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밤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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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주는 것은 악한 의도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상처를 받으면,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편했다.
선악의 틀로 짜여진 나의 세계관 속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젠 안다. 의도치 않게도 상처 줄 수 있다는 것. 나의 위치가, 태도가, 때로는 먹어버린 나이가, 생각과 신념이,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누군가를 해치기도 한다는 것을.

“(p.181 모래로 지은 집)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 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읽으면서 아파서 많이 울었다. 내가 준 상처들을 떠올리면서 미안해하는,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여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너무 안이한 반성은 아닐까하고.

“(p.235 손길)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그러게. 왜 어두운 위치에서서야, 겨우 볼 수 있는 건지.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밝다는 것은 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이 더 짙어져 있다는 것임을. 누군가의 어둠을 질료삼아서 빛나는 것이라면, 모두가 덜 밝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지금의 내가 너무 밝은 곳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 285 아치디에서)
뒤에서 보니 하민이 자꾸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왜 우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다만 조금씩 속도를 늦춰서 걸었다. 그녀가 울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서. “


결국 우리의 상처가 의도가 아니라면,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상처주거나 상처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단편집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슬픔에 너무 쉽게 이입하지 않을 것, 그의 눈물을 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을 것, 다만 조금씩 느리게 걸을 것. 해설에서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이를 “(p.319) 단시간에 빠르게 솟구쳐 상대에게 범람하고 금세 소진되는 열정과 달리, 상대를 손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으려는 배려가 스며있는 거리감”라고 말했다.
아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_


‘쇼코의 미소’ 때만 해도 동세대의 소설가들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게무해한사람’으로 최은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관계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그녀는 어디까지 헤집어서 생각했던 걸까.

더는 누구도 나 자신도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왜와 어떻게를 따져물으며 뒤집고 또 뒤집어 끝없이 적어내리던 29,30살 일기장 속에 두루뭉수루하게 적힌 나의 이야기가- 작가의 세심한 문장과 소설로 적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아주 깊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 받았다고 느꼈다. 두번 읽고 세번 읽어도 좋았다.

결코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없겠지만,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만큼 스스로에게는 당연한 것들을 휘두르지 않도록. 나는 몇번이고 이 소설을 더 읽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덜 유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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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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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짓고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 데, 사실 그럴수도 없거니와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하고 타인에게 잔인하게 굴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p.44 너의 여름은 어떠니) 살면서 내가 가장 세게 잡은 누군가의 팔뚝이...... 갑자기 목울대로 확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사막에서 만난 폭우처럼 난데없는 감정이었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 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별안간 뺨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간절히 움켜잡았던 누군가의 팔뚝이. 내가 너무 절박해서 몰랐을 그들의 상처가. 어떤 흉터로 남았을까 되묻게 되는 밤. 누군가는 손을 뿌리치고 떠났고, 누군가는 주저하며 혹은 기꺼이 잡혀주었다. 떠나거나 남거나 결론과는 상관 없이 아팠을 텐데. 누구라도. 세게 쥐면 아팠을 텐데. 많이 아팠을 텐데.

그러고 보면 나는 언제나 뿌리치지 못해 잡혀주는 편이었다. 안 아픈 척 시원하게 웃어주지도 못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결국 뿌리칠거면 일찍 손사래 치거나, 결국 잡힐 거면 그냥 괜찮다 웃을 것을. 후회된다. 그런데 몰랐다. 몰라서 결국은 더 아프게 했을까.

“(p.316 서른)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서른 무렵에야 어렴풋이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한테 왜 그랬어?’라는 질문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라고 되물어야 한다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한사람의 몫을 해야한다는 성인이 되고 고작 10년도 안되서, 너무 많이 상처입고 또 너무 많이 상처주고 있는 ‘죄 많은’ 스스로에 대해서. ‘피해의식’이 아닌 ‘가해의식’을.

정말 몰라서 혹은 알아채지 못해서. 나만 보여서, 내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이제는 알고도 모르는 척 확신범이 되어.
저지르는 죄들. 불가피한 눈 감음.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서 울고 싶었다. 어쩌다가. 나. 이렇게.

_

8편의 단편 모두, 슬프고 답답했다. 그리고 묘하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을 다루고 있으며 나와 가까운 이야기같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 데. 그런 (참혹한) 일 들이 일어나는 것 빼고 무엇이 비슷한가 더듬어 보았다. 그건 소설 속 인물 모두에 배어있는 ‘가난’의 냄새.

“(p.214 큐티클)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

심지어 일상의 소소한 과시적 소비로 자기만족을 하고있는 ‘큐티클’의 주인공에게서도 가난의 냄새는 났다. 보다 높은 경제력의 배우자를 만나서 신분상승을 하지 않는다면 그녀도 별수 없을 것이다. 이내 ‘벌레들’ 속의 부부가 될 것이고, 그렇게 소설 속의 청년들 대다수는 중년의 ‘기옥’ 혹은 ‘용대’가 될 것이다. (정년 퇴직 이후에도 벌어야 하므로) 택시운전을 하거나, (출산 육아 이후 경력 단절을 겪고 없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청소와 전단지 돌리기를 마다 않는. 가난한 그리고 평범한 현실속의 우리. 즉, 언제나 쉽게 교체되곤 하는 값싼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력.

각각의 소설이 빚어내는 비극적 상황들에서 ‘보편적 가난’을 뺀다면 ‘비극’도 ‘상황’도 만들어 질 수 없다. 차라리 그들이 가난에 허덕였다면 덜 비극적이었을 것이다. 공기처럼 보편적으로 가난한 인물들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나야말로 보편적으로 가난하고, 언제고 쉽게 교체될 수 있는 ‘대체 가능한 노동력’이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의 누구도, 지어는 중년과 노년에 걸쳐있는 ‘용대’와 ‘기옥’도 연민하기는 아직이르다.

“(p.297 서른)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서른을 넘어선 나는 자라 그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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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_ 한강
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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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수가 그리워서 사들였다. 또박또박 한 편씩 아껴 읽는 동안 작가 한강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소년이 온다’ 정도를 제외 하고 지금까지 읽은 한강의 소설들은 아리까리 난해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직 나에게 그 책들이 열릴 때가 아닌가 보지. 지금 나에겐 20대의 한강이 더 잘 맞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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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 소설을 꺼내 읽는다. 정선의 결벽이 그립고, 인규의 어머니의 절규가 생각나고, 또 <어둠의 사육제> 속 베란다 풍경들을 생생히 떠올리고 싶어서. 나는 이 소설이 그립고 또 아린다. 내 고향 여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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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도 더 된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가족-타인-타인의 고통>을 통해서 무의식 밑바닥에 잠궈둔 ‘나’의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문제의 해결이나 치유의 형태로 성급히 이어지진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러나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데에서는 일치하는 태도로- 지켜볼 뿐이다. 어떤 단단한 인내도, 대단한 깨달음도, 드라마틱한 해결도 없다.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는 가능성?! 따위 없다. 응시. 지켜봄. 천천히 곱씹으며 들여다 봄. 타인은 거울일 뿐이다. 나의 고통을 비추는, 혹은 그 자신의 고통에 허덕이는. 그러나 타인이 없다면 나 또한 나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없었다. 나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채로 원인 모를 어떤 병증에 허덕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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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점이 초창기 한강의 어떤 탁월한 인간과 관계에 대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스무살의 한강은 깨달았지만 난 이제 겨우 서른에서야 알듯 말 듯한. 고통에 대한 태도, 앓음을 응시 하는 것에 대한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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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관계를 집어삼키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내가 요즘 타인을 대하는 방식. 그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아픔을 가진 존재로서 평등해지기, 관계 혹은 이질감에 대해 조급한 해결없이 머무르기, 당신의 앓음으로 인하여 아니라고 거부했던 내 상처와 병을 깨닫기. 그러니까, 그 깨달음 없이 - 무엇을, 어떤 것을, 누구를 안다고/해결한다고 할수 있을까.
용감함의 덧없음. 자신을 모르는 자가 휘두르는 무기.
젊은 나는 그것으로 인해 전진해왔으나, 중년을 향해가는 나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조금은 거창하게) 한때의 인류는 그것으로 인해 발전해 왔으나, 지금의 인류는 더는 용감하지 않을 것. 해결하기 전에 멈추어 바라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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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였나. 한강은 글을 쓸 때, 여전히 직접 손으로 쓴다고 했던 것 같다. 94년의 무려 첫 소설집이므로 그녀는 더욱더 원고지에 꾹꾹 눌러썼으리라. 한문장, 한단어, 토씨하나 대충 쓰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소장각. 구매각. 일독각. ~
장범준의 여수밤바다 만큼 좋을 여수의 상징?!? (이라기엔 너무 우울한가....😭) 한강의 여수의 사랑! 꼭 읽으세여. 두번 읽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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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잘 적어보고 싶었는 데, 다 적고나니 무척이나 어수선한 글. 무언가 아주 깊숙히 느낀 걸 표현하고 싶었는 데 ㅠㅠ 이걸 쓴 나만 이해할 수 있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듯한 독후감ㅋ 킁~ 그래도 여하튼 썼다는 데 의의를. 인상적 문장은 나중에 추가할 예정. 가을맞이 사흘에 한권 읽고 이틀에 밀린독후감 한 편 쓰기 시전중인데 쓰는 건 역시 너무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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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8-10-21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문단 너무 공감되네요. 저도 대학 때 여수의 사랑, 검은 사슴 읽으며 그 축축 처지는 세계가 아리까리했는데...그땐 아직 열릴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공장쟝님 글 읽으니 다시 시도할 용기가 생기네요-

공쟝쟝 2018-10-22 16:35   좋아요 1 | URL
오 검은사슴... 좀 쉬었다 읽어야 겠어요 크크~!!
 
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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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게이 문학이라고도,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정리 할 수 있겠지만,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구구절절 표현한 글이라 말하고 싶다.
사랑을 쓰기 위해 글을 썼다기 보다는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p.217)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모든 것이 그로 수렴했듯, 사랑이 끝나가는 지금도 그를 생각하는 에너지는 최고조로 치닫는다.
그와의 사랑이 끝났다고 예감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쓰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를 차갑게 식혀야 했고 동시에 그를 다시 한 번 사랑해야만 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는 나를 믿을 수 없었고, 그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지연시켜야만 했다.
글쓰기에 있어 거리감의 상실이 언젠가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것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정념에 휩싸이지 않고서는 글을 썼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고, 정염없이는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헤퍼지지 않고는 도무지 버티질 못했다.”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의 추측이 아니라 어쩌면 진실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쓰는 동안 만큼은 다시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간 그 역력한 흔적들이 보이니까.
글과 소설 속의 ‘나’와 작가의 거리감이 너무나 찰싹 달라붙어서 당황한 건 오히려 읽고 있는 나였다.

솔직히 -‘퀴어’라는 코드를 빼 놓는다면- 소설 속 ‘나’들의 연애사는 달가워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지금보다 다섯살 어렸다면 모르겠다.) 친구라면 한대 쥐어박았을 거고 고나리질도 서슴지 않았겠지. 너의 박복을 탓하지말고, 휘발되는 정욕의 관계들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지니.

하지만, 소설로써 항변하는 그의 말들
“ (p.187) 어쩌면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불능일지도 모른다. 전형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협소하게 뜻을 재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사전의 기능에 역행하는것은아닐까? 혹은 사랑에 보편을 요구하고 정의하려는 것은 언어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닐까?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정의되지 못한 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 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선문답처럼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에 나는 동의하기로 한다. 더군다나 주인공이 내 친구도 아니므로.

소설을 읽고 그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작품에도 등장하는 ‘세월호를 가지고 일인칭으로 쓰기’라는 과제는 작가가 직접 겪은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제가 그런 과제를 받았고,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어쩌면 제가 첫 번째 작품집에서 저 자신에게 집중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타인을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저에 대해 자폐적으로 쓰는 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편협하단 얘기를 들을망정 내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사건이었죠. ˝ -연합뉴스 인터뷰중에서-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까지 내밀하게 자신에 대해 사랑에 대해 쓸 수 있었구나. 너무나도 솔직한 글쓰기. 그리고 쓰는 것에 대한 사랑. 사랑에 대해서 쓰려 하는 글. 지어는 글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 같은 그 삶의 방식 마저. 수긍되어 버린 인터뷰.

비슷한 구조의 짧은 단편들이 반복되어 읽는 동안 갸웃갸웃 하긴 했지만. 아직은 쓸 것과 사랑이 너무 많다는 작가의 다음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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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마세요 [웃는 남자]
웃는 남자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6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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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은 좀 힘들었지만, 하권은 무척 재밌게 거의 한번에 파파박 불태웠다. 스스로 읽어낸 게 너무 장해서 독후감을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오늘 책갈피 꽂은 곳을 중심으로 다시 읽는데, 다시봐도 자꾸 심쿵(!)한다.
아니, 뭐 이렇게 글을 잘썼어?!?! 하면서..



🤧빅토르 위고 할아버지, 상권 읽으면서 프랑스의 TMI라고 피곤해 했던거 사과드릴게요. 근데, 이 소설 말예요.. 칠순 다 되서 쓴 글 치고 너무 리비도 폭발 아닌가요? 뭣도 없는(?)장면을 이렇게 유려하고 야하게 쓰시면 어떡합니까.

“척추에는 그 고유의 꿈들이 있다. 그는 아무렇게나 발길을 옮겨 놓으며, 인적 없는 곳에서 흔히들 그러하듯, 되는 대로 몸이 흔들거리게 내버려 두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횡설수설하기가 용이하다. 그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그는 그것을 차마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로 향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침대로 향하고 있었다. 별들이여, 그대들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 (...)
사람들은 왜 연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까? 사로잡힌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남자는 한 여인의 영혼을 통해 포로가 된다. 그녀의 살을 통해서도 포로가 된다. 때로는 영혼보다 살을 통해 더욱 꼼짝 못하는 포로가 된다. 영혼이 정인이라면, 살은 안주인이다. (...) 살이란 미지의 것의 표면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살이 수줍음으로 도발을 자행한다. 그보다 더 큰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없다. 그 뻔뻔스러운 것이 부끄러워한다. 그 순간에 그윈플레인을 뒤흔들며 그를 붙잡고 있던 것은 표면에 대한 무시무시한 사랑이었다.

200년 후에 태어났으면, 위고 할아버지는 완전 거장 영화감독 되셨을 듯. 일단 주인공 외모부터 너무 시선강탈(입이 찢어진 웃는남자라니!!)이고요, 주연급 조연(?)인 조시언 여공작은 왜 양쪽 눈 색깔 마저 다른 설정인건데요.
곱씹어 상상할수록 그림이 너무 좋잖아!!😭

“...그윈플레인은 푸른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하늘의 시선과 지옥의 시선 앞에서 차츰 넋을 잃었다. 여인과 남자는 서로에게 음산한 황홀경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홀리고 있었다. 그는 흉측한 모습으로, 그녀는 아름다움으로, 즉 두 사람 모두 전율할 공포로 서로를 홀리고 있었다."

평생 책상에서 글만 쓰셨을 것 같은 분이, 연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부분은 또 어찌나 찰지게 묘사하시는지.. 흑.. 말라가는 연애세포가 다 촉촉해졌음.🤤

무엇보다, 정말 적절히 터져주시는 극적인 연출과 찰진 대사.

“모든 상원 의원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노인, 워턴 백작 토머스가 기겁한 듯 벌떡 일어섰다.
「이게 무슨 일이오? 누가 저 사람을 회의장에 들여놓았소? 즉시 저 사람을 내치시오.」
그렇게 고함을 치더니, 그윈플레인을 거만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누구요? 어디에서 나오셨소?」
그윈플레인이 즉각 대답했다.
「심연에서.」


심연!! 심연에서!!
그로테스크한 얼굴로 잉글랜드 피어들 놀래키며 등장해서 치는 대사.. 200년 전 연출이라 하기엔 너무 세련된 것 같다.

그뿐이게. 막 얽힌 것 같은 플롯인데 나중에 여기저기 던진 떡밥들은 다 제대로 결산하시고, 반전까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TMI라고 대충대충 읽다가는 큰코 다칠뻔. 아, 이 사람이 그사람이았어? 그 내용이 이것땜에 나온 거였어??

뭐지?!?! 이 소설?!?!
대문호의 까오란 이런 것 인가...!!

*

“경들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경들께서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그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헐벗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윈플레인.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공간에서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하지만, 그의 말이 결연할수록 의회장에 앉은 귀족들은 박장대소한다. 기형으로 변형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사실 울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엇을 보고 웃었던가? 그의 얼굴에 새겨진 웃음을 보고 웃은 것이다.
그가 영영 그 흔적을 간직하게 된 가증스러운 폭력, 지워지지 않을 즐거움의 표시로 변한 훼손, 압제자들 밑에 짓눌린 백성들의 거짓 만족감의 영상, 고문을 가해 만든 기쁨의 가면, 그가 얼굴에 달고 다니는 냉소의 극치, 국왕이 그에게 저지른 범행 증명서, 백성 전체에게 왕권이 저지른 범죄의 상징, 그것이 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그것이 그를 짓눌렀다. 그것은 분명 망나니를 규탄하는 고발장이었건만, 희생자를 단죄하는 판결문으로 변했다.
(...) 그들은 기분이 좋았을 뿐이다. 그들은 그윈플레인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배를 갈라 간과 심장을 뽑아 내고, 내장을 몽땅 그들에게 보였건만, 그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이러했다. 「코미디로군!」 비통한 일은 그가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서운 쇠사슬이 그의 영혼을 묶고 있어서, 그의 사유가 얼굴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 안면의 왜곡이 그의 영혼까지 미쳤고, 그리하여 그의 양심이 분개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양심의 말을 부인하며 낄낄거렸다.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는 〈웃는 남자〉, 눈물 흘리는 세계를 떠받치고 서 있는 카리아티데스였다.”


책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일지도 모르는
이 연설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다.
웃어야만 하는 형벌이라니. 가혹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백성들은 그윈플레인처럼 웃음(감정노동)이라는 형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음모냐고? 불평이 곧 음모이다. 무엇이 범죄냐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범죄이다. 비참함은 스스로를 감추고 입을 다물지니, 그러지 않을 경우 비참하다는 사실 자체가 대역죄이다.”

*
극적인 장면들, 시 같은 대사들, 매력적인 인물들.
문장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 특유의 블랙유머.
장황한 듯 하지만 나중에는 다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되는 설명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풍자와 비평.

어렵게 읽고 나니, 왜 대작인지 알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읽고 싶은 모처럼 읽어낸 고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
덧, 다 읽고 아쉬워서 영화(2013년 개봉한거)봤는 데.. 영화는 그냥 보지마세요. (뮤지컬은 안봐서 모름)



콤프라치코스는 콤프라페케뇨스처럼 스페인어인데, 복합어로 〈어린아이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콤프라치코스는 어린아이 장사를 했다.
아이들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그들을 훔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훔치는 일은 또 다른 사업이다.
그 아이들을 무엇에 썼을까?
괴물을 만들었다.
왜 괴물을 만들었을까?
웃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은 웃기를 원한다. 왕들도 마찬가지이다. 거리의 광장에는 곡예사가 있어야 하고, 왕궁에는 어전 광대가 있어야 한다.

흔히 밤이 내린다고들 하지만, 반대로 밤이 피어오른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어둠이 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절벽 아래쪽에는 이미 밤이었으나, 위쪽에는 아직도 낮이었다.

살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대리석이 아니라는 데 있다. 팔딱거리고, 전율하고, 홍조를 띠고, 피를 흘리는 것, 그것이 살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또한, 딱딱하지 않되 단단하고, 차갑지 않되 희며, 고유의 떨림과 결점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살의 아름다움이란, 그것이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대리석은 죽음이다. 살은, 그 아름다움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경우, 벌거숭이가 될 권리를 갖는다. 살은 눈부심을 너울 삼아 그것으로 자신을 덮는다. 벗은 조시언을 본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팽창된 반짝임을 통해 그 조각상을 보았을 것이다.

데아는 빛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이었고, 그윈플레인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이었다. 분명 두 사람은 절망한 이들이었다. ... 두 슬픔이 서로를 흡수하면서 극치의 경개로 진입하고 있었다. 추방된 두 존재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 공백이 결합해 서로를 채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없는 것으로 상대방을 지탱했다. 한 사람의 가난으로 다른 사람이 부유해졌다.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보물이 되었다. 만약 데아가 소경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그윈플레인을 선택했을까? 만약 그윈플레인의 얼굴이 흉측한 기형이 아니었다면, 그가 데아를 선택했을까? 그가 불구를 원하지 않았을 것처럼, 아마 그녀 또한 기형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윈플레인의 용모 흉측한 것이 데아에게는 얼마나 다행인가! 데아가 소경이라는 것이 그윈플레인에게는 얼마나 큰 행운인가! 천우신조로 이루어진 그 배합이 없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서로에 대한 경탄할 만한 욕구가 그들의 사랑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윈플레인이 데아를 구원했고, 데아가 그윈플레인을 구원했다. 비참함끼리 만나 서로 집착하는 현상이었다.

그윈플레인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이들의 지옥으로 이루어졌군요.」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두 암흑이되, 충만한 적막 속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영겁의 세월이라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려워하던 별이 앞에 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별이 아니고 하나의 세계이다. 미지의 세계이다. 용암과 이글거리는 숯불의 세계이다. 한없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삼킬 듯한 경이로움이다. 그녀가 하늘을 가득 채운다. 오직 그녀밖에 없다. 무한의 밑바닥에 있던 석류석, 멀리서 볼 때는 금강석이던 그것이, 가까이에 와서는 도가니로 변한다. 우리는 그 화염에 휩싸인다.
그리고 낙원의 열기에 타올라 우리가 연소되기 시작함을 느낀다.

나를 짓밟아요. 그러면 나를 더 사랑하게 될 거예요. 나는 그 사실을 잘 알아요. 내가 왜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는지 알아요? 당신을 멸시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나보다 하도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주제단 위에 모시는 거예요. 높은 것과 낮은 것을 뒤섞는 것, 그것이 곧 카오스인데, 나는 카오스를 좋아해요. 모든 것은 카오스로 시작해 카오스로 끝나지요. 카오스가 무엇이죠? 하나의 광막한 더러움이에요. 또한 그 더러움으로 신은 빛을 만들만들었고, 그 수채 구멍으로 세계를 창조했어요. 당신은 내가 어느 지경까지 타락했는지 몰라요. 진흙 속에서 별 하나를 빚어 보세요. 그것이 나예요.

그윈플레인은 자신의 운명이 폭소에 영영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곳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있되, 가루가 되면 영영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것은 처한 장소에 따라 좌우된다. 그린박스에서는 성공이던 것이, 상원에서는 추락이었고 참사였다. 그곳에서는 갈채였던 것이, 이곳에서는 저주였다. 그는 자신의 탈 이면과 같은 그 무엇을 느꼈다. 그의 탈 한쪽 면에는 그윈플레인을 받아들이는 백성의 공감이 있었지만, 다른 쪽 면에는 퍼메인 클랜찰리 경을 배척하는 세력가들이 있었다. 한쪽 면에서는 인력이 작용했고, 다른 쪽 면에서는 반발력이 작용했다. 그러나 두 힘 모두, 그를 어둠 쪽으로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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