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 선물 받은 책, 노트, 텀블러, 과자, 초콜릿. 물성으로 표현되지만 그 안에 든 마음.
그러니까 내가 받은 인정, 이해, 존중, 배려, 사랑.
그러고 보면 올 봄에 읽은 <행복의 약속>은 나의 시간관념과 관계의 포인트를 바꿔버렸다. 오랫동안 나는 감정을 억압해서, 감정과 따로 노는 몸의 반응을 가지게 되었고… 거기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나에게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이 그 사람의 속성인 것처럼 규정해버리고픈 욕망에 시달리곤 했다. 그러니까. 내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읽고 써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게 권력이구나.
감정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재배치되기도 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있는 감정을 나에게 투척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고, 연대엔 서툴고 자원이 별로 없는 나는 나를 해명하는 데 기운을 쓰느니 나를 옹호하는 지식, 언어라는 무기를 더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보다는 비교적 정확하게 글을 쓸 수 있으며 이것이 무기임을 안다. 쓰거나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있다는 기운을 풍기는 것만으로도. 타인들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세상과는 조율해야 하는 몫이 있을 것이며. 모든 것을 써낼 수는 없다.
우리 집 냥에게는 없지만 인간이 인간이기에 행하는 억압이 있다면. 나의 감정(몸의 반응)을 말(언어)로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다. 그게 일상에서 언어가 없는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억압자가 될 수 있다. 그 긴장. 그걸 안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넘쳐난다.
이 책 <감정의 문화정치>를 읽고 나면. 올해의 발견은 사라 아메드가 될 지도. 하게 된다. 아마 나는 그의 연구에 깊이 감응할 수 있는 몸을 지닌 주체로 스스로를 만들어온 것일 테다. 속으로 짜릿해하며 외친다. 잘했어. 쟝쟝. 멋지다 쟝쟝아.
“(5) ‘감정의 문화정치’는 타자를 주체가 느끼는 부정적 느낌의 원인으로 지목함으로써 그 타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속성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부정적 감정을 타자 탓으로 돌리는 원인은 주류 집단이 주변부 타자들에게 가한 폭력과 차별의 역사 및 불평등한 권력구조이다. 감정의 문화정치는 바로 이러한 역사와 권력구조를 은폐한다. 이 은폐의 지점에서 타자가 부정적 감정의 원인으로 생산된다. (이것을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정동적 전환˝ 개념으로 발전시켜 논의한다.) 예컨대 주류 정치가 타인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이라고 말할 때 타인의 고통은 ‘우리’를 묶어주는 고통으로 전유 될 뿐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감정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적 인정과 보상을 대신하며 그 고통을 야기한 역사에 대한 반성은 사라진다. 이것이 문화정치가 하는 일이다.”
바쁜데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1일 1 페이퍼하고 있네.
이런 짤퉁한 글들도 괜찮나요? ㅋㅋㅋ
정동 경제 개념이 핵심인 아메드의 정동 이론은 감정이 권력의 규율기제이자 사회적 접착제임을 규명한다. 감정은 타자를 위협, 공포, 불안, 증오를 유발하는 주체로 생산함으로써 ‘우리’를 방어해야할 주체로 모아주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아메드는 공포와 혐오감의 정치 역시 정동 경제의 틀에서분석한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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