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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낙관
로런 벌랜트 지음, 박미선.윤조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24년 6월
평점 :
“(225) 꿈은 안이한 낙관처럼 보이는 반면 실패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29) 나의 이야기를 지배했던 것은 잘 살아가는 환경이 아니라 실망, 경멸, 위협으로 이루어진 일반적 환경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폭력과 사랑 둘 다를 비개인적인 것으로 재개념화함으로써 사람들에 대해 애착심을 품는 나의 능력을 지켜냈다.”
아이러니로 점철이 되어서 고백인지 비평인지 자기 고백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해서 혼란한 (나의 상처는 투명하고 이해가능하게 말해져서는 안된다. 이해받고 싶지만 그게 아무나여서는 안됨.)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페이지에서 로런을 나의 동족으로 삼기로 했다. 으아악!! 투항! 🏳️🏳️
읽기를 통해 느끼는 은밀한 친밀감에 대해서 이토록 세심하게 파헤쳐 고백해버리면… 이해와 욕망과 방어기제와 윤리에 대한 (나만 알고 남은 모르면 좋겠는) 나르시시즘을 막막 써 버리면…. 못 참겠다. 여러분… 이게 이게 내 쾌락입니다. 자기의 정수리 냄새를 굳이 맡아보는 종류의 것이라고나고나아??? 🌝 쾌락은 왜왜 약간의 죽음 충동을 포함하고 있는 걸까. 뒤통수가 뜨끈해지는 느낌.
꿈과 환상, 오인과 투사의 읽기를 안이하다고 싸잡아 수치 주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오독에 대해 자주 힘주어 말하지) 결국 당신들의 실패하고 마는 읽기를 저주와 섞어 당부드리며. 나는 나의 오독에 언제나 당당하다! 메롱! 친구들아, 멋대로 읽으세요. 그게 당신입니다. ㅋㅋㅋㅋ 나도 이게 나라는 것이 좀 문제 ~🙄
[0730 "읽기는 친밀성의 비개인성(로런 벌랜트의 용어)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행해질 수 있는 곳이다." 언제부턴가 내가 가장 상처받는 것이 친밀감을 느끼는 저자에 대한 신랄한 비평일 때.]
한동안 안 읽다가 다시 잡은 까닭은 동족 선언하자마자 점점 괴로워졌기 때문이다(섣부른 선언에 대한 후회랄까ㅋㅋ 동족 아닌 거 같아짐ㅋㅋㅋ).
이 책은 트라우마를 트라우마적으로 읽는 것에 대한 불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상처 이후의 일상을 견디는 개인 나름의 방법들. 가끔은 지나치게 뻔하고 빤한 규범적 도식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과하고 이상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정동들에 대한 해설.
4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가 얼마나 ‘퀴어’하지 않은 인간인지를 절감하게 되어 버리는 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경험이 그들의 경험이 아니므로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가부장 구조의 부분적 겹침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자.) 그럼에도 어렴풋이 이해해 볼 만하다고 느낀 부분들.
관념을 과대평가하고, 비판적 부정을 즐기고, 읽기에 애착심을 품고, … 그렇게라도 평정심을 누려보고자 하는. 뭐. 시작은 나의 평정심을 위해서였다 치더라도, 지금은 내 일상으로 굳어져 로런 표현대로 “다른 시간성”을 사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 까마득한 상태로 어쩌면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의 형식으로 지내고 있는 중이고, 그것이 견딜만하다는 데에서 오는 일종의 해방감에 내심 즐겁기까지 하다는걸, 과거의 나는 알랑가몰러….
“(239)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 즉 취약성은 우리를 가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러니까 생존은 견고한 정체성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부드러운 나머지를 벽장에 숨기는 것에 달려 있다.”
#잘숨기자 ㅋㅋ
내면을 갖추는 ‘사치’에 대해 지적해 보고 싶었는데, 그게 나의 습관적인 재는 방식이라는 게 좀 빤하게 느껴져서 그렇게는 이제 그만 읽어야지 함. 도식 정비 삐비비비비빅——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영화 한 편을 땡겼고.
모처럼 기운이 남는다.라기 보다는 끝나지 않는 열대야를 조용한 에어컨 아래서 보내기 위해 스카. 출석. 어려운 거 (호호) 읽어야지.
“나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영화 #로제타 에게 이입하는 건 너무 수월해서 놀라웠다.
정상성에 대한 갈망과 집착, 어떻게든 내 힘으로 쓸모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음. 일자리와 친구. 최소한의 사회적 소속감. 너는 왜 그러느냐 그랬느냐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 나도 내게 해봤는 데. 어떤 기반이 희미해지면 다른 부분은 선명해지길 원하는 것 같다. 영화속 로제타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했던 것이며, 지금의 내가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두려워서 언제나 너무 과했다. (로제타처럼….)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써본 고로. 지금의 나는 어딘가 과한 사람들(곧 나)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생존방식에 눈을 흘기며 저렇게까지?를 입에 담는 한갓진 사람들에게 주눅들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던 사람들의 지당하신 훈계는 가뿐히 반사. 가끔은 훈계 아닌 좋은 말도 발작하며 반사.
좋은 말이 잘 안 받습니다. 이런 나의 과함은 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지만서도… 그렇다. 지금 나는 잘난 척을 하고 있다. 나는 잘났다. 나의 잘남을 아무도 안알아주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가스라이팅을 해서 이런 나를 알아보는 당신은 천재! ㅋㅋㅋ
나는 잘났습니다. 일 끝내놓고 밤 아홉시에 목적없는 공부하러 스카 오는 멋진 잘남ㅋㅋㅋㅋ 요즘 텍힙 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이제 세상은 나의 것이 되는 것이며…(망상)
“(299) 낮은 임금에 재미없는 노동이라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은 로제타에게는 거의 유토피아적인 것에 가깝다.”
“(305) 이 장은 능력주의라는 환상, 누릴 자격이 있다는 환상, 그리고 이 환상이 가정, 직장, 소비 세계에서 친밀성 실천과 맺는 관계를 다룬다. 이 장은 충만합과 희소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너무나 많은 임시 고용 노동자가 우연히 구하는 너무나 많은 고약한 일자리, 결코 충분치 못한 돈, 결코 충분치 못한 사랑,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휴식, 그럼에도 만연한 인정사정없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장은 호혜적 관계를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규범적인 환상적 삶과의 근접성이 어째서 우리 시대 경제적 밑바닥에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 계속 살아가기[라는 과제]를 활성화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자산*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MZ라는 호명 보다는 저성장(혹은 신자유쥬의)이 강제하는 만성적인 실업과 비정규직이 일하고 싶지만 일할 수 없는 인간(특히 여성), 어떻게든 사회에 한 뼘이라도 내 있을 자리를 만들어 내려는 과정에서 망가져버리는, 그게 아니라면 망가지지 않기 위해 삶의 도전을 유예하는 그런 사람들의 조건 분석이 나에게는 필요했고. 내가 남들 따라 품었던 삶의 전망에 대한 포기안됨(사실 거의 포기 다 됐는데. 그냥 가끔 부러움이 올라오는 거 보면 다 포기는 안되었나부다 한다.), 너무도 쉽게 입으로 내뱉게 되는 이미 습관인 능력주의가 잘못된 인식이라면 왜 잘못인지를 설명해주기를 바랬다. (근데 어려워. 정말 너무 어려워.)
그리고 책으로 설명 받는 중이다. 보다 첨예했던 1세계의 결론같은 교훈들.
그리고 어제 결국 패배한 독서는...
로런 선상림 버틀러가 둔탁하게 넘어간… 규범, 권위에 대한 집착 혹은 애착심을 설명하시고저…
(그래요, 나 이거 궁금해요. 나는 그런 나와 화해하고 싶어요.. 불가능할지라도….)
너무 흥미로운데 졸리다…🥴 자야징! ㅋㅋㅋㅋㅋ
오늘도 무사히 안지치고 일을 마치고 후련하고 가뿐한 건강함으로 완독에 체크할 수 있기를 바라며.
포스트포드주의의 긱워커 청년 아니 중년은 이만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