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도적적 확신을 칭찬 받고 싶다는 야망
왜 pc한게 싫지? 내가 뒤틀려서? 아니, 어쩌면 인간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누구보다 이념적으로 살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인 문제로 고뇌하는. 그래서 인간, 에휴 절레절레 하게 되는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 데, 이 인간 참 싫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소설은 재밌는 거다. 아, 이 작가(필립 로스)는 어쩌면 진짜로 인간을 아는 것 같은 데, 그런데 그걸 알아서 이렇게 써버리다니. 이렇게 써버리면 인간들은 합리화를 할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지. 인간이, 이렇게나 참 모순적이고 허접해서… 결국 이 소설도 인간도 참 싫다. 괘씸해서 별을 세개 주고 싶은 데, 그거랑은 별개로 재밌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엘리자베스 문의 SF소설(잔류인구)은 참 좋은 소설이었는 데, 참 하품이 났단 말이지. 응? 좋은 소설이라는 건 알았고 느꼈지만 재미가 없었어. 와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안녕, 헤어졌다. 착해 빠진 소설에 손이 안가는 이유에 대해.
내가 재미를 느끼는 소설은 확실히… 인간이 자기 모순에 날뛰다가 파멸하는 소설이다. 언제나 좋아서 울다 사랑해버리는 소설은 나만 안다고 느꼈던(물론 보편적일테지만 ㅋㅋ 읽는 순간 만큼은 완전 이해받았다 느껴버리는 감정을 일으키는) 아주 내밀한 감정적인 어딘가를 건드려주는 소설. (최은영 최은영최은영)
모르겠다. 소설은 소설이고. 글은 또 글이니까.
어떤 글은 글로 남기는 것 조차 상처가 돼버려서, 글로 남기는 것을 자체를 숙고해야하고. 실은 나 자신이야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지만. 그 글이 부득이하게 어떤 사람들을 상처주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좀 했었고. 기왕이면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나 스스로가 말의 무서움을 글의 무서움을 잘 알아서, 어떤 마음과 사실은 꼭꼭 숨겨서 표현하지 않은… 그러나 어떤 진실이 배어나오는 그런 글(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같은)을 쓰는 소설가들이야 말로 정말 대단하다고, 만약에 쓴다면 그런 걸 쓸 수 있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음ㅋㅋ)
그런데 또 웃긴 게… 내가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야한다, 읽어내겠다 싶었던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상처 받는 글들이었다. 정희진 말마따나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
그러니까 내가 그렇다. 상처 주기는 싫은 데, 상처 받더라도 알고 싶은 것들이 있다. 알아야 속이 시원하겠는 것들이. 이런 종류의 글을 쓰다보면 언제나 나의 마음은 섞이고. 섞여있다는 것이 여러 번 드러나면 결국은 알게 된다. 그냥 나 자체가 섞여 있다는 걸.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뒤에는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숨어있고, 기꺼이 상처 받아가며 더 아프게 알기를 바라는 마음 속에는 내 상처에는 무뎌지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있다.
누구도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려면 결국에는 글을 쓰지 않아야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오늘 했다. 자해를 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나를 훼손하는 나 ‘자신’이라는 왜곡된 자아감(너는 나를 상처줄 수 없다)이 작용할지도 모르겠다고 다부장님의 보부아르 페이퍼에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지금 왜 이게 생각나는 지는 모르겠다). 아, 알겠다. 어떤 글은 가끔 자해를 하는 심정으로 읽으며, 그런 글이 결론적으로는 나를 회복시켰던 경험에 대해.
나는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인간이 쓴 글, 인간이 창조해낸 이야기들을 보고 읽으면서 치유되었는 데, 최근에는 인간들이 쓴 글을 보고 상처받고, 인간을 통해서 치유받는 경험도 하고 있다. 어쩌면 계속 해왔는 데, 이제야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역시 알 수 없다.
인간은 역시 모순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글을 즐기지(훗)
그런 글을 즐겨버리게 된 이상, 상처주는 글을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테다. 안쓰는 것보다는 쓰는 게 낫지.
자, 글을 쓰자. 기왕이면 어려운 글과 상상력이 뛰어난 글을 쓰자. 그럼 좀 잘 써야 하잖아. 얽. 쓰지말자. 아닌데? 너무 잘 쓰려고 하진 말고 걍 쓰자. 아니다. 쓰지 말자. 일단 썼다… 오늘도 말과 사물 읽다 말고 실존에 대한 사면으로서의 글쓰기 해버리는 중… 아니 근데 하필이면 이 와중에 정희진을 인용하고 있어. 이게 글을 쓰라는 거여 말라는 거여, 뭐여 이게.
(다음날 댓글 읽다 덧붙임)
누구도 상처주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천착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글은 좋아할 것 같다.
그런 글을 아는 사람 내놓으시오. -천착 공쟝쟝ㅋㅋ 공천착-
내 생각에 쉬운 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 아무 노동(생각)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익숙함은 사고를 고정시킨다. 쉬운 글은 실제로 쉬워서가 아니라 익숙하기 때문에 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진부한 주장, 논리로 위장한 통념, 지당하신 말씀, 제목만 봐도 읽을 마음이 사라지는 글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진정 쉬운 글은 내용(콘텐츠)와 주장(정치학)이 있으면서도 문장이 좋아서 읽기 편한 글을 말한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기존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글은 매우 드물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쉬운 글은 없다. 소용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이 있을 뿐이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 P106
인간의 사유 방식은 언어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상상력은 관념적인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하지만 ‘딴 생각’은 머리를 흔들어서가 아니라 몸의 경험으로 기존 언어를 부정할 때 가능*하다. (…) 역지사지. 흔한 이야기지만 쉽지 않은 실천이다. (…) 아니, 쉽고 어려운 차원이 아니라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첨예한 이해 갈등, 정치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변’과 ‘중심’은 각자 다른 공간에서 일상을 보내며 ‘중심’은 안락한 삶의 유지와 영속을 위해 온 힘을 다한다. (…)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 인식의 위치를 바꾸는 것, 이것이 상상력이다. (…)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내 안의 주변성을 탐색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대립시키고 위계화하지 않는다. 이 때 일상은 깨달음이 주는 아름다움의 연속이 되고 인생과 예술의 길이는 같아질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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