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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8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공경희 옮김, 정희진 분류와 해설 / 열린책들 / 2022년 11월
평점 :
도서관에서 뽑아온 신간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다. 이 책의 해제를 정희진이 썼다는 것을 알라딘의 빵빵한 광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읽어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울프. <자기만의 방>은 여성과 글쓰기에 관한 일종의 에세이이며, 나에게 (책으로) 좋은 독자가 될 것을 자신만의 ‘언어’와 ‘윤리’로 싸울 것을 당부한 사람은 정희진이다. 나는 그들을 믿고 따른다.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여성주의와 상관없이 그들의 글을 좋아한다. 결론적으로는 그들이 여성이었고 내가 여성이라서 좋아할 수 있게 된 것일 테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서 글을 잘못 배운 나는(감히)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읽기 수월한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지식적 배움도 짧지만 쓰는 나로서는 나 스스로를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읽는 것보다는 쓰는 것에 더 진지한 쪽에 속한다. 내가 어떤저떤 까닭으로 스스로 뭉개 없앤 내면을 복구하기 시작한 것은 일기를 쓰는 시점부터이고, 쓰고 있을 때에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었던 어떤 시간들을 통과하고, 그 덕분으로 이제 나는 쓰지 않을 때에도 ‘나’라는 존재를 비교적 자유롭게 의식하며, 오롯한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자기만의 방> 생긴 후로부터 글을 쓰고 싶어진 건지, 글을 쓰고 싶었기에 <자기만의 방>을 욕망하게 된 건지 선후차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건 내가 누군지를 나에게 끈질기게 묻지 않았던 과오로 남들이 규정하는 나에 대해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어쩌면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던 과거의 나는 내 방을 가져 본 적이 없었으며, 글을 쓰지 않는 혹은 쓰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188)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은 자기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만 자신의 위치와 상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정희진은 <자기만의 방> 해제의 첫 페이지에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과 함께 동시대의 조선 여성이었던 나혜석의 문장을 배치했다. 탁월한 선생님은 나를 가끔 놀라게 하지만 이번엔 정말 놀랐다. 그리고 아, 이게 정희진이지! 해버렸다. 언제나 자신의 당파성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라는 것이 선생님의 요구셨지만, 이 해제는 좀. 너무 멋져서… 나는 해제에 대한 독후감을 쓰고 있는 것이다.
“(182)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기만의 방>에 대해 쓰는 일은 시공간에 따른 여성들 사이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쓰는 역사적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강조를 마친 후 선생님은 해제로 여성 글쓰기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쓰셨다. 그러므로 나는 또 믿고 따른다. 여성으로서의 <같음> “변화하지 않은 현실”에 대해. 또 여성들 사이의 다름 - 젠더를 포함한 시공간, 계급, 계층, 지역, 위치, 경험의 <다름>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것은 <달라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다른>것이었단 걸 이제는 안다. <같음>이 필요한 추상이라면, 그 <다름>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은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읽기만 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 이다. 나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같음>에만 머무르고 싶었을 것 같다. (나는 그러기 쉬운 특징을 지닌 캐릭터의 여성이다.) 여성의 다름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나와 다른 몸들이 점점 재밌다. 분리의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해제를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난다.
“(187)모든 작가에게 자아 정의는 자기 주장보다 반드시 선행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던 친구가 내 댓글에 써주었던 문장이다(뿌듯). 선생님은 <다.미.여>의 이 문장과 버지니아 울프의 주장을 함께 배치하면서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자아 정의의 어려움이, 윤리적인 글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는 위치로서의 자원이기도 하다고 격려하신다. 그렇다. 정희진의 말대로 “(189)<여성>의 인생은 여성주의를 만났다고 해방되지도 명확히 정리되지도 않는다. 더 복잡해질 뿐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종속된 주체로서 <그녀와 그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모든 가부장제>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우리는 그 괴로움에 대해 쓰는 것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를 탐독한 나는 “쓰는 사람과 쓰는 내용이 분리되지 않는 글”이 정희진이 말하는 윤리적인 글이란 걸 안다. 다만 그렇게 쓰고 있는가? 가 문제인데 남의 글이 그런지는 모르겠고, 나는 대체로 그렇다. 글을 업으로 삼지 않은 사람의 장점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위치적 장점이다. 억지로 쓰지 않으므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지면이므로 내 이야기를 쓰지 않을 바에야 쓸 필요도 쓸 이유도 없는 듯. (매문을 하게 되면 경계해야겠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매.문.하.고.싶.다ㅋㅋㅋㅋㅋㅋ 그건 내가 바란다고 되는 게 아니다ㅋㅋㅋㅋ 이 위치에서의 윤리를 즐기도록 하자ㅋㅋ 나는 모두를 깔 수 있는 자, 바로 독자다!!!!!!!)
해제의 마지막 부분은 너무 날카로워서 짜릿하기까지 했다.
“(194) 내가 아는 여성주의는 자기 현장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다. 울프도 이에 동의한다면, 지금 한국은 여성주의를 포함해 미국 이론의 식민지다. 최근의 한국의 여성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조차 미국의 예전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앞 문장에 동의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지금의 현실에서 다시 맥락화하면서 읽어야 하는 이유. 내 맘 속 페미니즘 선생님 정희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뒤 문장은 동의하고 싶은 데, 잘 모르겠어서 느낌 적으로만 동의. 일단 이 혐의에서 좀 자유로운 것 같다고 혼자 추측하며 이야기를 풀면🤔 내 경우 한국의 여성주의를 외국어로 설명하는 세태에 화나서 더 페미니즘 책을 열심히 읽었으며… (내가 혐오자라니!! 하지만 공부를 한다고 뭔가를 더 알게 되는 건 아니었고 몰라서 빡치는 상황만 계속 발생해서 아직도 공부 중. 그러다 페미공부는 평생해야한다는 걸 알게 됨…) 무엇보다 난 cj감송에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능력 밖이랄까요ㅋㅋㅋ 즉, 미국의 예전 언어가 뭔지 모름 ㅋㅋㅋㅋㅋ 그래서 희진 샘이 말하는 세태가 뭔지 잘 모르겠엌ㅋㅋㅋㅋㅋㅋ 백래시????ㅋㅋㅋ
나는 내가 뭘 모르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워당당! 여튼 이런 무식함을 쓰는 용기야말로 나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는 나에게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도 알려주었다. 다 알고 쓸라면 못 쓴다. 다 알 수도 없고, 모르는 걸 알아가는 과정을 쓸 뿐. 그러다 아는 거 나오면 아는 척하면 완전 신남! (왜 남자들이 맨스플레인 하는지 샘 이젠 알 것 같아요오~~~)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나혜석을 붙여 넣는 정희진을 읽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 참에 이 책에 도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