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 난 서른이 넘으니까 너무 좋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나도. 요즘엔 그 생각을 해. 이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사십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오십대는 더, 육십대는 더더.
- 맞아 맞아. 건강관리만 잘하면 살 수록 좋아질 것 같음.
- 있지, 그거 산타의 존재처럼 어른들이 치는 거대한 거짓말은 아닐까? 살아보니까 나이먹을 수록, 늙을 수록 좋은거야. 너무 좋아서 상대적으로 젊은 시절이 힘드니까 위로의 차원에서 “그때가 좋을 때다”라고 하는 거지.

극장을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동생과 대략 이런 대화를 나눴다. 알 수 없는 인정투쟁 속에서 조울 섞인 이십대를 보낸 동생과 나는 꽤 근사한 영화 메이트다. 어떤 영화도 함께보고나면 대화의 소재가 된다. 우리는 보통 유년의 슬픈 기억을 경유해 각자의 고집스런 방법으로 쟁취해낸 독립까지의 노고를 치하해 준다. 어제의 영화는 모처럼 대화의 끝이 ‘감사함’에 가 닿았다.

고맙지. 고맙긴한 데, 그 고맙다는 말이 잘 안나와.

우리는 잘 안다. 나 역시 최선을 살아왔 듯, 우리의 가족도 각자의 최선을 살아왔다는 걸. 일개미 본능, 각자 알아서의 생존 본능은 부모님이 몸소 실천해 주신 자원임에 틀림없다. 아빠도 엄마도 소처럼 열심히(만) 살았다. 네 남매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초중고 개근을 이뤄내버렸다. 우린 정말 쓸데없이 성실하였고, 성실하기만(!)했다. 그래서 가끔 억울하다!!!!!!

“22: 상처는 지구에서 받는 거야”

지구에서 받은 상처들. 서른을 넘기고 나니까 동생도 나도 상처보단 나 자신이 더 강하다는 걸 체득한 것 같다. 아니다. 체득 아니다. 공부였다. 그것도 열심히(!)했다. 비용을, 시간을, 에너지를 투여한 노력의 댓가이다. 우리는 상처를 직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러므로. 앞으로는 더 괜찮아 질거다.

동생과 나는 하나 더 알고 있다.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 혼란한 상처를 긍정하게 되기까지 앞으로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란 걸. 꼭 긍정이어야만 하냐고? 이건 must라기 보다는 운명의 데스트니 같은거다. 꽉 닫힌 결말의 드라마. 아무리 망쳐보고 싶어도 더 안망쳐지는 지점.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 그러니 어쨌든 우린 결국은 긍정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고 말거야. 그래도 대충 퉁쳐서 긍정하지는 말자. 결국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진다면 그건 아주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각자의 언어로 감사해 할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으로 생각하자. 안녕. 얻어탄 동생 차에서 내렸다.

*

디즈니-픽사가 그리는 ‘생전의 세계’에서 아이들의 영혼은 지구로 가기 위한 패스권을 따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불꽃을 장착해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불꽃은 무얼까 사색하고 이야기 나누게 된다.

생전의 나는 쏘맥을 맛있게 마시는 불꽃을 장착했나보구나, 그 불꽃에는 숙취와 이불킥이 딸려온다는 걸 멘토샘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또 나에겐 버튼이 눌리면 아무말 대잔치와 독설을 씹어뱉는 불꽃도 장착되어 있는 것 같다. 그 역시 다음날 이불킥을 하니까 설마 내 불꽃은 .... 이불킥? 🤭

좋은 불꽃을 생각해보자!! 22랑 비슷한거! 있다. 하늘 올려다 보기랑 겨울 불냄새 불꽃🔥 비교적 최근에 장착되어 있다는 걸 알게된 불꽃은 (반년에 한 번씩) 정희진 샘의 책을 읽으며 완전 다른 곳에서 감동 포인트를 발견하는 ‘재발견의 불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정희진에 해당했으나 앞으로 살면서 발견/재발견해야 할 저자들이 풍부해질테니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을 때 느끼는 황홀함의 불꽃🔥’ 으로 이름붙이자. 하하! 생전의 나는 그것을 장착하여 지구로 오는 패스권을 따내버린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오늘도 불꽃을 불태우자!!

*

남서향으로 창이난 집은 아마 곧 긴 햇빛이 들어올 것이다. 암막커튼을 사이에 두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겨울 햇살을 힐끔 건네다 보며 빨래 널 생각을 한다. 사소한 순간들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느끼는 불꽃은 아직 잘 작동되지 않는다. 언제나 할 일, 그 다음의 할 일을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직 발견할 불꽃들이 많다. 이 지구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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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1-24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여동생이 없어서... 아니지, 모든 언니/여동생이랑 그런 좋은 관계를 갖는 건 아닐 테니까요.
아무튼 근사한 영화 메이트 부럽습니다.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공쟝쟝 2021-01-24 13:10   좋아요 1 | URL
저흰 영화볼때만 좋아요! ... 평화를 알게해주기까지 전쟁을 혹독하게 겪은 자매애.. 아직도 전쟁중 ㅋㅋ 영화만이 휴전!!

공쟝쟝 2021-01-24 13:11   좋아요 1 | URL
그치만 여동생 너무 좋구 요즘은 언니들도 좋아요(소곤소곤)

수이 2021-01-24 14: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00세 시대니까 지구에 오래오래 머무를 수 있습니다. 가끔 무수한 자연재난과 사건사고들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인류는 어떻게든 살아남지요. 뭐라는거야;;;; 소울이 그리 좋다 하시니 저도 가서 봐야겠습니다. 근데 영화관 가도 될까? 사람들 엄청 많이 있으면 어쩌지;;;;

공쟝쟝 2021-01-25 19:17   좋아요 0 | URL
아주 많지는 않았어요! 음 오히려 방역을 어느 곳보다 철저히 하는 곳이 영화관이라는 생각. 소울은 가족과 함께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ㅡ^

다락방 2021-01-24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글 좋아 좋아 좋다. 쟝님 이 글 참 좋다요. 여동생은 사랑입니다. 물론 남동생도 사랑이고요. 샤라라랑💕

공쟝쟝 2021-01-25 19:18   좋아요 0 | URL
아 샤라라라랑~ 제 글 좋다고 해주시면 기분 진짜 샤라라라랑~ 30년만에 알라딘에서 숨겨진 글쓰기 재능을 찾을 줄이야! 아핫. 그러고보니 요즘 저의 불꽃은 알라딘 페이퍼!!!

바람돌이 2021-01-24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착하산 모든 불꽃들이 다 훌륭하십니다. 오늘 날씨가 따뜻해져서인지 이 글 때문인지 술이 확 땅기네요. 집에 맥주도 와인도 다 있는데 지금 집이 가는 길에 뭘 마실까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쟝쟝 2021-01-25 19:20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집에가셔서 무엇을 드셨을까요? (궁금) 적당한 혈중 알콜농도로 일상의 시름을 잊을줄 아는 사람~ 우리는 같은 불꽃을 가지고 있군요 *^^*

scott 2021-01-24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장쟝님 여동생은 행운!이런 언니 속이 확트인 언니가 있다는것 세상 어느 누구보다 내편이 되어주는 !소울속 ost재즈 넘 좋지 않나요 공장쟝님에 황홀함에 불꽃 꺼질까봐 난로 위에 놓아드려야쥥 ╰┳🔥┳╯

공쟝쟝 2021-01-25 19:21   좋아요 1 | URL
재즈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주인공이 재즈를 좋아하고 몰입하는 장면이 압권이었어요. 저도 재즈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따끈따끈 난로 덕에 페이퍼 불꽃이 지펴지고 있습니다!! 화르르륵

syo 2021-01-24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씩씩해.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는 것은 착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인데 대단해요!




.....하지만 결국 귀여운 게 이긴다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1-25 19:24   좋아요 0 | URL
그렇지! 저 대학교 다닐때 별명 오뚜기였어요. 응? 씩씩하면 나야 나!!! 귀여움은....... (잠시 침묵) 귀여움이란 역시 인간보다는 개와 고양이죠..

붕붕툐툐 2021-01-2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과 동생분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너무 멋지당~😍😍

공쟝쟝 2021-01-25 19:25   좋아요 2 | URL
영화 보고난 후 한정입니다. 자매들과의 평소 대화는 ...... 차마 옮겨적을 수 없나이다... 입험한 자매들? 정도로 유튜브를 준비해볼까 싶을 정도입니다 ㅋㅋ

붕붕툐툐 2021-01-25 19:27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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