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잃는 것이 두려워 굴욕을 참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폭력을 견디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보다 낫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지 않다.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이제 와서는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내 능력치 바깥의 일이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더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것 역시 존중할 만한 결단이다. 관계는 어느 일방의 희생 만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젠 알게 되어 버려서, 내가 알 수 없는 관계를 내가 아는 것처럼 넘겨짚어 조언의 말을 얹을 수도 없어졌다. 그와 아예 다른 결에서 최소한의 자신을 지킬 능력을 확보하지 않은 채로 어떤 기투를 감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좀 말리고 싶어 하는 편이긴 하다.
솔직히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적인 기준에 합당하다면 (물론 기준이 높지만) 건강한 정상 가족을 꾸리는 것이 행복(과 사회의 안녕)에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도 좀 알겠어서 잘 살기를 바란다(다만, 그것만이 선택지의 전부인 것처럼 내미는 한국 사회는 싫다). 모순인 건 알지만 정상적인 가족에서 정상적인 교육과 사랑을 받고 정상적으로 번듯하게 잘 자란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편인데, 음. 이런 말을 쓰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현재 진행형일 때는 바로 보기 힘들지만, 사건의 시점이 완료된 후에 돌이켜 보았을 때.
내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용감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동정심에 좀 약한 편이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 생각이 좀 많아졌다.
남자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미투를 활용한 여자 사람을 실제로 여럿 보아왔다. (이렇게 쓰자니 조심스럽다. 반페미들이 꽃뱀 운운할 거 같음.) 인터넷에서는 더 흔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미투의 의미가 축소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남자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여자들의 공감 능력을 이용하고, 도와주고자 하는 여자 동료들을 공격하는 인격을 가부장제 하의 여성이라고 감싸는 것도 페미니즘의 몫인가. (구조적으로 그런 성격이 만들어지기 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까지가 내 페미니즘 공부였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떠나 놀랍도록 자기만 끝까지 피해자인 줄 아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 데, (정희진은 그것을 '가해자의 피해의식'이라고 부르더라.)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몫을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합리화의 달인이라는 점? 때로 합리화가 몸에 배어있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능력까지 갖춘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208)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난 여기서 "(211)가해자의 피해 의식"까지는 운운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봤을 때. 나 역시 가부장제에 가담한 공모자이며 가해자고, 피해자이고 희생자(어쩌면 생존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떤 도구로 사용되어 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를 해석하는 글감으로는 사용한다, 그걸 어디까지 전시할 것 인가가 항상 고민스럽다.) 남들이 그래도 고통스러울 텐데, 나 스스로가 나의 상처를 타인들에게 사랑 받기 위한 도구나 이해해 달라는 당위의 요구로 활용한다는 것은 내 상처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것들에게서(내 생각엔 정말로 사랑한 것들 만이 정말로 상처 줄 수 있다) 받은 나의 고유하고 치명적인 상처는 내 스스로가 두고두고 분석하며 세심하게 보살펴 봐야 할 것이지 타인에게 쉽게 이해되거나, 함부로 동정할 수 있는 무엇으로 취급되게 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이런 종류(상처와 고통이 해석의 자원인)의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이런 것인데 "나도 피해자여서, 어쩔 수 없었어"라면서 상처 뒤에 숨는 것. 은 좀 더. 싫다. 그런 사람들. 미안해,라고 말하면 될 것을 어쩔 수 없었어, 네가 더 많이 이해해줘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건 뭐냐면. 내 자존감의 근거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면, 그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야하는게 관계에서 예의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자신의 피해자성이나 고통과 약점을 내세워 타인의 선량함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드는 거. 상황의 절박함을 떠나서 그건 정말 별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타인을 조종하려 드는 것은 다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절박하지 않았거나, 특별히 강한 사람여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당해야 할 몫, 책임져야 할 몫. 그런 것들을 도외시하고 발 뻗고 자는 사람이 아니더라고 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금 더 적어보고 있는 중인데... 나흘 뒤의 아침임ㅋㅋ 남의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상황이 이게 그렇게 까지 싫었던 이유는 휘둘린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인 것 같고, 괜히 오지랖 부리다가 곤란했던 상황에 빠지고 난 후에는 그게 내가 가진 변형된 나르시시즘이라는 생각에 가 닿았기 때문이다. 난 타인을 기꺼이 도울 수 있을 만큼 유능하거나 강한 사람은 아직 아니다. + 다른 층위에서, 나도 내가 아프니까 먼저 살고 봐야지 한 적이 있었는 데, 좀 괜찮아지니까 바로 죄책감이 올라와서 발 뻗고 못자겠더라.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니 이미 늦은 적이 있었다. 사과해도 안되더라. 경제적 손실이나 명예에 해를 입힌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를 관계 문제였는 데, 다 어른들이니까 좀 아프고 말겠지만, 그래도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잠을 많이 자는 나는 잠자리가 꿈자리가 편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걸. 분명히 대가가 따른다. 대가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역시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나나 잘하면 되는 거고.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으니 그러지 않으면 되는 것인 듯.
당연히 사랑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을 잃는 것보다 두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을 잃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도 안하는게 좋지.
(여자니까 그럴 수 있어!가 아니라 여자면 더 그러지 말자. 여자여, 사랑 좀 잃어도 된다. 남자들의 사랑이 뭐 별건가.)
‘피해자 편‘을 들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목표도, 전망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법치주의 국가의 상식일 뿐이다. 이걸 위해서 피해자가 인생을 걸어야 하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다. 페미니즘은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자는 사상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 이상이다.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피해와 가해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방식 자체에 있다. - P9
피해자의 위치에서만 발화가 가능해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사회에서 이해받을 만한 서사로 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자원으로 삼게 된다.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피해 사실을 반복적으로 공표하는 일도 자주 발생하는데, 이것만으로도 피해자의 정신 건강에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 P10
가해와 피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중 어떤 문제는 개인적, 미시적, 가벼운 피해이고 어떤 사안은 구조적, 거시적, 심각한 피해인가? 구조와 무관한 개인적인 문제는 없다. 또한 모든 사회 문제는 연동하기 때문에 구조와 개인, 공과 사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피해의 위계는 더욱 위험하다. 사람들은 ‘내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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