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 표지….
노출과 누드를 좋아하는 잠자냥 한테 지지 선언 받은 <에그 지지~> 책이 도착했습니다!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덜컥 선물해주신 분께 (잠자냥은 아닙니다) 심심한 감사를.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서론을 읽고 심각하게 즐겁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 생각보다 추하진 않습니다. 작아요. 모자이크 처리도 작아요.🙈 표지 땜에 안샀으면 어쩔 뻔!!!
서론 들어가기 전에 표지 안 본 눈을 산다고 댓글 다신 분들을 생각해서 보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안 본 눈 못산다.
내가 페미니즘으로 이야기되는 담론들 가운데 별로 안 내키는 개념이 두 개…. 아니 여러 개 있는 데, 지금부턴 사실 모르고 떠들 건데 이게 직관이라면 직관이다. 하나는 *폴리아모리(같이 엮어서 BDSM)*이고… 두 번째가 로지 브라이도티의 *유목적 주체* 인데 둘 다 제대로 모르는 채(전자는 모르고 싶고 후자는 알고 싶다에서 다르다)로 찜찜해 하는 까닭은 이렇다.
나. 라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나는 그것을 아주 잘 안다.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아모리(물론 그들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소유 감정에 기반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거라면?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개념 아닌가?... 하긴 사랑 역시 개념의 세계이지.)의 경우 기운 남아도는 능력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세계라고 생각 하게 된다. 폴리가 되려면 먼저는 아모리가 되어야 하는데 보통 관습적 이성애(이성애가 안낀 폴리아모리는 잘 모르겠다.)란 자본이든 매력자본이든 갖춰야지 성립이 된다는 현실(이게 현실 아닌가..ㅋㅋㅋ)적 조건에서 아모리가 힘든데 폴리?... 내가 원하는 사랑은 그건 독점/비독점의 문제라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오롯한 집중일 것이다. (일시적이라고 할지라도) 어쩌면 그건 ‘대체할 수 없는 관계’ 라는 지점에서 다소 낭만적일 수 있겠으나… 사실 나 자신을 내가 대체할 수 없는 만큼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는 게 뭐 어려울까도 싶다. 암튼 나는 나를 나눠쓰고 싶지 않다. (이것도 유용성의 측면이긴 한 것 같아서 검토해볼 것) 그게 지금의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내가 아닌 타인들이 독점적 사랑을 비판하든 말든 모르겠고 솔직히 그게 힙이고 페미니즘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현상은 좀 못마땅했다. (아직도 그런가? 암튼 내가 막 페미니즘 읽기 시작할 때 그랬다.) 사람은 자신을 속이기가 매우 쉽다. 서로를 속이지 않는 투명한 대화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에게나 가능한 것. 바쁘고 돈이 없는 일반적 현대인에게는 그것이 음음.
‘유목적 주체’의 경우 안 맞는다고 하지만 정작 삶은 누구보다 유목적으로 살 수 있는 난 생계형 엔잡러다. 어디든 노트북을 들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좋겠다~ 친구들이 물어보면 나는 빙긋 웃는다. 그럴 생각이 없다ㅋㅋㅋ 난 내 방구석이 우주에서 제일 좋음-인데다, 일할 때는 일만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겨 먹었다) 이런 내가 원하는 삶이란 *제발 하나만 해도 되는 삶*이다. 이젠 하나*만*해도 유지 되는 삶을 악이라고 칭하고 싶을 만큼(내가 하나만 하고 있다면- 분명 누군가 다른 몫을 대신하고 있을 것) 이걸 자꾸 자본주의와 엮어서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다. 여튼 이건 언제가 더 써보기로 하고 도티의 이 개념은 자칫 *나 자신*이라는 몸과, 감정적 에너지를 무리하게 운영하기 쉬울 것 같은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달까.
그런데 이 책에서 앨러이모가
“(16) 로지 브라이도티는 ‘지속가능한 생성 sustainable becoming”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를 이렇게 묘사한다. “매일의 삶에서 작고 평범한 실천에서 뿌리내리고 소박한 희망을 실천한다. 지속할 만한 변화의 문턱을 붙잡고, 유지하고, 지도를 그리는 단순한 전략이다.” 난 브라이도티처럼 희망적이지 않다. 이 책의 결론에서 주장하듯이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나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렇게 말해줘서 즐거웠다. 후후. 내 말이요. 지속 가능성. 제가 기운이 딸려서. 지속해야 하는 거 그만. 가능성 그만. 난 이제 그만 뿌리내리고 싶다. ㅋㅋㅋㅋ 유목하기 싫음. 무한한 가능성 너무 힘들다 ㅋㅋㅋㅋ 루틴 만들고 싶다. 그런데 밤새야 한다. 누군가의 근로 조건을 지키기 위해 나는 공백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면이 있다는 소리다. 암튼 이 부분 읽으면서 아 왕이모랑 역시 나 비슷한 걸까? 이러고 있다가 이 문장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들은 나체 시위 어쩌고 퀴어...동물...어쩌고... 또 유교걸인 내가 헉! 할 수밖에 없는 주장들이 있어서 일단 그 부분은 투비컨티뉴. 혹은 판단 중지. 더 읽어보고 생각하겠음.
좀 읽다 보니 도나 해러웨이랑 캐런 버라드도 나와서 나 좀 또 신남. (케케케케)
“(21)취약함의 반란으로써 ‘노출’을 이해하는 것은 추상적 동맹이기보다는 물질적 동맹을 수행한다는 뜻이고, 경계와 주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능력이 난처함에 처해도 그 난처함 가운데 거주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영락없이 신체적 존재라는 물질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벡이 논의하는 주권의 상실은 인식론적일 뿐만 아니라 존재-인식론적이다(존재-인식론이란 캐런 버라드가 사용한 단어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밀접하게 연관됨을 강조한 신조어다. 역주). 이것이 바로 내가 옹호하는 횡단-신체적 주체trans-corporeal subject다. 이 책에 있는 여러 글은 횡단-신체적 주체성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개진하고 있다. 횡단-신체적 주체성이란 신체가 장소로 확장되고, 장소는 신체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장소 안에 존재함을 극화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탈신체적인 서구 주체가 우월하다는 가정을 비판하고,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객관성이 가능하다는 가정도 비판한다.* 노출된 주체는 알지 못하는 물질과 세력에 의해 ‘항상 이미‘ 침투되어 있다. 윤리학과 정치학은 거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중략)그러나 나는 이러한 공연들을 단순히 퀴어나 페미니스트 환경론으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저항한다. 나는 각각 장들이 다양성을 지니도록 내버려 두고, 종합적인 이론의 지형도를 그리고 싶은 욕망을 절제한다.”
“(24) 21세기의 환경, 경제, 지구 정치학적 공포 때문에 현재와 미래에 존재하는 전 지구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주체를 위한답시고 탈신체화된 시스템이‘자원’을 보존할 수 있으며 ‘자원’에 대한 객관적인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믿는 허황된 신념이 확산되는 지금, 해러웨이가 오래 전에 썼던 글로 다시 돌아가 보면 유익할 것이다. 해러웨이는 "페미니스트의 객관성이란 주체와 객체의 분열과 초월이 아니라 제한된 위치와 상황에 따른 지식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앞으로 나올 장에서는 초월을 비판하고, 주체와 객체의 분열도 비판한다. 대신 신물질론적 노출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횡단-신체성’이란 개념은 명백히 해러웨이의 페미니즘적 인식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횡단-신체성은 자아의 견고한 위치성을 인정하고, 주체와 객체의 분열은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앎의 주체는 자신이 알려고 하는 객체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흐흐. 그러나 내가 가장 웃었던 건 고탄소 남성성임.
“(9)<노출>은 코비드19 팬데믹 이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 <노출>은 코로나 이후인 지금 색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개발에도 불구하고 노출은 여전히 우리 신체가 언제든지 투과될 수 있 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투과적 존재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원치 않는 바이러스의 투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팬데믹 중 얼굴에 마스크 쓰는 문제가 정쟁화되었다. 팬데믹 을 부정하는 보수 진영은 내가 이 책에서 명명한 "고탄소 남성성"을 주장했다. 즉 그들은 마스크 쓴 얼굴이 취약해 보인다면서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고, 마스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인데도 이 책임을 공격적으로 부정했다. (이 책에서 미국 특정 그룹의 고탄소 남성성을 기술할 때엔 이런 만화 같은 버전의 공격적 언사를 일삼는 사람이 곧 미국의 대통렁이 될 거라고 상 상하지 못했다.) *기후 변화를 부정하듯 팬데믹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비가시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 안전하고, 자아의 견고한 경계 안에서 안전을 보장 받고 있으며, 자신이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들은 취약함을 공유하기보다 남을 지배하는 데서 '힘'을 찾는 다. 그러나 팬데믹의 인식론적 불확실함은 특히 팬데믹 초기 과학적 정보가 뒤범벅일 때 인류세가 처한 광범위한 곤경을 확실시했다. 인간이 기후학적, 생태적 시스템을 망가뜨리면서 세상은 전보다 더욱 불확실해졌다. 인수 공통 질병이 증가하면서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이제 똑같이 위협 받고 있다.”
고탄소 남성성... 뭔가 저탄수..탄단지..생각이 나긴 하지만.... 고탄소 남성성... 이말 입에 착 달라붙네... 아후, 저 고탄소 남성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다..... 역시 난 스테이시 앨러이모가 좋은 거 같당!! 근데 먼저 신유물론 책 사둔거 읽어야 하는 데. 으윽... 일단 흥분을 좀 내려놓고 이 글을 적고 있는 이유는.
다가오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이 책을 살까 싶다.
내일은 노동절이고 나는 일을 할 예정이라 이 책도 살까 싶다. 소개 글 봤는 데 흥미로움.
........ 4월의 구매는 끝났고.... 5월의 구매를......... 미리미리....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뿌듯한 일요일....
나는 참 계획적이기도 하지!책의 맨 뒷 장에 표지 선택의 해설이 있기에 첨부합니다.
이 책의 그림 5로 삽입된 스펜서 튜닉과 그린피스의 작품 사진을 넣기로 결정했다. 이 사진에는 스위스의 빙하 위에 수백 명 의 나체들이 살아있는 조각처럼 서 있다. 이 사진은 차가운 빙하 위에 맨몸으로 노출된 인간 몸의 취약함과 강인함을 충격적으로 전달하고 있기에, 소멸하는 세계 가운데 무방비로 노출된 인간과 비인간의 곤경을 담고 있는 이 책의 환경정치학에 적절한 이미지로 여겨졌다. 또한 이 사진 속 인간들의 벌거벗은 몸은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벌거벗은 몸들은 ‘살로서 인간이 자연 그 자체‘임을 적나라하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간의 정계를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도나 해러웨이의 자연문화의 개념을 이미지로 극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번역자들은 이 사진이야말로 이 책의 취지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라 여겨 표지로 선택했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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