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와 과유불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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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 전2권 - 개정판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밥 먹기를 명심하며 토스트를 우물거리면서 마감을 마친 자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쓴다. 오늘은 <디지털…>만 다 읽으면 되는 널럴한 날이다. 원래는 운동 다녀와서 페란테로 *알파수컷* 쓸려고 했는 데, 파친코 2권 어제 다 들었고 운동가기 싫으니까 이거 써야지. 근데 쓰기도 전 부터 너무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마음아픔 주의다. 아, 내 마음 아픔이지 나 빼고 다른 사람은 안 아플 것 같다. 그리고 이 글을 읽기 전에 꼭 단발머리님의 파친코 리뷰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561043) 를 읽고 오시면 좋겠다.
[1. 노아의 결벽증 (2권)]
선자는 엄마이며 이삭은 빨리 죽은 아빠고, 한수는 (숨겨진) 아빠고, 노아는 아들이다. 아들은 자살했다. 나는 노아의 자살이 필연이라고 봤다. 노아 같은 삶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영혼을 난 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마음은 잘 모른다. 엄마가 아니니까. 적어도 내 엄마에 대해서 만큼은 세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사랑했으니까. 분리되는 것이 평생의 과제일 만큼.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엄마는 내가 엄마가 되기를 요구하지만 나는 엄마가 되지 않는 것이 엄마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당분간은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나의 부모는 좋은 사람들이다.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정직하게 사셨다. (거기에 어떤 폭력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나를 미치게 한다. 다행인 것은 지금의 나는 내가 미치겠는 지점, 여기에 삶의 어떤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단 거다. 그가 되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것. 어떤 삶도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 나는 서른 살 이후부터 안 미치고 살기 위해 읽고 쓰기를 택했는 데 잘한 것 같다. 잘 만든 이야기와 개념들에 나를 대입해서 읽어보는 글을 쓰는 것. 그런 나를 만들어낸 사회에 대해서 한번 더 읽어보려고 하는 것. 노아에겐 쓰기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노아는 너무 많이 읽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아들에게 팥죽을 먹이고 싶어서 수탁을 만들어 버리는 엄마의 마음에 대해 단발님이 잘 쓰셨기 때문에…(정말 귀한 글입니다. 여자여 글을써라!) 나는 노아가 왜 죽어버리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더러운 피’ 때문이 아니다. 일본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직면했기 때문이긴 하다. 그에 대한 상징으로 ‘일본인’이 등장하지만, 작은 따옴표안에 ‘깨끗한 정치인’, ‘선량한 기업가’… 같은 걸 넣어도 무방하다. 비슷한 의미로 ‘선한 영향력’도 있다 ㅋㅋㅋ) 조금 가혹한 말이지만 그건 선자가 노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삭도 노아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모자수도, 한수도 노아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노아는 ‘a good boy’ 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a good girl’ 였기 때문에 종종 어쩌면 자주 죽고 싶었다고 하면 답이 될까.
거지 같은 역사가 한 가족을 내다버리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삶을 다 갈아 넣어서 자식을 사랑하는 순진한 모성이란게(역사는 흘러흘러 선자를 헬리콥터 맘으로 만들었다), 대체로 무관심하면서 필요할 때만 나타나서 구원자인 척 생색내는 부성이라는 게 (한남의 부성이라는 건 어찌보면 한결 같다. 한수도 이삭도 대체로 부재한다. 존재감이 이미지로만 있음… 그나마 집에 붙어 있는 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요셉인데 꼰대에 무능함) 모든 가족이 자랑으로 여기는 든든한 (공부만 잘하면 되는) 아들(자식) 역할이라는 게,
이게 개인의 역사 속에서든 어떻게 기능하느냐면… (나는 왜 이 시점에서 조국 가족이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네ㅋㅋㅋㅋㅋ 여기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지만 할말이 음슴으로 대체하겠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기에 잘 살고 싶지만… 그들의 거리감 없는 사랑(차라리 가족의 관심과 기대가 없는 적당한 방임 속에서 자라온 모자수가 잘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이 과도해서 그렇게 살 수 없는 자신을 알게 되었을 때 도망치고 싶은? 살고 싶지 않은? 삶의 동력이 사라지는? 죽어버리고도 싶은? 그것이 깨끗하면 더, 그것이 꼿꼿할 수록 더, 그것이 사랑이었단 걸 이해하고 나면 더. 더. 더.
노아는 자기 자신만 행복해 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노아는 그런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아는 그게 자신이 받은 최대의 최선의 최고의 사랑임을 안다.
그러다 노아는 그 사랑이 엇나갔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사랑에 보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노아는.
자살은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노아같은 종류의 인간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어떤 시기를 지나왔고 노아만큼은 아니어서 살아는 있다.
나는 이젠 정말 잘 살고 싶은 데, 이게 맞다 싶다가도 이게 아니다 싶어질 때 너무 힘들다.
나는 사랑이 어려워서 자주 운다.
가끔 이렇게 어려운 걸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세상이 너무 무섭다.
그래도 운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래도 어려워한다는 것이 다행이다. 자주 힘들지만.
- 샘,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만 한걸까요. 이렇게 힘든데요?
- 맞아요, 힘들어요. 정말로 힘들어요. 그런데 재밌어요. 재밌어요 쟝님. 재밌구나 하는 날이 와요.
[2. 져주면서 사는 삶과 사랑에 대해 (1권)]
(P.209)
“그이는 구식이야.” 경희가 한숨을 쉬었다. “난 아주 좋은 남자랑 혼인했어. 다 내 잘못이지 뭐. 아이만 있어도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텐데, 그냥 빈둥거리는 건 싫어. 이건 남편의 잘못이 아니야. 그이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없어. 옛날 같으면 난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남편한테 쫓겨났을 걸.” 경희는 어렸을 때 들었던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의 많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 말을 잘 따라야지. 그 이는 항상 나를 아주 잘 보살펴주니까.”
경희는 요셉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 만으로도 고마워하며 그의 말을 잘 따른다. 훗, 모두의 예상과 빗나가게 여기에 페미니즘 탈 생각은 없다. (물론 좀 타서 요셉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는 데,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아주 잘 져주고 맞춰사는 커플 처럼 보였고 그게 사랑인가(물론 아름다운 경희의 아주 젠더화된 희생이 따르지만ㅋㅋㅋ) 싶었다. 아니, 그게 내가 본 사랑(우리 엄빠 떠오름)이다. 이미 과계몽된 나는 앞으로는 할 수 없는 찐 트루럽…* 그런데 요셉에게는 경희가 꼭 필요했어 보이는 데, 경희에게는 요셉이 꼭 필요… 했겠구나? 세상이 애도 없이 혼자인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 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 난리인데) 특히 아름다운 미모의 경희에게 요셉은 정말 필요한 존재였겠다 싶다. 그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거지. 그런데 결국 죽을 땐 다 혼자인 데...
경희에겐 아이를 못낳는 것과 요셉에게는 무능력한 것(거칠게 말하면 외국인 노동자…). 두 사람은 각자에게 스스로가 생각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부부이기에 그것을 누구보다 서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며 서로를 고맙게 여기고 건드리지 않는다. 어떤 존재가 가진 열등감과 수치감을 다 알고있으면서도 덮어주는 것. 거기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 (물론 이 약점이라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우리는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으니까요)
꼭 사랑하는 부부사이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같이 살아간다는 건 그런 종류의 생존 관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끝까지 훑어내리지는 않는 것. 그게, 삶의, 스킬,이다. (그리고 나의 피곤함은 여기에 있다. 끝까지 훑어 내리려고 한다는 것. 으윽… 나 자신… 정말… 싫다. 나는 훑어 내려서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목적인데, 나의 이러한 지점이 사람을 미치게한다는 것을 알아서 혼자 읽고 써야 한다… 아, 고독한 똑똑한 여자의 운명이여… ) 그렇다고 내가 뭐 아예 사람이랑 같이 못사는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30년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혼자 있는 게 훨씬 더 좋다. 그런데 가끔 너무 외롭다. 여튼 외로운 게 섞여사는 것 보다는 낫다. 이 수준의 경제력을 유지하는 한은 계속 혼자 있고 싶다.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 생존 스킬.
이 거친 서울에서 지방 출신들이 모여서 안 살면 월세와 생활비가 감당 안된다는 현실적 이유로 동생들과는 지지고 볶으면서 같이 살았다. 암묵적 위계와 돌봄을 관장하던(?) 부모님이 없는 생존을 위해 모인 원룸 - 투룸 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생존 관용’이 생겨나기 전까지 정말 치명적인 부분들을 다 긁어내서 싸웠던 것 같다. ㅋㅋㅋㅋㅋ …말로 죽일 수 있다니까?… 개싸움이다…ㅋㅋㅋㅋ 그렇다. 권력 관계가 거의 비슷한 평등(?)의 자리에 이해관계만 같이하는 공동체는… 바람잘날 없이 싸우는 것이 순리. (인류의 이상! 민주주의 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만약 싸우지 않았더라면 어느 일방의 정서적 노동으로 동거 관계가 유지되었을 것 같고… 그거랑 상관 없이 서로가 서로를 *참아주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참지 않았다. 싸웠다. 그 결과로 나만 따로 떨어져서 혼자 사… 는건 아니고, 이제 우리는 서로의 바닥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때로은 싸우더라도 품위를 유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대견해 한다.ㅋㅋㅋ 아무튼 그 시절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매들과 느끼는 나름(;;)의 돈독함은 없었을 것 같다. 부연하자면 나와 자매들은 죽고 못살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대단히 대단히 건조하게 서로를 응원하고, 개그 배틀을 하고,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면 안부확인하고, 좀 힘든일 있으면 같이 밥먹고(너무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절대 안찾음) 딱 그런 수준의 관계… ㅋㅋㅋ
그러므로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다 알아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덮어주는 관계’가 … ‘사랑’인 거라면.
난 역시.
1. 난 그런 ‘사랑’은 충분하지 않다. (서로도 싸우고 혹독한 세상과도 어느 정도 싸워야한다고 생각함)
2.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공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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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각자의 취약함을 서로가 인정하는 과정 자체가 사랑이라면?
4. 여기서 사랑을 글로 배운 멍청함이 드러나는 데ㅋㅋㅋ 그건 삶의 스킬이다. 즉 살지 않고는 모르는 거다. 근데 모르고서 막막 사랑은 저는 잘 안된다는 것이 문제인 데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결국 나는 *난 그런 사랑은 충분하지 않다*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내 인생이 삶이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와우.. 이렇게 써놓으니 또 나만 알아보겠네. 비약이 너무 심하네. 근데 벌써 열두시가 다 되어가고 나는 오늘 책을 다 읽어야 하므로 이렇게 써놓고 사라지겠음. 나의 ‘사랑’ 타령은 한동안 계속 될 것인가?
[1~2권]
하지만 사랑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있다. 그건 삶이다.
확실히 사랑은 삶을 지탱시키는 기능을 한다.
세상에는 ‘사랑’에 대해 결벽증을 가진 사람도 존재한다.
그건 궁극적으로는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므로 사랑이 아니게 되는 걸까?
그러나 그런 ‘결벽증’이 없었더라면 사랑에 대한 그토록 많은 환상과 신화와 이야기들 역시 없었으리라.
여하튼 그것은 있고. 그것은 있으므로. 나는 일단 내 기준에는 사랑 아닌 사랑들에게도 관대하게 괄호를 쳐 사랑이라고 묶어두기로 한다.
다만 내 사랑이 아닐 뿐이다.
소설 <파친코>는 나에게 이런 걸 다시한 번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