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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존재
김곡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3월
평점 :
현실관계에서 책 이야기란 어쩐지 내가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가까운 이들과는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나누는 편이다. 각자의 이야기가 나눠지면서 서로를 한번 더 알아가는 기분이 좋다. 그래도 나는 영화보다는 읽는 것이 더 좋아 늘 책 이야기가 목말랐다. 책으로 소통하고 싶고, 연결되고 싶고, 같은 책을 읽은 감상들을 나누면서 대화하고 싶어서 #북스타그램 이란 걸 했다. (동시에 #북플 도 했지요~)
인스타의 특성상 긴 문장을 쓸 수가 없(ㅠㅠ 100자평도 1000자가 되어가는 나라는 인간) 었기에 북플(알라딘 서재)보다 힘들었다. 그래도 나름 재밌게 했던 것 같다. 나야 좋지만, 이 책을 누가 읽어? 팔려? 그러나 세상에는 정말로 <캘리번과 마녀>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나는 기뻤다. 사람들의 근사한 책장을 구경하는 것은 나에게도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했고, 잘 정리된 책상 위에 쌓인 책탑과 필사 노트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내가 좋아해서 올린 책 리뷰에 작가님들이 눌러주는 ‘좋아요’는 놀라웠고, 영업하지 않았는데(!) 영업당해 읽었다는 감응의 글은 신기했다. 좋아하는 북스타그래머들이 읽는 책들을 그냥 따라 산 적도 많다.
하지만 인스타를 어슬렁어슬렁하다가 결국 서재에 정착했는 데,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소화할 수 있는 ‘좋아요’가 50개 그 언저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알라딘 서재는 좋아요가 50을 넘기는 법이 없다. 완벽한 곳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내 간절한 욕구를 넘어서버린 북스타그램의 피로감. 그것의 정체는 뭐였을까. 책에서 힌트를 찾았다.
“(73)하지만 너무 많은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너무 많은 ‘좋아요’는 좋음이 아니다. 외려 과잉 공급되는 친구들과 ‘좋아요’는 우정과 좋음의 가치를 폭락시켜 “자기 자신의 가치 절하(devaluation of the self)”를 초래한다. SNS 조울증이란 이런 거짓 자기의 인플레이션에 의한 진짜 자기의 파산에 다름 아니다.”
“(74) 그러니 SNS의 우울증의 원인이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에 있다는 견해는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SNS의 우울증의 근본 원인은 SNS 조울 회로가 사용자의 영혼에 박아 넣는 이러한 “참자기와 거짓 자기 사이의 분열”로서의 자기 양극화, 그 절대적인 자기 박탈감에 있다.”
‘좋아요’ 인플레이션. 좋음의 가치 폭락. 무한히 공급되는 친구. 쉬운 언팔로우. 저자는 최악의 경우 SNS가 “자아의 원심분리기”가 된다고 표현했는 데, 탁월하다.
“(76) SNS 조울 회로는 자아를 전능감과 무능감, 과열과 급냉, 과잉과 과소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정말이지 빙빙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서, 과잉된 흥분과 과잉된 무기력 외에 다른 어떤 현실감각도 찾을 수 없게 만들고, 심지어 그 둘을 판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진짜 세계는 휘발된다.”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내 소박한 욕구는 인스타그램 속 무한히 공급되는 친구들(?) 사이에서 매번 갈팡질팡했다. 책이 아니라 온라인 인맥을 만들고, ‘좋아요’를 받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고, 꼬박꼬박 답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죄로 언팔이 된 적도 ㅜㅜ 있었고, 질 좋은 리뷰로 얼떨결에 북플루언서(?)가 된 후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는 친구들도 종종 보였다. 가장 슬픈 건 그래도, 어쨌든, 팔아야 하는 마케터들의 타임라인이었는 데… 좋아하는 것이 업이 된 이들의 ‘과로’를 보는 일…. 고생들이 많으세요….
무튼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나는 전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 내 취미가 독서여서 참 다행이고(‘일’이 독서가 아니길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북플루언서가 아니기를 참 다행이다(좋아하는 것이 어느덧 ‘일’이 돼버리는 걸 보는 괴로움)!라는 생각은 많이 했는 데, 그것이 애정 하던 인친들의 ‘자기 박탈감’(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는)’을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이었나 보다.
SNS에는 ‘적당히’가 없는 데… 나 역시 ‘적당히’를 모르는 중독에 취약한 인간이기 땜시… 무튼 남들 책 구경에 푹 빠져있었던 ‘북스타그램’을 딱 끊었는데 그 이유는 (본론) 혹시라도 북플루언서가 돼버릴까 봐…!!!!!?????🤭 으하하하?????? 셀럽은 괴로워 보이더라고요. 전 셀럽이 되고 싶지 않았어... (이상 SNS 시대가 낳은 과잉 주체의 북스타그램 끊은 이야기).
그리고 초보 책벌레에서 이제 어엿한 독서 중독자(ㅋㅋㅋ 아니 또 중독이래ㅋㅋ)로 발돋움하고 보니 역시 책은 구경보다 읽는 게 좋고, 누군가의 인생 책, 추천 책 보다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만나는 책이 더 좋다. 책 속에서 책이 나오는, 책들 안의 하이퍼링크 연결고리 꿀잼.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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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백자평에서 하고 싶은 말 다했는 데, 특별히 5장이 읽기에 훌륭하다고 느낀 이유를 좀 더 부연하고 싶다. 한국의 묻지마 범죄, 충동범죄에 대한 분석인 데- 지난 시기의 ‘연쇄살인’과는 다른 양상과 패러다임이라는 지적이다. 경계를 지워버린 과잉 주체에게는 ‘사회’역시 없으므로 그는 ‘반사회’적일 수 없고, 그러므로 그들의 충동에 ‘사회 불만’을 가져다 대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한참 n번방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 조주빈 등에게 ‘범죄자에게 서사 부여하지 말라’는 담론이 일었는 데, 그것과 맥이 닿아있어서 솔깃했다.
“(98) 충동범죄는 사이코패스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이코패스가 반사회적인 성향을 갖는 것은 그의 자아가 적어도 초자아에 저항하여 이겼기 때문이다. 반면 과잉자아는 초자아와 싸우지 않는다. 그를 흡수하고 먹어버린다.”
“(105)지난 세기의 범죄가 너무 많은 통제와 억압 때문에 일어났다면, 이번 세기의 범죄는 너무 많은 가능성과 자유 때문에 일어난다. … 충동범죄의 동기를 ‘불우한 과거’나 ‘사회 불만’에서 찾는 견해는 두 패러다임을 혼동하는 것이다. 그건 지난 세기에나 통용되는 구닥다리 프로파일이다. ‘피해의식’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전 패러다임과 혼동된다. 많은 ADHD 아동이 행동이 제한되면 흥분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충동 범죄자가 폭발할 때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다.”
“(108) 디지털 성범죄 역시 충동범죄다. n번방 사건에서 가해자들의 목적이 돈이나 성이었다고 볼 수 없다. 지겨워지면 파일을 지워버리거나 남에게 넘겨버리는 식의 통제 욕망도 부차적 차원에 남아있다. 거기에는 아무나 걸리면 ‘노예’로 만들어 영혼을 지워버리고, 몇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며, 그 비명과 피눈물만큼이나 팽창해가며 스스로 전능하다고 여기는 망상적 과잉 자아의 망상적 과잉 발육 이외엔 다른 목적이 없다. ’n번방’의 관리자 문형욱의 ID는 ‘갓갓’이었다 ‘갓’이 두 번이나 있다. n번방 사건은 집단 묻지마 성착취다.”
“(109) 만약 미디어가 범죄에 뭔가를 기여한다면, 그것은 폭력적인 내용이 아니라 하이퍼 한 형식의 교육을 통해서다. 즉 하이퍼미디어와 하이퍼링크를 통해 학습되고 모방되는 것은 하이퍼 한 인격 자체, 하이퍼 할 수 있다는 전능감 자체다. … 과잉 충동의 인간은 이미 걸어 다니는 하이퍼링크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막히면 폭발한다.”
“(110) 같은 이유로 소거 충동은 파일을 마우스 버튼 하나로 쉽게 지우고, SNS 친구를 언팔 버튼 하나로 쉽게 차단하는 클릭의 형식이 충분히 학습되고 교육되지 않으면 출현할 수 없는 충동 유형이다. 우리는 인간 공격성의 뿌리가 유아기의 전능 환상, 눈 한 번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세계를 절멸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는 그 “마술적 파괴성”에 있다는 대상관계이론의 견해를 지지한다. 오늘날 그 눈 깜빡임이 클릭이라는 날개를 달았을 뿐. ‘파괴충동’이나 ‘죽음충동’이란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정확히 말해, 소거충동은 Shift + Delete충동이다. 친구삭제 충동이고 리셋충동이다.”
하하… 너무 다 가져왔나요? 그치만 너무 맞는 말이라서… (긁적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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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 날의 과잉에 저항하는 윤리로 ‘타자’와 ‘경계’등을 언급하며 밀당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 데, 매우 동의하고... 나 역시 과잉 사회가 낳은 과잉 존재이자 과몰입의 화신(!)이며 35년 산 프로중독러(최근에 친구가 붙여준 별명)로서…;; 과잉에 저항하는 나만의 방법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건 디즈니 영화 ‘소울’이다. (응?) 내 손에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 길거리의 피자 냄새, 하늘 올려다보기, 바람 느끼기. 나는 일상에서의 감각의 순간들을 그보다 더 아름답게 포착한 영화를 아직까지는 못 본 것 같다.
머릿속의 나는 하이퍼링크 되어 온 세계를 뛰어다니는 전능감과 온 세계가 적으로 돌려지는 것 같은 고립감 사이를 줄 타며 조울증 적 자아를 느낄지라도. 현실의 관계는 가상의 관계보다 더 어렵고 지리멸렬하고 상처뿐일 지라도.
내 몸은 ‘지금’ 여기에 있고 그것은 명확히 ‘경계’ 지어져 있으며 그 경계로 인해 ‘느껴’ 지고 어떤 감각을 선사해준다. 당연히 고통도 준다. 나는 몸이라는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고 한계가 있는 존재다. (비록 이 몸을 깎고 자르고 포장해 전시하는 게 이 미친 현대사회지만 ㅜㅜ) 본질적으로 내 몸은 ‘과잉’할 수 없으므로- 너무 많은 것들이 몰아쳐 정신을 차리기 힘들 때. 숨쉬기. 허리 펴기. 햇빛이나 바람 혹은 기온 느끼기. 그렇게 현실 ‘감각’ 회복하기.
현대의 기술들이란 대부분 ‘몸’이 가진 한계나 물리적(시/공간)인 한계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본이 지시하는 바라고 하더라도) 그러니 점점 그렇게 될테고 그걸 막을 수도 없다는 생각. 다만 자명한 것은 그 한계의 실체인 몸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아닐까. 어떤 기술도, 어떤 자아도, 지금 여기 살아서 대사(!) 중인 내 몸을 대신할 수 없다. 타인을 만나는 훈련과 동시에 내 몸을 실감하는 훈련도 함께하기. 이미 ‘하이퍼링크’ 되어버린 세상을 뒤로 돌릴 수는 없으므로..
‘과잉(hyper)’보다 이 시대를 잘 요약하는 말은 없다.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과잉행동하고 과잉경쟁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늘날 과잉은 단지 사물의 수량을 따지는 술어가 아니다. 과잉은 이제 삶의 방식, 존재방식 자체다. 과잉의 폐해는 대상이 너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외려 대상이 너무 없어진다는 데서 온다. 너무 많은 대상들이 주어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진짜 대상은 판별할 수 없다. 오늘날 ADHA, 공황장애, 묻지마 범죄가 동시에 유행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두 대상의 쓰나미 속에서 정작 진짜 대상은 잃어버리는 과잉장애들이다. 너무 많은 대상은 대상이 아니다. 너무 많은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너무 많은 링크는 링크가 아니다. 패닉은 여기서 온다. - P5
오늘날 ADHD, 우울증, 일중독 같은상이한 증상들이 동시에 대중화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달라 보여도 그들 모두는 하나의 동근원적인 질환, 즉 감각 및 행동의 경계가 와해되는 데서 오는 과잉조절장애다. 그 본질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긋지 못하는 "결단력의 부재(indecisiveness)"에 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것과 달리, 우울증은 너무 많거나 적은 관계 때문에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의 끝을 지정할 수없어서 생긴다. ADHD는 집중력의 결핍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할 대상의 끝을 정할수 없어서 생긴다. 과로사도 ADHD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과로사는 단지 과도한 노동 때문에 초래되 초래되는 것이 아니다. *과로사는 노동의 끝을 지정할 수 없어서 초래*된다. - P15
과잉주체는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지난 세기 경계의 패러다임을 살아가던 근대적 인간이다. 그가 경계를 통해 누리던 행동과 생각의 조절방식 자체가 과잉주체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 과잉주체는 주체처럼 행동하고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과잉행동하고 과민반응한다. 과잉주체는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과몰입한다. 과잉주체는 상상하지않는다. 그는 과대망상한다. 과잉주체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과장한다. 과잉주체는 관계 맺지 않는다. 그는 하이퍼링크한다. 과잉주체는 욕망하지 않는다. 그는 과흥분한다.* 과잉주체는 일하지 않는다. 그는 과로한다. 과잉주체는 숨 쉬지 않는다. 그는 과호흡한다. 과잉주체는 죽지 않는다. 그는 과로사한다…. - P19
지난 세기의 대미를 장식했던 ‘중2병’과 이번 세기 대유행 중인 ‘관심병’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미학적으로 중2병의 허세는 대상을 잃은 자아의 애도인동시에 그럼에도 건재한 자아의 찬미다. 중2병은 멜랑콜리 병이다. 이는 경계의 패러다임에 속한다…. 중2는 애도한다. 애도는 상실을 인정하고 기억함이다. 그로써 *나의 경계를 지킴*이다. "난 지금 미쳐가고 있다. 이 헤드폰에 내 모든 몸과 영혼을 맡겼다.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니까. 이게 바로 지금의 나다." 중2는 제정신은 상실했어도 ‘나라’라는 국경을 가지고 ‘지금의 나’ 도 가진다. - P65
반면 초고속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에서 자라난 관종은 정반대의 패러다임이다. 중2가 멜랑콜리 환자라면, 관종은 조증 환자다. 그는 허세를 어그로로 대체하며, ‘좋아요‘와 조회 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과잉한다. 관종은 멜랑콜리하려야 할 수가 없다. 만인이 그의 잠재적 친구이자 팔로워다. 관종은 추방 되려야 될 수가 없다. 무한정한 네트워크가 이미 그의 국가다. 중2처럼 마약도 따로 필요 없다. 좋아요가 이미 관종에겐 마약이다. - P65
클라인의 유작은 *<외로움에 관해서>*였다. 이 짧은 논문에서 그는 인간에게서 외로움은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대상세계 속에서 외로움은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외로움이란 자아와 대상이 서로에게 타자로서 분리되는 고통, 그로써 자아도 대상도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깨우치"는 고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않은 대상만신뢰의 대상이 된다. 완전한 것은 믿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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