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약속>과 같은 질문 방식이다. 감정은 무엇인가. 가 아니라 감정은 무슨 일을 하는가.
“(41)
감정은 단순히 ‘나’ 혹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다. 감정을 통해서 혹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대상이나 타자에게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서 표면과 경계가 만들어진다. 즉 ‘나’ 혹은 ‘우리’는 타자와의 접촉으로 형성되고 더 나아가 접촉의 모습을 취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몸의 표면surfaces은 타자가 남긴 인상의 효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surface’. 나는 타자가 남긴 인상을 통해서 개인의 몸의 표면뿐만 아니라 몸으로 형상화된 집단의 표면이 어떻게 모습을 갖추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다만 감정이 안과 밖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해서 감정이 그저 심리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라거나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제시하는 감정의 사회성 모델은 ‘동시에’라는 말로 에두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대상으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감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라는 ‘객관적 실재’가 [감정의] 원인이 아니라 효과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감정은 개인이나 사회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마치 대상인 것처럼 구분해 내는 표면과 경계 자체를 생산한다. 나는 감정이 여러 대상을 서로 구분해내는 경계와 표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45)
서로 다른 전통을 지닌 이론을 함께 엮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 이론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열쇠는 ‘무엇이 끈적이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이 책 전체에 녹아 있다. 이 질문은 어떤 면에서 더욱 익숙한 질문, 그러니까 ‘왜 사회적 변화를 성취하기 어려운가’ ‘왜 권력관계는 집단적인 저항에도 완고하게 지속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심리학 모델과 감정 사회학 연구에서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전제하게 되는 관점에 대해 아메드가 거리를 두며 내놓는 분석 틀은 감정이 지닌 ‘방향성 + 대상과의 접촉(관계맺음)’이다. 감정이 표면과 경계 자체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끈적인다’라는 말을 곰곰 생각했다. 나의 관계를 바꾸고 나의 몸을 바꾸고 나의 감정 반응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딱 달라 붙어 있어 끈끈하고 어려운 지에 대해서. 어쩌면 아직도 과정 중인 나는 그것을 쓰면서 가두기 위해, 사후적인 해석으로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다만. 책들을 읽다가 내가 만나는 어려움일지도 모르겠는(기존의 독서 습관을 바꿔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던) 부분은. 나였던. 나인. 나였을. 나일.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더욱 열렬히 동조하고 싶어했던 관계들과 온기들. (언제나 헤어지는 게 어렵다. 애초에 너무 붙으려고 하지 말라는 사람들의 만류를 나는 한가하게 여긴다. 현재의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어졌다는 상태와는 별개로.)
프랑스 엘리트 지식인들의 위선과 도덕적 이중성을 문제삼으며, 그들의 사유가 지닌 내적 타당성에까지 타격을 가하는 신자유주의(우파)자들의 수법은 ‘반지성주의’다 라는 지적(그렇다. 나는 기 소르망의 페도필리아 공작 때문에 푸코를 읽으려다 때려치운 전적이 있다. 그렇게치면 페미니즘도 그랬고. 나는 언제나 대중을 더 알게하려하지 않는 자들의 획책(?)에 놀아나는 무식한 독자인 것이다! 어쩌라고? 매번 말하지만 계속해서 인식을 깨트려야 하는 데 있어, 앞으로도 계속 할 예정이지만 그래도 적응 안될 때가 많아. 하여튼 개소리🐶를 경계하는 참다운 지성인의 태도를 연마하려면 폴 벤느의 책 개정판 후기를 읽으세요.)을 읽으면서는 되물었었다. 그렇다면 나의 도덕적임-_-;;은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이란 말인가?🤔 (흠흠. 한참 루틴 뭉개고 있던 반백수 주제에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패스.)
아무리 어떤 계기로 인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어쩌면 독서의 양과 질은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내가 길고 긴 그 역자 해제를 꼼꼼 읽은 까닭은 푸코를 옹호하고 싶었으니까.다. 애당초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푸코가 소아성애했냐고 안 했느냐고 만 궁금하고 그래? 아니면 말고. 하게 되었을 거란 소리.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지성을 연마시켜준 푸코는 나의 사랑. 트루 럽. 사랑은 나를 공부시킨다!! 😤 때문에 사랑에서 대상을 잘 만나야 한다는 언니의 지적은 백퍼 옳다. 사랑은 아아무나 하나. 아니 사랑은 아무와 하면 안 됨... 기왕이면 전 세계 엘리트 지식인들이 밀어주는 남자를 사랑하...(그만햇!)
그러니까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는 일련의 주장들을 머리로. 머리로만 이해하면서 와닿지 않았던 까닭.은 결국. 이론이 가진 정확성 보다는 이론이 보여주는 맥락 안에서의 마음🧡🩷. 마음으로. 어떤 정체성들은 정말로 나를 살려주는 것 같았으니까. (동시에 나를 질식시키며.)
깊고 복잡하게 사유하지 못함을 반지성주의라고 말하는. 나와 같은 (읽을 여력이 없었던) 대중들에 대한 어떤 <괴로움 없이> 논의 되는 듯한 ‘(너무 잘난)이론의 글’들이 조금은 아팠었다. (내게는 대략 짜증스러움으로 표현된다.) 받아들이기 싫은 감정을 일으켰다.
그래서 “(45)무엇이 끈적이는가” 라는. 아메드의 정동에 관한 문장들은.
나의 반지성주의를 (조금은 흔쾌하게) 인정하게 하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서도 어루만져 준다. 사람이 마음(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메드 식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내 몸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닌 물성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 내 감정은 오랜 기간의 내 삶의 역사가 축적된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무엇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언제나 더 구체적으로 ‘나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것이 우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옹호받는 느낌. 그의 연구는 계속 나를 훌쩍이게 한다. 하~ 완전히 투항한다. 정체성을 정당화하고 싶어서 안주하려 했던 나의 읽기는 반지성주의 맞다. (흥!!)
“(46) 감정에 주목하는 일은 개인이 특정한 구조에 투자하게 되는 문제에 답하도록 이끈다. 주체는 특정 구조가 해체되는 일을 자신이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일로 느끼기도 한다.”
나는 죽었고. 다시 살아난다.
짠!!! 다시 살아났다~!! ㅋㅋㅋ
아니 근데 사라 아메드 이야기하면서, 관습적 이성애 각본을 차마 다 못 버려서... 게이 남자 철학자만 사랑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쓰고 나니. 퀴어는 내가. 내가 퀴어다. 혼종은 내가 혼종이네. 어후. 한숨. 푹~
아마 올해의 책이 될 듯. <감정의 문화정치> 강추!👍🏻
퀴어 정치와 페미니즘 정치에서 애착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권력관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감정은 ‘끈적이며’ 우리가 투자를 철회하려고 할 때도 우리는 끈적이는 감정에 달라붙을 수 있다. 다만 끈적임이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은 당연히 존재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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