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걸 대충 알려주고 때려 맞추라고 하면서, 얼렁뚱땅 다른 관계자들의 핑계를 들어 제 맘을 읽어내라고 하는 클라이언트 즉,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가끔은 그걸 해야 한다. 아니, 언제나 그걸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돈이 나오니까.

서로 만족하는 거래는 거의 환상에 가깝다. 그러나 2024년의 서울에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거래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어떤 (자급의) 능력을 잃었으니까. 이 상황을 삶의 조건의 기본 값으로 놓더라도 지나친 능력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실은 다른 능력을 발달시키지 않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하는—을 자주 본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나를 잘 책임지고 싶고, 기꺼이 내가 기쁜 돌봄을 나누고 싶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싶지가 않다. 

궁극적으로는 “돈을 벌고 싶지 않다” 즉, 교환가치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향유하고 싶다. —대체로 그건 돌봄이고, 노동이고, 작업이고. 즉 기쁨이고 공부인데—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일과 사랑, 목적 자체인. 하지만 사회적 분업의 결과로 우리는 점점 무능하게 되어버렸으니. 화폐로 떼우는 거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자립적이고자 하는 내 나름의 실험(?)들이 오만한 건 아닐까. 고민했었다. 대세를 따라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에게 기대는 것을 너무 두려워(싫어) 하는 무의식의 발현 아닌가. 문득 오늘. 어떤 능력을 좀 덜어내서라도 외려 다른 능력들을 발달시키는 데에 더 적극적이고 싶었던 거란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실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고 하는 그런 실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렌트 입문서를 읽다가.)




(아렌트의 '사이')


상호의존(관계)을 화폐로 대체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편감이었구나. (만나고 떠나보내온 숱한 가족❤️기업들이 생각나벌임.) 경제공동체인 그들 ‘사이’에서 정치란 가능했을까. 

내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사이’를 좁히는 일이고. 그게 정말로 ‘필요’해지면. 사이.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절박하게 되면 집착하게 되는.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타인과 나눠질 수 없는 영역이 분명있으니. 나의 다른 능력을 발달시켜야지. 그렇지만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는 잘 모른다. 어디까지 내어주고 어디까지 좁히고 어느 만큼 멀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 

나는 고독을 “구매했어야”했다.

‘사이in-between’의 거리와 공간을 (정치뿐 아니라 삶에서도. 우정에서도. 그녀는 그것을 이론화하고 그것을 지켜보려한 진정한 철학자다!) 강조하는 아렌트가 옳다고 느끼면서도… 어쩜 나는 매번 그 어려움에 (어려움의 이상적임에) 어딘가가 긁힌다. 

착취적인 관계 말고는 자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악귀처럼 들러붙는 어떤 계선 없음은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으며… 혼자보단 하나같은 둘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좋고 기실 고독은… 비싸니까. —‘사이’를 구축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특권 계층이 아닌가— 고독 혹은 사이, 어쩌면 사유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물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개념은 원래 그랬다. (public/private의 구분, 통상적인 구분과는 약간 다르다. 이 글에서 그걸 설명할 순 없고. 쉽게 읽는 한나 아렌트 부제를 달고 나온 나카마사의 이 책을 읽으세염ㅋㅋㅋ) 그리고 그러한 public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든 ‘사이 없음’이 근대의 폐해고.

생각을 좀 더 벼리고 싶다. 그러려면 ‘사이’(생존과는 상관없는 시간과 공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게도 ‘사이’가 중요해졌고. 매번 긁히면서도 아렌트를 닮고 싶은 까닭이겠지만. 



“(32)이 여성 작가들의 거리 두기―연대보다 고독을 선호하는 성향―는 감동·감정·정서(비록 기술적으로 감정과 정서는 감동과 다르지만)의 사이성을 소거하고자 하는데, 그 여러 다른 이유가 앞으로 각 장에서 기술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의 영역에 머무르면서도 이처럼 감정에 저항하는 태도는 20세기 중반 부상한 각종 진보적 사회운동과도 선을 긋는다. 진보적 사회운동들은 하나같이 정서적 유대와 집단과의 동질성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론적으로도 거부한 이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지지를 기대했던 집단 내부에서 ‘파리아pariah’(배척당한 사람)로 낙인찍혔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초반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On Revolution》은 시민인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출간되었고 정치적 삶에서 동정의 “파괴적” 효과를 신중하게 해부했다. (중략) 20세기 후반 사회운동이 공감능력이 갖는 치유의 힘을 연대를 공고하게 만드는 접착제이자 진보 정치학의 목적으로 권장하자, 이 여성 작가들은 반감으로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사회정의라는 목표가 아니라 그리로 가는 길이 문제였다. 독자들로서는 이런 구분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중에서”


​(부연하자면, 아렌트 특유의 ‘거리두기=사이’는 ‘공감’을 정치의 원리로 두지 않고자 한다) 

아렌트의 ‘복수성plurality’은 사람들 사이에 ‘사이in-between’라는 공간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중략) 한나 아렌트의 ‘사이’는 사람과 사람을 심적으로 결부시키는 끈인 동시에 거리를 설정한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거리를 설정한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나 동물적 충동 따위에 의해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매개로 인격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뜻이다. 언어에 의해 생겨나는 이 ‘사이’가 사람들의 사이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다양성을 낳는 기초를 이룬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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