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의 성> 첫 페이지
보부아르가 이 책을 헌정한 자크 보스트는 누구인가.
그는 보부아르의 숨겨진 애인이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야 유명한 폴리아모리 커플이므로, 이들의 파란만장한 ‘따로 또 같이’의 연애사를 풀자면 끝도 없겠지만 보스트 경우 꼬일대로 꼬인 감당이 안되는 이들의 애정사 중에서도 감출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거슨 보부아르와 동성애 관계였던 ‘올가’의 남편이었기 때문… 당시 사르트르는 올가와 보부아르가 너무 ‘뜨거워’서 질투에 사로잡혔다고 하는데… 보부아르를 뺏겨서 질투가 난게 아니라 올가를 뺏겨서 보부아르에게 질투… 읭?!! 이게 무슨 말이다냐…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보봐르 전기<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에서 확인하시라. 진짜 이 책 꿀잼)싶겠지만 나도 이게 무슨 말이다냐… 하면서 읽고 있는데… 느닷없이 복수심에 불타 올가의 여동생을 꼬시는 사르트르… 와중에 사랑하는 올가의 남편인 보스트랑 눈이 맞은 보부아르는 차마 올가에게는 말할 수가 없… 그래서 죽을 때 까지 속였…이게 무슨?!?!… 하면서 읽었다. 그러타. 그들의 자유로운 계약 결혼은 생각보다 더 높은 수준이여따.
어쨌든, 보부아르가 한참 미국 작가 올그란과 연애 중일 때, 자신이 쓴 그 어떤 소설보다 빠른 속도로 휘리릭~ 집필한 <제2의성>은 사르트르 만큼이나 오랜 (숨겨둔)연인이었던 자크 보스트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보부아르가 만난 남자 중에 가장 덜 마초적이었다고 한다.
사족 하나 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왕언니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1970)은 우리의 보부아르에게 헌정되었다.
* 견뎌내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를 위하여.* (성의 변증법 첫 페이지) 크으- 😖 이 자매애, 뭔가 짜릿 짜릿해.
2. 계약 결혼
뭇 사람들은 사르트르의 화려한 여성편력 때문에 보부아르를 조강지처(?)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는데 조강지처는 무슨… 내봤을때는 보부아르의 편력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울 언니는 남성편력이 아니라 여남성편력이시다…). 사후에 본격적으로 출간된 숱한 보부아르 남친 및 여친들과의 불타오르는 편지들을 보면(ㅋㅋㅋ) 사르트르야 말로 보봐르의 철학 동반자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던 것 같다. 그는 잠자리에서는 썩 훌륭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무엇보다
“(354)(보부아르가 유방암이 걱정되어 병원에 다녀온 뒤) 사르트르에게 진료 결과를 얘기했더니 그는 냉전 시대의 지독한 냉소주의로 대응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12년은 더 살텐데 어차피 그때쯤이면 지구는 원자폭탄으로 멸망할거라나.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롸???🤷🏻♀️??? 정서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은 전혀 아니었던 것으로(절레절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우리의 쿨내 진동 보봐르 언니는 “보스트와 수술 전날을 아름다운 수도원에서 보냈다” ㅋㅋㅋㅋ 아하, 정서적 지지는 보스트와 뜨거운 밤은 란즈만과 철학적 영감은 사르트르와 문학적 감성은 올그런과?!! 나는 그의 동시 다발적인 연애사를 따라가는 게 읽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딸렸다. 그러나 끊임없이 타자를 향해 기투했던… 보부아르는 참 자유, 진정 철학자.
그녀는 말했다. “(504) 두사람의 관계는 억압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으므로 평등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사르트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했더라도 자신은 억압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 이 부분에서 멋있어서 무릎치다 모기 잡았잖아. 읭, 진짜 감히 누가 누굴 억압해. 누가 자꾸 보봐르를 사르트르 부록 취급 하는가. 누구인가. 응?
한 세대 쯤 더 지나면 ‘철학자 사르트르의 반려인 보부아르’보다 ‘페미니스트 보부아르의 동반자 사르트르’로 둘의 위치가 바뀌지 않을까. 어쨌든 이 책은 계속해서 살아남고 있고, 시간이 갈 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적어도 2021년 현재, 사르트르의 주요 저작들 보다 <제2의 성>이 흥행면에서는 훨씬 앞서고 있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3. <제2의 성>에 쏟아진 찬사들
자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제2의 성>이 발간되었을 당시(1949)에 쏟아진 찬사들을 보자.
“(327)마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다루는 주제가 제대로 된 철학과 문학 논평에 낄 만한가? (...) 욕구 불만, 불감증, 음란증, 색정광, 레즈비언, 낙태를 골백번 한 여자, 나는 그 모든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미혼모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327)공산주의자들은 보부아르가 노동자 계급과 아무 상관 없는 분석만 하는 ‘프티부르주아’라고했다. 보수파의 존경받는 기둥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레 탕 모데른(보부아르-사르트르 잡지)> 필진 중 한명에게 ‘당신 윗자리에서 일하는 여자의 성기 사정을 내가 다 알게 됐소.’라고 편지를 썼다.”
“(336) 칼럼니스트 앙드레 루소는 (…) ‘타자의 수준으로 밀려난 여성이 열등감 콤플렉스에 몸부림친다’고 했고, 보부아르가 너무 ‘집요하게’ 주장을 펼쳐서 ‘진짜 강박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존주의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337) 철학자 에마뉘엘 무니에는 이 책에서 ‘원한의 어조’가 보여 안타깝다고 썼다. 그런 어조를 좀 더 잘 다스렸더라면 ‘저자의 통찰이 덜 방해받았을’ 거라나. … 카뮈마저 ‘프랑스 남자 꼴을 우습게 만들었다’고 했다. 철학자 장 기통은 행간에서 ‘그녀의 슬픈 삶’을 보면서 마음 아팠다고 했다. <레포크>는 십 년 후에는 아무도 ‘이 구역질나는 성도착과 낙태 옹호론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바티칸은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철학자 아재들의 평은 진짜ㅋㅋㅋㅋ 어조를 좀 더 다스리라니, 니 삶의 기구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니, 너무 지금 페미에 대한 찬사들과 다를바 없는 똑닮은 … 걍 다 전형적인 맨스플레인이라 할말이 없다. 막판에 갑자기 등장한 권위의 바티칸이여… 읭? 금서라니 이 머선일이고(어쩐지 책의 품격이 높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ㅋㅋㅋㅋㅋ 몇년 뒤 보부아르에게 공쿠르상을 안겨다준 소설 <레 망다렝> 역시 가톨릭 금서가 된다. (대체 어떻게 쓰셨길래… 소설 넘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2권짜리라서 읽기는 당분간 미뤄두는 걸로….) 여하튼 금서 지정 2관왕에 빛나는 참 글쟁이 세상과 불화하는 보부아르.
<제2의 성>을 읽다보면 사실 저 남자-작가, 평론가, 철학자-들이 이 책을 다 보긴 한건지, 저렇게까지 화낼 일 인건가 싶어진다. 왜냐면 남자보다 여자들한테 더 화나게 썼거든. 이렇게 까지 굳이 신랄할 필요 있냐고. 아주 뼈를 때리다 못해 뼈를 발라버리는 팩트 폭행 오졌다고… 보봐르 진짜 너무 했다고… 제가 처음 읽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게요???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여성의 삶.
4. 알아두면 쓸데 있을 <제2의 성>에 나오는 반복적 ‘실존주의’ 개념들
(157) *초월*
현상학에서 초월성이란 의식과 그 대상사이의 거리, 또는 의식과 의식 아닌 것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 의식의 대상은 의식의 외부에 있다. 외부에 있다고 해서 외재성exteriority이라고도 말한다. 이 대상을 향해가는 내 의식의 운동이 바로 초월transcend이다. ‘초월’이란 넘어선다는 의미이다. (…) 의식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작동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란 언제나 ‘……에 대한 의식’이다. 창밖의 영산홍이 내 의식 앞에 나타날 때 비로소 나의 의식은 작동한다. 그런데 내 의식의 밖에 있는 영산홍을 어떻게 의식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일단 영산홍이 눈에 띄면 나의 의식은 내 몸 안에서 빠져나가 영산홍 쪽으로 향한다. (…) 그리하여 찬란한 색깔의 단단한 꽃잎에 의식이 가서 탁 부딪쳤을 때 비로소 나는 ‘아, 예쁜 꽃이로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대상을 규정한다. 이러한 의식의 운동이 바로 초월성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기 때문에 초월이라고 한다.
(162) *즉자존재 대자존재*
그러나 인간의 존재양식은 대자이고 사물의 존재양식은 즉자이다,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초월적 운동을 하는 대자적 존재이지만 이 초월성을 포기하고 과거에만 고착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는 대자존재가 아니라 사물과 같은 즉자존재가 되는 것이다.
(163) *기투*
대자존재의 생성 운동은 똑같은 성질이 죽 이어지는 연속이 아니라 매 순간 자기를 부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단절의 운동이다. (…) 의식처럼 인생도, 아니 의식으로 이루어진 인생은 언제나 종전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새로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한다. 자신의 새로운 기획을 앞으로 투사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를 기투企投라는 신조어로 번역했다. - <모든 사람은 혼자다>
보부아르 전기 읽다보면 사르트르는 정말 보부아르 없었으면 자기 철학을 저정도로 까지 발전시켰을까 싶어진다. 이번에 이런 저런 책들을 읽어가면서 페미니스트로서보다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의 보부아르를 발견하고 제대로 치여버렸는 데, 그 사연은 추후에 전기 독후감에 몰아서 쓰도록 하겠고.
이 책, <모든 사람은 혼자다>는 보부아르의 실존주의를 다룬 첫번째 철학 에세이로 원제는 <피로스와 키네아스Pyrrhus et Cineas>이다. 두번째 철학 에세이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Pour une morale de l`ambiguite>를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라고 출간한 것으로 봐서는 출판사 차원에서 뭔가 기획 의도가 있었던 것 같고, 그래 그럴듯 하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인데.
그런데 세상에… 백자평에도 적었지만 … 부제가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라니, OMG… 🙀😱
저기요, 의도는 알겠는 데… 한참 빗나간 마케팅 포인트 아닌가여? 뭔가 부제 그 딱 한줄 때문에 책이 너무 구리게 느껴진다구… 그리고 나서 방금 검색해보니 맙소사 소개에 책의 원제도 안적혀 있다. 보소, 출판사여, 제목 바꿀 거고 부제 이따구로 달아놓을 거면 원제라도 똑바로 알려줘야할 것 아닌감? 전기를 읽지 않았으면, 이 책이 그 책일지 내 어찌 알았겠냐 말이오. 저는 아니었지만 부러 찾아 읽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나 이말이오. (책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다. 역자 후기에 덧붙인 실존주의 개념 해석도 굿. 두고두고 여러번 읽을 책이라 별 다섯개 달았는 데 역시 부제가… 창피해. 쯥.)
5. 마지막으로 번역 비교.
으허허. 난 이 구역의 제일가는 <제2의 성> 부자니까. 여러모로 전체적으로 비교해보고 구매하시라고 (혹은 혹시 집에 먼지 뽀얗게 묻은 채로 묵혀있는 *93버전 을유*로 독서하실 계획이라면 그것은 무모한 도전이며 시간 낭비이니 유경험자로서 도시락 싸들고 만류하기 위해ㅋㅋㅋ) 몇 페이지 찍어 추려 올려봅니다.
5-1. 나를 정말 빡치게 했던 바로 그 번역 ‘음경적 결혼’.
<을유문화사 응답하라1993 버전 >
사실 전체를 다 읽어보면 음경적 결혼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동서문화사 버전>
‘남근 중심의 결혼’ 뭐 이정도도 나쁘진 않다.
<을유문화사 2021 뉴 버전>
‘남근적인 결혼’ 전체적으로 동서보다 문장의 흐름이 매끄럽고 잘 읽힌다.
5-2. 여자로 만들어진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을유문화사 응답하라1993 버전 >
<동서문화사 버전>
<을유문화사 2021 뉴 버전>
이 문장의 번역에 대해서는 호불호 갈릴 것 같긴하다는 생각이다. (전면 개정 관련 한겨레 기사 링크: “책 생명 늘려야죠”… 문학 속 ‘성차별’ 패치 떼는 출판계 ) 나는 ‘만들어진다’가 더 직관적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보부아르의 저 띵문이 오용(?) 남용(?)되는 사례가 문득 떠올라서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표현도 맞겠네 싶어졌다.
오용/남용의 사연은… 때는 바야흐로 몇년 전(기억 잘 안남), 꽤 유명한 모 뷰티 서비스에서 다이어트 자극 명언으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아주 떡하니 쨍하니 쓰셔가지고ㅋㅋㅋㅋ 이를테면 이런 거지 “세 끼 다먹으면 살쪄요 -김사랑” “날씬한 것 만큼 맛있는 건 없다 -케이트 모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보부아르” ???!!!??? ㅋㅋㅋㅋㅋㅋㅋ 아~~ 😩 😩 😩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동생 친구가 30년 동안 잘 주무시고 계시던 보부아르 언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오용이라며 항의 메일 보내고, 담당자는 당황+황당해하며 카피를 내렸다는 건너들은 야무진 페미 지인 실화가 제게 있음용.
그러고 보면 보부아르는 진짜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던 듯.
살아있는 동안에도 실컷 오독되고, 돌아가신 후에는 끝없이 오용되고 있다ㅋㅋㅋ
여러분 10월의 도서 <제2의 성> 화이팅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독서는 역시 1000페이지 넘는 벽돌책 아닌교.
(키키키! 먼저간 자의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