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48) 상상적인 이미지란 죽음의 그림자이고, 상상계란 꿰매 만든 죽은 인형의 세계다. “이것은 나다”라는 순전한 기쁨, 이미지가 찬란하게 곧게 서 있는 기쁨. 여기에는 한 치의 오점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거울에 비친 “나”는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어디인가 죽어있다. 이 거울상으로서의 자아 이미지와 맺은 상상적 관계를 타자에 전가해도 마찬가지다."
라캉의 #상상계 혹은 거울단계에서 비로소 갖춰지는 ‘자아’의 개념의 기원에 대해서 읽다 보면, 인터넷-SNS-메타버스라는 (일종의 상상계적) 공간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뜨끔뜨끔하다. (우리가 현실이라 칭하는 이 모든 공간 역시 한 꺼풀 벗겨보면 픽션이라는 사실 역시 라캉의 픽션이 알려주는 신랄함이지만.)
나로서는 #비비언고닉 을 통해서 좀 빠져나온 부분인데… 읽고 쓰는 자아(치명적인 상상계다.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됨)와 나 자신의 분리랄까. 나는 블로그 속 나 자신의 이미지에 탐닉한다. 나의 천재임을 막지 마ㅋㅋㅋ 이러면서. 읽고 쓰는 나로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지만, 정말로 되게 똑똑해 보이는 걔가 나였으면… 진짜 나였으면 할 때가 있다. (현실의 나는 설거지를 밀리고, 이건 충동구매란 걸 알면서도 과자에 손을 뻗는 가여운 탄수화물 중독자일 뿐…)
아, 결국 써버리고 말았네. 이거 비밀이었는데. 나 사실 천재 아니다…. 그래도 천재에만 동일시 하는 이걸 다 알아먹는 얘(공쟝쟝)가ㅋㅋㅋ 진짜 나였으면… 할 때가 있다. 먹고사니즘만 남아있는 심심한 내 인생에 어떤 환상, 집착할 만한 자기 이미지 하나쯤 들여다 놓고, 수시로 꺼내보며 나 이쁘지? 나 좀 그래도 이쁘지 않나?하는 게 뭐가 나쁘냐며. 다들 그러고 살잖여.
그런데 가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걔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거다. 님 아님. 백설공주가 짱임. 이 무슨 날벼락? 빡쳐서 독사과를 들고 쫓아간 마녀를 이해한다. 그러나 내 안의 질투 심한 미운 마녀를 ‘상상계’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또 가둔다. 응. 나오자. 그리고 심심하면 재미진 거 없나 또 쳐다보고. 쫑알쫑알 이렇게 적으면서 나만 알아보는 내 가능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들의 판타지들을 탐닉하고, 고정시키고 싶은 자아 이미지에 매료되는 것과… 내가 그럴듯한 판타지를 만들어 보여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작업이라고.
사사키의 말대로 “(각주-806)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써보지 않으면 모른다. 친구들에게 (실은 나 자신에게) 언제나 강조한다. 쓰고자 하는 그 욕망을 귀하게 여길 것. 그 욕망에 매일 적당히(ㅋㅋㅋㅋ 이게 문제임 홀랑 다는 안됨) 투항해버릴 것.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다. 그만큼 쓰고 싶다와 쓰고 있다는 완전히 다르다. 그건 정말로 특별한 욕망이고 와따시의 욕망은 타협을 모르지.
p. 46
<인판스>는 여기에서 비로소 “자아”를, “자신”을 획득한다. “이것이 나다”라는 기쁨과 함께, 그리고 바로 “내 이미지”의 “매혹”과 함께 절단된 신체는 해소된다. 정신분석 용어로 말하자면 “동일화의 과정, 나르시시즘의 과정, 애착의 과정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자기 모습에 매료되고, 자기 모습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것. 즉, 자기 모습에 상상적으로 동일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아의 기원이다.
읽고 쓰지 않았던 시절의 나를 종종 ‘인판스’에 집어 넣고 읽는 것은 꿀팁이자 나의 읽기 방식이다. 나는 그렇게 내 멋대로 라캉을 읽은 사사키를 읽는다. 나는 자주 라캉의 개념을 “쓰기에 대한 욕망”으로 바꿔서 읽는다. 그렇다면. 푸코의 이 말 역시 맞다. 라캉 읽기의 불가해함의 기능이란 “(28) 읽는자가 읽음을 통해서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었음을 발견하도록, 라캉은 자신의 발언과 문장을 설정해 놓았다” 아직까지는 라캉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반항으로 고집쟁이인 푸코를 좋아한다. 책을 다 읽고나면 또 바뀔지도.
915페이지, 오늘부터 50페이지씩
꼬박꼬박 바지런떨며 읽어야함 📖
아 걱정이다 또 천재 될까봐… 🤦🏻♀️
사사키의 푸코, 사사키의 라캉, 그리고 르장드르.
스따또!!
“(16)따라서 처음부터 책 전체의 구성을, 그 논지를, 그 논리를 명칭한 도식으로 뇌리에 떠올릴 수 있다면 책을 쓸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안다면 왜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것을 안다는 음습한 환상에 계속 취해 있을 것이라면. 이는 지식의 복사에 불과하다. 오만한,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지식의 ’교수‘다. 그러나 이런 것이 과연 쓴다는 행위일까?”
점점 ‘쓰는 행위라는 도박’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작)독후감이지만 나도 읽고 쓰는 사람.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걸고 있다. 기꺼이 검은 오류들을 떠받칠 하얀 공백에 의지하면서. 이 시각의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여기는지 모른다.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끝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