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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이연 지음 / 미술문화 / 2021년 3월
평점 :
“(14~15) 과연 내가 그림을 그려도 될까?
지금 나는 당장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 대답을 해주고 싶다. 당연하지, 뭐라도 그려! 종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크레파스 닳는 일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뭐든 그려. 네가 지금 아끼고 있는 그 크레파스는 나중에 영영 찾을 수 없으니까 있을 때 마음껏 좋아하는 색깔을 써둬.
…
물론 이런 대답을 해줄 미래의 내가 곁에 있었을 턱이 없다.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림은 특별한 사람이나 그리는 것 아닐까?
남들보다 겨우 조금 더 잘 그리고 좋아할 뿐이야. 마음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을 거야. 나에겐 해야하는 일들이 있어. 그림은 시간 낭비야……. 하며 살았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는 학생, 그것이 바로 나였다.”
내가 좋아했던 크레파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퍼석퍼석 바스라질 것 같은 군청색, 반짝반짝 은색, 그리고 유난히 무른 재질의 상아색. 좋아하는 색깔의 크레파스가 닳는 것이 조바심났다. 짧아져가는 크레파스들 사이에서 걔들만 유난히 키가 컸던 기억이 난다. 또 내가 좋아했던(유행했던) 코디네이터 스티커. 정작 제일 좋아하는 스티커는 떼고 붙이는 게 아까워 가지고 놀지를 못했다. 한쪽에 붙여놓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먼지가 묻든 말든 신나게 옷 입히고 보관용은 따로 두세개씩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코디 스티커 모으기를 관두기로 했다. 자꾸 더 갖고 싶어지면 안될 것 같아서, 나는 코디 스티커 놀이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생각해버렸다.
왜 어릴 때는 좋아하면 아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가난의 문제와 따로 떼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좋아했던 그 색깔의 크레파스들을 아끼느라 정작 그림에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도화지 위에 실컷 색깔을 덧입힐 수가 없는, 나는 언제나 희미하고 옅은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다른 모든 종류의 크레파스도 다 닳아질 정도로 써본 기억이 없다. 아끼고 참는 어린시절의 내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울화통이 터진다. 좋아해도 되는데, 갖고 싶다고 떼를 써도 됐을 텐데, 그게 맞는 나이였는데, 그렇게 했었더라도 그때의 받은 만큼의 사랑은 다 받았을 텐데. 나의 양육자들은 착하다고 혹은 똑똑하다고 더 줄 사랑을 더 주시는 분들도 덜 줄 사랑을 덜 줄 분들도 아니었다는 걸.
넉넉하지 못한 형편의 자식 많은 집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갖고 싶은 것을 말하기도 전에 양보를 배운 나는 내 몫을 주장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내것을 요구하는 건 동생들에게 돌아갈 부분을 줄이는 것이었다. 떼를 써서 갖는 것보다는 괜찮다고 말하고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편했다. 그래도 좋다면, 어쩔 수 없이 좋다면? 그건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참았다. 허락된 것 까지만 좋아했다. 허용되는 범위까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해지지 않는 수준까지만.
엄마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렸던 그림들. 스물 몇살 때 아직도 그걸 갖고 있어서 놀랐던 적이 있다. 엄마의 이야기는 그랬다. 사는 게 너무너무 바빠서 신경을 하나도 못쓰다가 청소하러인가 네가 1학년 때 학교에 처음 갔는데, 교실 뒤 벽에 걸린 운동회를 주제로 한 그림 중 눈에 띄는 그림이 보였다고 했다. 달리기를 하는 1등 아이가 머리를 젖히고 하늘을 보는 그림이었다고 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구도의. 어떻게 어린애가 이런 생각을 하지?하고 이름을 보니까 그게 내 그림이더란다. 그때 내딸이 그림을 잘그리는 구나 처음으로 알았다고 했다. 그거 알았는 데, 왜 한번도 그림을 그려보란 말 안했어? 니가 공부도 제법 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엄마는 내 백점 맞은 시험지나 성적표는 안갖고 있는 데, 내가 그렸던 그림들은 모아두고 계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정말 뜬금없이 엄마가 한 번 미술학원에 가보겠느냐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거의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였다. 딱 한 달. 스케치북에 삼각뿔 명함을 넣으면서 너무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두 달째를 등록해야했을 때 엄마가 한번 다녀봤으니까 됐지? 더 다니고 싶어? 물었을 때, 나는 이제 해봤으니 괜찮다고 했다. 아침에 모닝콜로 영어회화를 배우는 영어교실이 유행하고 있으므로, 학원비가 있다면 영어를 할래. 중학생이 되려면 영어가 필요하다고 하잖아. 나는 영어를 배웠고, 그림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미술로 진로를 결정했다고 했을 때 “미술 입시는 돈 많이 들지않아?” 물어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청 슬펐던 것 같다. 아마 부러웠던 걸 거다. 그날 혼자 걷던 기억이 아직도 나는 걸 보면. 나는 그림을 좋아하는 걸 나 자신에게까지 숨겼다.
한참 상담을 받던 서른 살 무렵 <철들고 그림 그리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때 생애 처음으로 스케치북을 샀던 것 같다. 어쩐지 계속 곁눈질하던 그림의 영역에 도전! 두달 동안 미술학원에 다녔다. 그림이 너무 재밌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지금은??????
…
네…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을 읽게 되었습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ㅋㅋㅋㅋㅋㅋ 그러려고 그런게 아닌데… 왜, 나. 그림 5년 동안이나 안그렸어? (응, 남는 시간에 책 읽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백수가 되면 하고 싶은 일 1위에 드로잉이 있었는 데… 백수되고 한달 째. 여적지 스케치북도 안샀다는 거지롱. 이거 읽으면 그림 그릴 마음 들 줄 알았는 데… 막상 그리려니 엄청 겁이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머뭇머뭇 하는 것은 겁이 나서다. 그림 배우고 싶은 데. 인터넷 클래스도 신청했는 데. 이제 시간도 있는 데… 왜 선뜻 못 시작하겠지? 아. 문제다. 문제.
“(24)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멋진 일은 대개 두려움을 동반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만큼 그 여정은 험난하다. 그럴 때는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내가 지금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 이 사실을 계속 떠올려야 한다.”
무언가가 좋아지면 일단 참고 보는 이상한 습벽은 여전히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게 전부 그런건 아니고,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이를 테면 나는 정말 좋아하는 책은 읽다가 중간에 덮는다. 오래오래 읽고 싶어서. 혹은 더 잘 읽고 싶어서…. 그렇게 꽂혀만 있는 책들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네??… 그리고 드로잉이라던가(사실 이건 게으름도 조금 있음)… 역시 must가 항상 먼저인 인간은 want나 like에도 must를 도입해줘야 한다… -_-;;;;
나 자신도 놀랄만큼 변한 부분도 있다. 사람에 대해서가 그렇다. 사실 이 분야 - 사람 좋아하는 것 티 안내고 잘 참기- 만큼은 정말 대장이었는 데, 어느순간 부터는 ‘참지않기 노력’이 빛을 발해 요즘엔 시시때때로 고백할 수 있어졌다. (이성애뿐만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그런데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건 입밖에 낼 수록 더 커지는 것 같아서- “좋아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더 좋아져버린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잠깐 멈춰 생각해봐야하는 인간인지라 왜, 어디가,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를 생각한다. 메모해본다. 때때로 나의 투사였음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걸 걷어내고 나면 더 잘 보이고, 그럼 더 구체적으로 좋아진다. 마음이 또 커진다. 그렇게 되기를 반복.. 큰일났다. 늦게 배운 도둑질처럼 - ‘좋아하는 거 좋아하기’의 방법을 알아버린 나의 요즘은… 어떻게 이걸 모르고 살았지?!!! 와, 맙소사! 좋아하는 마음은 닳아지지 않는거였다.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참지 않을 수록 더 깊어지는 거였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에 용감해지고 나니, 좋아하는 것들로 내 세계가 그득해져버린 느낌이다. 고심해서 고른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내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느끼면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한다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영원히 살고 싶다, 잠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7살의 나에게 돌아가서 그 크레파스를 실컷쓰라고
11살의 나에게 돌아가서 미술학원에 등록하라고
15살의 나에게 돌아가서 너 그거 부러운거라고, 참지말고 그냥 연습장에라도 드로잉을 하라고
말해줄 수는 없으니-
35살의 내가 나에게 말한다.
너, 참지말고- 좋아하고, 참지말고- 사랑하고, 참지말고- 읽고, 쓰고,
이제는 참았던 그리기를 시작해보라고.
좋아하는 걸 참지 않기 시작한 이 세계는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지기만 하는 오묘하고 아름다운 세계라고.
하하. 내일은 스케치북을 사와야겠다.
가끔 창작자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재능과 영감이 아니라 감정을 견딜 비위라는 생각이 든다. - P53
나는 아니다. 거의 다큐에 가까운 생각들만 한다. 새로운 것을 찾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것을 꼼꼼히 관찰하는 일이 더 흥미롭다. - P139
나는 네가 그래서 더 좋아. 사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우리가 뾰족하고 모나서 늘 누군가랑 부딪히는 그 부분, 거기에 진짜 내 모습이 있다. - P142
난 젊은 것치고 이상하리만큼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네? 이 고약함이 나의 개성이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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