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은 잔인해서 마침내 우리를 붕괴 시키고,
앎은 자명해서 단일한 설명을 미결의 불확정성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곤란한 21세기.
“(217) 보어는 이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물리학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결정론의 종말*이라고 하이젠 베르크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뉴턴의 물리학이 약속한 시계장치 우주를 믿는 모든 사람의 희망을 갈기갈기 찢었다. 결정론자들은 만일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밝혀낼 수만 있다면 가장 태곳적 과거로 돌아가 가장 머나먼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어난 모든 일이 이전 상태의 직접적 결과라면 현재를 들여다보고 방정식을 풀기만 해도 우주에 대해 신과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희망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으로 산산조각 났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미래도 아니요 과거도 아니요, 현재 자체다. 한낱 입자 한 개의 상태조차 완벽히 파악할 수 없으니 말이다. 기본 입자를 아무리 꼼꼼히 조사하더라도, 모호하고 미확정적이고 불확실한 것은 언제나 남기 마련이다.”
“(225) 이 한계들은 결코 이론상의 한계가 아니다. 모형의 결함이나 실험의 한계, 기술적 제약이 아니다.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현실 세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가 설명했다. “우리 시대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 행위자로서의 우리가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제 실재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면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분석하고 설명하고 분류하는 방법은 스스로의 한계*를 맞닥뜨렸습니다. 이것은 개입이 탐구 대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과학이 세상에 비추는 빛은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의 모습을 바꿀 뿐 아니라 그 기본적 구성 요소의 행동까지도 바꿉니다.” 과학적 방법과 과학의 대상은 더는 분리될 수 없다.”
2.
현대 물리학만 불안정한 것이 아니지. 투자 없이 노동 소득 만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는 우리의 삶도 불안정하긴 마찬가지지. 생각해봤는 데, 코인이랑 주식 같은 거 말야. 인간은 이제 일기 예보로 날씨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서 자연 재해가 없어지니까 스스로 자연 재해 같은 걸 만들어 낸거 아닐까. 삶에는 일정 정도의 충격과 유실이 필요한 거지. 지랄 총량의 법칙이랑 비슷한 재난 총량의 법칙이랄까. 자신들이 자초한 재난.
“(400) 하지만 쉽게 꺾이지않는 물가 상승세를 보면서 2022년 4월 23일 지금은 2022년 내에 3.0%를 넘는 수준의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습니다. 이미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던 70년대의 연준이 지금의 연준에게는 중요한 반면교사가 되었겠죠. 물론 공급망 이슈 등의 변수는 존재하겠지만, 그리고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70년대와는 다른 흐름이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40년 만에 찾아온 인플레이션인 만큼 한동안 고물가 환경을 고민해보지 않았던 투자자들에게는 투자의 난이도를 크게높이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겠습니다. 변해버린 연준은 그동안 저성장·저물가 국면에서 항상 시장을 구해주었던 든든한 해결사가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이 역시 투자 난이도를 높이는 부담스러운 요인이고요. 거시경제 환경의 변화가 워낙 빠르게 나타나기에이럴 때일수록 특정 자산으로의 집중보다는 *다양한 분산투자 전략*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3.
샘, 두 눈을 뜨고 세상을 살기 시작하니까. 너무 너무 불안해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게. 그런데 기대거나 의존할 수 없다는 것도. 내가 믿을 건 나 자신일 뿐인 데, 나 자체도 너무나 자명하지가 않아. 저만 이렇게 유별나서 저 자신이 문제가 되는 걸까요? 모르겠는데? 하나도? 그렇다고 예전처럼 도피하고 싶지는 않아요. 가끔 궁금해요. 사람들 다 이러고 사는 건지. 나만 조금이라도 덜 아파보려고 꼿발 딛고 사는 거야? 그게 너무 피곤해서 죽겠는거고?
그래서 뭐가 신념이 되었는지 아세요? “(250)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어쩔 수 없어요. 내 오류성에 대해서 틀렸네 또 틀렸어 하면서 아 맞다 틀리는 게 상수지? 나 자신이 별로 안 소중해져야 돼요. 쪽팔리는 거에 쪽팔려하지 않아야하고, 펑펑 잘 울고, 눈물 닦고, 잘 일어서야 하고. 친구가 저한테 씩씩하대요. 근데 안 아픈 건 아닌데. 안 쪽팔린 것도 아니고요. 틀리는 거에, 아픈 거에, 쪽팔린 거에, 불안한 거에 익숙해진 것일 뿐인데.
“(286) 헤더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게 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하고, 별들이 매일 밤 그들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천구의 천장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서서히 놓아버릴 수 있도록 수고스럽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그런데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물고기의 반대편에 다른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은 그 결과로 또 다른 어떤 실존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들의 경우에 꼭 그랬던 것처럼.”
“(263)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틀리고, 다 포기하고, 하나도 모르겠는 채로, 아프면 앓으면서 그렇게 사나봐요.
생각해보니까 또 그런데 아프다고 죽는 건 아니니깐요. 그래도 기왕이면 안 아프고 싶은 데. 아픈 거에 무뎌지는 것도 싫고.
4.
모든 것이 쪼개져 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상태로 모호해졌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기 때문에… 전체를 파악하고 싶어서 철학 책과 사회학 책을 본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잘 가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서. 조망하고 싶어서. 그런데 총체성과 전체론을 포기하라고 한다. 그런 시선으로는 똑바로 볼 수가 없대. 신체를 초월하는 시야 자체가 문제래. 그걸로 보는 것은 진짜를 볼 수 없게 한다는 것.
“반면 스트래선은 로고스(음성이나 남근)를 탈구축한다 해도 *유럽 형이상학의 초월성(탈신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위계적 질서를 해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스트래선이 보기에는 로고스가 아니라 *신체를 초월해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스트래선은 신체의 부분적 감각을 계속 주입함으로써 전체론적 사고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세계에 대한 앎을 완결적으로 닫아 놓는 것이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하여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다.”
그래서 소설 읽는 데, 아인슈타인의 깊은 빡침에 동일시가 되었다.
“(143) 그는 하이젠베르크가 요구하는 제약을 받아들이기가 꺼림칙했다. 더 멀리 보겠다고 둔 눈알을 후벼낸 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게. 두 눈알을 후벼내더라도 보이기 시작한 것들에 대해서 보게 되면 보지 않던/못하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게다가 불안에서 도피하기위한 ‘초월적 시야’보다 유한한 내 몸으로 보고 겪는 세상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압도적이란 말이지. 그러므로 나는 스트래선에 하이젠베르크에 한 표.
5.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조그만 부분 뿐이고, 신 조차도 자신이 만든 우주를 통제하지 못하며,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작고 작은 미시의 세계에서 마저도 대상을 인식하고자 하면 그 대상은 인식하는 순간 변해버려. 좌초된 총체성. “(69)총체성이 있을 때만 잘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까지도 그것이 자칫 재생산-유기체적 전체론 혹은 총체성을 향한다면, 쓸모가 없어지는 거라고 해러웨이느님은 말씀하셨지.
“(79) 이런 기계/유기체 관계(이분법)는 진부하며 불필요하다. 기계는 우리에게 상상과 실천 모두에서 보철 장치, 친근한 구성요소, 다정한 나 자신들이 될 수 있다. *침투 불가능한 총체성, 완전한 여성 및 그 페미니즘적 변이(돌연변이?)를 내놓는 유기체적 전체론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
“(85) 유기체와 유기체적인 것, 전체론적 정치는 부활의 은유에 의존하며 재생산을 위한 성이라는 자원을 반드시 소환하다. 나는 사이보그가 재생과 관계가 더 깊고, 출산과 재생산의 기반 대부분을 의심한다고 말하고 싶다. … *우리는 모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부활이 아닌 재생을 요구하며,* 우리를 재구성하는 가능성에는 젠더 없는 괴물 같은 세계를 바라는 유토피아적 꿈이 포함된다. 이 글에서 사이보그 이미지는 두 개의 핵심 주장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보편적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고안하면, 아마도 언제나, 지금은 확실히, 현실 전반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6.
내가 알던 세계와 내가 사랑했던 세계가 발밑 부터 붕괴되는 느낌은 꼭 대단한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니더라도 겪는 것이며, 호되게 깨지고도 살기 위해 배우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과거의 토대와 믿음들을 다 무너 뜨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무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일 텐데… 두 눈 똑 바로 뜨고도 부족하면 두 눈을 파내서라도 봐야하는 진실이라는 게 … 결정론 파기… 불확정성의 원리… 물고기는 없다… 전체론 붕괴… 총체성이 아닌 “상황적 지식”여야 한다는 건 … 때론 너무 버겁고… 그런 불안에 나를 다 내던져도 내가 녹아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해야한다는 것은 알지만, 잘 알지만.
혼술도 끊었더니 진짜로 공황 올 뻔 했다.
도피 아니면 도취. 그거 말고 잘 사는 방법이 있긴 해?
앎을 초과해서 알아버린 현생 인류에겐 역시 멸망 밖에 답이 없는 것인가 했다가.
불안해서 죽을 것 같은 데, 불안해서 죽지 않았다. 다 알면 안 불안할 것 같았는 데, 다 알 수 없다는 것만을 알았고.
그러니까 불안한 채로 안죽고 잘 견디면서 살 수 밖에 없으므로 …
총체성 포기 오케 전체론적 사고 포기 오케 결정론 포기 포기 포기 다 포기 오케오케!
근데 생각해보면 포기할 게 없는 게, 원래 내 것도 아니었고 원래 추구한 적도 없었다?
(제 3세계 / 노동계급 / 비혼 여성의 안도)ㅋㅋㅋㅋㅋㅋ 그러므로 붕괴될 게 없어 혼란할 게 없어ㅋㅋㅋㅋㅋ
내게 필요한 건 인내심. 조급하고 불안해질 때 마다 세상이라는 스위치를 꺼버리고 나 혼자가 되는 것.
미래는 걱정하지 말자… 지금 당장 행복하자…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닦고 잠이나 자야지.
근데 책사고 싶다. 책 사려면 돈 벌어야 한다. 돈 벌면 책 읽을 시간 없다. 아.
질주하는 파도가 수평선에서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 멘토인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어는 바다의 미칠 것 같은 넓이를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은 채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영원의 한 조각이 놓여있는 곳에 가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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