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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평점 :
하고 싶은 일들로만 가득한 하루를 상상한다. 그날 하루가 통째로 신나는 모험이 될 것 같은 소풍 날 아침의 기분. 그런 기분을 언제 느껴봤더라? 막상 다 신나기만 한 적은 없는 것도 같다. 소풍 날에도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떤 재밌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면서 설레 두근거렸던 날은… 국민학교 첫 소풍 정도? 그날도 기대는 했지만 같이 김밥을 먹을 친구를 구해야 하는 걸 조금 걱정했다. (그리고 결국 혼자 먹었던 게 지금 기억나는 데… 당시의 난 내성적이었지만, 그럭저럭 씩씩해서—사람 성격이 이렇게 안 변해— 어쩔 수 없쥐라고 생각하고 나무 그늘에 혼자 앉아 맛있게 먹음)
그러니까, 어제 구글 맵에 —이 책에서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별을 붙이다가 한 생각이다. 왜, 왜, 지금까지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나 본 것은 짧지 않은 인생에 단 두 번 인데 한번은 33살에 제주, 다른 한번은 작년에 광주다. 떠올려보면 두 번 다 좋았는 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명분(?)이 먼저였으므로 ‘여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큰 틀에서 대충 동선을 짜고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서 아주 많이 걸어다녔다. 이 시간 동안은 이 시간에 있자. 돌아가서 할 일들은 돌아가서 걱정하자. 이 시간에 오롯이 머무르자. 여행지에서, 나는, 행복했다. 하루가 길었고, 생생했고, 여전히 기억난다. 그리하여 가고 싶은 구글맵에 별 붙이기. 첫 번째는 반고흐 미술관이었고 곧 가게 될 거다. 두 번째 별은 전북의 마이산, 세 번째 별은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에 찍었다.
아, 🤔 이런 거였나?
요 몇 년 간 꾸준히 인생의 모든 have to(취업, 결혼, 육아를 비롯한 형식적 인간관계와 인생관 및 의미 부여, 의미 찾기 등등)를 삭제하는 데에 매진해 왔던 난, 내 생존 + 고양이 밥을 주는 것과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것 말고는 왜 살아야(혹은 돈을 벌어야)하는 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무의미한 무의미가 아주 조금 걱정되더란다. 이렇게 돈을 벌고 돈을 벌고 돈을 벌어서 불안을 해소하고 노후를 걱정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보루인 내 집을 사??!? 그건 그것대로 훌륭한 인생이지만, 기껏 집 샀는 데… 몸이 아파서 병원비를 위해 집 팔아야 하면 어떡해?!? 그렇다면 답은 존엄사!! 존엄사 적금을 들자. (🧠공쟝쟝 뇌 굴러가는 소리ㅋㅋㅋ)
그런데…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여행’이라면 그건 좀 다르잖아?!!!!!!!! 어…?!! (사람이 이래서 세상이 넓다는 걸,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알아야 하능가 보다… 😭) 물론 내가 이번에 가게 될 여행의 경험이 죽어도 못잊을 만큼 너무 좋아서 오로지 인생의 목적이 여행과 다음 여행을 위한 신나는 돈벌기(?)의 형태로 전환될 지는 정말로 알 수 없지만(소매치기를 당할 수도 있고, 함께 간 친구와 다투게 될지도 모르고, 기후 위기 이상 기온으로 쪄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여행을 준비하는 요즘은 그냥 신난다. 즐겁다.
여행지에서 아침에 눈을 딱 떴는 데 ‘해야할 일’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가고 싶은 곳을, 먹고 싶은 것을, 오늘 일어날 예상하지 않은 일들을 떠올려야 한다면… 아침에 빨리 일어나고 싶을 것 같다. 더 자고 싶다면서 투덜대지 않을 것 같아.
“(86) 무언가를 준비하는 데 즐거운 게 있던가? 준비는 닥쳐올 어떤 순간에 대비하여 미리 뭔가를 갖추어 놓는 행위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많은 준비를 한다. 시험을 준비하고 출근을 준비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회의를 준비하고 시합을 준비하고 이직을 준비하고 이사를 준비한다. 심지어 준비물도 준비한다. 근데 준비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 (87) 그러나 여행 준비는 다르다. 특히 구체적인 여행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언젠가 꼭 가리라는 다짐도 없는 채로 느릿느릿하는 여행 준비는 괴로울 까닭이 없다. … 그저 가고 싶은 곳의 곳의 목록을 하나 늘리고,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두 가지 상상만 하면 된다. 떠날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건 시험 치를 예정이 없는데도 공부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참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그러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오늘과 같은 한 여름이었고, 아스팔트 바닥이 끓었다. 버스에서 내렸는 데… 그걸 삶이 확 끼쳐오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어떤 인사이트 모먼트 였을 거다. 그 순간이 너무 강렬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 딱 하루만, 딱 12시간만, 아니 단 세 시간 만이라도. 시간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내게 그 소망이 생겼다는 것 자체에 무척 놀랐는 데… ‘시간은 원래 내껀데???? 왜 내 시간이 내 것이 아니지? 나는 내가 아닌 누구를 살고 있는 거지?… 언제부터 그랬지?…’
일주일에 한 시간 상담 받는 시간 말고는 나 자신을 위해서 쓰고 있는 시간이 전혀 없다는 걸 그 순간 알았다. 일, 그다음 일, 내가 겨우 겨우 일에서, 그 다음 일,로 옮겨가면서 지내는 동안 일주일에 고작 서너 시간도 나에게 할애하지 않았다는 사실. 나의 만성적인 것 처럼도 느껴지는 무기력증은 거기에서 기인했다. 인생을 견디 듯 살고 있었다. 20대 였는 데. 나를 벌주 듯이 살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 … 친구는 내 인생에서 ‘통째로 드러내 버려도 하등 상관이 없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 데. 나한테는 그 시간이 길었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그 시간 만큼의 시간을 써야만 했다. (사실 다 빠져 나왔는 지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인생이야, 라고 누가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아니, 요즘엔 좀 화난다. 시지프스 신화 같은 거 개나 줘. 나 그 돌 안들어.
지난 주에는 두 달 만에 상담 샘을 찾았고, 6년 전 여름의 아스팔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최근에 경험한 조금 다른 인사이트 모먼트도 이야기했다. (인사이트 모먼트… 는 페미니즘 모먼트에서 착안해서 만들어본 용어인 데, 그냥 나만 아는 내 성장 포인트…ㅋㅋㅋ 좀 더 생각이 정리되면 이번 꺼 역시 글로 써 볼까 싶다.) 샘한테 이번 여행이 쟝님에겐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잘 다녀오세요!라는 응원을 받았다. 아, 안돼. 샘 안돼요. 의미 부여 안돼… 전 의미 부여 경계해야 해요… 그런데… 이번 건 좀 하고 싶다. 하하하. 여행을 가서 너무 좋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거기서 살아본 것처럼 매일 매일을 여행하는 것처럼 살아보는 거를 연구하는 거죠. *Have to의 세계관에서 I love it!💕의 세계관으로* 천천히 몸을 뒤집는 것, 나, 성공?
“(62) 여행준비의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이유는 여행준비가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덜 원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언니, 언니, 여행이 얼마나 좋은데요. 감각이 다 열린다니깐요? 이번에 한번 경험해보세요. 앍! 여행 너무 좋아! 언니가 여행가는 거 나 너무 좋아! 삶이 너무 재밌어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친구1은 내 여행에 필 받아서 자기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그는 코로나가 수습되어 공연과 뮤지컬들이 오픈 되자, 걸신들린 사람처럼 보름에 한 번 씩 서울에 와서 내 집을 숙박 업소처럼 애용중인데…;; 당분간의 공연표를 대거 취소하고 그냥 여행을 가겠단다. 러빗!세계관의 실천자. 역시 현명해. 그 날, 나는 여행지에서 돈을 펑펑 쓰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얼마 모으지도 못한 존엄사 적금을 해지했다. 먼 미래의 나 자신과 안전 이별(?)보다는ㅋㅋㅋㅋ 가까운 미래의 유럽 플렉스를 원해!!! ㅋㅋㅋ
그리고 주말에는 여행을 준비를 목적으로 친구2를 만났다. 우리는 현지에서의 기차표 예매로 몇시간을 낑낑댔는 데, 뭔가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까스로 목표한 바(?)를 끝내고 나니 매우 허기가 졌다. 꽤 노련한 여행자일 것으로 예상했던 친구는 모든 여행은 여행이니까 다 처음인 거고 그러므로 자신도 알 수가 없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방법을 찾으면 되고 우리는 결단하고 그 만큼을 감당하면 되는 거라고 호기롭게 이야기 했다. 그 역시 러빗! 세계관의 실천가. 아직 have to~가 더 익숙한 나는… (투 두 리스트와 미리 알림으로 스스로를 속박하지 않으면 인생을 잘못 사는 것 같아 초조한 나는…) 아, 여행 준비…는 여행지에 대한 정보+지식 습득이 아닌 거 군요. J!!!! J를 지울거야. INTP! 인팁이 되겠어! 인생의 통제 욕망과 계획을 라벨링을 분류법을 없애라고!!!!!!!!!!!!!!!!!!!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질서가 있다면 질서가 없다는 것이 질서다 우하하하하!!!!!!!!!!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살짝 타버린 돼지 껍데기를 가위질로 되살려 내면서(?) 나는 아프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모험은, 새로운 사람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나는 겁이 나고, 이번에도 또 옛날처럼 아프면 어떡하죠?
친구는 이제는 안 아프고 싶으니까 안 아플 거라고 말해 주었다. 세상에는 아픈 상태에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도 있어, 라고. 쟝님은 아픈 상태에 머무르고 싶지 않잖아. 그러니까 결국엔 안 아프게 될거야.
“(167) 독서와 여행 준비는 좋은 짝이다. 둘 다 좋은 취미지만, 두 가지를 다 좋아하면 확실한 시너지가 생긴다.”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휙- 던져버린 그 많은 책들. 난 책 읽기로 그런 것들을 연습해 온 것은 아닐까. 사람도. 삶도. 읽기 전에는 예측 할 수가 없고,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다른 더 재밌는 걸로, 더 좋아하는 걸로, 더 괜찮은 걸로. 내키지 않으면 너무 열심히 읽을 필욘 없다고, 완독 할 필요 역시 없다고. 마무리 지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다 또 어느 날은 그 책이 나한테 열려서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날이 오기도 한다고. 온통 복잡하고 알아 먹을 수 없는 낯선 용어들이 저절로 읽히는 때가.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고, 머리에 열을 내면서, 신나게 다 읽어내고. 내가 이걸 읽었어! 쾌감에 몸부림 치는 날이. 그렇게 ‘인생 책’이 한 권, 두 권. 그것을 읽기 전의 내가 있고 읽은 후의 내가 있다. 결과값이 단절/비약/도약/반전이면 좀 괴롭지만 재밌어서 좋고 아니어도 그냥 내 언어가 풍부해진다. 지금 시점의 나는 말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재밌고 좋으니까.
소주 각 1병 씩을 하면서, 여행지에서는 과음 자제하자 약속을 하면서, 우리는 예측 할 수 없는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축소판이 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하기로 한다. 여행, 독서, 그리고 인생, 따위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좋아하는 중이다.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삶을 더 살아봐야 할 이유가 있다고. 여행이 알려준다면. 신나게 신나게 살거다. 소풍 날 아침의 기분처럼, 매일 아침이 뻔하지 않아서 즐거운 삶을. 나 이거 좋아하네? 나 이거 좋아해! 나 이거 좀 싫은 데? 나 이거 싫어해! 이 세계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므로 싫은 것에서는 도망친다고 해도 완전히 도망쳐지진 않는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더 추가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다.
사실은 그날 저녁에 친구가 해준 이 말을 쓰기 위해서 이렇게 긴 글을 썼다.
쟝님, 잘 될거예요. 잘 되기로 마음 먹었잖아요. 그러면 잘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