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스카 책상에 앉았다.
내일이 기간 만료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또 과신하여 넘치게 끊어 놓음. 정확히는 할인 가격 혹해서 끊어 놓고 자주 못 옴.)
읽기 버튼 친구가 #어떤글이살아남는가 의 이 문장을 공유해 주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오고가는 언어의 대다수는 ‘전해지는 언어’가 아닙니다. ‘평가를 받으려는 언어’도 아닙니다. 단지 ‘나를 존경하라’고 명령하는 언어입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에는 일정한 비율로 ‘머리좋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은 다양하더라도 메타 메시지는 하나뿐입니다. 바로 ‘난 머리가 좋으니까 날 존경하도록 해’라는 것입니다. 메시지 차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또 퍽 훌륭한 내용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메타 메시지는 슬플 만큼 단순합니다. ‘내게 존경을 표하라’. 그것뿐입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306쪽)”
요즘 나의 읽기 방식(사는 방식)은 이러하다.
1. 일단 글의 힘을 믿는 종족이 바로 저자라고 생각하여 기본적인 신의를 가진다.
1-1. 이 역시 우치다 선생에게서 배운 것 중에 하나인데, 나를 대상으로 해서 쓰이지 않은 글(예를 들면 <말과 사물>ㅋㅋㅋ)에 대해서는 쫄지 않으려고 노려본다. 번뜩. 너는 내가 언젠가는 정복ㅋ 한다. 물론 그 만큼 읽어서.
2. 저자를 존경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기에는 개인적 사연이 있다. 정신분석 조금 섞어 쓰면 내 인생은 존경할 만한 아버지를(가부장…) 찾아 헤매다 일정 정도 망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지 어른이 되지만, 딸들은 어머니를 죽인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일단 나 먼저 죽이고 아들로 변신! (응?)] 30대 전까지는 대체로 젠더화된 존경이었으나 페미니즘을 만나고부터는 여남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고 나니. 나 권위에 지독히도 약한 타입이지만, 권위 있는 저자 라캉이 인간 원래 그렇다고 알려줘서 겨우 살았다. (ㅋㅋㅋㅋ)
어쨌든 읽는 스스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자와 나는 친구이다. 평등하다. 대등하다. 너만 천재냐? 나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천재다. 라고. 잘 모르겠으면 건너뛴다. 건너뜀의 %가 너무 심하면… 아직 열리지 않는 책임. 포기. 기실 독서란 기력을 빼는 일이라. 기운남겨 잘 읽고 싶어져서 포기하는 책이 훨씬 많다. #잔인한낙관 과 같은 계열(?)의 책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천재라고 생각한다. 미친 사람 같겠지만 그렇다. 왜냐면 나는 정말로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전에는 내가 이상하다. 미쳤다. 미쳐가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울했다. 그런데 그게 가끔 세상이 미친 부분도 있긴 있어서. 뭐 정확히 딱 나눌 순 없지만.
페미니즘을 읽을 때는 점점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안 읽고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문장을 꼭 이해해야만 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그걸 읽어야 이다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서. 그 문장을 이해하게 된 날이 왔다. (감사합니다. 정희진 선생님)
펜을 가지려는 여자 사람에게 ‘너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라는 가까운 사람의 (주로 남의편) 말은 인류 오천 년 가부장제의 가스라이팅이다. 그 말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끔은 (나를 만들어온) 전 세계를 따돌리는 기분이었으므로 나는 나를 가스라이팅했다. 나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 천재다. 이 여자 천재들을 이해하는 찐 천재.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데. 아렌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천재인 걸 알았던 것 같다. (출처가 그래픽 노블이라서 실제로 그랬는지는 확인못해줌) 효과가 있었다.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것보단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게 즐겁고 편했다. 하지만 대화할 사람들이 점점 사라진다. (소통 불가능. 그런 의미에서 천재와 광인은 같다ㅋㅋㅋㅋ)
그렇게 나는 어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 같다. 휘발되는 대화만으로는 충족이 안되는, 읽기와 쓰기가 있는 세계. 글씨의 힘을 믿는 세계. “(7)우리 자신이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세계. 이곳에는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고립된 내가 그들에게 (혼자) 느끼는 애정은 어마 무시했다. 왜 그걸 이제껏 몰랐는지에 대한 엄청난 억울함(+이면의 열등감)은 옵션. 지금은 애정의 강도도 억울함도 반반 섞여 용해되었다. 나는 다른 세계(텍스트라는 상상계)에 가까스로 안착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긴 인생을 위해서 영어를 읽고 싶고, 살아남는 글의 비결도 알고 싶으며, 인공지능이 나의 읽고 쓰기를 어떻게 바꿀지가 무척 궁금하다. 책 앞에서 내가 얼마나 설레는지를 알면… 사람들은 부러워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설렘을 자랑하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는 신도 부러워하는 종족이 책읽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라고 쓴다. 신을 잘 알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메타 메시지 - 나를 존경하라.
존경의 마음을 품지 않는 (언젠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 문장을 첫 문장으로 하고 싶었다. “존경은 담배보다 해로웠다.” 그런데 아마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다.) 독자가 된다는 것은 (그게 일견 지적인 허세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 내부에는 열등감이 출렁이고 있을지 모른다) 우치다 타츠루가 힘주어 쓰는 “어른이 된다”라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가끔 어떤 저자들을 만나면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싶고 내가 아직 덜 자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지만.
어쨌든 내가 읽어 터득한 것은 사람(개인)을 존경하지 않는 방법이다. (조금 어려운 표현으로 나의 무력감을 개별 인간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존경 혹은 권위 때로는 이익/친함/다수/인정/대의의 함정에 걸려들지 않고 스스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 역시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글씨들에 의지해서.겠지만. 희진샘의 가르침에 따라 그걸 공부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내 인생의 하나뿐인 천재고. 특별히 ‘태도 천재’인데. 내가 읽은 천재들은 모두 공부를 했다. 그들의 업적은 모르겠고 태도는 베껴볼 수 있는 거 아니냐며…ㅋ
#로런벌랜트 가 <잔인한낙관>에서 이렇게 썼다. “(230)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상황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형식이 없을 때) 형식 없음에 느끼는 불안감으로 인해 —우리에게 아무런 형식이 없을 가능성은 우리를 어디든지 따라다니는데—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가르쳐 주면] 잘 배우는 사람이 된다.”
이런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나는 (잠깐 동안은) 잘 배우는 사람이다. 또 금방 까먹는 사람. 잊지 않으려 적어두는 사람이다.
덧, 기본적으로 (이퀄리스트인) 우치다가 꼰대라 생각하는 데. 그렇다고해도 나 꼰대 좋아합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꼿꼿한 꼰대라면, 아무래도 세상에 필요하지요. 잘 배우는 사람이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됩니다. 좋은 선생님 = 좋은 꼰대.
지금 우리 주위에 오고가는 언어의 대다수는 ‘전해지는 언어’가 아닙니다. ‘평가를 받으려는 언어’도 아닙니다. 단지 ‘나를 존경하라’고 명령하는 언어입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에는 일정한 비율로 ‘머리좋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은 다양하더라도 메타 메시지는 하나뿐입니다. 바로 ‘난 머리가 좋으니까 날 존경하도록 해’라는 것입니다. 메시지 차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또 퍽 훌륭한 내용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메타 메시지는 슬플 만큼 단순합니다. ‘내게 존경을 표하라’. 그것뿐입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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