게 느낀 남혐의 근거는. 관습적 이성애 사회에서 친밀한 관계의 실패 경험일테다. 성적 대상화, 평가. 질 나쁜 연애. 질 나쁜 섹스. 혹은 실패한 연애. 위험했던 섹스. 몰 이해. 소통 실패. 사회생활 속 이중의 억압에 대한 하소연에 돌아오는 맨스플레인. 그들과 비슷한 몸을 한, 좀처럼 성찰하지 않는 종족 일반에 대한. 그리고 인터넷 덕에 드러난 그들의 저열한 문화와 서열질, 속내. 뭐 그런 것들.을 깨치고 나면. 로맨스는 불가능하다. 취할 것이 없는 걸리적/징징 거리는 집단. 나에게 남성은 그런 종족으로 타자화되어 버렸을 지도.


그리고 어떤 집단을 타자화하는 건 여남 불문 빌어먹을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182) 문명은 여성의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 다른 인간은 배제되어야 했다 겉보기에 남성과 다른 존재, 타자(the others)가 필요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인 여성이 가장 적합했다.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 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타자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이기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 정희진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펼쳐진 성애화된 여성성의 이미지(포르노)를 볼 때마다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것은 논외로 치자. 이 책이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모든 걸 환원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후차의 문제가 아니다. 젠더가 뒤에 오는 문제도 아니지만(해일 오는 데 조개 줍는) 맨 앞에 항상 위치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이미 완전 승리해버린 한국 사회에서 젠더 가시화가 아니라 젠더가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동원되는 방식으로도 쓰인다는 지적은 건조하게 놓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끼친다. 마치 지역 감정과 레드 콤플렉스처럼 사람을 재빨리 아메바로 만들어 버리는. 


언젠가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싶은 감각(감정)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34792973- 작가라는 문제, 대상화의 문제, 유대인 문제 /  


미세하게 추적해 보면 출발은 위기 앞에서의 자기 보호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지배와 통제가 목적이기도 할테지만 조금 더 원초적인 것은 방어- 아닐까.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시절이다. 사실 나는 그것에 거의 완벽히 지쳐버렸다. 살아남은 것은 그것대로 장한 일이지만, 타인에게 가혹해지는 순간들은 낯설었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내 익숙해져야 했다. 매번 나를 낯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나와 타인에게 미세하게나마 관대해지기로 한 것은 어찌저찌 살아 남은 후에 고독을 구축할 수 있게 된 후 부터다. 그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셀프 마취(대체로 취해 있었음).


힘듦과 불안의 이유를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찾는 것. 가까이 있는 미운 타인에게서 찾기는 참말로 쉬운 일이라, 일찍/이찍을 서로 비난하는 정치만큼이나 여혐/남혐은 심해질 것 같다. 정희진의 지적대로 *신자유주의 덕분에 정말로 젠더가 가시화*되어버린 것이다. 경쟁에서 탈락된 젊은 남성들의 열등감 폭발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노릇이고. 그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가장 쉬운 약자를 혐오하는 방법으로 찾고 있는 것도 너무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논의를 자꾸 여남 대결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서는 예리하게 보아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위근우의 인스타그램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위근우 인스타그램 @plusratioquamvis99)


갈등 자체를 문제시 하는 프레임. 페미니즘 때문에 역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대남. 허어... 어렵다. 어려운 줄은 알았지만, 너무 어렵네. (한숨 폭폭~😮‍💨) 


무언가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나는 페미니즘에서 나의 언어 찾고 공부하는 여성주의자다. 다만 내 여성주의적 언어 생산(?)이 현실에서 여혐/남혐의 구도를 부채질해 중요한 다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떤 언어를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을 더 해야한다는 것, 더 면밀히 보아야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동안은 머뭇머뭇했지만, 또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겠지만 앞으로는 여성 혐오라는 표현보다는 미소지니라는 용어를 더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맘을 좀 고쳐먹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역시 입에 착 달라 붙진 않네.



어쨌든 복잡한 현실이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을 하자.

공부하자 공부하자 공부를 하자.


왜?


생각 안 하고 공부 안 하면 영원히 일찍/이찍으로만 싸워야 할 테니. 


그런 공동체에서 이미 충분히 살아 왔으며, 싸우느라 맘이 격해져서 계속해서 모두 함께 멍청해지는 기분… 난 좀 싫다. (물론 싸울 땐 싸울 거다. 그러나 미련을 남겨둔 편향을 인식한 결단 쯤으로.) 



2023. 8. 12.


(여름에 썼던 거 가져옴 ㅋㅋ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다" 부분 읽어보면 좋을 듯!)



https://blog.naver.com/jyanggrim/223181537578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12-18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 하트도 여름 거 가져옴.

공쟝쟝 2023-12-18 18:24   좋아요 2 | URL
히히❤️❤️❤️❤️❤️❤️❤️❤️❤️❤️❤️❤️❤️❤️❤️❤️❤️
근데 나 그거는 못하게쒀여. 쭈아아압쫩~! 이건 은오님 주자.

단발머리 2023-12-20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안타까운 건 과계몽된 여성들과 이해 못 하는 남성들간의 간극이겠죠. 여성혐오는 미소지니로 번역된 것이 옳았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오천년 가부장제에 도전(?)하고 일부 성공한 건 신자유주의 뿐이라는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에 완벽 동의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이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한줌의 이대남들이 과대표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소리는 더 크게 나지만 투표율은 20대 여성이 더 높다고 하죠.

대상화와 타자화에 대해선, 저도 더 생각해보려고요. 그게 참 어려운 문제더라구요.

공쟝쟝 2023-12-21 09:59   좋아요 1 | URL
대상화 타자화는 저도 읽는 사람에 머무르는게 아니라 쓰면서 계속 가지는 질문였어요. 한번에 결론 빵 나면 것두 윤리라고 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는 읽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쓰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하겠다… 정도로만 맘 먹었어요. 아무도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는 것 역시 환상이라고 생각하니깐요! (찡긋-!)

그리고 그래봤자ㅋㅋㅋ!! 독후감ㅋㅋㅋ 더 잘 쓰고 싶긴 합니다!!

단발머리 2023-12-21 10:00   좋아요 1 | URL
그 지점 좋네요.
그리고 그래봤자 ㅋㅋㅋㅋㅋ독후감ㅋㅋㅋ
많이 안 읽으심, 내 글을 ㅋㅋㅋㅋㅋ
누가 주의해서 보신다고 이리 조심하나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12-21 10:0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그래봤자 좋아요 50 안된다 ㅋㅋㅋㅋ 하지만 난 안다. *중요한 건 필력이다*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1 10:04   좋아요 1 | URL
좋아요 100 넘으면 나도 좀 진지하고 알차고 자기성찰적인 글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써보려 합니다. 그러나 50이 안 된다 ㅋㅋㅋㅋ 그것도 이웃님들이 💜으로 눌러주시는 것임 ㅋㅋㅋㅋ 여러분, 감사해요 💕

공쟝쟝 2023-12-21 10:05   좋아요 1 | URL
😊😊😊😊😊😊😊😊💕💕💕💕💕💕💕💕💕💕💕💕

단발머리 2023-12-21 10:43   좋아요 0 | URL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