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쉬는 날. 책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고 이제는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그걸 나한테 해주지 않던 삶을 기준에 놓고 생각하면 인생을 낭비한 것 같은 애통함 (애통함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이 들고, 그것 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허락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던 나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된다. 과정과 목적, 목표와 수단. 그런 단어들을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하고, 이 삶이 맞아, 초조해 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의 나는 ~을 ‘위해’라는 말을 참기 힘들어하는 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에는 ~을 넣어도 무방하다. 그 말들이 자꾸 튕겨나가서 계속 이런 상태일까봐 우려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야 함. 곧 왜 이런지 또 내가 나한테 알려줄 것이다. 기다려야 한다.
근무 중 농땡이를 쳐야 덜 억울할 것 같다며 동생이 소재를 물어온다. 나 도서관.
도서관까지 쫓아왔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면서 돈 이야기를 했다.
- 나도 돈이 좋아, 그런데 돈 이야기가 진부해서 싫어.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쉬워. 그래서 돈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자꾸 단순해져가.
- 녜녜, 인본주의자님.
- 아, 나 인본주의자 아니라고(화냄)!! 암튼 막 쓰는 것보다 (드디어) 짠테크로 맘 먹은 너를 칭찬하지만!! 나는 대세를 따르지 않고 이제부터 펑펑 쓰기로 했다. (ㅋㅋㅋㅋ) 너도 계속 생각해봐, 돈이 갖고 싶은 건지 돈으로 사고 싶은 다른 게 갖고 싶은 건지. 그리고 당장 그 다른 것을 나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닌지.
- 언니, 나는 진심으로 돈 쓰는 게 좋아. 돈이 정말 좋다고. 난 언니 같은 금욕주의자가 🙅🏻♀️아니야.
(…동생은 내가 금욕주의자인 거 어케 알았냐… 그러게 난 왜 금욕주의자인가… 아직도 내안의 금욕을 못 버렸나, 나여ㅋㅋㅋ 버려, 너는 오늘 부터 욕망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금욕주의 들킨 것을 찜찜해라 하고 있었는 데, 동생이 의외의 말을 했다.
- 언니, 물론 나는 사는 것을 좋아하고, 사야되니까 돈 벌고 그래. 사람들 다 그래. 사실 대부분은 시발비용이고 꾸밈비용이야. ‘비용’ /‘비용’이야. 그런데 다 같아보여도 조금씩 달라. 왜 사고 싶은 지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게 돼. 지금 내가 쟤한테 느끼는 열등감.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알아. 그래서라도 난 돈이 필요한거야. 그리고 쉽게 벌고 싶어하는 마음은 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아. 근데 너무 어렵게 버는 거 지겹고, 그래도 난 벌어!!! 번다고!!! 시발!!! 벌어야 한다!!!!!!!! ㅜㅜㅜㅜ 안버는 걸 상상할 수 없어!!! ㅜㅜ 어쨌든, 돈 많아지는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고 무슨 억만장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냐. 하지만 난 분명히 돈 쓰는 걸 좋아해. 언니 보다는 내가 더 돈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고! 언니가 뭐 걱정하는 지 알겠는 데, 난 날 믿어!!!!!!
라고 말하고 동생은 🥕마켓에 물건을 팔고 마저 돈을 벌러 갔다… 맞아.
‘돈’에 대해서 그것을 ‘쓰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동생이 나보다 훨씬 많이 생각했다. 걔는 어떻게 써야하는 지 안다. 그런데 나는 모른다. 인생도 그렇다. 동생은 나보다 훨씬 잘 산다. 열심히 운동하고, 맛있는 거 먹고, 사람들한테 도움도 잘 요청하고, 회사에 저항하기 위해 태업을 하며…ㅋㅋㅋㅋ 고객사에서 싫은 소리들으면 당당하게 깨!진!다! 자신이 일 못하는 건 좀 쪽 팔리지만 일이 하기 싫은 데 어떡하냐? 그러나 난 내가 주는 것 만큼 아니 그 이상하는 걸 알고 있다. 안그러면 짤렸지.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이여.
아, 내가 또 되도 않게 인생 선생질을 하려고 했구나. 동생한테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될 때가 많다. 잘 안고쳐져서 미안하다. 그리고 나서 생각했다.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 자신을 아는 방법으로 소비. 나의 사랑스러운 책 탑들을 생각했다. 그래, 나는 내가 사들이는 책을 통해서 나를 안다. 그것이 책일 뿐이다. 도서관이 옆에 있어서 굳이 사지 않아도 되긴 한다. 하지만 갖고 싶으면… 다 가질 수 없으니 걔중 제일 갖고 싶은 걸 산다. 스트레스 받으면 아무거나 막 산다. 똑 같다. 그냥 그게 책일 뿐이다. 나는 잘~ 살고 싶다. 돈이, 산해진미가, 근사한 옷이, 넓은 집이 필요한 것 처럼, 내게는 어떤 잘 제련된(?) 글씨들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좀 잘 살고 싶다. 나한테 잘해주고 싶고, 남에게도 관대해지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읽어보고 써보는 게 최선이다. 그 시간들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최대이다.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구두 수선공의 이 되어야만 했던 말년의 릴라는 도서관을 찾고, 권여선의 소설 <이모>에 나오는 이모는 암 판정을 받고서야 도서관을 다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녀들이 서글프지 않다. 나는 중년의 초입부터 도서관을 다니고 있으므로. 과정이 목적, 목적이 과정. 목표와 수단. 수단과 목표. 과거의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돌고 돌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로 빠져들러 온 그녀들이 삶의 끝에서 느꼈을 감정들을 앞으로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번 더 생각한다. 내 삶의 끝자락이 지금일 수 있다고. 언제나.
동네 도서관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대략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의 세계에 침잠하러 오는 사람들과 세계가 내어주지 않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생계형 엔잡러인 나는 두 쪽 다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늘은 내 세계에 침잠한다. 자신을, 세계를 치열하게 생각한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배운다. 먹고 사는 것이 바빠서 내게 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그들은 대신 해주었고 글씨로 남겨주었다. 그러나 그 글씨들은 아직 내것들이 아니다. 소화해야 한다. 어떤 글씨들은 하나도 이해 할 수 없다. 그냥 검은 줄무늬 같다. 밀도가 높고 농도가 짙은 개념들로 빼곡한 사유들. 나에게 필요할 수도 있지만 필요 없을 수도 있지. 잘 나가다가 끝에서 여성의 재생산 찬양하고 끝나는 남자들의 글을 많이 봤기 때문에 (… 어휴 사유를 참 게으르게 하신다…) 요즘에는 주로 여자들 책을 많이 본다. 나의 기준은 삶에 필요한 만큼 만이다. 너무 아프거나 내가 후달리는 것 같으면 덮는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선생님.
“(27) 그녀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Nicomachean Ethics 』을 읽고서 『인간의 조건』에서 포이에시스poiēsis, 즉 작업production 활동을 프락시스praxis, 곧 행위action 활동과 구분한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작업 활동의 내적 한계들에 대해 경고한다. 노동과 ‘작업들’ 또는 ‘생산물’은 인간 경험의 유연성을 우리가 주어진 ‘대상들’ objects로 ‘물화시킨다’reify는 것이다. 인간 조건이 굴복하는 이 물화物化와 실용주의의 씨앗들은 이미 이해한 작업poiésis 안에 내재해 있다.”
아, 너무 어렵다 낑낑. 퇴각할까. 검색을 때린다. 아렌트, 노동, …
*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을 ‘노동'(labor)과 ‘작업’(work)과 ‘행위’(action)라는 실존적 조건에 처한 존재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노동과 작업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구글)
… 엥 …. 의미. 행위, 행위, 자유로운 행위, 의미, 의미, 의미. 인간은 그런 존재다. 돈 역시 다 같은 돈이 아니다. 안써봤음 말을 말어.
이 책에서 크리스테바는 한나 아렌트가 ‘삶’을 철학적 사유의 본질적인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다. 아렌트에게 삶과 사유life and thought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었다. 아렌트는 ‘특별히 인간적인’ 삶(specially human)을 제안하는 데… 그가 말하는 *삶*이란 “(19)하나의 이야기a narrative로 재현되고, 다른 사람들other men과 더불어 공유하는 한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시기’를 지시하는 표현이다.”
삶. 이야기. 삶. 평범한 여성들의 더 많은 이야기가 더 길게 길게 써진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21)이야기의 행위성praxis (…) 삶 life, 이야기 narrative, 그리고 정치politics의 운명을 서로 연결 시킨다. 이야기가 예술 작업의 지속성과 불멸성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역사적 이야기로서 공동체polis의 삶을 동반하는데 단어의 가장 적합한 의미로 삶을 정치적 삶으로 만든다.”
그렇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공동의 세계를 짓기 위함이지.😔
내 안으로 파고드는 재미에 푹빠져 종종 세계를 지워버리곤 하는 나에게 똑똑! 여기 곁이 있어요. 다른 삶이 있어요. 그래서 정치는 꼭 필요해요. 라고 말해주는 다른 친구의 얼굴도 떠오른다. …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어 놓았었다. “(23)(…) 삶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value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삶이란 그 의미와 행위 둘 모두를 끊임없이 탐구하지 않는 한inquire into 스스로 충족할 수 없다.”
산다는 것 자체가 혹은 생존 그 자체가 가치는 아니다. 그것의 의미와 행위 둘 모두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는 것은… 그것은 내 삶을 내가 스스로 잉여로 만드는 것이다. (아렌트는 사람을 잉여적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근본악이라고 말한다. 잉여, 잉여에 대한 개념은 더 공부해야할 것 같다.) 삶을 하나의 단일한 원리로 가장 쉽게 환원할 수 있는 ‘돈’. 돈이 나쁜가? 아니지. 어쩌면 그것이 단일한 원리이기에 가치있는- 그것은 삶에 가장 가까운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사기위해 고르는 ‘소비’ 역시 비슷하다. 무력한 일상의 쉬운 통제욕과 나의 존엄을 깎아먹은 것에 대한 보상 심리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가 느껴진다면… 어떤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행위를 하면서 의미를 물을 거다. 그러므로 그건 또 삶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동생의 '이야기'는 동생의 '삶'을 보여준 것도 같았다. 그렇구나.
사실 나는 ‘삶과 사유는 하나이고 같은 것’ 이라는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들렸다. 당연한 거 아닌가?
“(12) 그녀는 ‘전문적인 사유가’라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게 자신의 삶에서 생각을 행동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특유의 아렌트적인 특질에서 우리는 어쩌면 여성들에게 고유한 어떤 것을 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억압’은 여성들에게 ‘문제적’이고 그래서 그들은 순수 사고의 강박적인 요새에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못하는 반면, 남성들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겨루어서 그들 몸의 현실과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잘 안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이 정말 말그대로 건조하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개념을 잘 다룰 줄 모른다는 뜻인가? (이것은 거다 러너의 지적과 공명한다…) 그럼 ‘전문적인 사유가’들은 사유만 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안 살아간단 말인가?(그래 그런 사람들 많이 봐왔지) 그럼… 적어도 어떤 사유의 결과라면…. 생각한 대로 살아보아야 할 것 같은 그런 것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갖는 특징인가? (물론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는다.😳ㅋㅋㅋㅋ 그냥 그래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래서 좋을대로 생각할 때도 많고….) 사실 더 의아한 것은 사유의 대상으로 삶을 주제로 삼지 않는 ‘전문적인’ 사유가도 있느냐는, 물음표인데. 응? 아... ? 응? 알아 나도 내가 이상한 거. 하지만 나는 이상한 내가 좋다, 으하하하!
어쨌든 이 문단이 통째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단이 주는 질문을 안고 그 뒤의 독서를 이어나갈 건데… 솔직히 말하면 정말 어려운 책이다. 그래서 어제는 꾸역꾸역 2장까지 아주 공들여서 읽은 뒤 그냥 유튜브나 만들었다. ㅋㅋㅋㅋ 좀따 올려요, 투비컨티뉴!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사유하지 않음 그것이 폭력이다’라고 말했던 아렌트의 말이 또 생각났다. 삶에 행위를 의미를 견주지 못하게 하는 것. 삶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 삶을 오로지 생존에만 매이게 하는 것. 그것들이 폭력이다. 뭔가 좀 더 이어지는 것 같다. 삶과 사유는 하나이고 같은 것. 삶과 사유는 하나이고 같은 것. 나는 이 당연해보이는 문장이 제법 맘에 든다. 운동을 하면서는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자 한나 아렌트의 말인 이 문장도 생각났다.
분명히 내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어떤 심오한 연결고리가 있다. 으하하. 아렌트 공부하고 싶은데. 넘 어려워. 어쨌든 아아, 나는 아렌트가 좋다. 그리고… 역시 크리스테바가 좋다. 크리스테바 책을 사야겠다. 돈을 벌어야하겠다!
처음부터 삶과 사유life and thought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녀의 다양하지만 서로 깊게 연결된 지적 오디세이는 ‘삶‘을 그 중심에 두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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