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나를 제대로 길러보기 시작한 것은 4년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만화책이 통째로 그 4년의 시간들 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당연한 관계들을 최대한 끊어내고 나 자신을 고립시켜 오로지 생존만을 도모했던 시간. 그 과로와 그 고단함과 그 질문과 그 생각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왜 누군가에겐 그토록 상처가 되는 일이 되어버리곤 했는지에 대해 뒤척였던 밤들이 많이 생각났다. 그래도 나는 나를 길렀다. 혼자를 길렀다. 지금 와서는 제법 잘 길러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드니까. …
그렇다고해서 완벽하게 혼자는 아니었다.
이시다에게는 담배와 쥐윤발이 있었고, 나에게도 담배와 홉스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시다 처럼 과로도...)
내겐 책도, 일기도, 가끔씩 술도 있었다.
혼자 먹는 밥은 대체로 맛이 없었다. 난 요리를 제법하는 편이라…(응?) 갖가지 요리를 도전해보고 또 생각보다 수월하게 성공하곤 했다. 내가 생각해도 맛있으면 친구들에게 대접하거나 동생들에게 만들어주곤 했는 데, 어쨌든 혼자를 위한 요리의 결과물들이 혼자 먹게 되면 결국 그저 그런 맛 처럼 느껴졌다. 요리는 확실히 2년 반쯤 넘기자 시큰둥해졌다. 맛있는 게 먹고 싶으면 동생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해 같이 먹어달라고 했다.
사람과 맛있는 게 먹고 싶은 날은 석달에 두 번 정도였는 데, 내가 오로지 그 목적(?)으로만 동생에게 연락하자 대체로 일년에 절반은 다이어트 중이던 동생이 분통을 터뜨렸던 기억이 있다. 나의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는 욕망에 널 이용하지 않을게.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다. 그 날 빼고는 대체로 나는 혼자가 체질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젓가락질에 매우 능숙한 편이라서 깻잎 김치도 혼자서 잘 뜯어 낼 수 있었고, 천둥번개가 치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대학시절 창문으로 칼든 청년 두명이 들어와 위협당한 적이 있었는 데(격투를 통해 물리쳤다는 건 거짓말이고 어찌저찌 기지를 발휘해 소량의 피를 흘리고 잘 쫓아냈다), 그 두려움은 창문을 꽉 잠그는 것으로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고, 사실 이미 습관이 이미 되어 있었으므로 혼자사는 집의 창문은 환기시킬 때만 열면 되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슬프네. 지금은 높은 곳에 살아서 이전처럼 심하게 닫고 지내진 않는다. 아파트를 사면 해결된다.)
그래도 가끔 엄청 외로운 날이 있었던 것 같다.
공개해도 되는 수준에서의 최고 외로웠던 날의 일기를 가져와본다.
“<2019년 모월 모일>
가끔 너무 외로워서 사람이 곁에 있으면 녹아버릴 지도 모른다고. 그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 나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이라면 나는 아주 찰싹 달라붙어서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고. 나 자신이 아니라 그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통째로 함입되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 페미니즘 적이지도 주체적이지도 개인적이지도 않은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는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길 바라?
아니, 나는 나이길 바라.
그렇다면 나는 내가 되자.”
나는 이런 것들을 핸드폰에, 일기장에 쓰면서.
어느 날은 걷고, 걸어서 들어간 카페에서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
기대고 싶은 마음, 의존하고 싶은 마음, 내 주도권을 통째로 다 넘겨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이랑 싸웠다.
그때서야 나는 정말로 알게 된 것 도 같다. 혼자되보지 않은 사람은 진짜로는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나에게 혼자를 처방한 것은 내가 혼자를 기르기로 마음 먹은 것은. 그것은 맛없는 밥을 살기 위해 먹어야하고, 자주 혼자 울면서 일기를 써야하는 것이고, 그리고 때때로 그저 일인분일 가뿐한 삶 조차 너무도 힘이 부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켜켜한 찌질한 마음들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면서 곱씹는 다소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나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자꾸 나를 다 내어주고 너를 통째로 다 얻고 싶은 건강하지 못한 내 방식의 사랑을 그만두는 것이었으니까.
보잘 것 없는 나에게도 *절대로 내어줄 수는 없는 어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누구에게도 아닌 스스로. 스스로에게 만큼은 인식시켜주고 싶었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만들지 못했지만.
어쩌면 참아야하는 영역이었다.
내가 조금 더 자라날 때 까지는 참아야하는.
혼자인 나는 /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어떻게 보면 유폐시킨 / 어쩌면 혼자의 과정 중인 나는 /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만큼의 아주 아주 중요한 존재가 아니고,
사회나 회사에서야 말로 언제나 대체 가능한 그저그런 일을 하는 시시한 존재이고,
아무런 업적도 없는 데다, 대단한 것을 하나도 만들 줄 모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에 불과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소중해. 나는 나를 소중하게 대해. 라고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미래의 나에게.
나는 미래의 나에게 잘보이고 싶어서 글을 쓰기도 했다.
모든 일에게서 어느 정도 떠나온 뒤에, 지금에 와서야 해석한 이야기지만. 아마 혼자가 되기로 굳게 마음 먹었던 5년 전의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따위의 ‘함께’를 정말은 원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과거의 나는 고작 그 수준의 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여기며 감지덕지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의 요구를 전혀 보존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의 함께와 진부하고 납작한 숙고없는 사랑을 거부한 댓가가 소스라치게 낯선 외로움이라도 그나마라도 ‘내 것’인게 내가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낫다. 확실히 나는 내가 없는 것 보다 있으나 마나한 나라도 내가 있는 게 더 좋다.
“(353)없다 치는 것”에 불과한 아주 작고 티끌같은 나지만 그런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없다 쳐도 괜찮은 나를 어떻게든 감당하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를 키우면서 그 부실한 나를 감당하고 싶다는 희미한 요구는 점점 선명해졌고, 이제 나는 제법 나 자신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 나를 좀 많이 좋아한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좀 보고 배우고 따라했다. 나는 멋져, 굉장해, 대단해! 라고 나에게 진심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년이 아직 되지 않은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외로움을 외로워하지 않을 것.
혼자력이 어느 수준에 오른 것 같다. 이제 나에게는 그래도 가끔은 사람이 너무 필요해질 때 그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몇가지 꿀팁들이 생겼다. 아. 이렇게 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조금 더 부연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자기 팔자를 꼬는 것 같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해소할 대상을 찾아 사랑을 발동시킨(?)달까. 나 역시 그렇게 굴 때도 있긴 하지만.
“쟝쟝씨, 외롭지 않아요?”
나는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외롭죠, 당연히. 그런데 내 외로움에 어떤 사람을 이용해도 될 만큼 내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럴 듯한 좋은 핑계가 되어… 우리는 외로워서 아무나 만나고, 아무나 사랑하고, 사랑하다 또 외로워지고,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 붙잡고, 외롭기 때문에 속아주고 기꺼이 속이고. 임박한 이별의 시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필요악이 되고. 견디고. 외롭지 않기 위해 견디면서 다 이러고 사는 거야. 응. 그거 사랑 아닌데. 그건 그냥 외로운 거지. 사랑 아닌데.
그럼 외로우면 어떻게해요?
이렇게 한다.
재밌는 책을 읽는다. 재밌는 뭔가를 본다. 외로워서 파멸하는 인간들이 나오면 좋다. 저러지 말아야지. 아니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요즘에는 유튜브를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무튼 뭔가를 만든다. 나가서 달리거나. 하지만 대체로는 술을 마신다. 음.
나에게 술이란 희노애락의 모든 순간 함께하는 어떤 것이라서, 꼭 외로울 때가 아니라 즐거울 때 기쁠때 노동에 지친 나를 위로하는 느낌으로, 밥 대신… 시도 때도 없이 함께하는 친구(… 술은 바로 단독자 공쟝쟝의 훌륭한 친구들 입니다)이지만ㅋㅋㅋㅋ
특별히 마음이 좀 허하고 외로운 날 네캔 만원 맥주 하나면 네명의 자아를 파상시켜 신나게 웃고 울고 떠들고 할 수 있어졌다. 이 때 나타나는 네 명의 자아들은 정말인지 매력적인 친구들이다. 우울한 애도 있고, 시니컬한 애도 있고, 대책없이 낙천적인 애도 있고, 지가 똑똑한 줄 아는 애도 있다ㅋㅋㅋㅋ
네 캔을 다 먹어도 외로우면, 정말로 외로우면, 요즘엔 걔들로 글을 쓴다. 그러면 시간이 섞이고 자아도 섞여서 아주 혼탁한 무엇이 된다. 난 걔들로 쓰는 내 글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아. 애매하게 흐리지 말자. 좋다. 좋아한다. 나는 걔들이 좋다.
그래도 가끔. 아주 아주 묵묵히, 나 자신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의 어떤 일을 무리해서 수행하고 있는 어느 날 들은. (나는 집에서 혼자 일한다. 거래처와 최소한의 소통은 하지만 일단은 내 안에서 내 일이 잘 되게 하기까지가 내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번 달은 너무 바뻤는 데, 외로울 겨를도 없어서 좀 힘들었다.) 여전히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당연하다) 내 상태가 어떤 과정 중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 어쩌면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무언가를 원하는 것도, 버티거나 견뎌서 어떤 되고 싶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지금을 잘 견뎌내자… 지금을 잘….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될지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지금을 잘…
그 감각을 익히는 작업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느낌.
혼자서 씩씩해지는 시간이랄까.
아무튼 얼마 전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좀 멋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권 표지) 매캐한 나의 도시, 서울에서 오늘도 혼자들은 스스로를 지켜내려 애씁니다”
나는 나를 잘 지켜내고 있다.
공격은 제대로 못하고 수비만 하는 싸움 같긴 한데…
그럭저럭 잘 지켜내어 잘 길러진 혼자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나를 잘 위로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것 같다.
만화의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든다.
혼자를 잘 길러서. 안전하고 소박한 내 아파트를 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