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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평점 :
오래 전 부터 나는 숨어서 글을 썼다… 싸이월드 비공개나 페이스북 비공개로… 그냥 항상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는 것이 그렇게 밉고 싫을 수가 없었다. 자의식 과잉 같았고 창피했다. 나는 쓰는 나를 싫어했다. 이상한 거 아는데, 사실이다. 요즘 말로 인맥정리 비슷한 걸 하면서 페북 계정을 폭파시키고, 백업을 한 적이 있다. 대략 2011~2017년 정도치의 글들 이었을텐데… 쭉 넘겨보다가 소름이 끼쳤다. 각기 다양한 다른 글들이었지만, 결국 하고 있는 이야기는 한 가지 였다. ‘나를 없애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때 나는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알고 난 뒤 부터는 노력했다. 내가 있어지려고. 스스로를 검열하게 하는 많은 관계와 이별했다.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후부터는 조금 다르게 글을 썼다. 그 역시 숨어서 쓰긴 했다. 차차 발전하여, 쓰는 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지 않기 위해 공개된 이 곳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아주 재미를 제대로 붙이고 말았네?)
매번 힘주어 말하지만! 😤 나는 나를 위해서 쓴다. 정확히는 십 년 뒤의 나를 위해서. 내가 상정하고 쓰는 독자는 미래의 나다. 2017년의 나처럼 2027년의 내가 소름끼치지 않길 바랐다. 멈춰있지 않기를 바랐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잊지 말아야할 점은(!) 2017년의 쓰는 나 역시 내가 솔직하다고 생각했었다는 거다. 개뿔, 아니었다. 지금은 안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했었는 지. 그 모든 시선을 다 소화한 후 내 것인 마냥, 듣기에 좋은 말 읽기에 좋은 소리들을 내 생각인 것 처럼, 이미 결론이 다 끝난 것 처럼, 그렇게 쓰면 마치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처럼.
사람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속일 수 있는 지, 난 좀 아는 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때의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지금도 바로 알 수 있다. (아, 킥을 할 이불이 필요하다) 그럼 결국 솔직하게 쓸 수는 없다는 거네? 아마 없다.
그리하여 현 시점에서 내가 고안한 방법은 두 가진데 하나는 솔직해져가는 과정을 쓰는 거다. 일종의 초고로 기능하고, 그걸 공개된 곳에 쓸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내 불태워야 할 몇 권의 일기장에는 솔직하려는 과정으로 엉킨, 완성된 문장이 아닌, 살인적인 물음표들을 비롯해 좀 수치스러운 욕망들과 남욕과 특히 친족욕(아, 불싸지를 라이터, 라이터가 필요하다)ㅋㅋㅋㅋ 이걸 몇 년 하다보니 쓰기 습관으로 굳어진 듯, 알라딘에 올리는 독후감은 힘 안들이고 휘리릭~쓴다. 에, 욕말고 쓰면서 더 솔직해져가는 그거 말이다. 아무튼 이젠 그때 처럼 징그러운^^ 글은 좀 덜 쓰는 것 같다. (단 남들이 쓴 징그러운 글을 알아볼 안목은 아직 없으니, 여러분 안심하시라.)
두 번째는 10년 뒤의 나를 제1독자로 상정하고 쓰는 것이다. (북플에는 몇 년전 오늘이라는 좋은 기능이 있다. 굳이 10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몇 년 전 내 글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깨닫지, 어머 졸라 잘썻네?ㅋㅋㅋ 라고) 지금의 시점에서 지금의 한계를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어떤 생각이 맞는 생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10년 뒤에 내가 봐도 이해가 되게 부연해서 쓰고, 그렇게 쓸 자신이나 시간이 없으면 안쓰는 것도 방법. 생각은 남기지 않으면 사라진다. 남길 필요가 없는 생각을 쓸 필요가 있을까?
되도록 나는 오늘의 경험을 배경처럼 쓰고, 지식과 생각보다는 느낀 걸 쓰려고 한다. 새롭게 배우게 된 것들에 대해, 그것들을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 때때로 내게 들어왔다 나가는 사건과 말들을 편집된 날 것(?)으로, 그로인해 분열하는 내 마음들을(내 글에 괄호가 많은 이유다). 쓰면서 한번 더 생각해보고 있는 데, 역시 내 생각과 주장과 그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10년뒤의 내가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가 중요하고,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며 자식 잘 살고 있네! 기특해했으면 좋겠다.
여튼 그러한 이유들로 이 책의 이 문장에 밑줄을 아주 퐉퐉 그었다지.
“(124) 10년 후(혹은22세기의) 눈으로 지금 쓰고 있는 글을 바라보라. … 지금 쓰는 글에 무의식적으로 새겨진 확신과 신념과 소망을 의심하라. 모든 것이 변화한 이후 도래할 낯선 눈으로 글을 바라보라.”
(ㅋㅋㅋ 내가 이미 하고 있던 것이로군. 아, 나는 얼마나 훌륭한 저자(?)인가 ㅋㅋㅋㅋ)
김홍중은 <은둔기계>에서 ‘좋은 글을 쓰는 법’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고 싶냐? 그건 잘 모르겠다. 글을 쓰는 과정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내가 쓰는 것이 좋은 글이기를 바라는지는 모르겠고. 다만 내가 읽기 좋은 글 들을 발견하는 재미는 좀 있긴 있다. 어쨌든 그 역시도 갱장히 주관적인 부분이라서…, 아 읽는 나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이 글의 주제는 *쓰는 나*다.
여하튼 이 책의 2부, <좋은 글을 쓰는 법> 어쩌고 챕터에서, 모처럼 발동한 *쓰는 나*는 몇 가지 힌트를 얻게되고, 내가 좋은 글을 *이미* 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야 마는 데… 🙄(응?)
“(118)나르시시즘에 대한 효과적인 해독제는 고난과 유머다.”
어쩐지… 그렇게 글로 웃기고 싶더라. 내 어둠의 다크니스~ 남은 다 알아채지만, 나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것! 나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이미 저는 알아서 유머라는 처방으로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그 유머가 나만 좋아하는 유머였던 것은 안비밀이다.
“(118)문체는 개성이나 사고 스타일이 아니라 작가가 활용하는 독자 선별 장치다.”
오, 이건 신박했다. 나는 아름다운 문체, 미문, 하나마나한 소리하는 글을 안좋아하는 데…ㅋㅋㅋ (모르겠다. 압도적인 아름다운 글은 또 좋음) 그건 내가 변태여서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일부러 숨겨 놓은(?) 장치로 기능하는(?) 쓰지 않은 글(?)을 읽을 때 즐겁기 때문이다. 책 읽는 습관이 좀 든 사람들이라면 다 알 텐데 와, 나니까 이걸 알아봐주지 누가 이걸 알아봐주냐?ㅋㅋㅋ 하면서 느끼는 독자로서의 자뻑의 순간이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누구나 끄덕일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란… 대놓고 유혹하는 것 같아서 도전 의식이 안생긴다랄까? (역시. 변태가 맞다.) 아, 그렇다면?! 김홍중의 저 문장이 사실이라면? 쓰는 사람이 독자를 선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쓴다고?~ 어허 에봐라? 그걸 문체로 한단 말이오? 생각이 여기에 가닿자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던 몇몇의 저자들이 떠오르며 그들이 갑자기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호승심 돋기 시작한다. 독.자.선.별. 이란 말이지. 훗 😏 그것이 쓰는 이들이 하는 것이라면, 이제 그런 방식으로도 한번 읽어봐주마. 기다려라! 악랄한 문체의 저자들아,
는 읽는 나고. 어디까지나 이 글은 *쓰는 나*가 주제이니까 변태같은 소리를 더 보태자면… 사람들이 내 글 안봤으면 좋겠다. 근데, 또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이었는데… 그것은. 아… 보긴 보면 좋겠는데 아무나 안봤으면 좋겠다는 나의 마음이었구나, 아주 깊은 깨달음😌ㅋㅋ 김선생님의 팁을 통해 이제 내 소망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는 (내 글을 보긴 보면 좋겠는 데 아무나 못보게 할 수 있는) 비결을 알아냈으니, 나 문체 연마해야하는 것 인가?
아서라, 냅두자. 2027년의 공쟝쟝, 보고 있나? 너는 결국 문체를 통한 독자 선별을 포기하고 말았어. 나는 널 알아. 노력하지 않겠지. 그러나 이 마음의 상태론 점점 더 이상한 글을 쓰겠지. 왜냐면, 그게 너의 본심(아무나 안봤으면 좋겠음)이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노력을 하든 말든 27년의 너… 아니다 이건 32년의 너인가?… 어쨌든 너는 결국 이 엉망진창인 글을 가장 잘 알아보는 독자일꺼야. 왜냐고? 넌 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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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나를 당황시킨 문장들.
“(118) ‘나’를 주어로 하는 문장을 되도록 사용하지 말 것.”
어, 이건… 못하겠네. 결국 난 좋은 글을 쓸수 없을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0) 사냥하되 먹지 않을 것. 이는 글쓰기에도 엄격하게 적용된다. 타인의 생각을 함부로 흡수하여 자기화하는 자들의 최후.”
오케이. 이건 접수 하겠음. 하지만 어떻게? 아직 모름. 아몰랑, 하다 안되면 최후를 맞이하자.
“(223)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이 문장은 뭔데 섹시하지? (또 나만 섹쉬한가?)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 여러분 읽고 쓰는게 이렇게 섹쉬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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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기계> 이 책을 덮는 데, 재밌게 읽었던 부분이 많았던 것과 별개로 다 까먹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려버렸다. (그렇다… 내 기억력 따위로 아포리즘은 무리였던 것) 그리고 모처럼 신나서 베어에 책 정리 하다가, 이번에는 글 잘쓰는 법을 열심히 읽게 되었고… 문득… 내가 암것도 모르는 주제에 엄청 까불면서 글을 쓰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머쓱해지고 말았다. 한 달 전에 처음 읽을 때는 시큰둥 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까… 그 짧은 사이에 내가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까. 망했다. 잘쓰고 싶어졌다. 맙소사. 솔직히 말하면 읽는 것은 눈에 공들여 읽어도, 쓰는 것은 (나만 알아보면 되니까) 촤라락-추르륵- 신나게 썼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내 글이 좋다고 진지하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래봤자 알라딘 좋아요 최대가 50이라서 실감하지 못하다가….
“(126) 뛰어난 비판자는 … 대상을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이 미처 달성하지 못한 잠재적 세계를 재창조하여 보여준다.”
내가 누군가의 글을 공들여 읽는 것 처럼, 누군가가 내 글을 공들여 읽고 뛰어난 비판을 해주는 경험을 드문드문 하게 되면서……. 무척 기뻤고. 기쁜 것과는 별개로 내 안에 무언가가 바뀌고 말았다. 슬프다. 슬프다. 슬퍼…. 난 나를 위해 써왔는 데……. 사실 앞으로도 나를 위해 쓰긴 할건데… (당장 이 만신창이의 독후감을 보시라…) 뭔가 타자를 의식해서 타인의 눈으로 내 글을 보니까… 나 무지 유치해보였음. 너무… 제1독자가 나인 것도 티나고… 막 되게 남들 다 아는 거 깨닫고 나서 엄청 세상을 다 깨달은 것 처럼… (현타옴)
그만하자. … 왜냐면 지금 새벽 네 시….
그치만 내일 토요일이니깐 실컷 늦잠 잘거다….
암튼.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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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잘쓰고 싶어하시는 분들의 댓글을 보면서 나름의 글쓰기론(?)을 보태서 앞부분을 조금 다시 썼습니다.
(A/S 편이라고 할 수 있죠. 아,* 쓰는 나*는 이렇게나 친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