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산 노동과 에이드리언 리치
수술을 앞두고 서울에 올라와 한 밤 자고 간 A에게 책 한 권을 쥐어서 보냈다.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도. 신나고 재밌는 일로 삶이 가득하다는 엔프피종 답지 않게 수술을 앞두고 살짝 침울해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이과형 인재임을 어필하며 즐겁게 읽은 소설을 이야기할 때 즈음에는 내가 아는 신나는 A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이과형 소설을 조금 더 찾아놓기로 내심 마음을 먹긴 했는데, 글쎄 이건 나의 마음일 뿐.
<애프터 양>이야기를 잠깐 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이후부터 돌봄/언어/소통에 대해서 계속 생각 중인데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이며 계속 사색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의 생계 부양까지 떠안은 K-장녀 친구들을 많이 둔 A는 내심 안드로이드 ‘양’이 빨리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과 친구들은 돌봄이라는 주제보다는 독립이, 자신을 착취하는 관계로부터의 분리가 더 관심사인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다 재밌었다.
나는 원가족과 (재정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것 포함) 거의 완벽히 독립을 이룬 상태(부단한 거리 두기 연습과 과정이 있었다)이며, 누군가의 돌봄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상태다. 하루 종일 혼자 있을 때가 많고 그리하여 자기 돌봄만이 유일한 문제가 된다. 나의 상태가 이렇지(?) 않았다면 나는 돌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언제나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함께 있을 때의 돌봄이란 대체로 주고-받는 것이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은 아니었다. 다만 맥락과 상황과 역할과 관계에서 나는 돌봄을 제공하는 쪽에 조금 더 가까웠을 뿐이다. 일방적으로 정서적 지지나 돌봄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일 때,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뿌듯했던 적도 많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내가 좋아하는 수준이고 어디서부터는 착취이다시피 했는지 그 양 조절이나 분간을 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지만.
의식적으로 철저히 혼자가 돼 본 후에야 알았다. 삶이 더없이 가뿐해졌다는걸.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도. 과거의 삶이 숨 막힌 듯 무거웠다는걸. 벗어남. 벗어나고 보니 그런 ‘짐’(짐이라고 표현했지만 대체 이 짐이 무슨 짐인지를 모르겠다) 따위 아예 애초에 지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 그 짐에는 내가 부지불식간에 수행했던 혹은 해야 한다고 느껴야 했던. 돌봄의 몫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짐으로만 여기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돌봄’은 역시 생각해야 하는 주제이다. 아무래도 그것 없이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걸 돈 주고 싼값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제값을 준다면?!? 모르겠다 ㅋㅋㅋ), 그걸 한쪽 성별의 일로 묶어둔다거나, 그걸 아예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 이 문제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특별히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닌 것 같다. 기실 삶이 제 기능할 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성인이 되고, 건강한 몸을 지닌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생애 주기에서 얼마 안 되는 그 몇 년(물론 나는 얼떨결에 비혼이 되다 보니 조금 더 그 시간이 길어진 것 같다)은 내 밥을 좋아하는 메뉴로 잘 차려먹는 간소한 자기 돌봄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쩌다 내가 스스로를 고립시켜두다시피하고 아팠을 때, 별 수없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야 했을 때, 사람의 온기와 응시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살다 보니 피할 수 없는 그런 시간들이 왔고. 지금 와서 그때를 떠올리면 사람은 본디 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정과 직면이 삶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돌봄. 돌봄에 대한 나의 감상은 복잡하며, 어쩌면 사회 전체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연에 위치하는 주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약자가 떠맡게(?) 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고. 지금 번뜩 떠오르는 소설이나 영화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속 루이즈. <애프터 양>의 양. 아직은 어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엔 레퍼런스도 사색도 부족하다는 생각. 다소 진지한 물음표를 여기에 매달아 두고.
또 한없이 길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데 오늘의 업무량을 생각하면서 써보고 싶은 이야기들에 대해 여기에 스케치처럼 남겨본다. 어제 친구와 <애프터 양> 이야기를 하다가 양을 애도하는 미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서 울컥하고 말았는데, 그건 <남매의 여름밤>속 옥주가 화내는 어떤 장면과도 겹치는 울컥함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잠에서 깨어나면서 했다. 양(오빠)과 미카(여동생), 손녀(옥주)와 할아버지. 아이들이 그리워하는 대상들이 지닌 속성. 어쩌면 그건 모부-자식 간의 돌봄이라기 보단 우정에 가까운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성장에 대한 잔잔한 응시 혹은 시선을 떼어 놓지 않음? 그걸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시 때때로 어린 시절에 접속해보곤 하는 난 그 아이들이 그런 존재를 필요로 했음을 안다. 생계에 바쁜 부모들은 그걸 해줄 수 없었다는 사실도 알고. 그 아이들이 그리워하는 속성- 그것을 외주화할 수 있을까? 그것에 마저 값을 매길 수 있는 걸까? 사실 그렇게 복잡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그저 그냥 그저 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 시점에서 *사랑*에 대한 벨 훅스 정의가 떠오른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
또 사랑이란 신뢰와 헌신, 돌봄, 존경, 상호 이해, 책임감이 결합된 것.
나는 돌봄. 돌봄에 동그라미를 쳐 둔다. 돌봄을 일종의 노동의 의미로 따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맥락에서 다시 곱씹어 볼 필요. 지금의 나에게는 그닥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오지랖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내 위치에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는 방법은. 그런 사랑이 절실하고 필요했던 어린 시절로 종종 되돌아가 생각해 보는 것 일 지도 모르겠다.
<애프터 양>에서 양을 떠올리며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미카.
<남매의 여름밤>에서 옥주가 아빠와 고모에게 사람이냐고 화내는 장면.
엄마와 아빠는 수명이 다한 양을 폐기처분하며 메모리를 팔고,
금전이 필요한 아빠와 고모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기고 집을 팔 생각을 한다.
나는 이 두 영화를 매우 좋아하고, 이 두 영화에 대해서 할 이야기는 아주아주 많다. 그러니 투 비 컨티뉴.
🎗️이런 쓸모(?)없는 내 이야기에 진지하게 응해줄 친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한 주말 아침이다.
재생산과 돌봄에 대한 단발머리님 페이퍼(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453026)가 기억나 트랙백 걸어둡니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