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누가 인간인가?

어떤 사람들은 삶이 공허하다고 하는 데, 나에게 삶은 기본적으로 무거운 것이었다.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하긴 하는 데 암튼 무겁다. 요즘은 정말 많이 가벼워졌다. 나는 읽고 쓰면서 스스로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계선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홀가분해짐을 느낀다. 


그리하여

- 왜 사느냐, 삶에 의미가 있느냐 라는 말은 내게

- 왜 글을 읽고 쓰느냐 는 말과 좀 비슷해지고 말았다. 


나는 읽는 게 재밌고, 즐거워요… 좀 살살 읽어요. 라고 앎비앎 친구는 말해줬다. 그러려고 해요. 라고 적으면서 엄청 울었다. 어떻게 살살이 돼요, 나는 안되는데. 나는 아닌데. 나는 아파서, 외로워서, 괴로워서 읽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책을 그렇게 읽을 수는 없고 그렇게 읽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을 읽는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복수하려고 읽었다. ‘그들’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내 안의 어떤 의지가 있었다. 가능하면 뿌리 뽑고 싶었다. 방법을 알려주면 그걸 내가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따를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장은 알 수 없으니 책 읽기가 시작이었다. 


책을 읽다가 어떤 증상들에 시달린다. 다루기에 따라서 수월하게 속일 수 있는 도구라고 여겼던 흰 배경에 박혀있을 뿐인 글씨들은 몸이라는 물리적인 신체에 작용하는 물성을 지닌 무엇이었다. 지행합일의 정도의 이해가 아니라 글씨들이 나를 해치는 지경에 이르고 난 뒤 퍼뜩 알게 되었다. 뿌리 뽑을 수 없다. 도려낼 수 없다. 내 안에도 그것들은 있고, 그것들은 시간을 내어 인식하지 않으면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없다. 그들은 내가 아니니까. 나는 그들과 같았던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정말 없다. 이해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기만이었다. 이유 - 의도 - 상황 - 조건이 ‘행함’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당함’역시 마찬가지다. ‘당함’만으로 정당화 되지 않는다. 거기에.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하는 질문에 해당 인간이 기준점으로 삼아야할 윤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 의지? (어렴풋이 써본다. 맞는 개념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이 있다.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다들 그러고 사는 거야. 에 대항하는 나는 그들과 다르구나,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겠구나 하는 감각은 언제나 희미했던 나에게 어떤 형체를 부여해주었다. 이것이 이를테면 ‘자아’라는 것일까. 나는 자아가 견고하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고, 지금 역시 견고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선. 선을 지키는 게 좋아. 라고 말하는 내가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선. 선이 무엇인지. 어쨌든 선을 긋고 있다. 그어가고 있다. 읽고 쓰면서.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에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는 문장. 내가 고통을 감각하지 못한다면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어져 결국 와해되고 말거라는. 내가 고통을 감각하는 경계. 경계. 경계. 왜 그게 아팠는지를 나에게 묻곤했다. 어쨌든 달랐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감각하는 고통은 사람들이 감각하는 고통과는 달랐다. 그리고 어떤 고통은 참으면 안되는 거였다.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가. 어느 순간부터 참을 수 없었기에 나는 나를 망치기 시작했는가. 이미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고통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어떤 고통들을 다 그렇게 사는거야 참고 견뎌보려고 했기에 나 자신이 와해되었던 그 지점. 이 만큼 살아내지 않았으면 몰랐을.


나는 복수하고 싶었다. 세상에 말해지지 않은 것들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을… 나 자신만이라도 이해가능한 말들로 바꾸면 그것들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언어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소통의 의무를 느끼지만, 어쩌면 소통은 필요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말을 만들고 싶었다. 내가 다치지 않는 말.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말. 나에게 참지 않아도 됨을 독려하는 언어들을 주입한다. 가끔은 손가락 하나 들 여력없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삶이 꿈틀. 조금씩 살고 싶어질 때가 있고. 그럴 수록 가벼워진다. 


나는 복수하고 있다. 여전히 복수 중 이다. 그런데 내가 택한 이 복수 방법이 좀 이상하다. 읽고 쓸 수록 나 자신은 선명해지는 데, 복수의 대상들은 희미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들은 분명 한 명 한 명의 인간이었는 데, 형체가 흩어져서 안개처럼 뿌옇고 공기중에 뿌려져 서걱이며 흡입된다. 이젠 그들이 ‘그것’들…이 된 것 같다. 나는 종종 그것들을 어떤 언어와 개념에 가둬 뭉뚱그려 묻어버리고 싶다는 영원히 기어 올라오지 못하는 심연 같은 곳에 처박아 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그런데 아마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백하고 가학적인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동은은 복수를 위해 17년을 살아왔다. 드라마의 초반은 학대당한 피해자가 스토커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왜 그랬어, 왜 그랬니, 왜 나한테 그랬니, 왜 나여야 했니, 왜 아직도, 가해자 집단이 선사한 폭력보다 더 오랜기간 자신을 고통 속에 가두는 동은(송혜교)을, 가해자 그 자신들보다 더 그들을 잘 알게 되어 버리는 동은을 좀 이해할 수 있다.


너는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일텐데, 꼭 복수 해야하겠느냐고. 복수가 끝나면 너 역시 폐허일 뿐일텐데 잊고, 지금 나랑 행복해지면 되지 않느냐는 남자 주인공(이도현)의 질문에 동은이 이런 종류의 대답을 한다. 


- 근데 선배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해요. 

- 돌아가요, 난 분노와 악에 더 성실하고 싶거든요. 


비록 <더 글로리>는 복수에 써야할 내 소중한 시간을 순.삭.하며 시즌 1에서 끝나버렸지만ㅋㅋㅋ 할 말이 좀 정말 많은 데, 일단 이 정도. 드라마가 피해자를 그려내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지만 김은숙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악’이 좀 더 맘에 들었다. (그리고 남자주인공 이라는 *판타지*도. 아, 그런데 얼굴이 이도현이라니. 이 판타지에선 깨어나고 싶지 않닼ㅋㅋㅋㅋㅋㅋ) 지금까지 내가 이해해온 인간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 심연 따위는 없는 악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피해자들의 자기 치유를 위한 일시적인 연대는 아마 영광없이 끝날테지만, 여기서 이렇게 끝내는 건 반칙이잖아요. 3월아~ 빨리 와라. 현기증 나 진짜. 


이 글은 나의 앎비앎 친구의 질문(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239708)에 트랙백을 달기 위해 썼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의 어려움. 그것이 보통의 임상 심리학이 말하는 어떤 신경증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는 분리되는 것의 어려움. 혹은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일. 또는 자아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싶어짐. 그냥 통째로 함입되어서 그 사람(들)이고 싶음일 때가 있었노라고. 그건. 여성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내가 시골 사람이라서 그랬던 건 아닐까. 라는 질문을 언니에게 했었다. 삶의 특정 어느 시기의 자아없음을 지금은 퇴행으로 인식하지만. 나는 꼭 사람에게 자아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가 하는 질문을 아직은 없애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야만인에 좀 이입할 수 있다. 야만. 야만인. 



왜 자신에게 삶보다 복수가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온 몸의 흉터 자국을 드러내는 동은에게 이도현이 “그건 흉터가 아니라 상처예요”라고 말했을 때 침을 꼴깍 삼켰다. (김은숙은 정말 로맨스 천재다!) 내 생각에 동은이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신은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고백이거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도.

함께 칼춤을 춰줄 망나니들이 필요하고. 

아직. 복수는. 진행. 중. 이니까. 


아 참. 혹시나 해서 글로리에 과몰입한 내가 송혜교에게 이입했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제가 굳이 이입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줌마(염혜란) 분. 그녀가 한 명대사가 있다. 이 대사도 정말... 후... 김은숙 천재세요?


- 난 매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ㅋㅋㅋㅋㅋ


덧붙임1. 쓰고보니 은오님 글(https://blog.aladin.co.kr/751596223/14242028)에 단 댓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트랙백 하나 더 걸어둔다! ㅋㅋㅋ

덧붙임2. 나의 남자 연예인 보는 눈은 정말 별로다. 촉이즈 싸이언쓰..ㅋㅋㅋ 이도현이 부디 조신하게 삶을 살아 무사하게 연예인 생활을 마감할 수 있기를... 하지만... 와따시는 연예인에 한해서는... 마약범과 강간범을 좋아하는 눈을 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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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글로리] 복수는 알겠는 데 소중한 건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3-12 20:50 
    어제 하루는 캄보디아 맥주를 마시며, 로제 떡볶이 국물에 교촌 허니 순살을 찍어먹으며(아. 너무 고급 져, 세상 가장 고급 진 메뉴 아닌가. 나는 성공한 인생이다🤤) 동생들과 <더 글로리> 파트2 정주행에 매진하였다. 다 끝내고 나니 심적으로 너무 지쳐서 급히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애꿎은 나의 파란색 스테들러 연필은 동생의 똥 머리 위에서 휘둘러지고, 자꾸 이렇게 굴면 정신과 의사 두 명을 섭외해서 널 가둬버리겠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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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0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3-01-12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딴 얘긴데 바둑 배우는 장면 검사외전에서 수사상 필요해서 정려원 딱밤 맞으며 이선균으로부터 고스톱 뱨우는거랑 넘나 비교됩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3-01-12 19:14   좋아요 1 | URL
검사외전 ㅋㅋㅋ 책으로 읽었어요 ㅋㅋㅋ 근데 결국 김웅씨 ㅋㅋㅋ 검사더라고요 ㅋㅋㅋ 저는 스위트 홈에서 챠가운 이도현을 눈여겨 보다가 <더 글로리>에서 아주 례쁘게 나와서 힝 ❤️

서곡 2023-01-12 19:17   좋아요 1 | URL
책은 안봄요 김웅 ㄷㄷㄷ 스위트홈에서 완전 딴사람같아요 ㅇㅇ 안경낀얼굴 샤프해서 조아여

공쟝쟝 2023-01-12 19:20   좋아요 1 | URL
네 제가 냉미남 좋아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런 관상들이 대체로 약을 많이 합디다…? ㅋㅋㅋㅋㅋ

서곡 2023-01-12 1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명랑핫도그 댓글은 보셨나요??? ㅋㅋㅋ 저녁맛있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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