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져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To 쟝쟝님 (부제 : 노아의 선택, 그 불가항력과 결정론의 함정 또는 변명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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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평점 :
사실 지난 독후감(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69259)을 좀 너무 거칠게 썼던 것 같아서 (휘리릭~) 오늘 길고 긴 지하철에서 추가로 몇 자 더 적을까 하다가… 나 자신을 더 훑기 싫어서 그만 두었었다. 그런데 단발머리님이 엮인 글로 엄청나게 근사한 답글(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980776)을 써주셔서 … 쓰다 만 거라도 긁어서 올려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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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일본에 사는 조선인이다. 온 사회가 노아의 출신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그러나 노아의 엄마 선자는 사회와 상관없이 오로지 생존에 힘쓰며 노아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운다.
노아는 책과 교육 덕분에 언어와 사회를 공부할 수 있었다.
노아에게는 어떤 질문이 있었고, 세계에 대한 어떤 기준이 생겼을 것이며, 노아는 열심히 잘 살아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공백)
온 사회가 나의 근본을 무시하고 멸시할 때,
그러나 나의 근본을 절대 부정하고 싶지 않을 때,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았는 데, 나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의 취약성이 발견되었을 때.
나는 나의 근본을 떠난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방식으로 근본을 사랑한다.
하지만.
(공백)
노아는 선자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끝끝내 이룰 수 없는 소망이고 선자의 삶에 대한 존중도 아님을 안다.
*
어쨌든 난 여기에 대해서 더 많이 쓰고 싶지 않다. (밤이니까…) 그리고 이미 단발머리님이 내가 다 못 쓴 글을 써주신 것도 같다.
같이 읽고 쓰지 않았다면 더 깊은 이해에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내 앎을 비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단발머리님의 애정어린 글에 대해서는 역시 정희진의 문장으로 답하는 게 가장 좋겠다.
아니, 파친코를 읽은 사람들이 정희진 선생님의 이 문장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식민자의 언어로는 대답할 수 없다. 애초에. 즉 어떤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
(뭐, 가능하면 나의 언어를 더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글에서 나는 노아가 글을 썼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는 데, 그것 역시 틀린 것 같다.
노아는 아마 일본어로 썼어야 했을 테고, 그리고 내 경우 글을 쓰면서 병이 더 깊어질 때도 있다.
“(26)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물음은 내 경험과 사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을 때, 타인이 멋대로 나를 규정할 때 솟아난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넌 누구냐?”라는 심문(審問)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식민자는 피식민자가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상기하게끔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이 질문은 면벽수도의 자기 탐구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면적인 폭력의 시작이다. 누구나 삶의 특정 시기에 이 물음이 요구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이들은 평생 이 질문과 씨름해야 한다. 다시 강조한다. “나는 누구인가.”는 “넌 누구냐.”이고, 그것은 “(나는 인간인데) 너는 뭐냐.”라는 폭력이다.
저자가 일관되게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피억압자의 삶을 내내 뒤덮고 있는 심문의 정치라는 사실이다. 여성, 아줌마, 성골과 진골이 아닌 사람, 식민지 사람은 이중 메시지 상황에서 늘 자기를 설명하라는 요구에 시달린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27)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강요하는 저들에게 어떻게 맞설 것인가. 어떤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무엇을 확보해 나갈 것인가. 가장 흔한 답, 가장 쉬운 답. 그러나 *불가능한 현실은 진정한 자아 찾기(나를 잘 설명하기)다*. 이는 ‘우리’를 기존의 사고에 묶어둠으로써 현실을 고착시키려는 식민자의 논리에 부응하여 “저들의 계통”을 강화한다. 상대가 이미 나를 정의하는 권력을 쥐고 있는, 속수의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랴.”
-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 쓴다>
“(225)나는 사회적 타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공감이 다소 염려스럽다. 개인과 구조 자살과 타살을 지극히 배타적 범주로 놓고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을 구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로 구분한 것 뿐이다. 자살 탐구는 원인과 결과, 몸과 마음, 자유과 강제, 개인과 구조 등 근대 철학의 모든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다. 사회적 타살론은 위에 언급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 *인생의 고난이 정신적 면역력을 압도할 때 인간은 자살한다.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를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살은 질병사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의 원인은 같다.*”
“(226)힘든 세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투쟁, 포기, 갈팡질팡 등- 이 세로토닌 생산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없다. 구조와 개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우울증을 만들어낸다면 그 비율은 1대 99, 51대 49, 37대 63 등 천차만별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구조가 몇 퍼센트인지... 정확히 계량 할 수 없다. 몸(뇌)의 건강은 정치적, 생리적, 개인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이 모든 것들의 계속적인 운동과 복합성에 달려있다. ..... 인간관계(사회 구조)의 질에 따라 개인의 기운과 용기는 달라진다. 자연의 법칙은
‘자살은 비정상이다’ 혹은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에 대한 인간의 의지를 의미한다. 이 의지는 건강 약자든 사회적 약자든, 죽을 만큼 아픈 사람의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희진, <낯선 시선>
“(72) 궁극적으로 자아는 극복되어야 할 개념이다. 즉 ‘내가 누구다’라는 자의식은 타인을 부정하거나 외부와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진 골치 아픈 문명의 산물이다. 외로움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온다. 안정적인 자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 연속적이고 일관적이지 않다.”
- 정희진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
어쨌든 나는 노아의 자살의 경우 신념에 의한 실존적 결단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우울증이라고 봤다. 또. 나는 노아와 선자의 차이는 ‘자아’라는 개념의 차이에 있다고도 봤다. 게다가 나의 경우 솔직히… 몇 년 전까지 언제나 ‘자아’가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쪽 이었는 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도 좀 알아버렸다. (소비자 주체, 투자자 주체로만 안살려면 다른 자아가 분명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없는 자아 만들다 보니 읽고 쓰기에 매진했는 데, 읽고 쓰기에 매진하다 보니 생업 할 시간과 체력과 건강이 너무 부족하다. 즉. 자아를 갖추기엔 제도가 내 몸을 망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래서 당분간 쉬어야 할 것 같다~
단발머리님이 쉬라고 하셨는 데, 일단 내일은 자매들과 아침 부터 가족 영화 보러 갈거라서 (가족주의 해체하자는 사람 치고 가족 너무 사랑하는 나의 모순) 못 쉬고, 사실 이 글은 쓰지 않은 것에 가깝기 때문에. 어쩌면 괜찮습니다. 걷는 게 대수냐, 내 인생의 목표는 완주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