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달 꼬박을 젠더트러과 끙끙 싸운 느낌이 든다. 페이퍼 두세편을 쓰긴 했지만, 정리하는 차원에서 뭔가 좀 적어 볼까 했는 데, 역시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 더 많다. 이를테면 그의 ‘수행성 이론’의 경우 360페이지 가량 되는 이 책에서 고작 30페이지 정도를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 그가 해체해버린 정체성의 뒤에 따라붙는 한마디 “(363)정체성의 해체가 곧 정치성의 해체는 아니다” 흥미로웠던 ‘우울증적 이성애’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몸’.
생각보다 더 심오했던 모니크 위티그의 이론과 (아, 그녀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어진 이리가레(읽기 전에 프랑스 현대 철학 공부해야할 듯), 과거에 포기했었으나 좀 돌아돌아 관심 생긴 헤겔과 니체는 이 책 덕분에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아래부터는 나중에 <젠더 트러블>을 다시 읽기 위해 적어두고 가야할 지금의 느낌인데 완전 버틀러 오독일 수 있으니 뇌피셜주의]
<젠더 트러블>을 읽으면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정체성을 해체한다기 보다는 ‘주체(혹은 본질의 형이상학)’ 자체를 끊임없이 해체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 정체성의 전제가 되니까 ‘본질’을 없앨 요구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본질(의 형이상학)’을 없애기 위해 <젠더 트러블>을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은연 중에라도 본질 운운하는 냄새가 나면 이잡듯 뒤져서 심문하고 소독까지 칙칙하는 느낌적인 느낌…
그는 우리가 ‘주체’라는 것을 명명하며 떠올릴 때 멈춰있고 정지되어있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가면 뒤에 있는 수행자로 여겨지는/ 그러나 버틀러가 없다고 한) 갖가지 방법을 통해 지우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버틀러 본연의 철학적 사명이라도 되는 것 처럼 느껴졌달까? 하지만 버틀러가 아르의 글에서 가져온 니체 해설 처럼 그건 주어/술어 라는 문법적 공식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거라서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안 떠올릴 수가 없고… (아, 그래서 명확하지 않은 문체로 그걸 부수려 노력한 건가…)
버틀러 이론의 많은 부분이 헤겔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정작 제목은 프로이트의 우울에서 따왔네?ㅋㅋㅋ)에서 알려줬다. 그의 첫 논문 <욕망의 주체들>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나타난 헤겔적 주체와 재구성을 분석/비판한 것이다. <철학과 우울>에 따르면 버틀러의 주체는 헤겔적 주체이긴 하나 미리 존재하는(pre-existing) 형이상학적 여행가가 아니라 *수행하는 행위(acts)들에 의해 담론 안에서 구성되는 ‘과정-중의-주체’*라고 한다. 이 역시 헤겔의 변증법은 가져오되 주체의 본질주의적인 부분을 제거한 듯 보인다. 시작도 본질을 없애버려서 없고 결말도 열린 결말인 그 ‘과정-중의-주체’를 그대로 ‘젠더’에 옮겨 ‘과정-중의-젠더’로 만들어 놓은 것이 <젠더 트러블>이라는 생각이다. 푸코와 크리스테바(권력/육체), 게일루빈과 정신분석학(여성거래/우울증), 데리다와 알튀세 (수행성/호명)등등 유명한 사람들 이론 다 불러와서 ‘섹스-젠더’(“(99)섹스는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에 남아있는 본질주의적 ‘끼’를 싹다 빼버리려 한 책. (이래도 안빼? 이래도??? 거봐- 안정적인/본질적인 정체성은 없어! 모두 구성될 뿐!!)
우리가 수월히 생각하기 위해 편의상 가져다 쓴 ‘본질’이라는 개념이 우리 스스로를 해쳐온 것은 아닌가 처음으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고,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해체주의’에 대한 편견은 다소 완화되었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 이 모든 것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그때도 내 어렴풋한 이해가 큰 의미에서는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너무 어려웠어…) 생생히 감각하고 있고 느껴지고 있는 내 몸을 담론(?)에 위치시켜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히 미심쩍지만 버틀러의 업적은 인정해야할 것 같다.
페미니즘이 버틀러 덕에(?) 해체된 정체성으로 어떻게 효과적인 정치적 투쟁을 벌일 수 있을지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이 방향이 맞다고 해도 현실에서는 주체/젠더/섹스에 대해 본질주의적으로 사고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우니까. 가부장제와 성차별, 여성혐오의 현실을 드러내는 발화들만으로도 페미광신도집단이 되는 마당에 어떤 수행적 실천으로 젠더 이분법/이성애 중심주의를 해체해야하는 것인지 역시 감조차 오지 않지만…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로 하는 반복적 수행을 통해 여성의 범주를 넓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잘 살아가 보는 것으로. 😤
덧, 펜트레이를 샀더니 <수전손택의 말>이 딸려왔는 데ㅋㅋ 펜트레이가 너무 이뻐서 연출샷. 뭐라고 새겨져있냐면 “마음이 따라오지 않으면 아무리 해도 재미없거든” 가운데는 버틀러 공부한 노트다. 살면서 이렇게 댓가 없는 공부를 열심히 해본거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한 공부(페미니즘 공부라기 보단 철학공부였음) 사실 재밌었다. 마음이 따라왔다. 다음 주면 백수도 끝난다. 돈 벌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 스웩을 지닌 여성이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