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빈센트 나의 빈센트 -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평점 :
병원 때문에 서울 온 엄마가 50만원을 현금으로 뽑은 봉투를 나에게 준다. 띠용? 내가 난생 처음 해외 여행간다니까, 면세점에서 비싼 가방 하나 사야 한다고 한다. 보태서 비싼 거 사. 그런 것도 좀 들고 다니라고. 막 500만원짜리 그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200만원은 넘는 거… 좀!!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엄마가 울먹울먹 하자 분위기 진지해지는 것 싫어서… 고마워, 하면서 룰루룰루 콧노래를 부른다. 돈을 쓰자, 펑펑 쓸꺼야.
엄마 내가 이번에 여행가려고 뱅기표 끊고 심장이 떨려서 돈을 펑펑 쓰라는 책을 읽었는 데, 내가 나한테 아끼지 않고 돈을 펑펑 다쓰면 온 우주가 내 통장을 채워준대. 그게 내 존재급이래. 근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어. 엄마, 내가 엄마한테 50만원을 받아보다니. 대박 인생 처음이야… 목돈 용돈… 이 나이에… 역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 그 책은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인가? 비밀이야, 동생들한테 말하지마. 진짜 비밀로 해? 엄마는 내 에코백 사랑이 좀 짠했나 보다. 근데 나는 정말 비싼 가방 필요 없는데? 그런 거 하나 있어야 하는 나이라고 한다. 난 진짜 필요 없는데…? 늬 동생들은 지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사는 데. 너는 그런 거 왜 안하냐. (하지만 엄마는 내가 책사는 데 얼마나 돈을 아끼지 않는 줄 알면 놀랄 거다 ㅋㅋㅋㅋ) 헤헤, 나는 괜찮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엄마 나는 진짜 괜찮아. 엄마… 나는 괜찮… 갑자기 목이 멨다. 켁켁.
사실 진짜 괜찮은 데 앞으로 엄마한테는 괜찮다는 말 하지 말고 그냥 졸라 잘살고 돈 펑펑 쓰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겠다. 아주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때 까지, 엄마가 내 신용카드를 이리 내놔 압수할 때 까지ㅋㅋㅋㅋ
내가 신용카드로 비행기 표 긁었다니까 엄마가 카드 값 못 갚겠으면 돈 빌려줄 거니까 넌 카드 좀 긁어. 엄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 너 돈 필요하면 말해. 응? 엄마는 너한테 돈 빌려주고 싶어. (실제로 내가 사업을 시작하고 엄마는 부가세 신고 할 때 마다 물어본다. 돈 빌려줄까?) 응??? 작년부터 늬들 다 안키우니까… 아빠 사업 정리하면서 빚도 다 갚아버렸고. 처음으로 통장이 +가 됐어. 너도 엄마한테 돈 빌려 줬는 데, 엄마는 항상 너한테 돈 빌려주고 싶었어. 그럴 거면 빌려주지 말고 그냥 주면 안돼? 그건 안돼. 니 아빠가 고생해서 번 돈이라.
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는 데, 밤 사이에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갔다. 쟝쟝, 일어나봐! 산타 할아버지 왔다 갔나봐. 포장을 뜯었는 데 연필깎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였을 거다. 1년 정도는 연필을 손으로 깎았던 것 기억이 있거든. 난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바로 알았다. 엄마네, 엄마야. 산타는 엄마였다. 24일 밤에 잠들기 전까지 내가 원했던 건 아파트가 한 채 딸린 미미 인형이었으니까. 기도를 할 줄 모르는 나였지만 틈만 나면 기도했다. 학교 문방구 앞에서 본 그걸 주세요. 더 착해질 테니까 그걸 주세요. 1학년 때는 친구가 없었는 데(사귀는 방법을 잘 몰랐다. 3학년 때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게 된 것 같다), 인형의 집 세트가 다 갖춰지고 옷도 여러 벌인 누구네 집에 모여서 인형 놀이를 한다고 들었다. 무튼 난 인형이 없었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고, 빌었다.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나 간절했던 지… 그 인형 박스 상자까지 기억이 나…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 보단 엄마가 산타라면 이 선물은 아주 기뻐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 우와! 연필 깎이다!!!!! 엄마 연필 깎이야!!!! 필요한 건데 어떻게 알았지? 산타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기뻐하는 척했다. 잠들면서 나는 몰래 울었던가? 거기까지는 기억 안난다.
쌤, 저는 바로 알았고, 웃었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웃고 산타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집은 가난하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하지만 엄마는 돈이 없고, 기도로도 분수에 맞지 않는 걸 바래서는 안되는 거라는 걸 아마 알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요… 쟝님, 그때가 일곱 살이잖아요. 그러면 마음에 안드는 선물이면, 이건 내가 원하는 거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나는 인형이 갖고 싶었다고 울고 떼를 쓰는 게 그 나이 대의 아이들 아닐까요?
그런가요? 전 기쁜 척 했어요. 사실 그 연필 깎이 꼴도 보기 싫었는 데도요.
그거 너무 안타깝네요. 맘에 안드는 선물 받고도 마음에 드는 척 한 거.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를 찾으려면 조금 더 어린 시절 첫 번째 기억까지 올라가야 한다.
거기까지 쓸 시간까진 없고.
연필깎이.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엄청 많이 울었다. 근 30년 치의 눈물을 몇 달 동안 뽑아낸 듯.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 기쁘지 않으면서 기쁜 척 했다는 것, 그렇게 계속 살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 의무감, 책임감, 양보, 타인들이 나에게서 바라는 것, 연기, 자아 없음. 남들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으로만 기능하려고 했다…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을 자처했다… 는 재미없는 반전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30년 동안 살았던 내 삶이라서 그 무렵엔 내 삶이 나하게 하는 복수를 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괜찮았다. 늘. 사람들은 내게 괜찮냐고 묻고 나는 정말 괜찮았으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아주 어릴 때 부터 (적어도 7살 부터는) 내가 원하는 뭔가가 갖고 싶다고, 하고 싶다고, 말하고, 울고, 떼 써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기능은 나의 욕구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데에 최적화 되어있어서 그걸 참 잘했다. 엄마한테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은 나의 습관. 이 해묵은 습관을 깨야 한다. 엄마가 나를 더 불쌍하게 여기기 전에 나는 오예 오예 돈 쓸 생각에 너무 신난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를 편애하지. 역시 엄마는 딸 들 중에 내가 최고지? 니가 제일 잘돼야 애들도 잘되지. 애들은 이미 다 잘됐잖아. 오예, 이젠 나만 잘되면 된다. 신난다, 앗싸! 비싼 가방 산다 내가, 엄마 땡큐땡큐.
나는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별로 안 믿는다. 괜찮은 감정 자체는 괜찮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니까. 그래서 안녕하기를 바란다. 그냥 평안하고 또 평안하기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은 내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엄마의 그 짠해 죽겠다는 눈으로 짠하게 나 자신을 바라 보는 건 데… 그 짓을 그만두려면 내가 나를 절대 불쌍하게 여기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무척 많이 30년 동안 (30살에 반전이 나왔으니까 -요즘 영화는 중간에 반전이 한번 나오고 - 그리고 후반부 10분 남겨 놓고 또 반전 한번 더 나오더라?)은 해줘야 한다.
나의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과거 내가 읽었던 고흐 책에서 그는 끊임없이 동생 테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며 물감을 사게 돈을 달라고 한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물감 정도는 벌어서 사… 이 새끼야…. 편지 쓸 시간에 노가다를 뛰라고 이 미친놈아….
좀 더 읽고 난 뒤 자세히 알게 된 사실 — 당시의 물감은 드럽게 비쌌고, 고흐 그림의 특징은 그 비싼 물감을 졸라 아끼지 않고 미친놈처럼 많이 퍼 발랐다는 데에 있고(아… 예술이란 무엇인가… 난 예술을 해야 하는 데… 뭘 너무 아낀다… 쉬벌…), 그는 살아서 그림으로는 돈을 못 벌었기 때문에 동생한테 빌 붙을 수 밖에 없었는 데(그 와중에 거리의 여인과 살림도 차리는 게 진짜 어이가 없어 가지고)… 동생한테 빌붙는 걸 그렇게 미안해 하면서도 절대 그림에 물감을 아낄 수는 없었다는 — 모순을. 알게 되는 순간,
아, 고흐? 그림 좋지… 이 정도 수준이 아니고… 난 그걸 직접 보고 싶은 거다. 빈센트의 예술 혼이 담긴 그림이 아니라 *테오의 노동*이 담긴 압도적인 양의 물감을. 그 비싼 물감으로 캔버스를 폭행하는 고흐의 붓질을. 그걸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빈센트를 좋아 하냐?라고 누가 묻는다면… 역시… 그럴 수가 없다. 왜냐면… 난 절대… 내가 그리는 게 설령 <별이 빛나는 밤>이라도 남한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싶어하는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돈이 아주 아주 많지 않고서는 싫은 소리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잘 알아서. 어정쩡하게 사느니, 끝까지 자신을 살아보려고 맹렬히 노력하는 인간들을 경외하고 그들이 만들어 낸 것들을 읽거나 보는 것을 좋아하는 데.
내가 뭘 사랑하는 지 원하는 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물어봐야 하는 것이고,
지금 내가 나에게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자기 자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것을 감상하는 것 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어. 😌
그것들을 읽고 보고 느끼는 것에서 만큼은 어정쩡하게 안 살면… 좀 나를 내가 짠해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 아닐까?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던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 갈 거다.
나는 그냥 올 여름 휴가로 거기를 가겠다고 말한 것 만으로도, 엄마한테서 돈을 뜯어낼 수 있고(뜯어내지는 않았지만 ㅋㅋㅋㅋ), 이토록 돈을 자발적으로 순순히 내 주는 사람이… 더 많이 주고 싶은데 그건 아직 안되는 것 같아 미안하다며 울려버릴 수 있는… 그런 … 존재다.
ㅋㅋㅋㅋㅋ
난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리고 엄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면.
세상엔 참사랑이 있다.
트루럽.
럽.
l
o
v
e
ㅋㅋㅋ
💕
"사람들이 모두 시궁창에 처박혀 있을 때도, 그중 몇 명은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이 문장처럼, 빈센트는 모두가 ‘어둠‘만을 바라볼 때도 ‘빛‘을 발견해내는 사람이었다. 빈센트가 그린 밤하늘의 별이 감동을 주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검은색이 없기 때문이다. 밝은 빛에 익숙해진 시선으로 어둠을 바라보면, 어둠은 순간적으로 짙은 까만색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의첫인상일 뿐이다. 어둠 속에도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이 있다. 빈센트는어둠 속에 빛나는 찬란한 무지개를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빈센트가 그린 밤하늘은 어둠이 머금고 있는 무수한 표정들을 고요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밤하늘의 빛깔은 군청색이나터키블루 같은 특정한 물감의 색이 아니라, ‘빈센트의 빛‘이라고 이름붙이고 싶은 고유의 색상이다. 👩🎨어두운 곳에선 어둠이 더 잘보여, 희미한 빛도 잘 보여. 어둠이라고 다 같은 어둠이 아니다. - P39
"잔칫집보다 장례식장에 가는 편이 더 낫습니다. 겉모습은 슬퍼 보일지라도 마음은 오히려 더 낫기 때문입니다." 20대 초반에 빈센트는 슬픔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슬퍼할줄 아는 한, 항상 기쁘다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에 가 닿지 않는 죽음이나 슬픔은 없다고. 따라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절망도 없고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 모든 감정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건, 다른 의미의 현실 직시 - P152
내 인생의 목표는 최대한 많이, 최대한 잘 그려보는 거야. 그렇게 최선을 다해 그리고 나서는, 인생의 종착역에서 뒤돌아보고 싶구나. 애정을 담아, 그리고 약간의 반성을 담아,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미처 그리지 못한 그림들을 아쉬워하면서 죽어가고 싶어. 👩🎨 그의 그림이 광기가 아닌 자기 치유의 몸부림임을 이젠 안다 - P3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